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지
감독 루이 말 (1992 / 프랑스, 영국)
출연 줄리엣 비노쉬, 제레미 아이언스, 루퍼트 그레이브즈, 미란다 리차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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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때 본 탓에 대충 내용을 다 알고 있었고, 끝나고 나서의 그 불쾌함도 알고 있어서 다시 보기 힘들었다. 내가 제레미 아이언스 아니면 이 영화 다시 볼 생각도 안했겠지. 아무튼 보려고 마음먹고 정보를 찾아보다 보니(어차피 내용을 다 아니까 스포일러 당할 것도 없었고) 이 영화가 가장 우스운 정사 장면이 담긴 영화 2위로 뽑힌 거다. 1위는 쇼걸인데 안봐서 모르겠고, 다 본 다음에 느낀 건... 이게 왜 1위가 아니지.
 
  장난이 아니라 진짜 세상에서 가장 웃긴 정사신이었다. 총 다섯 번의 정사 장면이 나오는 데 안 웃긴 건 마지막 거 한 개 정도...? 나머진 진짜 보다가 내 머리가 꽝꽝 얼어붙을만큼 우스웠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노력하고 진지하게 연기하긴 하는데,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가 너무 통나무같아서 서로 짝이 안맞는다. 장면이 뭔가 작위적이기 짝이 없어서... 정말 일말의 에로티시즘도 느껴지지 않아서 곤란했을 정도. 고 속에 담겨있는 감정이야 어렴풋이 알겠다면 보여지는게 이렇게 우스워서야 잘 전해지지 않는다고...

  내용 자체도 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타입인지라 보는 내내 힘들었다. 한 마디로 사랑에 빠지고 눈이 멀어서 자기 인생 뿐 아니라 남의 인생까지 말아먹는 이야기. 애당초 아들의 연인과 바람을 피우는 남자가 행복해질 수 있을 리 없지만, 이 이야기의 끝이 더 찝찝한 건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너무 찝찝하게도 이 모든 죄의 대가는 스티븐(제레미 아이언스)만이 받고, 안나(줄리엣 비노쉬)는 유유자적하게 그 모든 비극의 틀안에서 빠져나갔다. 스티븐은 그만한 대가를 치뤘지만 안나가 받은 죄가 없어서 아쉽다. 엉뚱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잔뜩 간 것도 그렇고 말이다.

  둘의 사랑에 관해서도, 스티븐 쪽은 진실성이 있어보이지만 안나 쪽은 일말의 죄책감뿐 아니라 사랑까지 없어보인다. 묘하게 정상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캐릭터라는 느낌이 가득했다. 마틴(루퍼트 그레이브즈) 뿐 아니라 스티븐을 사랑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이 캐릭터에겐 열정이랄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비뚤어진 사고방식과 남을 파괴하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같은 표현 밖에는. 마틴이 죽었을 때 알몸으로 계단을 뛰어내려가 마틴을 끌어안고 울던 스티븐과 달리, 안나는 유유자적하게 그 자리를 떠버리는데 이 장면은 소름끼쳤다.

  오빠와 나? 우린 늘 함께였죠. 세계 각국을 다니며 외국어를 배웠어요. 오빠와 난 점점 가까워졌어요. 우리에겐 우리 둘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오빠를 사랑했죠. 오빠는 제가 자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절 놓아주려 하지 않았고 소유하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전 그 어떤 소유욕도 두려워하게 됐어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을요.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났었죠. 오빠가 저 때문에 자살했어요. 전 결정을 해야 했어요. 저의 파멸을 막아야 했거든요. 전 이겨냈어요.
 이걸 잊지 마세요. 상처 받은 사람들은 위험해요. 그들은 생존하는 법을 알죠.

  영화 중반에 안나가 자살한 오빠에 관해 털어놓는 장면이다. 이런 오빠에 관한 이야기는 후에도 몇 번 더 드러나는데, 글쎄... 이런 설명을 듣고 안나가 왜 저렇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너의 생존하는 방법이라는게 그거냐고 묻고 싶었다. 설득력이 없는 캐릭터 배경이라서 현재의 행동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나 보다.

  그냥 볼만한 건 제레미 아이언스와 미란다 리차드슨의 연기 정도. 스티븐이 한참 안나에게 빠져 있을 때의 그 초조함이나 마음 속에서 찐득하니 눌어붙어있는 열망, 욕구의 표현등이 섬세하게 드러나서 그건 좋았다. 예를 들명 벨기에 출장지에서 파리로 무작정 야간열차를 타고 가, 호텔에 있는 안나에게 전화하던 장면. 수화기를 매만지고 수화기가 안나인 양 가만히 얼굴에 대는 조심스러운 모습이라던가, 파리 호텔의 건너편에 있는 마틴과 안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침대에서 온 몸을 뉘인 채 흐느끼는 장면 같은 것. 전반적으로 연기가 다 좋았지만서도 이런 안절부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들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미란다 리차드슨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부근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마틴이 죽고 난 후 잉그리드(미란다 리차드슨)가 스티븐에게 "왜 자살하지 않았느냐"며 오열하는 부분이 그랬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로 자식을 잃은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나체인 체로 "날 사랑한 적이 있냐"고 묻는 장면. 전자쪽은 완전히 폭발하는 장면이라 아 잘한다 싶긴했는데, 후자쪽은 오히려 차분하고 냉정하게 식은 느낌인데도 연기를 잘 한다는게 확 와닿았다.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는 말하고 싶지 않아... 캐릭터 탓이겠거니...

  시간이 지나서 생각하면 괜찮은 영화. 그런데 막상 볼 때는 그런 생각이 별로 안들었던게 신기했다. 영화의 분위기나 연기를 보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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