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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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알베르토 모라비아 (열림원,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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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었는데 읽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어디서 줄거리 요약만 듣고 바로 산 거였다. 요약이라 함은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와 헤어지려 하는데, 그 여자 쪽에서 먼저 멀어지려 한 순간 사랑이 불타오른다' 정도 였고, 내용 또한 다르지 않다.

  '어머니가 돈이 많고' 자신은 부자가 아닌 주인공 디노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초반에 묘사되는 디노가 느끼는 권태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탁월해서 이것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다. 디노는 서른을 넘어서까지 인생에 무료함을 느낀다. 그가 느끼는 권태는 고질적인 병인데, 모든 것이 지겹고 귀찮기만 하다는 이 태도는, 부자가 아니라는 디노의 말과는 달리 굉장히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집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며 화가로 독립했지만 그림에 열정이 있지도 않고, 성공한 것도 아니고, 결국 어머니에게 약간의 돈을 매일 받고 있는(나는 디노가 그렇게아 어머니를 거부하면서도 막상 아버지처럼 떠나지못한다는 것이 우스웠다.) 디노의 일상에 무슨 절박함이 있느냔 말이다. 디노에겐 삶을 하루하루 투쟁해 가는 절박함이 없고, 또한 항상 무언가를 쉽게 얻어왔기에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애정 또한 없다. 그러니 권태를 느끼게 될 수밖에...

  이런 디노의 권태를 완전히 불살라 버리는 건 체칠리아이다. 사실 디노는 처음엔 체칠리아를 그렇게 대단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그 자신이 계획했던 완벽한 이별이 체칠리아로 인해 부서지게 되자 상황이 달라지고 만다. 체칠리아를 사랑하지 않는다 말하면서도 그녀에게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 마음을 참 잘 묘사했다 싶어서 웃고 말았는데, 뒤로 갈수록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들이 줄줄이... 난 체칠리아 보면서 무슨 소시오패스인 줄 알았다. 일상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그걸 태연히 감추고, 증거를 잡아 추궁하면 순순히 사실을 털어 놓으면서도 잘못한 줄을 몰랐다. 오히려 디노에게 둘 다 사랑한다고 말하질 않나... 여러모로 신기한 여자. 일종의 팜므파탈이었는데, 썩 마음에 드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머리를 쓰고 재고 따진다기보단 생각없이 행동하는구나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지 못하거나, 감정에 대한 설명을 해 준다 하더라도 이해하지는 못하는 타입이었다. 병이 들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두고도 별로 슬프게 생각하지 않는 걸 보면 이 여자는 틀림없는 소시오패스...

  디노는 자신이 체칠리아를 향한 사랑 때문에 죽은 노화가 발레스트리에리와 닮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든 것을 관두지 못한다. 오히려 집착은 더욱 더 심해지고, 노화가가 걸었던 길인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그 길을 밟아갈 뿐이다. 비정상적인 관계가 계속되지만 그는 벗어날 수가 없다. 그녀에게서 권태를 느껴야만 모든 것을 관둘 수 있는데, 그녀는 그가 권태로울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일상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시간을 거의 주지 않는 특별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데에서 기인하는데, 체칠리아가 입으로 사랑을 말해도 그건 디노에게 더 이상 안정을 주지 못한다. 디노는 그녀를 잡아 그녀를 일상적인 그 무언가로 만들려 하지만 그건 불가능 한 일이다. 결국 디노는 앞으로도 자기를 갉아먹으며 그녀를 사랑하게 되겠지. 권태를 다시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심리 변화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고, 진행도 재미있다. 권태와 그 외 다른 감정들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다만 번역이 약간 거슬렸는데, '다르다'와 '틀리다' 정도는 제발 구분 좀 해라... 그리고 이건 편집자 실수겠지만, '안 되요'라고 쓰지마 제발!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내가 무엇인가 하기를 강렬히 원하면서도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으면 마치 샴쌍둥이처럼 하기 싫은 일이 동시에 내 눈앞에 쌍으로 나ㅏ났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지만 혼자 있고 싶지도 않았다. 집에 틀어박혀 있기도 싫었고 외출하기도 싫었다. 여행을 하기도 싫었지만 로마에 계속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리지 않고 싶지도 않았다. 깨어 있고 싶지도 않았지만 잠을 자고 싶지도 않았다. 사랑을 하고 시지도 않았지만 하기 싫은 것도 아니었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혐오감을 느끼기도 했고, 몸서리가 쳐지기도 했으며,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가끔씩 이런 권태가 극심해질 때면 혹시 내가 죽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지 내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했다. 사는 것을 내가 너무나 혐오스러워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사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모든 일이 음울한 춤처럼 쌍을 이뤄 교대로 내 머릿속에 침투해 들어왔는데, 그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내가 종종 생각했둣이, 나는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을 그렇게 원치 않았듯이 죽기를 간절히 바라지도 않았다.

『권태』, 알베르토 모라비아, 열림원, 2005, 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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