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01 - 거미 여인의 키스 / 마누엘 푸익



거미 여인의 키스
감독 헥토르 바벤코 (1985 / 브라질, 미국)
출연 소냐 브라가, 윌리엄 허트, 라울 줄리아, 데니스 더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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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봐야지 하고 생각한 지 반년만에 보는 듯. 굉장히 고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85년작이면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화질이 내가 봤던 다른 고전영화들보다도 별로여서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당연히 원작은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

  나는 책이 더 낫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영화가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다. 책의 길고 함축적인 내용들이 영화 안에 다 밀어넣어지진 못했다는 느낌이어서 그랬던 것 뿐이고... 책을 본 사람도 영화만 본 사람도 괜찮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몰리나(윌리엄 허트)의 영화 이야기에서는, 몰리나와 발렌틴(라울 줄리아)과 관계된 이야기들을 골라 잘 담아낸 것 같고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몰리나의 말에 따라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를 보는 기분으로 볼 수도 있었다. 감옥 안에서 둘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변화해 가는지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거의 없지만 보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발렌틴의 태도 변화가 많이 느껴졌다. 뒤로 갈수록 몰리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진다.

  캐스팅이 잘 된것 같다. 게이인 몰리나 역할의 윌리엄 허트는 커다란 덩치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섬세한 감정 표현을잘 해줘서 좋았다. 소심하고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몰리나 역할을 너무 잘 해줬다. 아, 몰랐는데 윌리엄 허트 예전엔 붉은 머리였더라. 가늘가늘해 보여서 그 머릿결마저도 몰리나 같았다. 발렌틴 역의 라울 줄리아도 정치범이면서도 동성애에서는 관대하지 못한 마초의 느낌을 잘 살렸다. 처음과 끝의 느낌이 너무 달라서 신기했다. 이 분이 아담스 패밀리의 그 분이라니 믿을 수 가 없다(...)

  내용에 관해선 이미 책을 읽고 느꼈던 것들이 많아서 그런지 더 할 말이 없다. 괜찮은 영화였다.

거미 여인의 키스(세계문학전집 37)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마누엘 푸익 (민음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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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후...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냐. 마지막에 울었다. 짧게 전달되는 사실 한 줄에 숨이 턱 막혔다. 몰리나, 몰리나... 아름다운 몰리나. 그리고 발렌틴. 그들이 감옥 안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는. 영화는, 사상은, 감정은. 뭐라 정리할 수 없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몰리나밖에 떠오르지 않아. 죽겠다. 너무너무 슬퍼. 1부 끝나고 나서 몰리나에게 느꼈던 감정들은 2부가 끝나고 나서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래 몰리나에게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랬지만. 미치겠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영화들이 매력적이다. 몰리나의 시각에서 재창작되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훨씬 더 감성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캣피플과 같은 스릴러조차 몰리나에게 전달받을 때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치의 홍보 영화조차 몰리나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전달된다. 나는 몰리나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몇 몇 이야기는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고, 몇 몇 이야기는 본래 있는 영화라고 한다. 많이 각색 되었지만... 여섯 종류의 이야기를 볼 때 각각의 주인공들에게 발렌틴과 몰리나를 넣어서 볼 수 있다.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빠져버린 것도 볼 수 있다. 나치 선전물속의 레니는 아무리 봐도 몰리나다. 매혹의 오두막에 나오는 못생긴 하녀도 몰리나이다. 마지막 싸구려 멜로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그녀도 몰리나이다. <내가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답니다…… 내 마음을 빼앗아 갈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멀리 있으나…… 가까이 있으나 항상 당신을 그립니다……> 모두가 다른 이야기인데, 모두가 몰리나와 발렌틴의 이야기야. 본 바탕이 확실한 영화는 세 개. 캣피플, 매혹의 오두막, 좀비와 함께. 그렇지만 보지 않아도 상관 없다.

  초반엔 동성애자인 몰리나(내가 보기엔 트랜스젠더 같기도 한데, 흠.)를 무시하던 발렌틴이 점점 변화하는 과정이 경이롭다. 물론 몰리나의 엄청난 희생정신, 부족한 자존감 따위가 발렌틴의 비참한 상황과 맞물려 벌어진 일이지만... 정말 꽉 막혀있던 발렌틴이 변화하는건. 그가 대화를 통해 마음을 열어서이기도 하지만, 몰리나의 정신이 너무나 대단해서. 남자를 최고로 알고, 남자이면서도 자신을 여자로 생각해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몰리나. 그런 몰리나를 이제는 그러지 말라 설득하는 발렌틴. 둘이 섹스하는 장면도 그렇거니와, 마지막에 몰리나의 부탁으로 키스하는 장면은.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한 채로 헤어나오질 못한다. 몰리나는 언젠가부터 가브리엘보다는 발렌틴을 위주로 생각하고 있었지... 그가 말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몰리나와 가브리엘이 아니라, 몰리나와 발렌틴이었어. 마지막 장면, 고문을 당해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발렌틴이 보는 환상들은. 그가 몰리나에게 가지는 죄책감의 크기는. 거미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은. 아아 몰리나...

  발렌틴이라는 게릴라와 몰리나라는 동성애자를 통해 그 시절의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 그런 것도 이해가 안 되는 바 아니지만. 나는 왜 그런 현실보다 발렌틴과 몰리나가 교감하는 감정들에게 시선이 가는 것일까. 좋았다. 굉장히.

「내가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좀 내버려둬 달라는 말이야. 내가 더 이상 현실을 비관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미치기를 원해? 하긴 난 이미 미친년이니까」
「그래, 솔직히 말하면, 네 말도 맞아. 여기서 네가 미칠 수도있어. 하지만 그것은 네가 현실을 비관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네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지금 네가 하는 행동처럼 말이야. 네가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만 생각하는 네 태도는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단 말이야」
「왜 그렇지? 그렇지 않아」
「그렇게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마약처럼 해로운 거야. 내 말 좀 들어봐. 네 현실, 바로 네 현실은 단지 이 감옥만이 아니야. 이 감옥을 뛰어넘어 생각해 봐. 내 말 알겠지? 그래서 난 책을 읽고 하루 종일 공부하는 거야」

「그래. 그리고 나도 살아 있어…… 그런데 내 삶은 언제부터 시작하지? 언제가 되어야 내가 내 것을 만질 수 있고, 내 것을 가질 수 있지?」

「행복하다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면 더욱 고통스럽지 않을까?」
「몰리나, 한 가지 명심해 두어야 할 게 있어. 사람의 일생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지만, 모두 일시적인 것이야. 영원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그래, 맞아. 하지만 조금 더 오래가는 것은 있어」
「우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 좋은 일이 일어나면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하기는 쉬워. 하지만 그걸 진정으로 느낀다는 것은 다른 문제야」
「그러면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자기 자신을 납득시켜야 되는 거야」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옳아매는……」
「아주 멋진 말인데! 그 말, 정말 맘에 들어」
「……」
「내 생각 많이 할거야?」
「너한테 많은 것을 배웠어…… 몰리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난 멍청인데……」
「행복하게 지내길 빌어. 그리고 나를 좋은 놈으로 기억해 주길 바래. 나도 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나한테 뭘 배웠지?」
「설명하기 아주 어려운 것이야. 하지만 나한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주었어.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네 손은 항상 따뜻해, 발렌틴」
「네 손은 항상 차고」
「발렌틴, 너한테 한 가지 약속할게. 널 떠올릴 때마다, 난 행복할 거야. 네가 나한테 가르친 대로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해 줘…… 다른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 않도록 행동하고, 아무도 널 함부로 다루게 하지 말고, 착취당하지도 말아. 그 누구도 사람을 착취할 권리는 없어. 한 얘기 또 해서 미안해. 전에 한번 말했는데, 넌 그 말을 별로 달갑게 여기질 않았어」
「……」
「몰리나, 남한테 무시당하면서 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그래, 약속할게」

마르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이 말만은 당신한테 할 수 없었어, 당신이 그것을 물어볼지 몰라 두려웠고, 그러면 당신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았어, <아니에요, 사랑하는 발렌틴,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이 꿈은 짧지만 행복하니까요.>

마누엘 푸익, 『거미 여인의 키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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