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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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무니에게 작년 생일선물로 받았던 책. 정작 목표로 했던 책보다 곁두리로 골랐던 이 책이 훨씬 재미있었다. 생각의 방향이랄까 위트있게 풍자하는 방식도 좋았고, 말을 꼬아서 언어유희 한 것도 주석 읽으니 훨씬 재미있었어다. 언어 여러개 하는 천재라니 얄밉지만 재미있어...

001. [실용 처세법]
002. 여행하기
003. 서로를 이해하기
004. 스펙터클 사회에 살기
005.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대처하기
006. 정치적으로 반듯한 사람이 되기
007. 책고 원고를 활용하기
008. 전통을 이해하기
009. 미래에 대처하기
010. [성조기]
011. [카코페디아 발췌 항목]
012. [내 고향 알레산드리아]

  목차가 이거였는데 난 초반부가 훨씬 재미있었음. 아무래도 간단한 산문같기도 하고 그래서 읽기도 좋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살짝 복잡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도 영 이해못할 정도의 글이 나오는 건 드물었다. 카코페디아 발췌 항목 쪽만 좀 읽는데 더뎠고 나머지는 술렁술렁 잘 읽었다.

  움베르토 에코는 학술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데에도 확실히 재능이 뛰어나서 재미있다. 감성적인 걸 쓰는 건 아니지만, 이성적인 소재를 가지고 사람을 웃음짓게 만드는 글을 쓴다는 건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연이어 읽을 필요도 없고 시간날 때마다 술술 읽어볼만 함. 두고두고 또 읽고 까먹고 읽고 까먹어야지...
장미의 이름(상)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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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변 아이들을 상대로 말을 들어보니 평가가 극과 극을 달렸다. 그러나 이건 소설적인 평가는 아니고, 재미의 측면에서 말을 들어본 것이었다. ‘재미있다’ 혹은 ‘어렵다’라는 대답이 나왔는데, 재미없다가 아닌 ‘어렵다’였기에 책을 읽기 전 바짝 긴장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실재로 책을 구매하고 나니 일반 책보다 더 두꺼우면서도 두 권이나 되는 분량이 아닌가. 맘을 단단히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장을 열고 몇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을 때는 더욱 절망했다. 긴 주석에 잘 알지 못하는 내용. 초반부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주석을 읽다보면 내용을 잊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내용 이해의 틀을 잡고 나자 읽는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 영화를 본 것이 내용의 틀이 되는 이야기를 잡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책의 내용을 잘 담은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장미의 이름은, 주 내용의 뼈대를 빼 놓고 보더라도 그 살집이 비대하다. 쉴 새 없이 늘어대는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의 대화, 또는 윌리엄 수도사와 다른 수도사들과의 논쟁은 장미의 이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살집이다. 그들의 대화는 수많은 종교적 논쟁과 철학적 물음으로 점철되며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고 있기에 쉽사리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차근차근 살펴보면 그 반론의 반론이라는 것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종파라도 그 안에서 끝없이 갈려나가는 의견과 의견의 대립은 장미의 이름이 왜 단순한 소설로 치부되지 않으며, 움베르토 에코가 지식인으로서 높게 평가되는지 알게끔 한다.

  소설의 초반부에 나오는 윌리엄과 우베르티노의 논쟁은 소설에 등장하는 어느 논쟁보다 어렵고 지루하면서도 재미있다. 우베르티노는 꼬장꼬장하면서도 이미 머리가 굳은 노인이다. 그는 당시 가톨릭인의 모습 중 하나를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그는 해박하지만 자신의 굳은 믿음, 어찌보면 신념인 그것을 통해 다소 보수적이며 일반적이지 못한 논리 구성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와 위트가 적절히 섞여있는 논쟁을 펼치는 윌리엄은 철저히 이성적인 틀 안에서 논쟁한다. 이 대화는 분명 서로의 논리가 치열하게 다투는 접점이고, 어느 한쪽의 편도 확실히 들어주지 않지만, 왜인지 나는 윌리엄의 손을 들게 된다. 내게 우베르티노는 믿음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둔해진 사람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결말 부분에서 언 듯 호르헤가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는 듯한 느낌인데, 이것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 그의 논리 전개가 타당성을 획득하기에 부적당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나의 규칙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논리 전개가 쉬이 이루어지지 않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후 나오는 윌리엄과 수도사들과의 논쟁에서도 나는 대부분 윌리엄의 손을 들었는데, 이것은 내가 무신론자인 것과도 조금은 관계있을지 모르겠다.

  윌리엄과 호르헤 수도사의 웃음에 관한 논쟁 논쟁은 단순히 종파가 다르고 가르치는 교리가 다르다는 것에서 설명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호르헤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웃음이 좋지 않다고 믿는다. 이것은 한 종파의 교리가 되기 이전에 호르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미 진리가 된 것 같다. 웃음이란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반응이다. 그런데 호르헤는 이것을 두고 이교도들이 관객을 웃게 만들고자 지은 것이라고 하며 웃음이 온당치 못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웃음을 육체를 뒤흔들고 얼굴의 형상을 일그러뜨리게 해 인간을 잔나비로 추락시키는 존재라고까지 말한다. 호르헤가 내세우는 또 다른 논리도 우습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의 논리는 ‘웃음이 나쁘다’라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고 단지 내게 그의 믿음을 강요할 뿐이다.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윌리엄의 주장 중 웃음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고 이성성의 기호라는 말 만 나에게 약간의 의문을 주었을 뿐(인간만이 웃었던가?), 나머지의 논리는 적절한 예를 들어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나의 반응은 무슨 차이일까. 그것은 앞서 말했듯 호르헤(혹은 그 외의 다른 수도사들)의 주장은 종교적 가르침으로의 믿음에 얽매여 있는 탓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요컨대 그들은 그들의 교리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은 거짓일 수 없고, 이 믿음을 온전히 보전함과 동시에 다른 논리를 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펼치는 수많은 논쟁거리는 온전한 자기주장만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고, 하나에 얽매인 상태로서는 적절한 토론을 펼칠 수 없다.

  그들의 수도원이 진리에 대한 수호라는 아름다운 이념을 가졌음에도 그런 이념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흥미를 억압했다는 것에서 하나의 믿음에 무작정 얽매인 결과를 알 수 있다. 그들이 펼치는 논리가 맞았더라면 다시 말해 그들의 진리가 정말 진리였다면, 그들의 진리는 억압하지 않더라도 그 진리로서 인식되지 않았을까. 중간에 윌리엄이 아드소에게 해 주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라에서도 나올 수 있는것이라고.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그 진리의 본질마저 흐리고 있는 것이다.

  star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도 그 덧없는 이름뿐.) 장미는 장미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장미 자체로서 장미인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을 통해 이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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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이게 대학 2학년 때인가? 이 땐 죽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재미있다. 이거 영화도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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