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스 앤 젠틀맨
감독 클로드 를르슈 (2002 / 프랑스, 영국)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빠뜨리샤 까스, 띠에리 레미떼, 알레산드라 마르티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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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전반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아릿했다. 슬픈 이야기가 아닌데 슬프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는 장면도 있고... 프랑스 감독이라 그런가, 그쪽 영화 특유의 느낌이 약간 있는 거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 프랑스 영화 같지도 않았고... 시간 교차하는 편집방식 때문에 어느 게 현실이고 어느 게 환상인지 때때로 헷갈렸지만 헷갈리면서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기억상실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꽤 적절한 편집 방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기꾼인 발렌틴 발렌틴(프랑스어로는 발랑탕 발랑탕, 제레미 아이언스)의 이야기와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인 제인(파트리샤 카스)의 이야기. 정열적인 사랑이야기라기보다는 저 사람들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한다. 사랑에 관한 것은...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같은 병을 앓는 동질감 속에서 발렌틴과 제인이 이야기를 나누며 친근해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발렌틴의 경우 기억상실증의 원인이 뇌에 있는 거였지만, 제인의 경우엔 심적인 괴로움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 마음을 치료함에 따라 증세도 치료된 거겟지. 기가막히게 운이 좋은 발렌틴은, 팔코네티 부인(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보석을 훔친 도둑으로 오해를 사서(그간 행적을 바탕으로) 모나코 돈으로 수술도 하고 병도 치료되고 좋았네요. 결국은 누명도 벗었고, 새로운 연인도 얻었고.

  발렌틴의 사기행각은 생각보다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 그 때문인지 노련미가 보였다. 어릴 때 기념품을 훔쳐내어 더 싼 값에 팔던 때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범죄는 단순하면서도 꽉 짜여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기범들이 으레 그레하듯 자기를 꾸미는 데도 뛰어나고, 그걸 받혀줄 만큼의 매력도 있었다. 불가리에서 일하던 프란시스(알렉산드라 마르티네즈)가 자기네 보석상을 턴 발렌틴에게 넘어간 것도 이해가 갔다. 다만 단기적인 사랑은 줘도 장기적인 안정은 정말 모르겠기 때문에, 프란시스가 티에리(띠에리 레미띠)에게 마음을 주게 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렌틴이 모나코에서 고난에 처했을 때 당황하는 프란시스의 모습은 짠하기도. 여튼 발렌틴은 죽을 위험에 놓인 사기꾼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사실 제인보다 고난의 깊이는 없어보였다. 이런 생각은 해봤다. 그가 기억상실증을 겪게 된 것은 뇌종양 탓이지만... 크게는 그런 일들을 하면서 죄책감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제인의 경우 어떻게 보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삼각관계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거고, 사실 제인은 그에 대해 크게 감정을 표출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내부에서 조용히 끓어오르고 있었나보다. 항상 먼 데 시선이 있는 제인은 제 마음까지 먼 곳에 두고 온 것 같았다. 간단하지만 그 슬픔의 깊이가 깊어 보였던 캐릭터.

  발렌틴과 제인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시간이 그리 길었다 말할 순 없지만 서로가 비슷한 종류의 상처와 고민을 떠안고 있었기에 잘된 거라고 본다. 처음의 어색했던 대화와는 달리, 고난의 길을 걸으며 그들은 단기간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서로가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사실을 털어놓아서 일수도 있겠고...

  결말이 산뜻하고 좋았다. 발렌틴이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들을 모두 복구하려 다니는 장면들도 좋았고... 제인이 다시 파리로 돌아온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바에서 노래하는 제인과 다시 만나게 되는 발렌틴이 좋았다. 혹시 얘네 서로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헤어져버린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었다.

  묘하게 감성적이면서 산뜻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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