벨벳애무하기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세라 워터스 (열린책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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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무니에게 빌려서 읽기 시작. 처음에는 약간 시큰둥한 느낌으로 책장을 넘겼는데 (역사소설이 재미있을까?) 와... 1장 읽으면서 가슴 터지는 줄 알았다. 난 내용 하나도 모르고 보기 시작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이건 낸시 애슬리의 레즈비언으로서의 성장기. 그렇지만 인간으로서의 성장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낸시 자체가 소설 끝날즈음엔 꽤 철이 들어있다. 일단 얼굴만 밝히지 않아요... 아무튼 끝까지도 꽤, 아니 사실 엄청 재미있었다.

  1장, 2장, 3장으로 나뉘어서 낸시의 인생이 얼마나 널뛰며 변화하는지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1장이 제일 재밌긴 했다. 로맨스 소설 읽는 기분이었다. 레즈비언판 로맨스 소설... 심지어 잘 쓴. 남장 가수였던 키티 버틀러에게 한 눈에 반해 그녀를 쫓고,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기까지의 장면은 진짜 여느 로맨스 소설 뺨치는 긴장의 연속. 이게 낸시의 시점이다 보니까 감정이 절절하게 전해들어와서 또 좋더라. 촌뜨기 소녀였던 낸시가 사랑때문에 런던에 가며 인생이 확 바뀌어나간다.

  다이애나를 만나기 전 까지 낸시의 삶은 그다지 풍요롭지 않았고 어찌 보면 비참하기 까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낸시에게 완벽한 풍요와 향락을 가져다 준 다이애나를 만난 뒤의 일이 썩 즐겁게 보이지만도 않았다. 돈 많은 과부의 애인이 된 낸시의 모습은 완벽한 애완동물이었다. 예쁨받지만 자신의 의견을 낼 수도, 존중받을 수도 없었다. 화를 낸다 치더라도 한낯 어린애의 화처럼 치부됐을 뿐이지. 제나와 그렇게 사고를 친 게 잘했다는 말하려는 건 아니다. 애초에 낸시 자체가 썩 도덕적이지 않은데다 캐릭터가 철 없을 나이의, 철 없는 애인지라 좀 열받게 하는 구석이 간간히 있긴 했다. 그래도 그렇게 된 데에는 다이애나의 탓이 절반은 넘는다고 생각. 뭐 낸시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없긴한데, 이 부분은 그랬다.

  플로렌스를 만난 뒤 낸시는 레즈비언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완성된다. 그렇게나 철없던 그녀가 처음에는 살려고 발버둥치고, 플로렌스의 집에 들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탕아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더라. 처음엔 플로렌스의 캐릭터 역시 썩 마음에 들진 않았는데(아 죽은 사람 붙잡고 살다니 이게 무슨 말이요), 갈수록 좋아졌다. 상처를 가지고 있는 만큼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질투하는 모습도 나름 귀여웠고... 둘 사이 연애가 크게 꼬이지 않아서 다행. 서로 솔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난 굉장히 재미있게 봤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추천하기 난감할 것 같다. 앞서 말했듯 생각보다 자세하게 묘사되어서. 퀴어문화에 조금 열려있지 않으면 난관일 듯. 그걸 감당할 사람에게라면 추천. 너무너무너무 재밌다. 핑거스미스도 완전 기대중.
멋진징조들(그리폰북스)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판타지소설
지은이 테리 프래쳇 (시공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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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한 삼주전에 읽은 거 같은데 아직도 왜 감상 안썼지. 까먹었네...

  재밌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산건데, 재밌긴 재밌었다. 요한계시록의 종말 이야기를 살짝 비튼 건데... 암울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바꾼 상상력이 마음에 들었다. 악마 아지라파엘과 크롤리의 몇천년 쌓인 우정의 모습도 좋았고, 적그리스도인 열한살 아담과 '놈들'의 모습도 귀여웠고. 그 외 어설픈 마녀사냥꾼들인 새드웰, 뉴튼과 예언자의 후예 아나테마의 이야기도 간간히 즐거웠다.

  전반적으로 영국식 유머? 서양의 유머감각이 묻어난다. 동시에 말하면 이 나라에 사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거나 금방금방 캐치가 안되는 유머가 많았다. 생각만치 즐기지 못해서 아쉽다. 기독교 교리를 삶의 바탕으로 삶고 있는 사람들이(믿건 안믿건) 이 책을 읽으면 더 재미있게 느낄 것 같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이야를 다루며 약간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한 이야기가 쭉 이어지는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게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유머도 제대로 캐치 못하는데 이야기에도 집중이 안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소하게 읽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냥저냥 즐겁게 봤음. 근데 산 건 돈 쪼끔 아깝다...
최순덕성령충만기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이기호 (문학과지성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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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이거 읽기 전에 기대를 많이 했다. 그리고 첫 소설인 '버니'를 읽고 나서는, 어 이게 아닌데. 이런 느낌이 들었고. 같은 작가의 소설인가 의심하게 하더라. 분명 말을 풀어내는 방식은 비슷한데 더 무겁고 습윤한 느낌이었다.

버니
햄릿 포에버
옆에서 본 저 고백은 - 고백시대
머리칼 전언
백미러 사나이 -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간첩이 다녀가셨다
최순덕 성령충만기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독특한 형식으로 쓰여진 글들이 있는데 '버니'나 '최순덕 성령충만기'가 특히 그랬다. 버니는 랩 가사처럼 진행되는 서술이 인상적이었고, 최순덕 성령충만기야 아예 성경 문체. 버니 같은 경우는 내용이 너무 어두워서 그런가 그런 읊조리는 듯한 서술이 굉장히 불편하게 다가왔지만,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꽤 즐겁게 읽었다. 결국 내용의 차이인가.

  '갈팡질팡~'에서 보았던 시봉이 이 소설의 단편들에서도 보인다. '햄릿 포에버', '옆에서 본 저 고백은 - 고백시대', '백미러 사나이 -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이렇게 세 편에 나오니 꽤 많이 나오는 편. 그렇다고 모든 단편의 시봉이 같은 시봉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시봉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입맛의 한 구석은 모두 같이 씁쓸하다.

  '머리칼 전언'이랑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은 이 소설집 안에서도 느낌이 되게 특이했다. 전설이랑 현대 이야기가 합쳐진 느낌이었는데, 괴기스러운 느낌을 주는 결말까지 꽤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뭐 썩 좋진 않았다. 신기한데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도 둘 중 택하라면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간첩이 다녀가셨다'는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싶은 이야기. 그냥 현실적이었다. 좀 있을 법하고 소름돋는.

  난 좀 더 가벼운 느낌이 나는 '갈팡질팡~'쪽을 더 좋아한다. 그래도 다른 작가들 소설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내여자의열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한강 (창작과비평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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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 취향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실망했다. '어느날 그는'과 '아기 부처'는 좋았는데 나머지는 썩 취향에 맞진 않았던 듯. 나중에 되팔 목록에 올릴 지 말 지 고민중이다. (으 그러기엔 '어느날 그는'이 걸려서.) 여튼 그래서 초반 두 소설을 읽고 나머지는 건성건성 넘기고 닫고 이러다 나중에서야 완료.

  한강 소설 읽으면 침울하고, 음울한 감정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만 같다. 이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왠지 자연스레 힘없고 하얗게 마른 여자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그런 여자. 여튼 한강의 소설은 그런 게 있다. 굉장히 삶에 집착하면서도 또 쉬이 그걸 놓아버리려고 하는 느낌 같은 게. 아니 삶보다는 어떤 대상인가? 그 대상에 대한 욕구 때문에 삶을 이어가지만 그 대상이 없어진 순간 삶에 대한 의지도 한풀 사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혹은 그 욕망의 대상을 위해서라면 삶 같은 건 되게 하찮아지고 마는. 끈질기게 뭔가를 갈망하는 모습이 소설집 전반에서 묻어나왔다.

어느 날 그는
아기 부처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붉은 꽃 속에서
내 여자의 열매
아홉 개의 이야기 
흰 꽃
철길을 흐르는 강

  '어느날 그는'은 다류에게서 텍스트를 얻어 먼저 따로 읽어봤었는데 그 때 느낌이 되게 좋았다. 뭔가 비참하고 절절한 집착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민화'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삐뚤어진 방식을 택하지만 그게 꼭 악에서 나왔다기보단, 방법을 몰라서 택하게 되었다는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 고시원 골방으로 돌아왔지만... 결말을 보면 그건 비극적인 일만도 아니다. 그는 민화와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결국 그 스스로의 인생을 찾게 되었으니까. 시작점이라도.

  '아기 부처'는 소재 때문에 마음에 들었다. 커다란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걸 감추려 애쓰는 남자, 그 상처 탓에 남자를 보게 되었지만 정작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여자. 다른 여자에게 더 심한 상처를 받는 남자, 그리고 다시 남자와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여자. 뭐 요런 구성 자체가 난 꽤 마음에 들었다. 상처입고 상처입다가도 결국 둘 밖에 남지 않는 느낌이 좋았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는 되게 비참하고 절절하다. 화자가 어린 소녀라서 더 그랬다. 그 소녀에게 독을 먹이고 같이 죽으려던 아버지의 심정이란 것도 볼수록 비참했고. 어머니가 외치던 '지겨워'소리가 내 귀에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부녀가 찾아 헤매던 욕망의 대상인 어머니는 끝까지 나타나지도 않았다.

  '붉은 꽃 속에서'는... 나쁘진 않았는데 뭔가 체념하고 관조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해탈이라고 하나. 그래서 스님이 된 여자는 행복했을까. 이 소설 보면서 더 느낀 건데, 한강 소설 속의 남자들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참 드물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여자의 열매'는 채식주의자의 모티프가 된 작품이라길래 좀 기대했는데... 아 내가 뭘 기대한거지; 왜 밝은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채식주의자 만큼이나 무언가에 집착하고, 또 그 모습은 처절하게 아픈 모습이었다.

  '아홉개의 이야기'는 작은 토막글 아홉 개인데... 뭐 썩 마음에 안들지도,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간소한 이야기들이라 그런가 크게 다가오진 않았는데.. 그래도 '첫사랑'만큼은 좀 마음에 들었다.

  '흰 꽃'도 뭔가 근근히 붙잡고는 있는데 그게 엄청 희망적이진 않았고... '철길을 흐르는 강'도 마찬가지 느낌이 들었다. 둘 중 뭐가 더 낫냐고 하면 그나마 '흰 꽃'쪽을 택하긴 하겠다.

  음 모르겠다. 소재가 마음에 들었던 소설들은 좋았는데 나머지는 꾸역꾸역 집어넣은 기분이다. 난 밝고 희망적인 게 좋다. 아니면 내쳐지고 버려져도 끊임없는 욕망으로 삶을 붙잡으려 드는 모습이 좋고...

시계태엽오렌지(세계문학전집112)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문학선
지은이 앤서니 버지스 (민음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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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이거 너무재밌잖아.... 내가 왜 이전에 이걸 안 읽었지?! 말투 땜에 거슬린다고 덮었던 것 같은데 완전 재미있었다. 화폐단위도 전혀 다른 걸 쓰고 있는걸 보면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삼고 있진 않은 것 같았는데, 설명이니 뭐니 읽어보면 1940~60년대의 시대상을 철저히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 저것 더 검색해보니까 앤서니 버지스 개인의 삶과 굉장히 연관되어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고. (아내에게 일어났던 사고 같은 거...)

  알렉스는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십대이다. 열다섯살일 때 이미 소년원에 갔다 온 전적이 있고, 나와서는 조지, 피트, 딤과 함께 패거리를 이루어 또 나쁜 짓들을 저지르고 다닌다. 이 때 그들이 벌이는 범죄에 대한 묘사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데, 화자인 알렉스 자신이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아서 그런가 읽는 데 큰 불쾌감은 없었다. 오히려 좀 흥겹다는 느낌이 들어서 신기할 지경이었음. 알렉스는 좀 싸이코패스 같은 거라서... 그런 악행들을 보고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느끼는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걸 재밌어 하면 재밌어 했지. 순수악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주제에 교향곡을 듣는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어서 좀 웃기긴 했다만... 그건 제쳐두고.

  1부의 악행들로 말미암아 알렉스는 결국 열다섯 나이에 교도소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도 결국 알맹이는 변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싹싹하게 굴지만 여전히 악하다. 철없기도 하고. 어떨 땐 좀 순진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알렉스가 또다시 살인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국가에 의한 치료에 들어가는 게 2부 이야기. 이 과정을 보는 데서 1부에서 느끼지 못했던 불쾌감이 느껴졌다. 국가라는 거대 기관이 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바꾸려고 하는 것까지는 좋다. 이 시도가 전혀 인도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걸 뺀다면 말이다. 치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어린 애를 속여먹는 것만 같았고, 치료 방법 또한 고통을 일으켜 그 일을 방지하는 것이라... 효과적이긴 한데 인간적이진 못했다. 그렇게 본성을 거세당한 알렉스가 사회로 돌아와서 겪는 일들은 어떻게 보면 뻔한 일들이었다.

  3부가 사회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인데, 글쎄. 알렉스는 이미 부모님에게도 반 쯤 버려진 상태인데다(이때 묘사는 좀 웃기긴 했다... 애가 땡깡 부리는것 같아서ㅋㅋㅋ) 자신이 좋아하는 교향곡은 고통 탓에 듣지도 못하지, 갈 데도 없어 헤매다 이전에 자신이 괴롭힌 사람을 만나 된통 얻어맞기만 한다. 이제 알렉스는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거든. 그걸로밖에 문제 해결을 못하는 앤데, (물론 폭력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폭력이 없으니 대항할 수단이 전혀 없어진거다. 다른 방식을 전혀 모르니까... 사회에 의해 자기 본성까지 잃었으니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애가 되어버렸다. 경찰이 된 딤과 빌리보이에게 수모를 당하고, 그 뒤 어떻게 또 자신이 괴롭혔던 (하지만 그게 자신이 한 일인지는 모르는) 사람의 품에 들어가 어떻게 도움을 얻는데... 그 쪽에서 취하는 행동이란 것들도 결국 정부가 하는 일과 크게 달라보이진 않았다. 여튼 그러다 그쪽에서 마련해준 아파트에 갇혀 클래식을 듣다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 부분까지 모두가 급박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나중에 병원에서 깨어나 내무부 장관의 손에서 또 그 권력에 약간 이용당하긴 하지만, 동시에 알렉스는 본성을 찾게 되는데... 

  이 이후에 원래의 악행으로 돌아오나 했더니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는, 이전에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았던 피트가 결혼한 것을 보고 자신도 정착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드디어 어른이 되어가는 거 같은 모습인지라 신기했다. 아기 사진이나 오려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걸 보면 어떤 교도같은 것이 없었는데도 결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게 될 것 같은 지라. 질풍노도의 십대를 보내고 사회에 의해 억지로 교도당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알렉스 본인을 바꾼 건 알렉스 자신이었다. 아무리 본성을 틀어막아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걸 바꿀 수 있는건 오로지 자신 뿐인 거. 난 그렇게 알아들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는, 소설 마지막 부분의 묘사도 빠졌고, 강간이나 폭력같은 부분을 그 자신의 미학으로 그려냈단 데서ㅋㅋㅋ 왜 앤서니 버지스가 치를 떨고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소설이랑 전달하는 것도 다르고 보여주는 방식도 좀 다른 듯.

  약간 호밀밭의 파수꾼 읽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홀든 콜필드는 알렉스에 비하면 아주 착하고 바른 청년이지만. 비슷한 혼란을 이 소설에서도 본 것 같았다. 그 십대 특유의 감성이랄까. 아무튼 재미있게 읽었다. 푹 빠져서 금방금방 읽어버림.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 하나와 같은 거야.

『시계태엽 오렌지』, 앤서니 버지스, 민음사, 2005, p. 222
어둠의왼손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SF소설
지은이 어슐러 K. 르귄 (시공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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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은 지 좀 됐는데 주요 인물 둘 빼고는 이름이 잘 기억이 안나서(...) 볼라 그래도 텔이한테 책을 빌려줘서ㅋㅋㅋㅋ 리뷰를 쓸까 말까 하다가 어쨌든 쓰기 시작. 설정이 너무 미치겠어서 바로 샀었다. 난 진짜 이런 소재 굉장히 좋아한다. 성 다뤘거나, 인간 심리 다뤘거나 해서 약간 특이한거. 약간인가... 이런 소재 보면 아무튼 돌아버림. 근데 이건 완전 이런 거 다루고 있잖아? 안 볼 수가 없어...

  그래도 SF소설이라서 처음에 좀 걱정했는데, 이 소설의 판타지 세계관은 낯설고 어색한 것이라기 보단, 신기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니까 배경이 이야기 속에 잘 녹아난다는 이야기. 배경 설정의 특이함과 세심함에 놀라긴 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고, 단순히 이 세계관이 배경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그런 세계관을 통해 불러 일으키는 주제의식이 놀랍다. 예를 들면 '어둠의 왼손'에서 게센인은 양성이고, 발정기인 케머 기간이 따로 있다. 이걸로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진 성별에 대한 편견이 깨지는 부분이 있었다. 케머 연인에 대한 설명에선 진솔된 사랑에 대한 감각이 되살아난다. 잠깐 생각나는 대사가 있는데, 확실친 않지만... 카르하이드의 왕이 헤인인인 겐리에게 발정기가 따로 없다는 걸 듣고, 그럼 만년 발정기냐고 변태들 아니냐고 묻는 거. 묘하게 신선했다.

  행성 겨울(게센)에 외교관계를 맺으려 찾아온 에큐멘 연합의 겐리 아이가 주인공. 그리고 그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 카르하이드의 에스트라벤. 겐리 아이가 겪는 난관 부분도 재미있지만, 역시 가장 보면서 흥미진진했던건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이 함께 하는 빙하지대 통과인데... 이건 진짜 엄청난 고난이었지만, 인격을 가진 두 생명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함께하는 모습이 참 안쓰럽고도 좋았다. 극한 상황에서 피어나는 신뢰, 우정, 혹은 사랑 같은 것들이 마음 깊이 다가와서 좋았다.

  결말 즈음 가서는 좀 울었다. 이런게 판타지라면 이런 소설 많이 읽고 싶더라.
바다위의주유소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최대환 (문학과지성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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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판타지적인 요소가 있다는 걸 듣고 사긴 했는데 생각보다 좀 덜하다고 해야하나. 뭐라고 하지. 아예 판타지는 아닌 것 같은 게 많고, 현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걸치고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야기들이 서로 조금씩 이어지는 연작 소설. 물론 단편으로서의 완성도도 있지만 이 소설들은 하나로 묶어 읽어야 그 의미가 더 나올 것 같다. 솔직히 하나만 읽으면 좀 허전하다 싶은 단편들도 몇 개 있었다.

  이 허전함은 뭔가 일상적인 소설의 소재들에서 기인하는 듯 하다. 그 일상에 판타지가 녹아내린 것은 재미가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아 이거 너무 일기같다. 싶기도 하고. 커다란 사건이랄 게 별로 없는데, 그 덤덤한 일상 속에서 조금씩 의미를 찾아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외로움이나 그리움, 그런 것들이 눈에 띈다. 특히 주유소 부분에선 그리움이 너무 묻어나서 애잔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무덤덤하면서도 무척 애잔한. 사무치는 그런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일상에서 간간히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약간 싱거운 기분이 있긴 했는데, 그렇게 치열하진 않다는 점에서는 또 마음에 든다. 나는 판타지가 마구 섞여있던 부분보단 오히려 현실의 이야기같다 싶었던 것들이 더 좋았다. 간간히 마음을 건드는 구석도 있는 뭐 그런 소설집. 확 취향이랄 것도, 아니랄 것도 없었다.

분홍리본의시절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권여선 (창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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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집. 처음에 '가을이 오면'을 읽을 때만 해도 이게 단편집이라고 생각을 안하고 읽어서, 끝났을 때 어!? 했다. 내가 좋아하는 소재라던가,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닌데도 재미 있다고 생각했다. 말투같은 게 굉장히 현실적이었다. 묘사들도 참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확 튀지 않으면서 공감은 심하게 되는 것들이었다. 여튼 안정감이 있었다. 내가 소설 읽는다는 느낌을 들지 않게 하는(좋은 의미로) 그런 문체였다.

가을이 오면
분홍 리본의 시절
약콩이 끓는 동안
솔숲 사이로
반죽의 형상
문상
위험한 산책

  단편들이 전부 뭔가에 매여있는 치밀한 기억, 뭔가에 알게 모르게 집착하거나 매여있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것 같았다. 사람사이의 관계를 자연스레, 그러나 엄청나게 연관된 느낌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게 독특하고 좋았다.
 
  '가을이 오면'에서 나왔던 엄마와의 관계에 매여있는 여자주인공은 좀 안쓰러웠다. 그런 기억에 매여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행복을 못잡고 넘기는 모습이 슬펐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던, "너 진짜 못됐고 집요하다"라는 말은 내가 들은 것처럼 꽂히더라. 그 말과 여자의 구구절절 집요한 심정 때문인지 이 소설집 하면 이 소설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분홍 리본의 시절'의 선배 부부는 독특했던 캐릭터. 개인적으로 선배같은 남자 타입은 안좋아하지만, 그 선배의 부인도 썩 마음에 드는 존재는 아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침묵하다가 터트리는 사람. 오히려 더 나약해 보였다. 그게 마지막 몸짓인 것처럼. '나'의 존재는 글쎄... 참견하지 않으면서도 사건을 기다리는 그 모양새가 이해가긴 했다.

  '약콩이 끓는 동안'은 뭔가 치밀하지 않은 듯 하다가도 불쾌감을 자아내는 그런 면이 있었다. 노교수의 행동부터 그 아들들의 행동까지 스멀스멀하게 '나'를 얽매는 느낌. 그런 나에게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행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반죽의 형상'은 흥미로웠다. 살짝 엇나간 친구관계를 이런 식으로 그린 소설은 처음 봤다. 그것도 한 쪽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이라는게 재미있었는데, 이 다른 한 쪽이 덤덤하게 풀어내는 말들은 실제로는 전혀 덤덤하지 못한 것들이라서... 뭔가 사소한 부분이 문제가 되는 그런 점을 잘 짚어내고, 또 그런 감정도 잘 설명한 듯한 느낌.

  '문상'에서의 여자는 물론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여자가 가지고 있었을 내면의 상처가 잠시나마 드러난 듯한 모습과 외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의 갭 때문에 동정심이 들었다. 남자주인공이 문상을 갔으면 좋겠지만.

  '위험한 산책'은 이 소설집 안에 그려진 불행 중 가장 끔찍한 불행을 다루고 있지 않은가 싶은데... 그 전까지 묘사되던 그야말로 쏘쿨하던 여자의 삶과 대비되어 더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보단... 아 이게 당연한 일처럼 그렇게 느껴져서.. 그게 좀 묘했다.

  확 취향은 아닌데 재미있다.

퀴즈쇼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영하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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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 장편 소설은 처음 읽었다. 대체로 소재가 어두워 보여서 선택하고 싶지 않았었다. 이건 다른 소설들에 비해 가벼워 보였고 그래서 샀었다. 예상대로 질척이게 무겁진 않았다. 단편의 재기발랄함이 묻어나면서도 호흡이 길다는 느낌이었다. 나쁘진 않았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 위해 반절이 넘도록 끌어가던 서사들이 마음에 들었다. 촘촘하단 느낌은 덜했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았다. 딱 좋은 정도.

  주인공 이민수는 딱 철딱서니 없는 20대다. 그것도 살아온 방향이 나랑 좀 비슷한 거 같아서 읽으면서 울컥했다. 때려주고싶어서.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자기 능력 파악은 하지도 못하고, 그 와중에 자존심이나 내세우고. 뭐가 앞이고 뒤인지 구분도 못하는 거 같아서 속이 터졌다. 적당히, 생각없이 실제로 삶에 관련된 일은 생각치도 않고 무의미한 스펙을 쌓으며(아 이건 아니려나, 민수는 제대로 쌓지도 않았지) 실제 문제 앞에서는 도망치기만 하는 이민수. 얄밉지만 차라리 빛나 같은 애가 실속있게 사는 걸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민수는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도망칠 궁리만 꾀한다. 민수가 하는 행동들이 다 그렇다. 목표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기실 목표도 없고, 그를 위한 노력도 없다. 간단히 말하면 좀 철이 없다. 궁지에 궁지에 몰려도 그랬다. 그런 민수가 유일하게 몰입하는 게 퀴즈. 근데 이건 사실 별 거 없다. 퀴즈를 통해 '벽 속의 요정' 지원을 만나고,  퀴즈를 통해 퀴즈를 위한 '회사'에 스카웃되어서 거기 생활을 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퀴즈 자체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친 않았다. 거기에 의미가 있다면 비상구로써의 의미 정도일까. 결국 중요한 건 민수가 퀴즈를 통한 도망에서 벗어나 현실세계에 입성하게 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거야, 라던 민수의 말이 이번에는 제법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성장소설이다. 그것도 이십대를 위한. 마치 내 치부를 들추는 듯 부끄럽고 화가 났지만 그래도 썩 괜찮았다.
캐비닛제12회문학동네소설상수상작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언수 (문학동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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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 작가들이 취향인건지, 이거 엄청 재미나게 읽음. 시작과 진행에 비해서 결말이 약간 부족한 거 같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즐겁게 읽었다.

  최근 읽은 여자 작가들 소설은 집요하고 세세하고, 감성을 톡톡 잡아내거나 혹은 서늘한 느낌이었는데... 남자 작가들은 대부분 그런 거 없었다. 넉넉거나 위트 가득, 혹은 메말랐지만 장대한 느낌. 꼭 성별로 이러하다, 라고 말하자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내가 받은 인상이 그랬다. 취향에 따라서 가겠지만 나는 너무 꽉 막히거나 몰아세워지는 기분 안좋아해서... 남자 작가들 소설이 좀 더 취향이었던 듯. 뭐 요새 내가 읽은 작가들 성향이 그런 거 같긴 한데... 여하튼.

  무료함에 빠진 직장인 공대리가 13호 캐비닛을 열어 그 안에 있는 '심토머', 징후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관리하게 되는 게 큰 바탕. 일반적인 인류라기엔 뭔가 특이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야이기. 이게 해괴하기 짝이 없는 예가 대부분이라서, 요런 상황 자체는 현실성이 제로다. 손가락에 은행나무를 키우는 남자라던가, 마법사, 혀 대신 도마뱀을 키우는 여자. 이런 사람들이 나오니까...

  재미있는 건 이런 다양하고 특이하고,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하는 챕터마다 있는 현실과의 접점들은 뼈저리게 현실 같다는 거다. 그들이 겪고, 느끼는 현실은 내가 지금 느끼는 현실과 같다. 소재를 보면서는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에 놀라고 재미있어 하면서도, 또 동시에 그 안에서 느껴지는 현실의 모습에 깜짝 놀라게 된다.

  큰 이야기는 뭐... 캐비닛의 원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권박사와의 관계나, 비대한 몸을 웅크리고 사는 손정은씨 이야기가 좀 있는데 전체적으로 연관성이 그다지 긴밀해 보이진 않았다. 그게 유일하게 아쉬운 부분이다. 세 챕터 중 마지막 챕터는 큰 이야기에 거의 쏟아부었는데도 이 간극이 잘 메워지지 않더라. 근데 이거 진짜 작은 단점이고... 충분히 즐거웠다.

  즐거웠다. 동시에 생각할 것도 많았고. 이렇게 양 쪽을 다 채워주는 소설 흔치 않다.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아니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저는 이 폭력적인 이분법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캐비닛』, 김언수, 문학동네, 2006, p.195

"(…) 인간은 육체와 정신을 통째로 빌린다 해도 결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가 없어요. 타인의 입장이라고 착각하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니 함부로 타인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바로 거기서 끔찍한 폭력이 발생합니다."

'다중소속자', 『캐비닛』, 김언수, 문학동네, 2006, p.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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