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샬럿 브론테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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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술 읽히는 편이었는데 게을러서 읽는데 좀 걸렸다. 총 두 권. 초반엔 진행이 더딘 듯 했는데 어린 시절 이야기만 지나가면 진행이 꽤 빨랐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나랑은 좀 맞지 않았던 작품. 어디로든 다시 되팔 생각이다. '오만과 편견' 읽을 때처럼 아 연애 이야기구나, 답답하지만 귀엽고 산뜻하구나. 요런 감정을 바랐는데... 얘네가 연애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겠고, 제인의 독립적인 여성상은 내게 와닿지도 않았다는 문제가 있었다.

  고아로서 환경을 이겨낸 여자라고 하기엔 미묘한 구석이 있고, 제인의 사상이 워낙에 기독교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탓에 내가 보기에는 그냥 그랬던 소설. 주체적인 느낌이 있긴 한데, 이게 소설이 쓰여졌을 당시에는 엄청나게 주체적이라는 느낌이었을진 몰라도 지금 보기에는 그냥 그랬다.

  고아가 되어 외숙모의 집에 얹혀 살다가, 시설이 좋지 않은 기숙사 학교에 맡겨져 자랐고 후엔 가정교사가 된 제인 에어가 있다. 어릴 때부터 바득바득한 성격이 강조되는 여자인데... 커서도 그 성격은 비슷비슷하다. 가정교사로 간 집에서 그 집의 주인 에드워드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할 뻔 했으나 로체스터에게 숨겨진 부인(미쳤지만 어쨌건간에 살아있는)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몹시 사랑하지만 그의 영혼을 타락시키지 않기 위해' 그 집을 떠나 며칠동안 고생을 한다. 아, 거지같이 살았다곤 하나 단 며칠 뿐이었다. 그러다 어떻게 굶어 죽을뻔 한 것을 목사인 존 리버스, 그리고 그의 동생들인 다이애나와 메리를 만나 구제받는다. 생활을 하다보니 만나지 못한 외숙부에게서 꽤 큰 재산을 물려받게 되고, 또 알고보니 세인트 존, 다이애나, 메리는 자신의 사촌이었다... 뭐 그런. 세인트 존에게서 구애(인지 강요인지)를 받으나 그걸 물리치고 또다시 로체스터를 찾아나서는데, 자기가 그런 일을 겪는 사이에 로체스터는 미친 부인이 집에 불을 내 그걸 구하려다 장님에 한 팔을 잃어있었고 따라서 여태까지 꺼지지 않은 사랑의 불씨를 다시 지펴 로체스터와 결혼하게 되었다. 짝짝.

  ...인데 뭐랄까 음. 자기보다 스무살은 많은데다 고집이 세고, 일면 험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 (거기다가 결혼사기미수!) 로체스터의 매력이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 데다, 제인이 겪는 고난이란게 내 눈에는 엄청나게 고되어 보이지 않았고(뭐냐 이 바득바득한 자존심은 이란 느낌이었다), 결정적으로 자기 스스로 운명을 개척했다기엔 너 유산받았잖아... 이런 느낌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그런지 그다지 읽으면서 떨리거나 흥분되었던 감정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대했던 것보다 약간 밍숭맹숭한 스토리인지라 약간 실망했다.

  그나저나 여기 나오는 사람들의 연애는 다 왜 이 모양인지, 로체스터 영혼 타락 방지를 위해 손필드를 떠나는 제인도 그렇거니와, 로저먼드를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더 큰 사명을 받들기 위해 로저먼드에게 뭔가 할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세인트 존이나 답답해서 짜증이 났다. 세인트 존은 그나마도 약간 이기적인 느낌이 있어서 그래 그렇다 싶었지만 제인이 떠나는 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서리. 기독교 사상이 묻어있으면서 마음에 들었던 캐릭터는 제인의 로우드 자선학교 시절 친구인 헬렌 뿐이었다. 이 쪽은 담담하면서도 초연한 느낌이 많이 있어서 그런가 그 죽음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재미가 아예 없다기엔 뭐한데, 어릴 적과 학교에서의 이야기 쪽이 뒷부분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었고... 그 이후에는 인물들의 사상이 나랑 대치되는 것이 많아서 그런지 밍숭밍숭한 기분으로 봤던 것 같다. 굳이 시간내서 또 읽고 싶지는 않았던 그런 작품이었다.
무진기행(김승옥 소설전집 1)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승옥 (문학동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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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때인가 다니던 학원의 국어 선생님과 제법 친해졌던 일이 있다. 그 때 난 정말 어렸고 물론 그 분에게도 내가 한 없이 어렸겠지만, 친절하게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시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그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던 소설이 무진기행이었다. 버스를 타고 갈 때 그 흔들림을 턱이 움직이는 것으로 표현하던 그 표현력에 너무나 감탄했다고 그랬다. 그리고 내게 무진기행을 빌려주셨었는데 그 때 당시의 난 별로 재미있게 읽지 못했던 것 같다.

  대학교 졸업반이 되어 논문을 쓸 때 무진기행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김승옥 전집을 덜컥 샀었는데 음, 뭐 결론적으로는  어떻게 일이 꼬여서 이청준의 '비화밀교'로 논문을 쓰게 됐다. (논문 주제를 정할 당시의 내 생각이 좀 짧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뒤로 김승옥 전집은 사 놓고서도 잘 안읽고 있었는데... 요번에 읽어봐야지 하고 무진기행이 있는 김승옥 전집의 1권을 읽었을 때 굉장히 충격받았었다. 어떻게 이런 표현들을 쓰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뭐 그런 것들이 뒤섞이더라. 대표작인 무진기행 말고도 다른 작품들에 담긴 표현들이나 깊이가 놀라웠다.

생명연습(生命演習)
건(乾)
역사(力士)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무진기행(霧津紀行)
싸게 사들이기
차나 한잔
서울 1964년 겨울
들놀이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夜行)
그와 나
서울의 달빛 0章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무진기행에는 이렇게 총 15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가장 여운이 강하게 느껴졌던 것은 '서울의 달빛 0章'이었고,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읽으며 씁쓸했던 건 역시 '무진기행'과 '염소는 힘이 세다' 였다. 이런 씁쓸한 소설들 중에서도 '역사'는 위트가 느껴져서 좋았다. 굳이 하나 더하자면 '차나 한잔' 쪽도 약간 유머러스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모든 소설들은 1960년대의 답답하고 억압된 감성이 묻어나서 읽으며 썩 편한 소설들은 아니었다. 아, 재미가 없단 소리가 아니었다. 난 소설에 빠져들어 읽었고 앞으로도 종종 책장에서 꺼내볼 생각이다. 다만 재미있고 빠져들지만 그 뒤에는 끕끕하고 가슴이 답답했던 그런 글들이었다는 거다. 1960년대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갑갑함을 해소하려 뛰쳐나갔을지, 갑갑함을 감추려 가슴께를 여몄을지... 나는 모르겠는 일이다.
미나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사과 (창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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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소설을 참 오래전부터 읽었다. 어떤 면에서 그 인터넷 소설들은 참 중독성이 있었다. 딱딱했던 소설을 벗어난 빠르고 간결한 문체, 급한 진행, 시제가 지켜지지 않는 문장들 등 모두가 날 흥미롭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 싶었다. 내가 그동안 지켜왔던 소설을 보고 쓰는 방식들이 인터넷 소설을 봄을 통해 망가져가고 있었다. 나는 멈춰야 할 때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멈췄다.

  이번 소설 『미나』를 펼쳤을 때 내가 느낀 당황스러움 여기에서 기인한다. 인터넷 소설의 생 날것같은 느낌이 소설 전반에 흘렀기 때문이다. 작가인 김사과의 나이가 어리고, 인터넷에 소설을 기재해 보았다는 이력 때문에 그런 것일까? 『미나』는 기존의 발행되었던 책들과는 달리 인터넷 소설의 느낌을 매우 강하게 띠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것이 불쾌했다.

  현재형으로 일관된 소설은 읽기에는 매우 수월했다. 마치 내가 수정이나 미나가 된 듯이 바로바로 읽어 내려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인터넷 소설의 감성은 날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사회 시스템을 위협하는 미나와, 그것의 존재를 극사회적인 존재 수정. 그리고 모두의 방관자 민호. 모두가 정신병자처럼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P시는 실제 우리 사회의 교육열과 인간을 사회의 부속품처럼 보는 현실을 극대화한 장소이다. 십대의 일상에 가장 밀접하고 첨예하게 대두되어 있는 사교육 문제는, P시를 통해서 극단적으로 그려내어진다. P시의 사교육 시스템은 공립학교 시스템을 비웃으며 학생들에게 계급에 따라 분리하여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학교 교육을 대안하여 등장하였다기보다, 어릴 때부터 평등주의의 논리를 거절하게끔 만들어버리는 불평등의 장소이다. P시의 모든 것은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파악되고, 그들의 삶에 있어서도 이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학생들의 부모들이 이에 대표적으로 투영되는 인물들인데, 미나나 수정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대신 그것을 돈으로 때우려 든다. 학원비를 주고 용돈을 주면 그들의 역할이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런 비뚤어진 P시의 모습은 그 근저에는 한국의 현실 사회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불쾌한 현실이 제시되었다면 이제 그것이 해소되어야만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은 예상과 달랐다. 이 사회체제에 완벽히 적응하고 있는 미나, 수정, 민호의 관계는 친구로 등장하지만, 미나의 옛 친구인 박지예의 죽음으로 인해 이 관계가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게 했던 사회 안에서의 위치는 깨어지고 만다.

  수정은 P시의 사회에서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는 인물이다. 아니, 어쩌면 완벽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는 시종일관 구토하면서 P시가 제시하는 교육시장의 열기를 따라잡으며 불평등의 사회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인물이다. 이미 10대인 그녀는 P시의 이러한 열기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을 벗어나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수정에게 있어서 미나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시기의 대상이다. 미나는 융이나 들뢰즈 같은 철학자의 이름을 줄줄 꿰는 모습을 보여주어 자신의 지식수준을 비교하게 만드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금전적인 입장에서도 자신의 우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수정은 미나를 친구라 여기며 한없이 매달렸음에도 한 순간에 그녀를 적으로 인식하여 반대의 입장으로 돌려버렸다. 그 일말에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은 수정이 가지고 있었던 상대적인 결핍과, 불평등의 사회에서 미나보다 하위구조에 위치하였다는 자존심의 패배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소설을 읽던 초반에는 미나를 수정과 다르지 않은 존재로 인식했다. 그녀의 행동거지 어느 한 군데 수정보다 특이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지예의 죽음 이후 미나는 P시의 안티테제로 등극한다. 박지예의 죽음에 영향 받지 않고 P시의 사회구조 속에서 계속해서 똑같이 살아가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미나는 박지예의 죽음에 크게 흔들린다. 그리고 그로 인해 P시의 논리와 반대의 입장에 서서 그곳을 벗어나 버린다.

  이 변화는 긍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억압되고 비뚤어진 P시의 논리는 소설 바깥쪽에 위치한 내게는 부숴야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P시는 사회구조를 흔들어놓는 미나의 존재를 용서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틀에 맞추어 키워낸 수정의 존재를 통해 미나를 제거하는 극단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태까지도 미나를 부러워하고 시기의 대상으로 놓았던 수정은, 이 사회를 벗어나려 하는 미나를 보며 두렵다고 느끼며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녀를 닮아가고 싶어 하면서도 닮을 수 없는 자신을 느낀다. 여태까지는 그나마 미나와 자신을 동일 선상에 두고 같은 존재로 느꼈지만, 미나가 사회를 이렇게 벗어난 순간에서부터 수정은 그럴 수가 없어졌다. 미나는 이제 더 이상 친근한 존재가 아니며, 자신과는 다른 존재이다. 구토를 해가면서까지 P시에 간신히 맞춰가고 있던 수정은 자신과 다르게 이 사회를 쉽게 빠져나가는 미나의 존재를 용서할 수 없다. 그 자신이 억지로 그 틀에 밀어 넣어지며 긍정했던 P시의 논리가 부정되어지면, 수정 자신의 존재 또한 부정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수정과 미나로 대두되는 이러한 대립은 인간을 가두려는 사회와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상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소설의 또 다른 인물인 민호는 두 시선을 지켜보고 있는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수정의 미나 살해계획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것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점에서 사실 수정보다 더 P시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미나를 살해한 수정을 보며 미소를 던지던 민호는, 내게 수정 이상으로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이상한 소설이 도착했다’는 김영하의 말처럼, 『미나』는 정말 이상한 소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선함이 모두에게 맞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는 맞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구세대의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어느 정도는 형식과 서사가 괜찮은 소설을 읽고 싶었다.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수정의 미나 살해과정에서 있던 현실들의 모습이 그저 답답하고, 어째서 현실세계의 탈출이 이런 방식으로 좌절되어야만 했는지 불쾌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시간의 문(이청준문학전집:중단편소설 6)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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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잡이」를 보다 보면 이청준의 또 다른 소설인 「줄광대」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구성의 모습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두고 보면 「매잡이」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방식이 존재한다. 액자형 소설인 「매잡이」는 그 틀에서 ‘나’와 ‘민태준발견할 수 있으며, 액자 안에서 ‘곽 서방’과 ‘버버리 소년’을 발견할 수 있다. 액자 틀과 액자 안을 넘나드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 듯 해 꼭 인물들의 위치를 규정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또, 이 소설은 액자형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이야기보다 액자 틀에서의 이야기와의 연관성이 더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다.

  「매잡이」에서는 세 가지 작품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이미 발표한 ‘나’의 작품이고, 두 번째는 ‘민태준’의 유작이며, 세 번째는 지금 소설의 액자 틀이 되는 이야기이다. 시간 순서대로 본다면, 지금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가 앞선 두 작품을 통틀어 서술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 작품의 연관 관계를 통해서도 많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겠다. 특히 민태준이 남긴 소설과 지금 ‘나’가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의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매잡이」는 시대의 기류에 편승하지 못하고 전통을 고수하다 스러져 가는 이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매잡이는 한때 몹시 흥하던 직업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매잡이라는 직업은 그 의미를 잃게 되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해결책은 새로운 직업을 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곽 서방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곽 서방이야 말로 자신의 직업에 소명의식을 굳게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은 시대에 편승치 못하는 그의 모습 때문이다. 이전엔 매잡이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서 노인마저 그를 나무라는 것에서 매잡이의 현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매잡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곽 서방에게 매잡이는 모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매잡이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매잡이라는 직업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든 매잡이는 존재 가치가 없어져버린 직업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꾸준히 이어나가려는 사람이 있다. 이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매잡이는 어쩌면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소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 매잡이를 계속 이어나가려는 사람을 통해 보여지는 소명의식일 것이다. 스러져가는 가운데서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며, 매잡이만을 자신의 천직으로 생각하는 곽 서방의 소명의식. 그것이 매잡이라는 직업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곽 서방이 식음을 전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반항의 표현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곽 서방의 반항의 대상이 약간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다른 집도 아니고 하필이면 서 노인의 집 헛간에서 죽음을 맞이하려 드는 행동은 왜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전에 매잡이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지금은 매잡이인 자신을 구박하는(곽 서방을 챙기려는 행동이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구박하는 듯한 행동이다.) 서 노인에게의 불만을 나타내려 한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거처에 관해서는 그저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차라리 곽 서방의 반항의 행동에서 그 의미를 찾고 싶다. 그의 식음을 전폐하는 것은 일종의 한 반항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반항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 반항의 대상은 어쩌면 매잡이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것 일수도 있고, 매잡이를 더 이상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으며, 세상의 기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명확한 한 가지 이유를 집어내긴 힘이 드나, 어찌 되었건 곽 서방의 단식은 반항의 일종인 듯 하다.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단순하게 소명의식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여기서 민태준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매잡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민태준, 즉 민형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평생 소설에 대한 연구만을 했을 뿐 소설을 발표한 적은 없는 민형. 그런 그가 자살하기 전 ‘나’에게 취재 여행을 강권한다. 그런 민형의 권유로 인해 ‘나’는 매잡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민태준은 왜 죽기 전 나에게 그러한 권유를 했을까. 그 이유는 그가 남긴 유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곽 서방의 죽음을 예견한 민태준의 유작은 단순히 미래를 예측한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필연성과 개연성을 잘 잡아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민태준이 점쟁이가 아닌 이상 어떻게 미래의 모습을 그렇게 잘 그려낼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민태준의 현실을 바라보는 능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그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나’를 취재 여행에 보낸 것 같다. 자신이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까지 설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다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민태준이 그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자살을 실행했다는 점에서 민태준은 자신의 작품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자신의 눈으로 그 결과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닐까. 이러한 모습은 곽 서방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의 유작은 곽 서방과 민태준 자신을 동일성을 통해 탄생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소설을 위해 취재는 하되 소설은 결국 쓰지 못했던 민태준이 더 이상 매를 잡아 살아갈 수 없는 매잡이와 동일시되어 비춰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음에 답답함을 느낀다. 민태준과 곽 서방의 대화 부분이 특히 그러했다. 매를 아끼느냐는 민태준의 질문에 곽 서방은 스스럼없이 매를 아끼고 있다고 대답한다. 민태준이 학대와 굶주림과 사역만이 가득한 매를 부리는 방법만이 매를 부리는 방법의 전부냐고 묻는 장면에서, 곽 서방은 매의 몸짓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에 대해 되물으며 민태준을 죽이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솔직히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곽 서방은 민태준을 죽이고 싶다 말하는 것일까. 이 부분이 중요한 시사를 나타내고 있다 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기 힘드니 답답할 따름이다.

  「매잡이」는 간단하게 읽기 어려운 소설이었다. 나는 「매잡이」를 읽으면서도 그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이 들었다. 나 자신의 억측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면 많았다고 하겠다. 액자 속의 내용과 액자 겉의 내용이 서로 얽혀 있는 부분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설 내의 세 가지 종류의 매잡이 소설이 등장하는 것도 그 뜻을 알아내기 힘들었고 말이다. 내가 해석한 것이 맞는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매잡이」는 어떤 의미에서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한 이청준의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언젠가 이 소설에 대해 더 연구하고 이해할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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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랄리가 있나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세트(전2권)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로렌 와이스버거 (문학동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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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하건대 나는 칙 릿 소설을 아주 어릴 때부터 읽었다. 칙릿 소설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영화로 제작된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내가 중학교 때 읽은 소설이다. 마을문고에서 빌려보았던 이 소설의 진행 방식은 독특하면서도 그 이야기에 재미를 잃지 않았다. 소설은 2~30대 여성을 타겟으로 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이것이 내게도 먹혔다. 중학교 여자애란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 또한 성인 여성들이 가진 문화를 흉내내기 좋아했고 또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나는 내가 나이 먹은 어른의 삶을 알고 있고, 그들의 비밀이 내게는 비밀이 아니라는 만족감에 젖곤 했다. 그렇기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결코 나와 먼 자리에 있지 않은 소설이었다. 나는 항상 이런 가볍고도 여성들의 문화를 다룬 이야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쏟아지는 칙 릿 소설들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화려한 패션 산업을 다룬 것 때문인 듯하다. 나 또한 읽으면서 나와 동떨어진 패션지 사람들의 모습에 혹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중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악마 같은 상사 아래에서 일하게 된 사회 초년생과, 처음에는 징징대기만 하던 그녀가 성장해가는 모습에 사람들이 동화된 것 아닐까 싶다.

  미란다 프리스틀리는 런웨이의 식구들, 특히 앤드리아에게 있어서는 악마 같은 존재이다. 까다로운 취향과 독선적인 스타일은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는 최고의 실력을 가진 권력자. 이 까다로운 여자의 비서로, 심지어 관심도 없는 패션산업에서 버텨야만 하는 앤디는 보통 힘든 게 아닐 것이다. 미란다는 악마이다. 그런데 이 미란다를 미워하기 힘들다. 까다롭고 독선적이지만 그녀는 분명 실력을 가지고 있고, 인간미가 없어 보이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있어선 어느 정도의 인간미도 보여줬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짓밟는 방식은 좀 그렇지만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 까다로운 건 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이든 악마 같은 상사는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앤드리아에게서는 사회초년생 티가 난다. 앤드리아가 겪는 힘든 일들은 미란다의 탓도 일부는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녀 스스로 자초한 일들이다. 사회에서 학교 때와 같은 어설픔이 통할리가 없다. 그녀는 패션 잡지사에서 일하면서 모두가 입지 않은 옷을 입었었고, 일을 할 때 지켜야할 규칙들을 어기곤 했다. 그것과 미란다라는 악마가 합쳐져 더욱 큰 효과를 내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가 미란다의 독설을 견딜 수 없고, 패션 업계를 비웃고만 있을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런웨이에 들어오지 않는 편이 옳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성장을 위해 런웨이에 입사했다. 앤드리아의 말마따나 런웨이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여성들은 한 둘이 아니다. 그런 다른 여성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런 탁월한 기회를 손에 넣었다면 앤드리아는 불평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런웨이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 불평한다 한들, 그녀는 결국 자신의 욕망과 타협하여 런웨이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모든 가치가 달러로 통용되는 런웨이의 사회는 어찌 보면 냉혹하다. 선입자인 에밀리는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인물이다. 다소 귀여운 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여성이다. 그런 에밀리가 앤드리아의 등장으로 뒤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은 런웨이 내의 사회가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것으로 굴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앤드리아는 이러한 런웨이의 냉혹한 사회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 안에 제대로 자리 잡게 되었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열심이 된다. 런웨이에서 일한다는 것이 힘들고 진저리쳐지는 것과는 별개로, 런웨이에서 일한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고 그것을 자신의 명함에 박아 넣기를 좋아하는 인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평범했던 인물이 어떤 사회에 적응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치졸하고 짜증나는 인물이 되어버리는 지 앤드리아를 통해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앤드리아의 욕망실현은 처음에 런웨이의 직장을 자신이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기구원에서 멀어져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는 런웨이에서 궤도에 올랐으며, 자신의 일에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이것이 자기구원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런웨이를 통해 자신이 하고자하는 일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자신 또한 그 일에 제법 만족했었다. 마음먹은 대로만 풀리면 그게 어떻게 인생이겠는가. 그녀의 꿈이 완전히 좌절되지 않았고, 런웨이 또한 그 과정이었으며,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감을 느꼈었던 것 자체가 나는 앤드리아의 욕망이 크게 좌절되지 않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결말 부분에 앤드리아가 미란다에게 쏘아대고 런웨이를 떠났던 것이, 오히려 자아실현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앤드리아의 욕망이 아무리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한들, 그것을 벗어던지는 일을 내가 완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앤드리아가 느꼈던 런웨이에서의 회의감을 벗어던지고 정말 자신이 나아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앤드리아의 벗어남을 자기구원의 실현으로 긍정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앤드리아가 런웨이에서 멋지게 성공한 뒤에 그것을 벗어던졌다면 그게 더 멋있고 긍정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앤드리아가 잃었던 것들이 가볍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앤드리아가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이 매우 컸고, 그 자신의 이상과 떨어져있었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그러나 앤드리아가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시점이 아쉬웠다. 어느 사회의 일원이 되던 간에 그 곳에는 갈등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내게있어서 앤드리아는 그 조율을 중간에 포기해버린 존재로 느껴져 아직까지도 안타까운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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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까 과제였어서 좋게 쓴거고 영화가 천배쯤 낫다.
  사회 소외 계층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은 아무래도 불편한 기분이다. 게다가 그 소외 계층의 발버둥이 세상에 아무런 의미를 미치지 못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김경욱의 단편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에서, 노인과 계집의 삶은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은 그들이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 입맛이 쓴 느낌이다.

  소설은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하잘 것 없는 도둑질에서 시작된다. 온갖 비싼 것들은 내버려두고 사라진 아파트 지도, 학생 신상카드, 입주민 주차스티커 발급대장 등 사소한 일상의 물품들은 사내에게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다. 이 사소한 물품들의 등장에 있어서도 김경욱은 현실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가짜 경비구역 표시가 붙어있는 부동산업자, 학생에게 애정이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강지선 땜’, 비밀리에 업자에게 돈을 받고 있는 관리인. 어느 한 사람이고 이 사람은 허구이다! 라고 외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초반부에서부터 현실감각을 놓지 않은 김경욱의 묘사는, 남자와 손녀의 삶에 관한 묘사에 가서는 더욱 그 현실이 짙게 느껴지게끔 만든다. 가스가 끊긴 재개발지역의 텁텁한 삶만으로도 삶은 고달프기 마련이다. 손녀딸은 아프고, 직장은 고달프다. 남자의 삶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손녀딸의 병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깊다. 빡빡한 직장만으로 부족해 남자는 더욱 더 아파가고 있으며, 자식이라는 사람은 항상 어디에 있는 지 항상 죄송하고 미안할 뿐이다.

  삶의 기반은 무너져가고, 손녀딸의 마음의 병과 남자의 병은 깊어져만 간다. 이 상태에서 남자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것은 손녀딸의 병을 만들어 낸 근원에게서 나온 것이다. 기회라기엔 더러우나 붙잡기를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들. 남자의 삶이 그렇게 퍽퍽하지 않았다면 남자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고민하고, 고민 끝에 그 기회를 차버리기를 선택한다.

  여기에서 남자를 선택하게 하는 것은 작품 전체에 중요한 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종교적 신념이다. 손녀가 가게에서 외상을 해 먹은 단과자들을 보며, 괴멸을 맞은 세상에 창궐했던 죄악의 이름이라 인식하는 부분만 봐도 그렇듯, 이 종교적 신념은 남자의 삶 전반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쟁터에서 종교적 신념이라는 것을 배운 남자는 그를 받드는 삶을 따른다. 하지만 어떠한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이 남자 본인의 환경에 맞추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일 때 그를 더러운 자로 매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죄가 없으면 벌도 없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믿고 있는 종교적 신념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찾으며 그에게 질문하지만 결과적으론 자신의 신념에 맞추어 그것을 해석하는 것 같다. 그가 겪은 전쟁터는 그에게 종교적 신념을 준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자기해석의 말미를 부여한 곳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혼재하며,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조차 죽음의 형태를 띠고 나타났던 전쟁터에서 남자는 의지를 지도 안에 두지만 않았다. 지도 바깥에 있던 분노를 실제로 의지로 만들어내, 지도 바깥에서 그 의지를 실현해냈다. 남자의 믿음은 그런 식이다. 종교적 신념에 완전히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쪽에 완전히 치우치지만도 않으며, 자신의 신념 또한 버리지 않고 그와 섞어낸다. 사실 내 눈에는 종교적 신념은 허울에 가까울 뿐 사진의 신념을 더 잘 지킨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벌인 남자의 심판은 죄에 따른 벌을 부여한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부가적인 금전적 목적 따위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공한 이 복수극이 남자의 의도대로 결말을 맞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어쩌면 실패라고 볼 수 있는 것처럼 결말을 맞았을 때, 여기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단순히 벌을 부여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입은 피해만으로도 죄를 받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그처럼 기대했던 매체화가 되지 않았을 때, 주인공인 남자나 독자들이나 이 혁명이 실패한 것으로 여겨진다. 읽으면서 푹, 가라앉게 되는 기분이다. 남자가 행했던 벌이 벌만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닌, 그에 의한 다른 여파를 기대하는 폭로하는 성격을 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벌의 모습은 남자의 지독한 삶 가운데 마지막 발악일 수도 있고, 손녀딸이 얻게 된 병에 걸맞는 종류의 것을 안겨주고 싶었던 노인의 애처로움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던 이것이 실패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마치 신에 의지했던 남자에게 신의 논리를 알려주려 하는 것만 같다. 평등하지 않은 세상은 어떨 때엔 잔혹할 정도로 평등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는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에겐 평등으로 느껴지지 않는 평등이다.

  남자가 원했던 벌의 실패로만 끝났다면 이 소설은 참 암울했을 것이다. 게다가 남자에게는 죽음이라는 ‘누구’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에 들었던 한 가지는 희망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컴컴한 죽음의 늪을 헤매고 있는 남자의 등에 업힌 손녀는, ‘싼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앤지.’라는 노래를 부른다. 소설의 중간 부분에서도 나왔던 이 노래는 짧은 희망의 계시를 던져준다. 그 정확한 발현은 손녀가 입을 떼었다는 데서 나타난다.

  남자의 삶은 앞으로도 퍽퍽할 것이다. 가스와 전기가 모두 끊긴 재개발 지역의 좁은 방에서는 결국 쫓겨날 것이고, 직장은 이미 잃었다. 아들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손녀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계시처럼 노래한다.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알고 있는 신은 평등하게 남자에게도 구원의 빛을 내려줄 것만 같다. 물론 남자의 삶이 그때까지 버텨준다면, 하는 안타까운 조건이 붙지만 말이다.

  김경욱의 소설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소외 계층을 더 구석으로, 더 한계로 몰아간다. 안타까울 정도의 현실묘사는 그들의 삶을 더욱 외롭고 희망 없는 구석으로 몰아넣어가지만, 그 때문에 소설 안에서 미약하게 보여지는 희망의 실마리가 더욱 눈에 띄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텍스트 - 김경욱,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창작과 비평 2009.봄』, 창비, 2009
서편제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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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편제」라는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알고는 있었다. 영화 「서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대본이 고교 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서편제」는 각색되어진 시나리오의 모습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서편제」가 여러 단편들로 구성된 이야기라는 것조차 잘 알지 못하고 있었고 소설을 읽게 된 이제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다섯 편의 연작을 쭉 읽고 나니 시나리오 「서편제」의 그것보다 넓은 의미의 한과 그 승화의 모습이 머릿속에 들어옴을 느낀다.

  「서편제」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한의 예술적 승화에 눈을 돌린다. 이것에 대해서 내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바가 없다. 「서편제」는 정말 한국인의 정서에서 이해될 수 있는 한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의 예술적 혹은 자연적 승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각각의 한의 승화의 모습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결국 큰 줄기를 보면 「서편제」 연작 다섯 편은 한의 승화를 보여 준다.

  「서편제」의 다섯 연작 중에서 한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며 그것을 잘 승화시킨 것은 역시 첫 번째 이야기인 「서편제」와 두 번째 이야기인 「소리의 빛」일 것이다. 이 부분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서편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리꾼과 그의 딸, 그리고 그녀의 동복 남매인 사내를 주축으로 진행되는 이 부분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의 승화를 이루어내는 모습을 그러내고 있다.

  그들이 가진 한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보통은 소리꾼의 딸인 송화의 한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 한다. 그러나 나는 송화의 한보다 사내의 한에 조금 더 시선이 간다. 사내는 소리꾼을 증오하고 죽이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그를 죽이지 못하고 도망치는 것에 그치고 만 사람이다. 나는 소리꾼에 대한 사내의 증오가 결국 한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단순히 원망의 이미지만으로 사내의 한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사내의 한이 만들어진 것은 그의 유소년기적 체험에도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삐에 매여 무덤가에서 보냈던 사내의 유년기가 사내에게 어떠한 의미로 작용하는 지 나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고삐에 매인 채 어머니의 요상한 노래를 듣고 자란 사내의 과거가 단순한 것이 아님은 알 수 있다. 뜨거운 햇덩이 아래에서 보낸 그의 유년기는 사내의 뇌리에 깊게 박혀, 그가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살게 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가 가졌던 속박과 괴로움의 시간은 그의 한의 토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사내는 소리꾼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사람이다. 실제로 소리꾼이 어머니를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소리꾼은 어머니를 앗아간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외디푸스적 심리에서 나온 것 같다. 사내를 뱀에 비유하는 것도 그렇고, 어머니의 죽음을 사내의 탓으로 무작정 돌리는 것도 그러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어머니의 소멸로 동복동생이 사내의 곁으로 찾아온 셈이지만 소리꾼에 대한 복수로 가득 찬 사내에게는 그것이 중요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사내가 동복동생의 탄생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였다면 소리꾼에 대한 증오가 없을 수 있었을까. 애초에 소리꾼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식했으니 그렇지 않았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다. 사내가 가진 한의 모습을 단순히 소리꾼에 대한 증오로 볼 수 없는 이유를 나는 그의 유소년기의 체험과 외디푸스적 심리에서 찾는다. 더 덧붙이자면 결국은 소리꾼을 죽이지 못하고 자의든 그렇지 않든 그를 용서하게 된 그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내가 이러한 한의 생성 화정을 거쳤다 하면, 딸인 송화의 한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소리꾼은 자신의 딸을 훌륭한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만든다. 이것은 온전히 소리꾼 자신의 욕심에 지나지 않으며, 그 욕심에 그의 딸이 희생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송화의 한은 단순히 아버지가 자신의 눈을 멀게 한 데서 나오지 않는다. 송화의 한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는 과정에서 탄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한의 생성은 한국인이 가진 한이 단순히 증오나 원망의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한국인의 한은 드러나는 복수나 원망으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다. 가슴 속에 꼭꼭 묻어두다가 그것이 사무치게 되어 삶의 원동력이 되었을 때 그 한이 진정한 의미의 한이 되는 것이다. 송화는 그녀가 가진 한을 판소리로 승화시키고 이것에서 한이 그녀에게 삶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내의 경우에서도 그의 한이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됨은 마찬가지이다.

  사내와 송화가 서로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한바탕 판소리를 한 것을 두고 송화는 그것이 서로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왜 그것이 서로를 보존하기 위한 길이었을까. 그것은 한이 가진 특성과 관련이 있다 할 수 있다. 한은 한으로 남아 있어야만 그 가치가 보존된다. 그들이 서로의 정체를 밝힘으로서 한의 해결을 도모한다면, 그들의 삶의 원동력인 한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삶의 원동력이 사라진다면 그들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 조용히 헤어져 간 것이다. 그들에게 한은 이미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벌이는 판소리 한 판은 그들의 한의 예술적 승화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되, 그것을 판소리로 대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편제」의 앞부분은 이런 식으로 소리를 통한 한의 예술적 승화에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작에서 이어진 다른 부분들은 어떠한가. 「서편제」의 다른 연작 소설에서는 한의 승화가 다각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이다. 「새와 나무」에서는 한의 자연을 통한 승화가 보여진다. 수림을 만남으로서 소유와 지배의 욕심을 놓는 시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의 자연적 승화를 본다. 「다시 태어나는 말」은 한을 용서를 통해 승화시킨다. 차를 마시는 행위를 통해 용서의 과정은 이루어진다. 모든 사람들이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한이며 그것을 용서하고 풀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한의 원동력이 탄생하는 것임을 「다시 태어나는 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의 원동력은 단순히 미움과 원망에서 나오지 않는다. 복잡하고 단계적인 감정의 변화와 용서의 과정. 그것이 쉽사리 터트려지지 않고 가슴 속에 맺혔을 때, 한을 통한 원동력이 발생할 수 있게 된다.「서편제」는 한국인의 정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감정인 한의 다양한 승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다른 민족에게는 한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미움과 원망과는 또 다른 감정인 한. 이것은 우리 고유의 특성이며, 우리 고유의 것을 창조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가슴 속에 응어리지고 사무쳐 있는 그 감정을 어떻게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복잡한 감정인 한의 생성 과정을 그리며 그 승화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서편제」는, 그런 의미에서 내게 다소 감정적인 생각의 진행을 택하게 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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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과제. 이거야 워낙 유명하니까...
황금마차는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살와 바크르 (아시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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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사회구조가 여성들을 구속하는 구조라는 것은 전 세계 누구나가 알고 있다. 사회 뉴스면에서 그려지는 이슬람 여성의 실상은 어둡고 칙칙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 내부에서 어떤 자세한 핍박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람들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살와 바크르의 『황금마차는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는 이슬람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여성 차별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낸 소설이며, 그들의 삶을 고발함과 동시에, 그러한 사회 속에서 성장한 여성들의 내면 심리 또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그 안에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는 여주인공 아지자와, 그녀의 주변에 있는 또 다른 수감자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책은 이슬람 여성사회의 현실을 고발한다. 이것을 소개해내고 있는 소설의 구조 자체는 옴니버스 형식의 것으로 평범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낼 장소가 여자교도소라는 점에서 신선하다고 느꼈다. 그 사회 안에서 범죄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이고 동시에 충격적이라는 느낌이었다. 살와 바크르가 이 여자 교도소라는 장소를 택한 것은 여러 의미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느낌이었다.

  화자인 아지자에서부터 시작되는 그들 핍박의 이야기는 너무나 참혹하고 정도를 벗어나 때로는 불쾌감을 준다. 이 불쾌감은 이 이야기가 온전히 픽션일 수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소설을 통해 잘 꾸며낸 이야기를 보는 것과 동시에, 여성이 차별당하는 현실을 노골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불쾌감은 기원하고 있다. 마치 우리 사회의 현실 단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았을 때의 느낌 같이 말이다.

  여자교도소의 수감자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등장한다. 아주 어린 여성에서부터 나이 든 노인에까지 걸쳐 분포되어 있는 수감자들은, 그 사회에서 지워진 굴레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나이 열여섯에 처음 교소도에 들어왔었고 몇 번의 반복을 계속한 사피야는 어릴 적부터 교도소를 동무삼은 인물이다. 끝까지 참고 참으라던 어머니의 말을 되새겼던 힌나는 결국 노인이 되어서는 남편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살해한다. 이렇듯 나이를 불문하고 그들 사회의 굴레는 지워져있다.

  나이 뿐 아니다. 배운 자와 안 배운자를 더불어 그렇다. 지식인과 비지식인을 차별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노력했든 안 했든 그들이 결코 그 사회를 벗어날 수 없었음을 말한다. 바히자 압둘 하크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던 여자이다. 단 한 번의 마취 실수로 그녀는 교도소에 오게 되었다. 그녀의 삶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세계의 그것이다. 사회논리를 수긍하여 혼전순결을 지키려 했지만 그 때문에 약혼자는 떠났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계급사회 탓에 신분상승을 하지 못했다. 노력하는 자에게도 희망은 없다는 현실을 다시 한 번 알려주고 있음이다.

  이 사회에서는 가족 또한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들 또한 굴레에 지워진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굴레를 지우려 하기 때문이다. 샤피카 알마트울라가 구걸행위로 교도소에 들어왔지만, 사실 그녀가 정신을 놓게 된 계기는 친부의 자매 살해 때문이었다. 존속살해의 이러한 행위는 그들 사회 속에서 가족적인 수치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지만, 사실 개개인의 입장에서 그것을 너르게 두고 이해하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불쾌했던 것은, 여성의 편이어야 할 여성조차 여성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앗아가고 착취하는 대상에는 남성 뿐 아니라 여성도 빠지지 않는다. 아이다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엄마의 존재는 모성애를 보여주지 않는 존재이다. 이 이야기 안에서 아이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엄마의 존재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는데, 어쩌면 이 끔찍함을 보완하기 위해 살와 바크르는 움무 알카이르의 존재를 등장시켰는지 모른다.

  하나 안쓰러웠던 부분을 꼽자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사회에 물들어 무엇이 근본부터 잘못되었는지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가장 한 가운에데는 당연히 아지자가 있다. 아지자의 정신분열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일관 새아버지로부터 당했던 성폭행의 기억을 사랑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아동 성폭행에 지나지 않는 그것은 결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런데 이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은 아지자의 새아버지가 아니라 피해자인 아지자 본인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세뇌되어버렸다는 느낌에 씁쓸한 뒷맛을 감출 길이 없었다.

  정신분열증 아지자가 바라는 ‘황금마차’는 구원의 상징이다. 그러나 책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그것은 동시에 구원의 존재가 될 수 없다는 한계로 규정되어져 있다. 이러한 모순의 모습은 소설을 보는 내내 먹먹한 기분을 가슴 속에서 떨쳐낼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되더라도 이것은 결코 구원의 이야기를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정신분열증 환자가 화자라는 점에서 예상한 바였지만, 그 안에선 구원의 희망을 찾을 수가 없어 슬펐다.

  아지자는 황금마차에 태울 사람을 선별하기 위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준비하라 말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아지자의 황금마차에 실제로 탄 여성은 없다. 모든 것은 아지자의 환상일 뿐이다. 그 황금마차 위에 올라 승천하는 순간 동시에 아지자의 숨은 끊겨 버린다. 황금마차가 승천했다는 것은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아지자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의 구원 의미는 현실 세계에 닿을 수가 없었다. 살와 바크르는 이런 비극을 통해 이슬람 사회의 구원없는 현실을 더욱 냉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황금마차는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에서 드러나는 여성 차별의 모습은, 어느 부분에서 우리나라의 여성차별과 맞닿아 있다. 우리나라의 사회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도 물론 존재하긴 하지만, OECD국가 중 여성차별국가로 순위권에 등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 또한 긍정적인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이 책이 이슬람권의 여성들에게 어떠한 깨달음의 발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자신들의 사회를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문화권의 여성들에게도 영향이 없다 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황금마차는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는 그 교훈을 여전히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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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과제. 어우, 이 소설 재밌지만 너무 불편하다. 그 결말까지도 상상 초월로 불편하다. 픽션이지만 현실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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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과 머저리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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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신과 머저리」는 전형적인 액자형 소설이다. 다른 액자형 소설에 비해 조금 더 특이한 점은, 내부의 이야기가 현실의 모습을 비추는 듯한 가상의 소설이라는 데 있다. 그 소설은 액자 틀에서 존재하는 인물인 형에 의해 그려지고 그의 동생을 통해 전달된다. 액자 안을 구성하는 형의 소설은 현실이 아니지만, 읽는 이들은 이것이 현실에 바탕을 둔 소설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주인공인 ‘나’는 무기력 증에 걸린 듯한 청년이다.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계획은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의 여자친구인 ‘혜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느낄 정도로 무감각하다. 그는 마치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자유가 억압된 시대, 그 때의 전형적인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또 다른 인물인 ‘형’은 6.25를 겪은 인물로서 현실을 잘 살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나, 자신의 환자가 죽어버린 이후 모든 일을 관두고 소설을 쓰고 있는 사내이다. 그는 시대의 혼란을 직접 겪은 이로서 소설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혼란을 해결하려는 것 같다. 이 둘의 모습은 형과 동생 세대에서 대비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정신적 환부를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의 차이를 보여준다.

  형에게는 뚜렷한 정신적 환부가 있다. 그가 소설을 쓰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환부를 찾아 서술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그의 정신적 환부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 6.25를 겪으면서 남게 된 죄책감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이 6.25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있다.

  동생에게는 뚜렷한 정신적 환부가 없다. 그런데 통증은 있다. 환부가 없되 통증은 있다는 말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기 고뇌의 원인과 그 책임을 찾을 수 없는 그 시대 젊은이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혜인’의 말에서 통증 없는 환부를 가진 동생의 모습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전쟁을 겪음으로서 자신의 명확한 정신적 환부를 알며 그것에로의 책임 전가를 통해 환부를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는 형의 세대와는 달리, ‘동생’의 세대는 그렇지 못하다. 형과 ‘동생’이 갈등을 겪는 것은 이런 세대간의 차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동생이 형의 소설을 읽으면서 욕을 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안의 나’는 과거의 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설을 읽는 동생의 모습으로도 보인다. 오관모와 김 일병 사이에서 ‘소설 안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방관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김 일병의 몸이 썩어가는 상황에서 그는 오관모를 죽이지도, 김 일병을 죽이지도 못한다. 이것은 과거에 형이 겪었던 딜레마의 모습이며, 현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나’와 ‘형’과 ‘소설 안의 나’는 동일성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의 소설은 미완인 채로 오랜 시간 유지된다. 그것은 소설을 읽는 나를 답답하게 만들어 결국 소설의 끝을 쓰게끔 만든다. 현실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동생이 소설에 그만큼 집중했다는 뜻일 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가 소설의 결말을 스스로 썼던 것은 ‘소설 안의 나’와 ‘나’를 동일시해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형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정신적 상흔을 해결하려 했던 것과 비슷하게 나 또한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정신적 환부를 찾아내고 그것을 자기 식대로 해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가 맺은 결말은 ‘소설 안의 나’가 김 일병을 죽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상황을 직접 겪지 못한 나가 취하는 해결책이며, 형에게는 탐탁치 못한 것이 된다. 형에게 나는 뚜렷함이 없이 무기력하기만 한 수동적인 인간으로 보이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형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과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곧, 나가 맺은 결말은 이전에 자신이 했던 행동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곧 형은 과거 김 일병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오관모가 김 일병을 죽이는 것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가엾은 김 일병을 왜 죽이느냐고 나에게 소리치는 장면에서 그가 가진 죄책감을 보는 듯 하다.

  형은 과거의 죄책감으로 인한 환부 때문에 소설 쓰기를 시작했으나 쉽사리 그 끝을 맺지는 못했다. 과거의 상처를 쉽게 극복하기에는 그 환부가 크기 때문이며, 그의 죄책감을 해소할만한 용기와 독한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형이 구걸하는 소녀의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바로 형이 독한 마음을 먹고자 저지르는 행동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라도 오관모를 응징하고 싶어 하는 형은 그 일을 마음먹기 위해, 그리고 소설로 쓰기 위해 이러한 일을 벌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형에게 오관모를 응징하는 것은 형이 과거에 가졌던 죄책감을 덜 수 있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형에게 정신적 환부를 남긴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형은 어떤 결말을 택하는가? 형이 쓴 소설의 결말은 오관모가 김 일병을 죽이며, 뒤따라 ‘소설 안의 나’가 오관모를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은 형의 상흔의 치료이다. 과거에 형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을 ‘소설 안의 나’로 하여금 대신하게 함으로서 본인의 상처를 치료하려 했던 것이다. 형이 과거에 오관모를 죽이지 못했던 것은 ‘혜인’의 남편이 오관모라는 암시를 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소설에서는 ‘소설 안의 나’가 죽인 것으로 나오는 오관모가 멀쩡히 살아서 ‘혜인’과 결혼식을 한다. 이를 통해 과거에 김 일병을 오관모가 죽인 것까지를 사실로 볼 수 있으며 그 이후의 일은 형의 바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형의 정신적 상흔의 완벽한 해소가 형이 소설을 불태우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소설을 쓰고 그것으로 어느 정도의 정신적 상흔의 해소를 이루었지만, 결국 오관모는 살아 있으며 소설은 그저 형의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상처를 명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겨내려 했다. 그의 관념의 성은 무너졌지만, 정신적 상흔을 해소하려 들었던 용기는 그에게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형’과 ‘나’의 갈등은 어쩌면 총체적인 ‘나’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이 나의 모습과 행동에 분노한 것은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찌 되었건 간에 형은 자신의 정신적 상흔을 해결하였다. 그는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 확연한 자신의 정신적 상흔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정신적 상흔의 해결이 비교적 쉬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환부만을 안고 있다. 소설 끝에서 나는 그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허비될 것을 말한다. 나의 아픔 가운데에는 형에게서처럼 명료한 얼굴이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는 그의 정신적 환부를 이겨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을 안다. 작가는 뚜렷함이 없는 나를 통해 그 시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나 또한 명확한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이 막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듯 하여 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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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과제. 읽으면 끕끕해져서 많이 좋아하진 않는다. 내 인생 같은 이야기들은 읽기 싫어.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완벽함을 요구한다. 실제로 완벽이라는 건 모든 상황이 빈틈없이 맞아떨어져야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인간에게 어느 한 가지 특출한 능력을 요구하기 보다는, 이것저것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을 원한다. 모든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도 아닌, 모든 분야에 뛰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모든 일에 있어서 완벽할 수 있을까? 지켜질 수 없는 명제와 그 간극을 메워보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딜레마는 발생한다.

  서유미의 「저건 사람도 아니다」는 이런 딜레마에 빠진 현대인들의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싱글 맘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주인공은 완벽해야 한다. 밤늦게까지 회식을 하고 난 다음날에도 멀끔한 모습을 다음 날 직장에 나타나야 하고, 회식이 있다 하더라도 아이의 숙제는 꼭 도와주어야 한다. 이러한 갈등 상황은 현대 여성 모두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두 역할 중 어느 한 역할도 제대로 해 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녀의 능력이 부족해서 라기 보다는 사회가 제시하는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 상황은 해결 방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

  완벽한 직장인, 완벽한 어머니 안에서 갈등하던 주인공은 그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하나의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이양하기에 이른다. 여러 명의 파출부를 전전한 끝에 그녀가 도달한 타협점은 ‘트윈 사이보그’라는 가상의 존재이다. 이는 소설적 허구이다. 현실 상황과 맞닿아 있는 실제적 문제를 소설 안에서 허구적 존재를 통해 해결하려 드는 모습은, 우리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상황이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던져주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이 트윈 사이보그라는 존재는 실제의 주인공과 같은 모습을 한 존재이다.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완벽할 수 있다면, 나라는 존재의 필요성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여기에선 현실을 사는 현대인들의 딜레마와 그에 의해 흔들리는 정체성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비현실적 해결방법이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어찌 되었건 소설 안에서는 이러한 허구적 대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 한다. 이러한 해결 방법은 소설 내에서 어찌되었건 잘 통한다. 주인공과 닮은 트윈 사이보그의 존재를 주변 사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며, 트윈 사이보그는 주인공의 갈등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해 준다. 주인공은 더 이상 육아 문제로, 지친 다음 날의 출근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완벽함의 고삐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 주인공에게는 새로운 딜레마가 등장한다. 너무나 완벽한 자신의 대체품에 의해 자신의 진짜 존재까지 대체되는 상실감을 겪게 되는 것이다.

  트윈 사이보그는 아이를 완벽하게 잘 돌보고, 회사 일을 완벽하게 잘 해내며, 심지어 헤어진 전남편을 상대할 때에도 완벽하게 행동한다. 오히려 주인공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려 할 때 그녀는 최근까지의 완벽을 이유로 비난을 받는다. 직장 동료인 ‘구’나 ‘홍’은 물론이요, 자신의 아이까지도 그녀를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집안에서도 회사에서도 반복되는 이러한 패턴의 반복은 결국 그녀가 설 자리를 완벽하게 잃게 만든다. 그녀는 어디에서도 쓸모 있는 존재가 아니다. 소설 안에서 그녀를 증명하는 모든 것은 고작 완벽한 행동들뿐이다. 그녀의 성격이나 인간성 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주인공이 느낄 허전함과 허무함으로 나타난다. 이 쯤 되면 그녀는 트윈 사이보그의 사용을 중단하고 본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법도 하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한다. 사회는 여전히 그녀에게 완벽함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와 홍을 보며 ‘저건 사람도 아니다’라고 끼적거리던 주인공은, 사실 사람이 아닌 트윈 사이보그를 통해 차지할 수 있었던 인간답지 못한 위치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함에 길들여진 주인공은, 자신 또한 그 완벽한 모습을 포기하지 못한다. 비록 그것이 껍데기이고 본연의 자신이 아닐 지라도 그녀는 더 이상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드러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인이 만들어낸 사회 전반적인 딜레마 자체가 개인의 심리 안에 틀어박힌 현실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이 딜레마들이 어떻게 보면 개인의 욕심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지막 반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홍’의 등장은 다소의 웃음과 함께 미적지근한 감정을 전달한다. 우리 사회의 지나친 완벽함의 요구가 비단 주인공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려주며, 그 완벽했던 ‘홍’ 또한 사이보그였다는 것을 통해 진실한 완벽함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건 사람도 아니다」는 허구적인 존재를 통해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말하고 있다. 무한 경쟁에 휩싸인 사람들, 자신을 몰아세워서라도 완벽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우리는 완벽을 추구해 왔다. 하지만 진실한 완벽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완벽을 위해 자아가 손상을 입어야 한다면 그것이 진짜 완벽한 완벽이라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를 휘감아왔다.

  소설 안에서도 현실에서도 진실한 의미의 완벽이란 찾기 힘들다. 소설 안에서 완벽의 모습을 오벼주는 트윈 사이보그는 결국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인간은 그 도구만큼 완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하물며 진짜 현실에서는 그런 도구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벽을 추구하며 한없이 스스로와 남들을 재고 따지며 상처 입힌다. 이것은 일종의 가학적이고도 피학적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어쩌면 완벽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인간은 그 완벽을 쫒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에서 말하듯 이런 완벽은 추구는 자칫하면 인간 자아의 상실까지 초래할 수 있는 듯하다. 적절한 선에서 현실의 완벽 요구에서 타협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혹은 우리 사회 전반에 깔린 의식을 변화시키던가. 둘 중 어느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텍스트 - 서유미, 「저건 사람도 아니다」, 『창작과 비평 2009.봄』, 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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