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세트(전2권)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로렌 와이스버거 (문학동네, 2006년)
상세보기

  고백하건대 나는 칙 릿 소설을 아주 어릴 때부터 읽었다. 칙릿 소설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영화로 제작된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내가 중학교 때 읽은 소설이다. 마을문고에서 빌려보았던 이 소설의 진행 방식은 독특하면서도 그 이야기에 재미를 잃지 않았다. 소설은 2~30대 여성을 타겟으로 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이것이 내게도 먹혔다. 중학교 여자애란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 또한 성인 여성들이 가진 문화를 흉내내기 좋아했고 또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나는 내가 나이 먹은 어른의 삶을 알고 있고, 그들의 비밀이 내게는 비밀이 아니라는 만족감에 젖곤 했다. 그렇기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결코 나와 먼 자리에 있지 않은 소설이었다. 나는 항상 이런 가볍고도 여성들의 문화를 다룬 이야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쏟아지는 칙 릿 소설들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화려한 패션 산업을 다룬 것 때문인 듯하다. 나 또한 읽으면서 나와 동떨어진 패션지 사람들의 모습에 혹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중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악마 같은 상사 아래에서 일하게 된 사회 초년생과, 처음에는 징징대기만 하던 그녀가 성장해가는 모습에 사람들이 동화된 것 아닐까 싶다.

  미란다 프리스틀리는 런웨이의 식구들, 특히 앤드리아에게 있어서는 악마 같은 존재이다. 까다로운 취향과 독선적인 스타일은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는 최고의 실력을 가진 권력자. 이 까다로운 여자의 비서로, 심지어 관심도 없는 패션산업에서 버텨야만 하는 앤디는 보통 힘든 게 아닐 것이다. 미란다는 악마이다. 그런데 이 미란다를 미워하기 힘들다. 까다롭고 독선적이지만 그녀는 분명 실력을 가지고 있고, 인간미가 없어 보이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있어선 어느 정도의 인간미도 보여줬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짓밟는 방식은 좀 그렇지만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 까다로운 건 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이든 악마 같은 상사는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앤드리아에게서는 사회초년생 티가 난다. 앤드리아가 겪는 힘든 일들은 미란다의 탓도 일부는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녀 스스로 자초한 일들이다. 사회에서 학교 때와 같은 어설픔이 통할리가 없다. 그녀는 패션 잡지사에서 일하면서 모두가 입지 않은 옷을 입었었고, 일을 할 때 지켜야할 규칙들을 어기곤 했다. 그것과 미란다라는 악마가 합쳐져 더욱 큰 효과를 내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가 미란다의 독설을 견딜 수 없고, 패션 업계를 비웃고만 있을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런웨이에 들어오지 않는 편이 옳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성장을 위해 런웨이에 입사했다. 앤드리아의 말마따나 런웨이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여성들은 한 둘이 아니다. 그런 다른 여성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런 탁월한 기회를 손에 넣었다면 앤드리아는 불평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런웨이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 불평한다 한들, 그녀는 결국 자신의 욕망과 타협하여 런웨이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모든 가치가 달러로 통용되는 런웨이의 사회는 어찌 보면 냉혹하다. 선입자인 에밀리는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인물이다. 다소 귀여운 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여성이다. 그런 에밀리가 앤드리아의 등장으로 뒤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은 런웨이 내의 사회가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것으로 굴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앤드리아는 이러한 런웨이의 냉혹한 사회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 안에 제대로 자리 잡게 되었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열심이 된다. 런웨이에서 일한다는 것이 힘들고 진저리쳐지는 것과는 별개로, 런웨이에서 일한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고 그것을 자신의 명함에 박아 넣기를 좋아하는 인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평범했던 인물이 어떤 사회에 적응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치졸하고 짜증나는 인물이 되어버리는 지 앤드리아를 통해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앤드리아의 욕망실현은 처음에 런웨이의 직장을 자신이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기구원에서 멀어져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는 런웨이에서 궤도에 올랐으며, 자신의 일에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이것이 자기구원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런웨이를 통해 자신이 하고자하는 일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자신 또한 그 일에 제법 만족했었다. 마음먹은 대로만 풀리면 그게 어떻게 인생이겠는가. 그녀의 꿈이 완전히 좌절되지 않았고, 런웨이 또한 그 과정이었으며,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감을 느꼈었던 것 자체가 나는 앤드리아의 욕망이 크게 좌절되지 않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결말 부분에 앤드리아가 미란다에게 쏘아대고 런웨이를 떠났던 것이, 오히려 자아실현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앤드리아의 욕망이 아무리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한들, 그것을 벗어던지는 일을 내가 완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앤드리아가 느꼈던 런웨이에서의 회의감을 벗어던지고 정말 자신이 나아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앤드리아의 벗어남을 자기구원의 실현으로 긍정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앤드리아가 런웨이에서 멋지게 성공한 뒤에 그것을 벗어던졌다면 그게 더 멋있고 긍정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앤드리아가 잃었던 것들이 가볍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앤드리아가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이 매우 컸고, 그 자신의 이상과 떨어져있었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그러나 앤드리아가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시점이 아쉬웠다. 어느 사회의 일원이 되던 간에 그 곳에는 갈등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내게있어서 앤드리아는 그 조율을 중간에 포기해버린 존재로 느껴져 아직까지도 안타까운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

  솔까 과제였어서 좋게 쓴거고 영화가 천배쯤 낫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