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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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보니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던 소설. 이 책을 읽는 중간에 꼬마 니콜라 5권 세트와, 고우영 삼국지 10권 세트를 읽었다(...) 아무튼 이 소설은 서점에서 우연히 보고 집에와서 바로 샀었는데, 내가 적나라한 성애 묘사 장면 때문에 샀던건지 뭔지(하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알다시피 이 묘사는 전혀 야하지 않다, 그냥 적나라할 뿐.) 그냥 홀리듯 샀던 걸로 기억한다.

  중간 정도까지 읽었었을 때도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지, 이 소설의 주제는 뭔가 한참 생각했는데 결말까지 가서야 겨우겨우 생각할 여지가 생긴 것 같다. 결말이 생각치 못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꽤 놀랐고, 처음 소설이 왜 미셸 제르진스키를 다룬다 했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요컨대 소설 안의 '현재'를 만들어 낸 선구적인 인물이라 이거지. 아무튼 읽는 도중에는 이거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결말에 놀랐던 것 같다. 중간 중간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무지막지하게 나오는데 그 이유는 이거겠지.... 읽을땐 몰라서 이게 뭔가 했어.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 일단 브뤼노와 미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철학적인 질문에 와닿게 된다. 이 완벽하게 다른 형제는 같은 뱃속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완벽하게 다른 사고와 성향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교류하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

  브뤼노는 혐오스러운 종류의 인간이었고, 그 사고 자체는 동의할 만한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가 그런 생각을 머리에 품게 된 동기만큼은 이해가 갔기에 미운 인간은 아니었다. 크리스티안을 만난 이후 둘이 같이 긍정적으로 변하나 했었는데, 결말이 그리 되어 아쉬웠다. 크리스티안은 정말 좋은 여자였는데. 브뤼노도 그걸 알기에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간 것이겠지. 정신병원 이후의 생활이 아무런 문제 없이 '행복하기만 해'서 소름이 돋았다. '멋진 신세계'의 소마를 먹은 사람들 같아서. 으응, 역시 이런 건 싫어. 차라리 혐오스러운 브뤼노 쪽이 낫다.

  미셸은 어릴 때부터 유지했던 그 무덤덤한 성격 탓에 성장 이후의 일들은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아나벨과 사십이 되어 재회한 뒤의 움직임은 꽤 흥미로웠다. 그렇게 감정에 무감각한 사내가 실제로 감정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느낀 것 같아서 말이다. 미셸은 아나벨을 사랑하진 않았지만 아나벨을 통해 사랑을 배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그저 두려움의 표정을 띄우던 그가, 자기도 모르는 새 울어버렸다는 데서 진화를 느꼈었다.

  미셸의 실종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프레데릭 허브체작이라는 과학자는 막상 미셸이 생각하고 고려했던 깊은 성찰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의 과학적 성과들만이 밀어붙여진 듯 해 슬펐다. 그 사람들이 좀 더 생각했다면 인류는 여전히 지금의 인류일 수 있었겠지. 완벽한 인간이라는 것은 이상적인 것일 뿐, 실제로 있다면 그다지 행복하진 못할 것 같다. 아니면 이건 내 소망일까?

  유쾌하진 않았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책.

  아스페의 실험은 정확하고 엄밀했으며 완벽한 자료로 뒷받침되어 있었다. 이 실험은 학계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35년에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와 로젠이 양자 이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이래, 처음으로 그것에 대한 완벽한 제반론이 나왔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실험 결과는 양자 이론의 예안과 완벽하게 일치하였고, 아인슈타인의 가설에서 나온 벨의 부등식은 명백하게 부정되었다. 그럼으로써 이제 두 개의 가설만이 남게 되었다.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의 운동을 결정하는 감추어진 속성들이 국소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립자들은 서로 얼마만큼 떨어져 있든 간에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또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들이 관측 문제와 무과하게 내재적인 속성을 지닌 소립자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우리는 깊디깊은 존재론적 공허 앞에 놓이게 된다. 실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고 관찰 가능한 것을 예측하는 수학적 형식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연구자들의 대부분은 물론 두 번째 가설 쪽으로 결집하였다.

『소립자』,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pp.135-136

  「두 개의 소립자가 결합되면,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가 형성됩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한 몸에 관한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미소를 짓고 있던 목사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미셸은 활기를 띠며 말을 이었다.
  「제 말씀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힐베르트 공간에서 양자에게 고유 상태 벡터를 부여할 수 있지 않겠는냐 하는 것입니다. 제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소립자』,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p.187

  1999년 12월 31일은 금요일이었다. 브뤼노가 여생을 보내게 될 베리에르 르 뷔이송 정신병원에서는 환자들과 의료진이 함께 모여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그들은 샴페인을 마시며 파프리카 향을 가미한 칩을 먹었다. 파티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브뤼노는 어떤 간호사와 춤을 추었다.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 약이 제 효능을 발휘한 덕에 그의 욕망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오후의 간식을 좋아하였고, 저녁 식사 전에 모두와 함께 보는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을 좋아하였다. 그는 무엇 하나 기대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평온하게 살고 있었다. 두 번째 밀레니엄이 끝나는 그 밤도 그에게는 마냥 기분 좋은 밤이었다.
  세계 전역의 묘지에서는 묻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들이 무덤에서 계속 썩어 조금씩 해골로 변해가고 있었다.

『소립자』,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pp.3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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