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감독 리들리 스콧 (1982 / 미국)
출연 룻거 하우어,해리슨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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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인지 요새 SF/판타지 계열을 많이 보고 읽는 느낌이 나네. 어 별로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포스터는 일부러 이거 넣어봄. 옛 향기가 물씬 나네요. 1982년에 개봉했다가 1993년에서 디렉터 컷으로 다시 재개봉한 작품. 미래를 다루고 있는 옛 영화들에선 그 특유의 촌스러움이 있는데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그게 엄청 덜했다. 어떤 부분에선 이게 최근의 영화들보다도 더 미래상황을 멋지게 그려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설정 말고 화면의 미학에서 하는 말이다.) 특히 도심의 모습을 비춰줄 때에는 되게 현실적인 미래상 같았다.

  SF명작이라길래 봤다. 보면서 아 이거 너무 우울해서 이런 게 흥행했었나 싶었는데, 흥행한 건 아니고 SF팬들 사이에서 전설의 레전드ㅋ가 되고 그게 전해지면서 고전 걸작이 된 거더라. 그럼 그렇지... 막 액션영화처럼 화려한 것도 아니고, 침침하고 습윤한 분위기 속에서 우울하고, 운명적인(그래서 끝이 보이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거기에 전개속도도 다른 비슷한 류의 영화들에 비해 좀 느리고 스토리에 큰 기복이 없는 편. 난 설정 즐기느라 느릿느릿 보면서 나름 재미있었는데 대중의 취향은 아닐 듯? 그래도 명작으로 취급받는 이유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보기를 추천.

  21세기초 타이렐사(The Tyrell Corporation)는 리플리컨트(Replicants: 복제인간)라고 알려진 사실상 인간과 동일한 진보적 넥서스 단계(Nexus phase)의 로봇 진화(Robot Evolution)를 이뤘다. 이중 넥서스 6(Nexus 6 Replicants)은 힘(strength)과 민첩성(agility)에 있어선 그들의 창조주인 유전공학자들(the genetic engineers)을 능가했고 지능(inteligence)에 있어선 최소한 그들과 대등했다. 복제인간들은 다른 행성(Off-world)들의 식민지화에 이용된 노예였는데, 어느 넥서스 6 전투팀(a nexus 6 combat team)이 식민 행성에서 유혈 폭동을 일으키자 지구로 잠입한 복제 인간들에겐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특수경찰대(special police squads)인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Units)는 복제인간들을 사살하란 임무를 하달 받는다. 그 임무는 사형 집행(execution)이 아니라 해고(retirement)라고 불리웠다.

  이게 영화 시작 때 나오는 기본 바탕이 되는 설정. 복제인간 스토리는 이미 다른 곳에서도 많이 봤지만, 블레이드 러너는 좀 달랐던 게, 여기서는 복제인간들이 가진 수명의 한계성이 비극을 강조한다. 겨우 4년의 수명을 가진 복제인간.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같고, 인간과 같은 (아니 더 뛰어난) 지능을 갖고, 이제는 감정까지 가지게 된 복제인간들을 인간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질문이 꽉꽉 이어지는 테스트 외에 그들을 가려낼 방법이 없다면, 인간과 복제인간을 나누는 기준은 어디에 남아있으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다움'은 무엇으로 가려질 수 있는가. 이런 철학적인 물음을 더 깊게 할 수 있는거다. 단순히 복제인간에 대한 것 뿐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특질이 뭐가 있나 생각해보게 한다.

  블레이드 러너인 형사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행성에서 탈출한 리플리컨트 넷을 잡는 게 스토리의 기본 뼈대. 거기에 복제인간을 만드는 회사인 타이렐 사에서 만난, 자신이 복제인간인줄도 몰랐던 복제인간 레이첼(숀 영)과의 관계가 추가되면 이야기가 끝난다. 릭 데커드의 추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긴 하지만, 보면 볼수록 이 스토리의 주인공들은 블레이드 러너가 아닌 복제인간들이다. 캐릭터만봐도 데커드는 좀 심심하다.

  넥서스 6 전투팀 넷은 각자 강한 개성을 보여준다. 지휘자 격인 로이 베티(룻거 하우어), 전투용 레온(브라이언 제임스), 살인 훈련을 받은 조라(조안나 캐시디), 위안부용 프리스(다릴 한나). 모두가 도망자이며, 한정된 삶을 어떻게든 늘여보려 노력하고 있기에 그 모습이 꽤 처절하다. 그들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가 더욱 그들을 비참하게 만든다. 목숨을 늘이려 타이렐을 만나려던 그들이 추적을 거듭해 유전과학자 세바스찬(윌리엄 샌더슨)을 만났을 때, 세바스찬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뭔가 보여줘." 라고 한다. 그들은 인간들과 다를 게 없다. 따라서 보여줄 것도 없다. 조라는 세바스찬에게 농담처럼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들은 생각하고, 느끼고, 숨쉰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있다. 마치 인간처럼. 로이 베티를 만나게 된 타이렐 회장(조 터켈)의 반응은 한 술 더 떴다. 그들을 인간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만든 뛰어난 창조물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으니까. 그에게 아버지라 말하던 로이베티가 결국 그를 잔인하게 살해할 때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존속살해의 느낌을 주던 이 장면은 잔인함보다는 오히려 슬픔이 느껴졌다.

  볼수록 데커드가 주인공이 아니었던 것 같았던 게, 결국 다른 넥서스 6를 모두 '해고'하고 로이 베티만 남게 되었을 때, 로이 베티가 보여주는 감정의 깊이가 데커드가 보여주는 것들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공포속에 살아본 적이 있느냐 묻는, 죽은 프리드를 애틋하게 끌어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데커드는 그저 무뚝뚝한 표정만 지을 뿐이니까... 게다가 그렇게 데커드를 쫓던 로이 베티가 그를 살려주고, 그 앞에서 정말이지 낭만적인 모습으로 죽어갈 때 그는 이미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참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레이첼은 자신이 복제인간인지도 몰랐던 복제인간. 다른 복제인간들보다 더 인간에 감화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데커드와 함께하게 되는 것만 보아도... 여튼 데커드 쪽이 마음을 돌려먹었으니 같이 도망다니겠지. 데커드는 원래부터 좀 복제인간을 죽이는 데 회의감이 있었던 것 같은데(죽인 후의 태도를 봐도) 로이 베티의 죽음이 그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 듯 하다.

  감독이 개봉한지 십년도 넘어서 사실 데커드도 복제인간이었다. 라고 말했다더라. 하지만 뭐 꼭 그렇게 안믿어도 상관은 없을 듯. 보면서 데커드가 복제인간아냐? 이런 생각을 했기에 뜬금없진 않았다만, 꼭 그렇게 믿을 필요도 없는 느낌? 복선을 깔긴 깔았는데 그걸 확실히 드러내 준 것도 아니어서, 뭐 딱히 보면서 복제인간이구나! 하고 확신케 한 장면이 없다. 그리고 이런 모호함이 오히려 이 영화 속을 꿰뚫는 주제와 비슷해서... 인간과 복제인간을 구분케하는 특질은 무엇인가. 데커드가 복제인간이라면, 어떻게 그걸 구분해낼 수 있는가.

  설정이 심오하고 재미났다.


킹덤 오브 헤븐
감독 리들리 스콧 (2005 / 독일, 스페인, 영국, 미국)
출연 올랜도 블룸, 에바 그린, 리암 니슨, 에드워드 노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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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길어서 보느라 힘들었지만 오 다 보고나니 꽤 만족했다. 극장판에 비해 감독판이 49분 더 길대서 극장판으로 봐야했는데, 이거 극장판으로 본 사람들이 욕한 이유를 알겠더라. 이건 완벽히 감독판으로 봐야 하는 영화였다. 그래야 모든 서사구조가 눈에 들어 오겠더라. 아무튼 엄청나게 긴 탓에 내가 영화를 처음 보려던 목적이었던 제레미는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 나와...ㅎㅎ

  애초에 사극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편인데, 요새 나오는 역사물들은 거의 팩션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사건 일면만 툭툭 따오는 거라고 생각해 버려서 그런지 완전히 바뀌는 것만 아니라면, 실제 역사와 어긋나도 크게 거슬려하지 않는다. 애초에 역사에 그렇게 관심 있는 타입도 아니기도 하고. 킹덤 오브 헤븐도 역사물이라고 하기엔 꽤 많은 것들이 실제 역사와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발리앙(올랜도 블룸)이 이십대의(!) 평민 대장장이 출신으로 되어있다던가, 시빌라(에바 그린)가 발리앙을 좋아한다던가... 또 뭐가 있지. 아무튼 요런 설정들은 현실과 다르긴 한데, 그걸 빼고 나면 이 전쟁에 대한 시선이 생각보단 객관적으로 그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과장된 영웅주의는 접어두고 기독교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 발리앙이라는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오히려 그 기독교적인 신념이란 것, 전쟁에 앞선 사람들의 마음 속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여튼 재미있고 말이 되게 이야기를 만들어 놨다는 소리다. 리들리 스콧은 '글래디에이터' 볼 때도 느꼈는데 이런식으로 역사 서사시를 헐리웃 판으로 잘 만드는 것 같다. 이번에는 대놓고 영화 사이사이에 중간, 막간 이런 부분을 넣은 점이 흥미로웠다. 완급조절은 잘 된편일까... 상대적으로 화려한 전쟁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득달같은 로맨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보는 내내 아 이거 재밌군,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십자군 3차 전쟁 직전의 이야기인데 사실 요 때 예수살렘이 살라딘의 손 안에 넘어갔을때, 주인공은 이벨린의 발리앙보다는 승리한 자인 살라딘(가산 마소드) 쪽이 헐리웃 스타일에 더 맞았다고 생각한다. 근데 이 영화에서는 남아서 예루살렘을 지키고 지키다 평화롭게 협상을 맺어(역사에선 어쨌건간에) 사람들을 구제했던 이벨린의 발리앙을 내세운단 말이다. 이 주인공 설정에서부터가 이 영화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게 아닐까.

  기사 고프리(리암 니슨)의 사생아로서 원래는 평민이었던 발리앙은 이벨린의 영주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게 되는데, 처음에는 죽은 아내(나탈리 콕스)의 천국행을 기원하고 동생(마이클 쉰)을 죽인 자신의 죄를 씻으려 한 것이지만... 막상 예루살렘에 가 보고 나니 별게 없단 말이다? 자기가 바라던 신은 모습은 커녕 목소리도 안 보이고 옆에서 아버지와 함께하던 자선단체 회원(데이빗 듈리스)이 아무리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해 좋게 설파해도 마음은 냉랭하기만 할 뿐인데 그런 거 치곤 자기 할 일을 잘 해나간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볼드윈 4세(에드워드 노튼)의 충실한 신하인 티베리아스(제레미 아이언스)와 만나고 나병에 걸린 볼드윈 4세를 받들며 자신의 영지인 이벨린을 개척해나가는 일들 말이다. 여기엔 다른 십자군과 같은 종교적 여지가 전혀 없어보인다. 요런 덤덤한 영웅이라는 설정이 오히려 신선했다.

  볼드윈 4세는 살라딘과 적절한 수준의 평화를 유지해나가는 왕인데 이거에 반발하는 부하들이 당연히 있고... 그게 기 드 뤼시냥(마튼 초카스)과 샤티용의 레이날드(브렌든 글리슨) 같은 애들. 아, 영화답게도 이 반대편인 기 드 뤼시냥의 아내이며 지금 왕이 죽으면 자기 아들을 통해 섭정을 할 여자가 시빌라란 말이다. 그런데 이 아들도 삼촌과 같이 나병에 걸려있다는걸 발견하고, 시빌라는 그런 아들을 차마 두고보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죽인다. 그리고 나서 왕위는 자연스레 자신에게서 기 드 뤼시냥에게로. (실제로 시빌라는 발리앙에게 반하지도 않았고 당연한 수순으로 기 드 리시냥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 왕위 넘어가는 과정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게 실제 역사와 다른건 차치하고, 시빌라의 마음 속이 그렇게 이해되는 편은 아니었어서 그랬다. 발리앙을 그렇게 사랑한다면서도 상황 판단 제대로 못하고 배신감 느꼈다고만 생각하는게... 그래서 나라 쫄딱 말아먹기 직전까지 가게 만드는 게 영. 뭐 그거 때문에 영화 진행되는거긴 하다만 아들 죽이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그 외의 스토리 진행이나 캐릭터 묘사는 참 좋았음.

  종교세계를 해탈한 듯한 발리앙의 묘사도 그랬지만, 인심 후했던 승리자 살라딘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맡은 배우 가산 마소드는 이슬람교 연구하는 사람이기도 하다던데, 여로모로 카리스마가 넘쳤다. 예루살렘이 무엇이냐고 묻는 발리앙의 말에,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라고 말하고 연이어 하지만 곧 전부이지(everything) 라고 하는 모습은 이 성지가 가지고 있는 상징을 보여주는 듯 해 좋았다. 살라딘 주변 인물로 초반부에 등장하기도 했던 이마드(알렉산더 시디그)는 능글맞은 면이 있으면서도 진중한 면모가 돋보이던 캐릭터. 병마에 시달리며 얼굴이라고는 눈밖에 나오지 않았던 볼드윈 4세는 종교의 광기와 현실 사이에서 중도를 찾으려고 하는 거 같아서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었다.

  음... 기대를 하나도 안하고 봐서 그런가 재미 있었는데, 남들이 봐도 재미있을 거 같다. 전쟁씬을 보려는 게 아니라 서사를 보기 위해 보는 영화였고, 그 역할을 잘 해낸 것 같다. 배우들의 연기도 참 좋았다. 다들 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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