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세계문학전집 19)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윌리엄 골딩 (민음사, 2000년)
상세보기

  안읽으려고 했는데 다류가 사더니 바로 빌려줘서 읽었다(이런). 확실히 빨리 읽을 수 있었고, 읽는 내내 재미있었지만 동시에 괴롭기도 했다. 으 난 인간의 악마같은 본성을 대놓고 꿰뚫는 책이 제일 소름 돋는 것 같다. 내가 몹시나 감성적인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을 믿고 싶어하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나는 인간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가 그 본성을 끄집어 낸다던가, 혹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이게 더 처참하다) 사실은 인간 본성은 이러이러하다 라는 점을 짚어내는 이야기들이 참 껄끄러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파리대왕은 그런 이야기가 맞다. 어른들 없이 '어느 정도로' 교육받은 문명인인 아이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처음에 그들은 나름의 규칙을 정하고 랠프를 대장으로 추대해(과정이 좀 우습긴 했다만) 무인도에서 인간사회의 규칙을 세워 그것을 지켜나가려 했다. 사실 이 순간에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돼지Piggy가 무시되는 것과, 사사건건 부딪힐 것을 예고하고 있는 잭의 성격이 눈에 보여서 그 파탄이 눈에 보이는 듯 했지만. 그래도 뭔가 이해가 되는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 왕국은 권력에의 욕심과, 식욕이라는 본능, 실체없는 두려움에 선동된 탓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것도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무너져버렸다. 사이먼의 죽음까지는 광기에 휩싸인 결과라 치부할 수 있다 해도, 최후의 지식인이었던 돼지가 죽은 이후에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랠프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였던 쌍둥이들조차 잭의 편으로 돌아서 버리고, 모두가 랠프를 사냥감처럼 사냥하려 드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마치 이성이라고는 한 톨만치도 남지 않은 짐승처럼 변해버린 모습이라서... 사실 짐승도 자신에게 투항할 의지가 없는 다른 짐승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죽이려 하진 않는다. 인간이 짐승보다 한 단계 아래로 퇴보해버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랠프 하나를 잡기 위해 섬에 불을 내는 건 또 어떤지. 마치 야만인의 제의 같다고 생각했다.

  구조대들이 왔을 때, 처음에는 그렇게 자기 이름을 잘 읊더대던 퍼시벌 윔즈 메디슨는 머리 속을 텅 비워버린 양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성이 없는 우리는 결국 점점 더 멍청하게 변해버리고 만다.

  랠프와 다른 아이들이 무사히 구조되었다지만 이것을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너무 낱낱이 드러나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 앞에 기묘한 역겨움이 느껴졌다. 그건 그 추악함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인간, 우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것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나 또한 자신의 치부를 보고 싶지는 않다.

  랠프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 전에 모래사장을 뒤덮고 있던 신비로운 마력의 모습이 잽싸게 눈을 스쳐갔다. 그러나 이제 섬은 죽은 나무처럼 시들어져 버렸다―사이먼은 죽고― 잭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목매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민음사, 2000, pp.302-30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