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반전
감독 바벳 슈로더 (1990 / 미국)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글렌 클로즈, 프레데릭 노이먼, 펠리시티 허프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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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레미 아이언스 필모그래피 보니까 이걸로 상 많이 받았길래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네이버에서 간략한 스토리만 보고는 그냥 평범한 중년부부의 질린 일상을 담은 영환 줄 알았었는데 처음부터 그 예상을 바로 깨주시는 전개를 보여주었다. 오히려 스릴러라고 해야하나, 이리저리 머리 쓰게 하는 영화.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주고 답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여러 모로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았다.

  서니 본 뷸러(글렌 클로즈)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시점에서 이미 서니가 식물인간이 된 채이다. 아내를 살해하려 시도했다는 혐의로 1차 공판에서 30년형을 선고받은 서니의 남편, 클라우스 본 뷸러(제레미 아이언스)가 항소를 하기 위해 하버드 법학대학의 교수 알랭(론 실버)를 고용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클라우스와 알랭이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과 함께 일어났던 사건의 이야기를 듣거나 해서 재구성 된 장면들이 나타나는데 여타 수사물을 다룬 미국 드라마에서 많이 보여졌던 방식이기도 해서 그건 익숙한 편이었다. (저스티스가 생각났다. 변호인들의 이야기인데 고객의 입에서 나온 사실로 재현장면을 보여준다. 마지막에는 진짜 진실을 보여주고...) 다만 이러한 사건의 재현 장면들이 한 30 정도는 타인의 입에서 나온 증언장면의 구성이라 한다면, 나머지 70 정도는 클라우스의 입에서 나온 사실을 재현한 장면들이기 때문에 다소 클라우스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영화 끝까지 진짜 상황은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순전히 관객들이 자신의 머리 속에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물론 그것이 진실이라는 법도 없다. 클라우스의 증언을 듣는 알랭 또한 신뢰와 의심을 널뛰기하며 그를 판단해가는데 이것이 보는 관객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알랭이 인맥과 학생들을 동원해서 단시간 내에 항소를 준비하는 과정도 흥미진진 한 편이었다. 아마도 옛 연인이었던 변호사 사라(아나벨라 시오라)까지 끌어들여서 하는 일인지라 처음에는 여유가 있다가도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하고, 이런 저런 사건도 생긴다. 뭐 학생들이 따로 눈에 띄는 일은 별로 없는데 하나 있다면 처음에 변호를 돕는 일을 거부하겠다고 했던 학생 미니(펠리시티 허프만) 정도일까... 이런 미니가 나중에 가면 어떤 태도로 변하게 되는 지 보면 조금 웃긴다.

  클라우스라는 캐릭터가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캐릭터였기에 흥미가 솟았다. 처음에는 세상의 시선처럼 나쁜 사람으로 보여지다가도 그가 설명해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은 동정심도 솟고, 때때로는 한없이 다정해 보이며, 어떨 때에는 비열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다. 서니의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것, 바람을 피우는 관계 등을 스스럼없이 인정하는 모습이나 아내의 상황을 두고 연극같다고 말하는 점 등은 인간성이 결여되어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무표정한 얼굴로, 인슐린에 관한 농담(서니의 혈액에서 과다한 인슐린이 나타났다)을 한다던가, 알랭이 원하는 식의 감정 표현을 할 줄 모른다고 인정하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한없이 인간적이다. (또 미드 생각이 나는데, 일전에 보스턴 리걸에서 부자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여자가 나온 적이 있었다. 바람을 피우는 데다가 냉혈하고 감정 표현도 못하는 여자였고 그것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잔뜩 샀었다. 비슷하네...)

  완연히 클라우스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듯 하며 클라우스가 무죄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들다가 마지막에는 서니의 속옷차림을 두고 두 가지 상황을 예상 할 수 있게 된다. 처음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났을때 서니가 했던 말대로 "나도 좋고, 당신도 좋은" 상황을 클라우스가 만들었던가, 아니면 클라우스의 외도의 증거를 직접 목격하고 실의에 빠진 서니가 자살을 택했던가. 사라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하게, 그리고 증거대로 생각하기에는 클라우스가 죽였다는 쪽이 훨씬 말이 된다. 그러나 정말로 단순하고 억지스럽더라도 서니가 자살을 택했다는 것이, 알랭의 말대로 '단순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른다. 클라우스 본 뷸러만이 사실을 알 뿐이다.

  마지막에 약국에 간 클라우스의 모습에서, 약사에게 인슐린을 달라고 하는 모습에선 살짝 소름이 돋기도 했다. 굳어진 약사의 얼굴을 보며 "농담이에요."라고 말하는 클라우스의 모습은 장난스럽기도 하고, 소름이 돋기도 한다. 이전에 이미 몇 번 했던 농담이었다는 점에서 쉬이 넘어갈 수 있기도 하지만... 묘하게 껄쩍지근한 구석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화를 다 보고 위키피디아를 뒤져봤는데 이게 완전히 실화라서 이름까지 다 진짜더라. 서니 본 뷸러는 식물인간 상태로 살다가 2008년에 죽었다고 한다. 그 오랜 시간동안 식물인간인 채였다니 불쌍하다. 클라우스 본 뷸러는 지금 영국에서 예술작품이랑 영화 리뷰하면서 산다고. 재미있는 건, 클라우스가 서니의 유산을 딸 코시마를 위해 포기했다는 점. 서니의 어머니, 곧 장모가 분노한 나머지 유산 상속인 목록에서 코시마를 제외하자 코시마를 다시 상속인으로 만들기 위해 칠천오백만 달러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돈 때문에 서니를 살해했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 같기도 하고. 아 코시마가 상속받을 돈이 더 많으려나. 뭐 어차피 내 생각일 뿐이다.

  상을 휩쓸었던 제레미 아이언스의 연기는 아주 좋았다. 예민한 서니의 남편으로서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모습과 서니가 죽은 뒤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냉혈한의 모습... 여러가지 모습이 뒤섞였는데 우리로선 심중을 알 수 없는 클라우스라는 인물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준 것 같은 연기였다. 글렌 클로즈의 연기는 히스테리컬하고 예민한, 동시에 나약하기도 한 그런 모습들이 잘 나타나서 좋았음. 론 실버 역할이야 약간은 전형적이었는데, 클라우스를 신뢰하게 되며 보여지는 미묘한 변화들이 좋았다.

  재미있었다. 처음부터 혼을 쏙 빼놓았고, 진행 방식이나 스토리 모두 흥미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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