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오렌지(세계문학전집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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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앤서니 버지스 (민음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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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이거 너무재밌잖아.... 내가 왜 이전에 이걸 안 읽었지?! 말투 땜에 거슬린다고 덮었던 것 같은데 완전 재미있었다. 화폐단위도 전혀 다른 걸 쓰고 있는걸 보면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삼고 있진 않은 것 같았는데, 설명이니 뭐니 읽어보면 1940~60년대의 시대상을 철저히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 저것 더 검색해보니까 앤서니 버지스 개인의 삶과 굉장히 연관되어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고. (아내에게 일어났던 사고 같은 거...)

  알렉스는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십대이다. 열다섯살일 때 이미 소년원에 갔다 온 전적이 있고, 나와서는 조지, 피트, 딤과 함께 패거리를 이루어 또 나쁜 짓들을 저지르고 다닌다. 이 때 그들이 벌이는 범죄에 대한 묘사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데, 화자인 알렉스 자신이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아서 그런가 읽는 데 큰 불쾌감은 없었다. 오히려 좀 흥겹다는 느낌이 들어서 신기할 지경이었음. 알렉스는 좀 싸이코패스 같은 거라서... 그런 악행들을 보고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느끼는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걸 재밌어 하면 재밌어 했지. 순수악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주제에 교향곡을 듣는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어서 좀 웃기긴 했다만... 그건 제쳐두고.

  1부의 악행들로 말미암아 알렉스는 결국 열다섯 나이에 교도소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도 결국 알맹이는 변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싹싹하게 굴지만 여전히 악하다. 철없기도 하고. 어떨 땐 좀 순진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알렉스가 또다시 살인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국가에 의한 치료에 들어가는 게 2부 이야기. 이 과정을 보는 데서 1부에서 느끼지 못했던 불쾌감이 느껴졌다. 국가라는 거대 기관이 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바꾸려고 하는 것까지는 좋다. 이 시도가 전혀 인도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걸 뺀다면 말이다. 치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어린 애를 속여먹는 것만 같았고, 치료 방법 또한 고통을 일으켜 그 일을 방지하는 것이라... 효과적이긴 한데 인간적이진 못했다. 그렇게 본성을 거세당한 알렉스가 사회로 돌아와서 겪는 일들은 어떻게 보면 뻔한 일들이었다.

  3부가 사회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인데, 글쎄. 알렉스는 이미 부모님에게도 반 쯤 버려진 상태인데다(이때 묘사는 좀 웃기긴 했다... 애가 땡깡 부리는것 같아서ㅋㅋㅋ) 자신이 좋아하는 교향곡은 고통 탓에 듣지도 못하지, 갈 데도 없어 헤매다 이전에 자신이 괴롭힌 사람을 만나 된통 얻어맞기만 한다. 이제 알렉스는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거든. 그걸로밖에 문제 해결을 못하는 앤데, (물론 폭력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폭력이 없으니 대항할 수단이 전혀 없어진거다. 다른 방식을 전혀 모르니까... 사회에 의해 자기 본성까지 잃었으니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애가 되어버렸다. 경찰이 된 딤과 빌리보이에게 수모를 당하고, 그 뒤 어떻게 또 자신이 괴롭혔던 (하지만 그게 자신이 한 일인지는 모르는) 사람의 품에 들어가 어떻게 도움을 얻는데... 그 쪽에서 취하는 행동이란 것들도 결국 정부가 하는 일과 크게 달라보이진 않았다. 여튼 그러다 그쪽에서 마련해준 아파트에 갇혀 클래식을 듣다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 부분까지 모두가 급박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나중에 병원에서 깨어나 내무부 장관의 손에서 또 그 권력에 약간 이용당하긴 하지만, 동시에 알렉스는 본성을 찾게 되는데... 

  이 이후에 원래의 악행으로 돌아오나 했더니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는, 이전에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았던 피트가 결혼한 것을 보고 자신도 정착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드디어 어른이 되어가는 거 같은 모습인지라 신기했다. 아기 사진이나 오려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걸 보면 어떤 교도같은 것이 없었는데도 결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게 될 것 같은 지라. 질풍노도의 십대를 보내고 사회에 의해 억지로 교도당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알렉스 본인을 바꾼 건 알렉스 자신이었다. 아무리 본성을 틀어막아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걸 바꿀 수 있는건 오로지 자신 뿐인 거. 난 그렇게 알아들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는, 소설 마지막 부분의 묘사도 빠졌고, 강간이나 폭력같은 부분을 그 자신의 미학으로 그려냈단 데서ㅋㅋㅋ 왜 앤서니 버지스가 치를 떨고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소설이랑 전달하는 것도 다르고 보여주는 방식도 좀 다른 듯.

  약간 호밀밭의 파수꾼 읽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홀든 콜필드는 알렉스에 비하면 아주 착하고 바른 청년이지만. 비슷한 혼란을 이 소설에서도 본 것 같았다. 그 십대 특유의 감성이랄까. 아무튼 재미있게 읽었다. 푹 빠져서 금방금방 읽어버림.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 하나와 같은 거야.

『시계태엽 오렌지』, 앤서니 버지스, 민음사, 2005, p.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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