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범신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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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누 만난 날 지누가 빌려주겠다면서 쥐어준 책. 줄거리는 커녕 무엇에 관한 소설인지 짐작도 못하고 일단 쥐어주길래 받아가지고 왔는데, 금방 다 읽었다.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놀랐다. 현대문학을 이렇게 빠르고 즐겁게 읽기는 또 오래간만인듯. 책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인데 이건 흡입력이 좋았다. 작가가 한달 반만에 썼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가 따라가는 호흡도 빨랐다.

  시인 이적요, 그의 제자 서지우 그리고 고등학생인 은교. 현재 남은 것은 은교 뿐인 상황에서, 시인 이적요와 제자 서지우가 어떤 식으로 은교를 사랑했었는지를 말하고 있지만, 기실 이 이야기는 그 둘 사이에 있던 갈등 혹은 그보다 더 복잡하게 또아리 튼 감정의 덩어리들이 어떤 식으로 생겨나고 어떤 결말을 맺었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인이 죽은 뒤 1년 뒤 그의 회고록을 열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중간에 서지우의 일기까지 포함되며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Q변호사를 통해서는 현재의 이야기와 실제 사건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적요와 회고록과 서지우의 일기가 같은 사건을 어떻게 다른 식으로 서술하고 있는지가 가장 재미있었다. 그 둘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면서 은근히 증오하고, 열렬히 증오하면서 은근히 사랑하고 있었다. 애증이라는게 이런걸까 싶은 두 사람의 모습이 교차되어 즐거웠다. 은교가 주요 주인공 중 하나긴 한데, 은교가 그 자신의 행동의 주체로서 역할이 컸었다기 보다 두 사람에게 욕망과 갈증을 불어넣어주는 욕망의 원인, 그 두 사람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에도 은교 그 애에게는 별 관심이 없지만(오히려 평범하거나 혹은 약간 더 발랑 까진 고교생의 느낌이 있지만), 은교가 없었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하는 행동에 의미가 부여되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초반부의 이적요 시인의 회고록만 읽을 때에는 약간 '롤리타' 같다고 생각했는데 뭐 어느 면에서는 그 부분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전혀 다른 것이, 이적요는 은교에게 성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거. 마음 속 깊이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애가 상처받거나 다치는 것 조차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는 거... 은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서지우의 뜨뜻미지근했던 감정의 시작이나 무성의했던 행동들에 비하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서지우는... 글쎄, 후반부에가서 은교에게 미친듯이 집착하게 되었던 서지우의 감정은 본인의 것이라기보단 이적요의 감정을 알아채고 이적요가 가진 모든 것을 뛰어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욕망의 발현이 아니었나 싶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생각하는 이적요의 태도나, 거목인 이적요의 완벽한 모습이 은교로 인해 낱낱이 풀어헤쳐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서지우의 뻔한 인간군상의 변화과정도 만만치 않게 마음에 들었다. 이적요를 존경하고 사랑하던 서지우가 어떤 식으로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버려, 점차 이적요를 대하는 태도나 심경에 변화가 생기던 모습.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적요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며 이적요에게 매여있는 서지우는 인간적으로 안쓰러운 면이 있었다. 그리고 이적요보다는 서지우같은 그런 사람이 세상에 더 흔하지 않은가... 후반부쯤에 서지우가 심장을 자기가 썼다고 생각하게 되며 그 생각을 믿어버리는 과정은 오히려 솔직한 것이었다.

  이적요는 서지우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고, 알게 된 사실 또한 확실히 감당하지 못했다. 은교에 대한 갈망과 서지우에 대한 질투, 자신에 대한 혐오까지 범벅되며 나타난 파멸적인 행동들은 보는 내내 씁쓸했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서로에게 오해를 쌓는 행동들이 겹겹이 나타나는 과정이 안타깝고 그랬다. 은교가 없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했는데, 아닐 것 같다. 느리게 진행되었을 거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서지우가 울면서 '당나귀' 코란도를 운전하고 있을 모습이 떠오른다. 눈물이 범벅되어 운전하는 그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자살의 길을 걷게 된 이적요의 모습까지 겹쳐지게 되면, 이 소설은 한 없이 안타까워진다.

  재미있었다.

"제 문제가 걱정되서가 아니구요. 확실한 건요. 할아부지하고 서선생님, 서로가 깊이 사랑하셨다는 거에요. 제가 낄 자리가 없을 정도로요! 제가 소외감 느낄 정도로요!" 그녀의 말이 단단히 내 고막을 울렸다. 그녀의 그 말이야말로, 이적요 시인과 작가 서지우의 비극적인 관계를 풀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열쇠라고 나는 그 순간 확연히 느꼈다. 계속 꺼림찍했던 나머지 의문점들이 홀연히 모두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박범신, 『은교』, 문학동네, 2010, pp.377-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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