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고인다김애란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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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애란 (문학과지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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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만 많이 들어봤던 작가긴 한데 왜인지 꽤 기대했었다. 안타깝게도 기대한 바가 충족되지는 못했다. 아주 마음에 안드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닌 그냥저냥 정도?

'도도한 생활', '침이 고인다', '성탄특선', '자오선을 지나갈 때', '칼자국', '기도', '네모난 자리들', '플라이데이터리코더'. 이렇게 여덟 개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다 읽고나면 기묘하게도 하나의 이어진 소설을 읽은 느낌이 난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사고방식이나 주변 인물들의 사고방식, 치루는 일들이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특히 가족이 등장하면 짤없이 비슷한 느낌이었다. 주인공은 각박한 세상을 덤덤한 시선으로, 하지만 치열한 삶을 살면서 지켜보고 있고... 어머니는 억척스러운 가장이시고, 아버지는 사고만 치는 말썽쟁이(아버지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줄). 형제들도 썩 미더운 존재들은 못되고 그러는. 작가가 만들고 싶어하는 어떤 캐릭터가 있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그게 너무 반복된다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 그래도 재미 없는 건 아니다. 기대가 커서 아쉬운 기분이 많이 남았다는 거. 하나하나 따로 봤으면 더 재밌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소설은 '자오선을 지나갈 때'. 가장 치열한 재수생 시절을 표현해내는데, 고 심정이 구구절절이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의 지금 현재 모습도 우리들 삶과 비슷해서 좀 미적지근하면서도 마음에는 들었다. '침이 고인다'의 후배와의 생활도 괜찮았고... 하긴 뭐 하나하나 뜯어보면 각자 재미있고 괜찮은 소설들이었다. 너무 같은 길로 통하는 소설을 몰아봐서 내 기분이 그랬던 거지.

  무난히 괜찮았다. 두 번 읽을 지는 모르겠지만.
절망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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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이환 (예담,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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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멀티문학상 수상작. 소재가 엄청 재미있어 보여서 온 책들 중에서도 빨리 읽어야지, 하는 순위권이었는데. 느낌만큼이나 재미 있었다. 그렇게 내내 재미있다가 막판에 찝찝해져 버렸다... 으 난 이런 불쾌함을 되게 싫어하는데. 결말을 어떻게 낼까 궁금해하긴 했는데, 이런 류의 설정들의 전철을 밟듯이 '홀연이 나타나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가 정답이 되어버렸다. 물론 중요한 건 구의 정체가 아니고, 인간의 삶을 향한 발버둥과 그를 통해 보여지는 모습들(주인공 내면이건 주변 사람들이건 간에)이긴 한데... 으 그래도 난 이런 거 별로 안좋아해. 우주전쟁 같은 이런 설정 별로인 거 같다. 차라리 설명을 해줘... 날 이해시켜줘... 이래서 내가 판타지 문학을 잘 못읽는 거겠지만.

  장편인데 계속 도망을 쳐야하는 주인공의 상황 때문인지 긴박감이 넘쳐흐른다. 거의 종반부까지도 내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긴장상태가 계속되었다. 원래 출퇴근길에만 읽으려고 했는데, 출퇴근 길에 반 읽고, 다음날까지 못참고 집에서 다 읽음. 엄청 재미있어서라기보다는 (아니 재미는 있다만) 이 긴장상태를 잃어버리면 내일 또 가져오기 어려올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쭉 한번에 읽는 편이 더 재미있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도 온 몸에 힘이 쫙 풀리는 기분이었다.

  근데 중요한 건 뭐 이 남자의 도망보다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나 상황의 변화 같은 거. 어떤 부분에서는 남자에게 공감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못하고 그랬다. 인상깊었던 만남은 종교집단과의 만남이랑, 청년과의 만남. 종교집단 쪽에서는 뭔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고(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었다 한들 그 분위기란 게), 청년과의 만남은 세상에 남은 단 둘이었다는 점에서 그 감정교류가 흥미로웠다. 어떻게 해서든 둘이 함께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 영 맞지 않는 두 사람이 공존해나가는 모습은 끈질기고 흥미롭지만, 동시에 남자의 피로가 나의 피로가 되어 짜증이 밀려들어온다. 두 사람의 심리가 변해가는 모습도 재미났다.

  구가 사라진 후의 세상은, 글쎄. 서로의 짜증을 폭발시킬 희생양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읽으면서 가장 두려웠던 건, 이게 딱히 판타지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거.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인터넷에서... 뭐 이런 저런 모습을 보면 결국 이 소설은 판타지 안에서 현실을 풍자하는 쪽에 굉장히 공을 들이고 있다. 무거운 것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재미있으니 추천 못할 이유가 없지.

  그나저나 멀티문학상은 올해 수상작 없음... 어이쿠 1회로 끝나는건 아니겠지.
환상수첩(김승옥소설전집2)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승옥 (문학동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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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단편집이라고 해야하나. 단편이라기엔 약간 긴데...  '환상수첩', '다산성', '재룡이', '빛의 무덤 속', '먼지의 방(미완)'이 실려있다. 먼지의 방은 지금 쓰고 계신다는데 언제 나오려나 모르겠다. 이거 미완인지 모르고 보다가 막판에 미완, 글씨 써있는 거 보고 어찌나 당황했던지.

  책 제목과 같은 '환상수첩'은 굉장히 서글픈 소설이었다. 애당초 이야기 서두에, 이 수기를 쓴 친구가 죽었다. 로 시작했기 때문에 깔끔할 거라고는 기대 안했지만서두... 내 생각보다도 훨씬 처절하고, 찝찝하고, 힘없어서 읽으면서 슬프단 생각을 자꾸 했다. 여자친구였던 선애의 삶과 죽음도 그랬고, 꿈을 잃은 듯한 수영과 윤수의 모습도. 그리고 얼굴이 무너져버린 형기의 모습도 다 애처롭기만 했다. 중간 중간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보였음에도 그게 모두 좌절되어 버린 것이 씁쓸. 가장 안타까운건 윤수였고(아 미아는 어쩌란 말인가) 형기의 "바다로 데려다줘"라는 말도 너무 슬펐다. 수영은 솔직히 진짜 밉고 짜증나긴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이해도 되고. 여튼 여기 나오는 애들 다 안쓰러웠다.

  '다산성'은 솔직히 내가 잘 이해를 한 거 같지는 않아서 뭐라 말은 못하겠고, 이런 저런 이미지들은 꽤 인상 깊게 남았다. 노인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재룡이'는 입담이 살아있는 이야기라는 느낌.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재룡의 삶을 통해, 전쟁이 사람을 어떤 식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직접 참여한 재룡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태도나 뭐 그런 것들도. 이념이라는게 거 참. '빛의 무덤 속'은 보면서 즐거웠다. 환상이 가미된 두 편의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로우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라. 자라나는 귀라는 설정은 좀 소름끼쳤지만. 음 뭐 재밌었어.

  약간씩 긴 단편들이지만 원체 문장도 잘 읽히는데다 가슴 답답하면서도 여전히 재미있는 소설들인지라 즐겁게 읽었다.
완득이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청소년소설
지은이 김려령 (창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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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책 지름으로 왔던 책 중 가장 빨리 읽을 만한게 뭔가 싶어서 집어든 책. 출퇴근 시간에 다 읽었으니 잘 선택한 셈이었다. 난 책읽는 속도가 꽤 더딘 편인데 출퇴근 시간에 다 읽었으니까... 내 출퇴근 시간은 지하철에서만 왕복 한시간 반 정도. 다른 사람이라면 한시간 약간 넘는 시간이면 다 읽을 것 같다.

  무난한 성장소설인데 읽는 맛이 있다고 해야하나. 1인칭인데 이게 일반 소설들과 다르게 톡톡 튀는 게 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어떨 땐 인터넷에 올려진 소설을 읽는 것마냥 가벼운 기분이 든다. 그와 다른 건 담고 있는 걸까... 어떻게 보면 무거운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그걸 가벼운 방식으로, 그러나 주제를 잊지 않을 정도로 진행시켜나간다. 청소년이든 어른이든간에 읽기 편하고 그 안에 담겨있는 주제를 알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주제고 나발이고 일단 소설이 재미있었다. 페이지가 싹싹 넘어가는데 너무 재미 있어서 멈출 수가 없더라. 담임인 '똥주'캐릭터가 생각보다 알맹이가 꽉 차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완득이가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뭐 완전히 확 바뀐건 아니긴 한데,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주변 인물들이 나름 현실적이었고...

  진득한 소설이라기보단 책장이 빨리 넘어가는 재미있는 동화책을 읽은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늘어지지 않게 쉬어간다는 느낌.
모리스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E. M. 포스터 (열린책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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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자에게 작년 생일 선물로 받은 세 권의 책 중 하나인데 이제서야 다 읽었다. 사실 읽는 데 걸린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음. 생각보다 몰입이 잘되어서 놀랐던 소설이었다. 초반 부분에서만 약간 헤맸다가 익숙해진 다음에는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읽었던 퀴어문학에 속하는 것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음울하고 우울하며 그 특유의 정서가 있었다. 소재가 소재인지라 고뇌가 많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일면 밝은 부분도 보고 싶었던 게 사실. 모리스는 소재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고뇌를 섬세하고 정확하게 풀어내는 반면 동시에 밝은 부분도 가지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100년 전에 이런 소설이 나오다니.

  여기서는 주인공인 모리스 홀을 특별한 인간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은 세속적이고, 교육받았지만 동시에 속물적인 근성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리스가 어떤 식으로 개화해나가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반면 완전히 성숙한 사람처럼 그려지던 '클라이브'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씁쓸함을 느낄 수 있다. 교육이나 본성에 관한 설명이 거의 없는 '알렉 스커더'는 진솔하고 솔직한 모습이라서 마음에 들었다. 이리저리 둘러대는 클라이브보다 직설적인 알렉이 백배 매력적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1, 2장은 클라브와의 관계 3, 4장은 알렉과의 관계로 나뉘어 있는데 더 재미있었던 건 3, 4장이었다. 혼돈에 빠진 모리스가 병원에 동성애를 치료하러 다니며 내면과의 혼란과 싸우는 모습은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이뤄지는 알렉과의 관계는 빠르면서도 깊숙이 다가왔다. 흐릿한 인상이던 알렉이 점점 짙어질 때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창문을 넘어 '나리께서 절 부르셨죠' 하고 다가온 알렉. 편지를 보내고, 모리스를 만나려 하고, 모리스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포기할 수 있었던 알렉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클라이브와의 관계에서 못봤던 뜨끈뜨끈한 열정을 본 느낌. 대영 박물관 장면을 보았을 땐 심장이 터질 뻔 했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다가 미지근한 긴장을 터트리고, 손을 잡은 순간 모든게 괜찮아지는 그 과정이 너무 좋았다.

  클라이브도 사실 1부에선 아주 마음에 들었었는데. '네가 향연을 읽었다는 걸 알아'하고 다가왔던 지적인 청년은, 시름시름 앓고 난 뒤 딴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클라이브는 '여자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지만, 글쎄. 아내와의 잠자리 묘사를 보면 썩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너무 피상적이다. 게다가 뒤로 갈 수록 클라이브가 사회의 시선 같은 것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을 가릴 수가 없었다.

  모리스라는 개인의 발전을 보는 재미도 있고, 그냥 로맨스 소설로 보아도(그렇게 보면 너무 미안한가) 엄청 재미있었다. 마지막 부분으로 갈 수록 재미 있었는데 선착장에서의 모습과 그 이후 모리스가 보트하우스로 향하는 과정은 내가 모리스가 된 것마냥 같이 떨리고, 피곤해지고, 지치다가 나른해졌다. 후에 모리스와 클라이브의 대화도 아주 좋았다. 이전의 모리스와 달리 훌쩍 성장한 느낌이었고, 클라이브의 어리석음을 비춰주는 장면이었다.

  좋았다. 오래간만에 즐거운 소설.
엄마를부탁해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신경숙 (창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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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프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내가 힘없는 문체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고... 신경숙 소설을 썩 좋아하지도 않아서 읽을 생각 없었다. 신경숙 소설에는 뭐라고 하지, 어제 선영이랑 이야기 하면서 나온 말인데, 90년대 초반의 감성이라는 게 느껴진다. 뭐 그에 비하면 이 소설은 워낙 타깃이 전연령에다가 소재 때문인지 그런 건 좀 덜했지만... 어쨌든 할아버지 댁에 갔는데 이 책이 있길래 그냥 가져옴. 할아버지 책은 내 꺼, 내 책도 내 꺼(오해마시라, 난 할아버지가 승인해준 책도둑이다.).

  마침 읽고 있던 소설을 다 읽은 참이라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그게 어제 출근길. 출근 내내 눈물 콧물 흘리며 지하철에 있던 사람들을 불편한게 만들었다. 퇴근길에도 역시... 그래도 퇴근길엔 휴지라도 챙겨서-_-; 음... 원래도 내가 잘 울긴 하는데 소설 초반부터 이렇게 울 줄은 몰랐었다. 장마다 작가인 딸, 큰아들, 남편 식으로 화자가 달라지는데 각자가 바라보던 엄마인데도 기본적인 바탕이 무섭게 닮아 있어서... 오히려 각 사람과 엄마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엄마가 화자인 장에서는 엄마가 가지고 있던 비밀을 알아서 좋았고... 근데 뭐 상대적으로 이 장보다는 앞의 세 사람의 입장에 선 장들이 더 재미있다. 너는 -했다. 라는 식의 서술을 해서 초반엔 불편하게만 느껴지던 딸 입장의 1장이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다. 남편의 입장에 선 3장에서는 남편의 아들인 '균'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었고...

  희생적인 어머니 상이라는 흔한 소재를, 솔직히 말하면 조금 흔하게 써먹었다는 생각은 들었다. 별로 독특하거나 특별날 건 없다는 소린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재미있다. 어쩌면 그래서 재미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공감하기 쉽고 어렵지 않으니까... 엄마를 잃은 뒤 다른 사람들이 떠올리는 엄마의 모습과 참회하는 과정은 마치 내가 소설 속 인물이 된 것 처럼 느끼게 만든다. 문장도 어렵게 쓰인 것이 아니라서 술술 읽혔다. 딱히 두 번 보고 싶진 않은데 읽는 동안에는 눈물 콧물을 쏙 빼놓았다. 좀 거슬렸던 건 며느리가 얄밉게 그려졌다는 건데 가족이라는 테두리의 설정까지도 흔한 걸 택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보고 나서 엄마한테 전화하고 싶어서 혼났다-_-; 우리 엄마랑 좀 닮아 있는 거 같아서... 외할머니 생각도 났고, 친할머니 생각도 났고. 보고 나서 재미있으면 엄마 보여주려고 했는데 못보여 줄 것 같다. 나보다 더 우실 것 같다. 소설에서 엄마가 화자인 4장 마지막 부분이 이랬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쉬운 건데 잊고 사는 것 같다.
한밤중의작은풍경(김승옥소설전집5)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승옥 (문학동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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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옥 문학전집 다섯 권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책이 '한밤중의 작은 풍경'이다. 단편이라기엔 뭐한, 꽁트 길이의 글들이 삽입되어 있는데 길이가 짧은 글들인지라 읽는데 지친 적이 없다. 오히려 호흡 빠르게 읽을 수 있어서 읽는 내내 즐거웠고, 그 짧은 글 속에서 무수한 감정들을 칼같이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정말 놀라웠던 책.

  짧은 글인지라 세세한 배경을 다루는 일보다는 일상 속의 사건을 다루는 일이 많은데 으아, 이게 엄청 크게 다가온다. 무난무난한 사건들조차도 김승옥이 쓰면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위트가 있어서 실소를 짓거나 쓴웃음이라도 짓게 만드는데 몇몇 글들은 애틋하기도 했다.

  가장 좋았던 건 '준의 세계'인데, 이걸 읽고 되게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미래 SF가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룰 줄이야. 미래 배경이면서도 주제는 또 현실적인 지라 읽으면서 놀라고 감탄했었다. 재미있게 읽었던 건 '중매'. 이건 지하철에서 읽다가 소리내서 웃기까지 했다. "오…… 그 기집애…… 결혼 안 돼버렸으면 좋겠다!"하고 외치는 아내의 모습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귀여운 이야기였다. '남편의 호주머니'도 기억이 남는데,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소한 의심이 낳은 치명적인 결과라는 점에서 충격이 있었고, '시골 처녀'같은 경우에는 내가 머리카락을 잘린 것마냥 서슬퍼런 기분이 들어서 가슴이 쿵 내려앉더라. '이상한 학우'같은 경우에는 이 짧은 단상 속에서 누가 평범하고 누가 평범하지 않은지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하게 했고.

  이 이외에서 많은 단편이 실려있는데 다들 몹시 재미있다. 무엇보다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매우 짧으니까 머리를 식힐 때 읽어도 좋을 듯.

  으 언제 읽어도 김승옥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다.

치명적사랑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루이자 알코트 (민음사,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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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무니가 빌려줘서 읽었다. '작은 아씨들'을 쓴 사람 작품인데, 그것과는 굉장히 다르다길래 어떨까 싶었다. 근데 진짜 엄청 다르다... 작은 아씨들보단 이게 더 내 취향이긴 할 듯. 번역때문은 아니고 원래 소설이 좀 내 마음에 안드는 문장구성으로 써지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른 전개와 이야기 진행방식이 썩 마음에 들었다.

  플롯이 어떻게 보면 살짝 제인 에어랑 비슷하다. 반전 자체도 그렇구... 근데 그 뒤로 진행되는 양상은 많이 달라서ㅋㅋㅋ 난 제인 에어 재미없게 봤는데 이건 엄청 재미있게 봤다. 글 자체나 설득력은 제인 에어가 나은 거 같긴 한데 아 이게 훨씬 재밌어ㅋㅋㅋ 로맨스 소설같아서 그런가... 아 그런거 치고는 결말이 행복하지 않지만... 남자에게 정나미 뚝 떨어진 여자 심정이 이렇게 잘 표현된 소설은 처음 본다. 그 과정이 너무 잘 드러나.

  로자몬드와 필립의 연애가 시작되는 건 무난무난한데, 로자몬드가 필립 템페스트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후로 반응하는 방식이 아주 재미있다. 여자는 도망을치고 남자는 좇아가고... 이게 몇 번이나 반복되는데 그때마다 흥미롭다. 로자몬드가 몇 번의 도망을 하지만, 수녀원에서의 장면이 가장 재미있었다. 템페스트 이놈 고해성사하는데 신나서 튀어나오지 말아라ㅋㅋㅋ 템페스트의 전처와 아들인 리토는 생각보다 비중이 별로 없어서 실망.

  이그네이셔스 신부는 멋있었다. 끝까지 신의 편에 있는 것도 좋았고. 그래도 막판에 템페스트에게 하는 말은 좀 깼다. 죽어서 신의 나라에서 함께 할거라며 담담한 태도라니... 차라리 살아있을때 내것이었으니 무덤에서도 내것이라고 하는 템페스트 쪽이 더 마음이 갔다. 물론 템페스트가 찌질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야... 이그네이셔스 신부가 너무 고결해서 마음이 안간다면 템페스트는 너무 인간적이어서 마음이 안간다는 느낌이 있었다. 결론은 연애는 템페스트, 결혼은 이그네이셔스니라.

  일반적이고 낭만적인 로맨스 소설을 바라고 이 소설을 본다면 놀라고 충격적일 수 있을 것 같다. 뭐 그래도 엄청 재미있다. 절판되어서 아쉽긴 한데 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설인 듯? 고전이라기보단 현대 로맨스소설 같은 부분이 많다. 그래서 더 읽기 쉬운 건지도.
몬테크리스토 백작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알렉상드르 뒤마 (민음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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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멘타에게 빌려서 읽음. 5권 완결. 보고나서 재미있으면 살까 했지만, 재미는 있는데 확 내 취향은 아닌 것도 같아서 사진 않았다. 아무튼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건 틀림 없음. 다섯권이나 되는데도 참 재미있게 읽었다. 

  복수극이라는 걸 알고 봤는데도 왜 나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익살스러운 캐릭터라고 생각했을까. 이게 다 어릴 때 본 아동용 책표지 때문이다... 처음 시간이 지나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서 등장했을 때 너무 냉정하고 매서운 얼굴이 떠올라서 약간 당황했었다. 하긴 14년이나 토굴감방에 처박혀 있다가 탈옥해서 오랜 기간 복수를 준비한 사람이면 당연히 냉혹한 건데...

  나는 초반 에드몽 당테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탈옥하는 과정이 나오는 1권이 진짜 너무 재미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복수의 밑밥(!)을 깔기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던 2-4권 중반 까지의 재미가 상대적으로 덜했던 거 같다. 1권-2권 초반, 5권을 볼 때는 페이지가 확확 넘어갔다. 개인적으론 1권이 가장 재미 있었다. 누명을 쓰게 되는 과정도 괜찮았고, 감옥에서 파리아 신부를 만나 에드몽이 눈을 뜨게 되는 과정들이 재미있었음. 탈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지막의 복수 자체는 내 생각보다 덜해서 그런가 카타르시스가 크지는 않았던 거 같다.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미치고 한 명은 전재산을 다 잃었는데도 나는 왜 덜하다고 느끼는걸까...

  에드몽을 모함해놓고 연인 메르세데스를 앗아간 페르낭, 에드몽이 위험에 처하도록 계략을 꾸민 당글라르, 자신의 출세를 위해 무죄인 것을 알면서도 에드몽을 감옥에 넣은 제라르 드 빌포르. 누가 더 악하다 하기 뭐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안들었던 건 당글라르였다. 당글라르에게는 에드몽을 그 지경에 처하게 할 만한 이유가 다른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보였기 때문에. 결말에서 유일하게 멀쩡히 살아남은 게 당글라르라는 것도 그래서 거슬렸다. 뭐 다들 벌은 받았지만 골고루 받은 것 같진 않다.

  모르세르 백작, 페드낭은 악당들 중 제일 찌질했다. 에드몽을 그렇게 몰아넣은 계기란 것도 그렇거니와, 출세하기 위해 알리 테베린을 배신하고 바실리키와 하이데를 노예로 팔아넘긴 범행 자체도 상당히 찌질했다. 에드몽을 그렇게 몰아넣은 뒤 올바르게 살았으면 복수를 이렇게 거하게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제 무덤 제대로 팠구나, 그런 생각이 가장 크게 들었다. 안그랬으면 그냥 메르세데스랑 아들인 알베르 드 모르세르가 떠나는 정도로 끝났을 텐데.

  당글라르는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당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당한거래봤자 돈 전부 날린거... 뿐인거 같다. 아내 바롱과 이혼한 것도 자기 의지로 한거인데다가, 외제니 떠나간 것도 그렇게 슬퍼한 거 같지도 않다. 외제니와 안드레아 카발칸티(베네데토)와의 약혼이야 뭐 결혼해서 크게 피해입은 것도 아니고 그냥 깨진 거고. 외제니도 상처 안입었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막판에 빌포르 가의 비극을 보고 마음을 '약간' 너그럽게 잡은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가장 비참해 보였던 건 빌포르인데, 여러 가정사가 엮여서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는 누아르티에는 자기 출세를 막아대는 자코뱅 당원이었지, 첫 아내는 사망, 두 번째 아내는 독살범. 아들 에두아르는 철부지, 살아있는 걸 간신히 알게 된 사생아는 탈옥범 베네디토다. 딸 발랑틴만이 그나마 멀쩡한데 유대관계를 못쌓았으니... 미쳐버릴 만도 했던게,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진 데다 아버지에게 기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발랑틴은 이미 죽은 걸로 알고 있었으며, 아내에게는 자살을 종용해 (안되겠다고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에 돌아오자) 아들 에두아르와 함께 죽게 만들었으니 미치기 딱 좋은 상황이었지...

  메르세데스는 여전히 메르세데스였지만 결투에 임한 몬테크리스토 백작 앞에서, 그가 에드몽 당테스라는 것을 알고도 알베르를 죽이지 말라고 하는 건 좀 이상해 보이긴 했다. 아들 아끼려는 심정이야 백배 이해하겠는데 앞에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그럼 자기가 죽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도 그러는 게... 아니 집에가서 말할 거라고 앞에서 말이라도 해주던가. 뭐 전체적으로 인상이 선하긴 했지만 그닥 취향인 여자는 아니었다.

  모렐 씨 가족은 신의를 지킨 거 때문에 대대손손 복받은듯ㅋㅋㅋ 모렐 씨 자살하기 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거 너무 기뻐서 울뻔 했었다. 딸인 쥘리나 엠마뉘엘은 많이 나오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미지 좋게 나왔고... 장남인 막시밀리앙이 발랑틴과 사랑을 하는 게 로미오와 줄리엣 같아서 재미있었다. 막시밀리앙 참 건실한 청년인데 발랑틴 죽었다고 나도 죽을거야ㅜㅜ 이렇게 실의에 빠진 거 신기했다. 내 눈엔 그다지 낭만적이진 않았고 그냥 약간 웃겼다... 뭐 그래도 발랑틴이나 막시밀리앙이나 괜찮았다. 막시밀리앙 쪽이 좀 더 행동력있고 피동적이라서 좋았다.

  가스파르 카드루스는 인생을 좋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는데도 그렇게 못해서 씁쓸한 캐릭터. 오히려 부소니 신부로 분한 에드몽이 그에게 다이아몬드를 주지 않았던 게 그의 전체적 인생에 있어서는 더 낫지 않았을까. 다이아몬드 하나 때문에 아내인 카르콩트도 죽이게 됐고, 매매상도 죽이고... 또 탈옥해서도, 베네데토가 주는 돈에 만족했으면 괜찮았을텐데 더 욕심부리다가 결국은 죽어버렸으니. 욕심 많이 부리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캐릭터였다.

  베네데토는 따지면 악역이긴 한데 보는 재미가 있는 악역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사악까지는 아닌, 건들건들한 건달같은 느낌의 악역이었다. 빌포르와 당글라르 부인 사이의 사생아로써 그대로 자랐다면 에두아르처럼 되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뭐 여러모로 생각없는 악역의 절정이었음. 살인자나 강도보단 사기꾼 타입의 악당. 잡히기 전에 하필 외제니와 그녀의 음악선생인 루이즈 다르미의 방에 추락한 것까지 잔재미가 있는 캐릭터였다.

  하이데는 복수극 안에서는 큰 역할을 했지만 정작 그 캐릭터로서는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공주님같은 캐릭터 안 좋아해서 그런가... 메르세데스보다는 하이데 쪽이 나아보이긴 한다. 알리같은 경우엔 내가 노예제도 이런 거에 거부감이 있어서 그런지 보는데 편한 캐릭터는 아니었음. 시종인 바티스탱은 잘 큰 역할로는 기억이 안나고, 집사 베르투치오는 베네데토와 엮여있는 부분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이모저모 사람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느낌.

  에드몽 당테스는 초반에는 순진 그 자체였다가 탈옥해서 복수의 시간을 다지는 동안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되는데 이 캐릭터 변화가 꽤 볼만했다. 냉혈하면서도 가슴속에 불을 품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캐릭터이긴 한데 음 뭐 이런 소설에 이 정도 능력치와 자신감이라면 용인될 수준인 거 같았다. 평소엔 차갑기 그지없다가 모렐씨 가족을 만나면 사근사근해지는 것이 또 좋았던 캐릭터. 에드몽 당테스로서의 순진한 모습이 답답하긴 했지만 너무 차가운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좋지는 않았던 거 같다. 하이데와 행복해지면서 포근한 인간성을 되찾길 바라야지.

  음 읽는 동안 충분히 재밌었다. 명작은 역시 명작.
은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범신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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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누 만난 날 지누가 빌려주겠다면서 쥐어준 책. 줄거리는 커녕 무엇에 관한 소설인지 짐작도 못하고 일단 쥐어주길래 받아가지고 왔는데, 금방 다 읽었다.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놀랐다. 현대문학을 이렇게 빠르고 즐겁게 읽기는 또 오래간만인듯. 책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인데 이건 흡입력이 좋았다. 작가가 한달 반만에 썼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가 따라가는 호흡도 빨랐다.

  시인 이적요, 그의 제자 서지우 그리고 고등학생인 은교. 현재 남은 것은 은교 뿐인 상황에서, 시인 이적요와 제자 서지우가 어떤 식으로 은교를 사랑했었는지를 말하고 있지만, 기실 이 이야기는 그 둘 사이에 있던 갈등 혹은 그보다 더 복잡하게 또아리 튼 감정의 덩어리들이 어떤 식으로 생겨나고 어떤 결말을 맺었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인이 죽은 뒤 1년 뒤 그의 회고록을 열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중간에 서지우의 일기까지 포함되며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Q변호사를 통해서는 현재의 이야기와 실제 사건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적요와 회고록과 서지우의 일기가 같은 사건을 어떻게 다른 식으로 서술하고 있는지가 가장 재미있었다. 그 둘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면서 은근히 증오하고, 열렬히 증오하면서 은근히 사랑하고 있었다. 애증이라는게 이런걸까 싶은 두 사람의 모습이 교차되어 즐거웠다. 은교가 주요 주인공 중 하나긴 한데, 은교가 그 자신의 행동의 주체로서 역할이 컸었다기 보다 두 사람에게 욕망과 갈증을 불어넣어주는 욕망의 원인, 그 두 사람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에도 은교 그 애에게는 별 관심이 없지만(오히려 평범하거나 혹은 약간 더 발랑 까진 고교생의 느낌이 있지만), 은교가 없었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하는 행동에 의미가 부여되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초반부의 이적요 시인의 회고록만 읽을 때에는 약간 '롤리타' 같다고 생각했는데 뭐 어느 면에서는 그 부분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전혀 다른 것이, 이적요는 은교에게 성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거. 마음 속 깊이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애가 상처받거나 다치는 것 조차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는 거... 은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서지우의 뜨뜻미지근했던 감정의 시작이나 무성의했던 행동들에 비하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서지우는... 글쎄, 후반부에가서 은교에게 미친듯이 집착하게 되었던 서지우의 감정은 본인의 것이라기보단 이적요의 감정을 알아채고 이적요가 가진 모든 것을 뛰어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욕망의 발현이 아니었나 싶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생각하는 이적요의 태도나, 거목인 이적요의 완벽한 모습이 은교로 인해 낱낱이 풀어헤쳐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서지우의 뻔한 인간군상의 변화과정도 만만치 않게 마음에 들었다. 이적요를 존경하고 사랑하던 서지우가 어떤 식으로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버려, 점차 이적요를 대하는 태도나 심경에 변화가 생기던 모습.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적요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며 이적요에게 매여있는 서지우는 인간적으로 안쓰러운 면이 있었다. 그리고 이적요보다는 서지우같은 그런 사람이 세상에 더 흔하지 않은가... 후반부쯤에 서지우가 심장을 자기가 썼다고 생각하게 되며 그 생각을 믿어버리는 과정은 오히려 솔직한 것이었다.

  이적요는 서지우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고, 알게 된 사실 또한 확실히 감당하지 못했다. 은교에 대한 갈망과 서지우에 대한 질투, 자신에 대한 혐오까지 범벅되며 나타난 파멸적인 행동들은 보는 내내 씁쓸했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서로에게 오해를 쌓는 행동들이 겹겹이 나타나는 과정이 안타깝고 그랬다. 은교가 없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했는데, 아닐 것 같다. 느리게 진행되었을 거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서지우가 울면서 '당나귀' 코란도를 운전하고 있을 모습이 떠오른다. 눈물이 범벅되어 운전하는 그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자살의 길을 걷게 된 이적요의 모습까지 겹쳐지게 되면, 이 소설은 한 없이 안타까워진다.

  재미있었다.

"제 문제가 걱정되서가 아니구요. 확실한 건요. 할아부지하고 서선생님, 서로가 깊이 사랑하셨다는 거에요. 제가 낄 자리가 없을 정도로요! 제가 소외감 느낄 정도로요!" 그녀의 말이 단단히 내 고막을 울렸다. 그녀의 그 말이야말로, 이적요 시인과 작가 서지우의 비극적인 관계를 풀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열쇠라고 나는 그 순간 확연히 느꼈다. 계속 꺼림찍했던 나머지 의문점들이 홀연히 모두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박범신, 『은교』, 문학동네, 2010, pp.377-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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