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소외 계층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은 아무래도 불편한 기분이다. 게다가 그 소외 계층의 발버둥이 세상에 아무런 의미를 미치지 못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김경욱의 단편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에서, 노인과 계집의 삶은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은 그들이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 입맛이 쓴 느낌이다.

  소설은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하잘 것 없는 도둑질에서 시작된다. 온갖 비싼 것들은 내버려두고 사라진 아파트 지도, 학생 신상카드, 입주민 주차스티커 발급대장 등 사소한 일상의 물품들은 사내에게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다. 이 사소한 물품들의 등장에 있어서도 김경욱은 현실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가짜 경비구역 표시가 붙어있는 부동산업자, 학생에게 애정이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강지선 땜’, 비밀리에 업자에게 돈을 받고 있는 관리인. 어느 한 사람이고 이 사람은 허구이다! 라고 외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초반부에서부터 현실감각을 놓지 않은 김경욱의 묘사는, 남자와 손녀의 삶에 관한 묘사에 가서는 더욱 그 현실이 짙게 느껴지게끔 만든다. 가스가 끊긴 재개발지역의 텁텁한 삶만으로도 삶은 고달프기 마련이다. 손녀딸은 아프고, 직장은 고달프다. 남자의 삶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손녀딸의 병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깊다. 빡빡한 직장만으로 부족해 남자는 더욱 더 아파가고 있으며, 자식이라는 사람은 항상 어디에 있는 지 항상 죄송하고 미안할 뿐이다.

  삶의 기반은 무너져가고, 손녀딸의 마음의 병과 남자의 병은 깊어져만 간다. 이 상태에서 남자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것은 손녀딸의 병을 만들어 낸 근원에게서 나온 것이다. 기회라기엔 더러우나 붙잡기를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들. 남자의 삶이 그렇게 퍽퍽하지 않았다면 남자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고민하고, 고민 끝에 그 기회를 차버리기를 선택한다.

  여기에서 남자를 선택하게 하는 것은 작품 전체에 중요한 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종교적 신념이다. 손녀가 가게에서 외상을 해 먹은 단과자들을 보며, 괴멸을 맞은 세상에 창궐했던 죄악의 이름이라 인식하는 부분만 봐도 그렇듯, 이 종교적 신념은 남자의 삶 전반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쟁터에서 종교적 신념이라는 것을 배운 남자는 그를 받드는 삶을 따른다. 하지만 어떠한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이 남자 본인의 환경에 맞추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일 때 그를 더러운 자로 매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죄가 없으면 벌도 없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믿고 있는 종교적 신념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찾으며 그에게 질문하지만 결과적으론 자신의 신념에 맞추어 그것을 해석하는 것 같다. 그가 겪은 전쟁터는 그에게 종교적 신념을 준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자기해석의 말미를 부여한 곳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혼재하며,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조차 죽음의 형태를 띠고 나타났던 전쟁터에서 남자는 의지를 지도 안에 두지만 않았다. 지도 바깥에 있던 분노를 실제로 의지로 만들어내, 지도 바깥에서 그 의지를 실현해냈다. 남자의 믿음은 그런 식이다. 종교적 신념에 완전히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쪽에 완전히 치우치지만도 않으며, 자신의 신념 또한 버리지 않고 그와 섞어낸다. 사실 내 눈에는 종교적 신념은 허울에 가까울 뿐 사진의 신념을 더 잘 지킨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벌인 남자의 심판은 죄에 따른 벌을 부여한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부가적인 금전적 목적 따위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공한 이 복수극이 남자의 의도대로 결말을 맞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어쩌면 실패라고 볼 수 있는 것처럼 결말을 맞았을 때, 여기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단순히 벌을 부여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입은 피해만으로도 죄를 받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그처럼 기대했던 매체화가 되지 않았을 때, 주인공인 남자나 독자들이나 이 혁명이 실패한 것으로 여겨진다. 읽으면서 푹, 가라앉게 되는 기분이다. 남자가 행했던 벌이 벌만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닌, 그에 의한 다른 여파를 기대하는 폭로하는 성격을 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벌의 모습은 남자의 지독한 삶 가운데 마지막 발악일 수도 있고, 손녀딸이 얻게 된 병에 걸맞는 종류의 것을 안겨주고 싶었던 노인의 애처로움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던 이것이 실패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마치 신에 의지했던 남자에게 신의 논리를 알려주려 하는 것만 같다. 평등하지 않은 세상은 어떨 때엔 잔혹할 정도로 평등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는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에겐 평등으로 느껴지지 않는 평등이다.

  남자가 원했던 벌의 실패로만 끝났다면 이 소설은 참 암울했을 것이다. 게다가 남자에게는 죽음이라는 ‘누구’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에 들었던 한 가지는 희망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컴컴한 죽음의 늪을 헤매고 있는 남자의 등에 업힌 손녀는, ‘싼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앤지.’라는 노래를 부른다. 소설의 중간 부분에서도 나왔던 이 노래는 짧은 희망의 계시를 던져준다. 그 정확한 발현은 손녀가 입을 떼었다는 데서 나타난다.

  남자의 삶은 앞으로도 퍽퍽할 것이다. 가스와 전기가 모두 끊긴 재개발 지역의 좁은 방에서는 결국 쫓겨날 것이고, 직장은 이미 잃었다. 아들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손녀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계시처럼 노래한다.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알고 있는 신은 평등하게 남자에게도 구원의 빛을 내려줄 것만 같다. 물론 남자의 삶이 그때까지 버텨준다면, 하는 안타까운 조건이 붙지만 말이다.

  김경욱의 소설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소외 계층을 더 구석으로, 더 한계로 몰아간다. 안타까울 정도의 현실묘사는 그들의 삶을 더욱 외롭고 희망 없는 구석으로 몰아넣어가지만, 그 때문에 소설 안에서 미약하게 보여지는 희망의 실마리가 더욱 눈에 띄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텍스트 - 김경욱,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창작과 비평 2009.봄』, 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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