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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 박근형

 
  2006년 5월 즈음 학교 과제 때문에 봤던 작품. 그때 냈던 건데... 결론부터 말하면 악평이올시다. 올해에도 배우 몇 명이 바뀌어서 상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난 되게 별로였던 작품. 연극 보고 실망한 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날 처음으로 다운시켰다.
  제출용이라 역시 거짓 점철 부분이 좀 있음. 지금 보니 되게 어설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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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내에서 연극 「일주일」의 포스터를 본 적이 있었다. 검은 배경에 덩그러니 놓인 네 남자의 얼굴은 다들 사뭇 진지하고 어두워 보였기에, 연극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포스터의 분위기가 독특해서 언젠가 보러가야지 하면서도 게으름에 가지 않고 있다가 수업의 과제로 선정되어서야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게을러서 자주 찾지는 않지만 연극은 내게 두근거림을 안겨준다. 몇 편 보았던 연극들이 전부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는지 보았던 연극들이 전부 짜임새 있고 재미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연기를 눈앞에서 본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경험이던지. 연극 ‘일주일’은 그런 기대감을 안고 보았던 연극이었다.
  연극 ‘일주일’을 상연하는 극장에 들어서자 마자 든 생각은 ‘너무나 작다’였다. 내가 전에 보았던 연극들도 전부 소극장이었지만, 이정도로 협소하고 불편한 좌석을 가진 소극장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상연하는 장소가 무슨 대수일까, 한 시간이 넘을 시간 동안 내가 좌석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좋은 연극이 상연된다면야 좌석의 불편함은 참을 수 있다. 작은 상연 장소야 연극을 가까이서 느끼는 데에 도움이 될 터이고. 무대는 몹시 간단한 도구들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커다란 책상 하나와 의자 두개. 의자는 의자라고 하기엔 민망한 그냥 네모난 나무상자였다. 단순히 네모였던 것은 나중 상황에 따라 의자에서 수납장으로 변모했기 때문이었지만 막 보았을 때에는 허술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벽은 푸르스름하여 자못 암울한 느낌을 주었고, 조명은 상연 전이라 그런지 그냥 단순한 오렌지 빛이었다. 극장만큼이나 참 간소한 무대였다.
  극의 시작은 한 여자의 설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연극 외적인 설명을 하다가 갑작스레 연극 안으로 파고들어서,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상황을 파악한 뒤에는 신기한 느낌을 주었다. 극의 시작에 한 사람의 설명을 두는 게 박근형 연출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처음 겪는 나는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자지러지는 비명 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연극의 처음 부분에서 나는 또 하나의 신기한 연출 방법을 하나 보았는데, 양쪽에 자리 잡은 문을 통한 빠른 화면 전환이 그것이었다. 보통은 짙은 어둠 뒤에 화면 전환이 이뤄지기 마련인데 이 두 쪽의 문을 통한 빠른 화면 전환은 몹시 신기했고 극의 긴장감을 팽팽히 조여 주었다.
  그러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러한 연출이 초반에 이루어졌음에도, 극은 불행히 나의 기대치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의 이해력이 남들보다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이 연극은 도대체 이해 할 수 없는 논리로 구성되었다고 할까. 아니 논리성이라고 할 만한 게 시나리오에서 많이 결여되어 있었다. 원인과 결과가 이렇게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을지. 시나리오가 본래 이렇게 쓰여진 것인지, 연출가가 가감하면서 본래의 것이 바뀌어 이렇게 흐트러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전문적이지 않은 내가 느끼기에는 몹시 허술한 시나리오였다. 왜 네 사람이 반항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형사들의 말도 안 되는 말에 금세 좌절하고 마는지, 형사들이 내뱉는 말들은 도대체 무슨 논리로 그런 결과가 도출되는지 그 어느 것도 나를 이해시킬 만한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이것은 너희들의 운명이다.’라는 말은 그 아이러니에 짜증마저 났다. 충분하지 않은 논리를 이건 그냥 운명이야 라는 말로 덮어씌우려는 듯하다는 느낌이었다. 진실이 거짓이 되는 게 싫다는 그들의 말도 이해 불가의 매커니즘이었다. 중간 중간 극이 매끄럽지 못하게 연결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시나리오의 완성도 부족 탓인 듯 하다.
  이러한 막무가내 논리의 시나리오 탓에, 극을 다 본 후에는 과격하게도 ‘그래서 뭘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란 말인지. 겉으로 딱 봐서 그 내용을 알 수 없다고 그 시나리오가 형편없다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논리의 구성의 부족함으로 인해 이야기의 개연성 부족이 매우 컸고, 나를 설득시킬 만한 논리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시나리오는 총체적으로 몹시 불안정했고, 그것을 덮어줄 만한 것은 없었다. 연극은 배우의 연기와 그 시나리오에 기초를 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리오, 혹은 담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극장에서 하는 연극은 배우의 연기와 시나리오가 그 성공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는데, 일주일은 시나리오 쪽에서는 실망이었지만 배우의 연기 부분에서는 만족했다. 내가 그토록 실망한 시나리오였지만, 시나리오 덕에 배우의 연기가 산 부분도 있다. 시나리오에 기반하고 있는 캐릭터들의 특성이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을 네 명이나 내세우고 있는 작품이지만, 누군가 한 사람에게 치우침 없이 각 캐릭터들은 자신들의 매력을 발산한다. 사회에 대한 반항적인 모습이 돋보이는 길수(홍성인)나 다혈질에 삶에 대한 의지를 보이는 영배(이호웅), 전형적인 순한 바보 캐릭터인 덕배(김진용), 그리고 정신지체아인 삼식이(이민웅). 네 명의 캐릭터는 너무나 각자의 개성이 독특해 배우가 배우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단순히 시나리오 안의 캐릭터가 독특하다고 해서 공연되는 캐릭터가 독특해 진다는 법은 없다. 내게 네 명의 배우가 몹시 독특하고 매력적으로 보인 것은 그들의 열연 탓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캐릭터와 하나가 되어 열연해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다혈질인 성격이 잘 드러나며 유달리 몸짓이 많았던 영배 역의 이호웅씨와 정신지체아 삼식이 역의 이민웅씨가 눈에 잘 띄었다. 다른 두 배우가 모자랐다는 건 아니지만, 영배 역은 다혈질인 그 성격 탓에 무대에서 많이 날뛰는, 그러니까 관객에게 많이 어필하는 연기가 많아서 눈에 띄었고 삼식이 역은 단순한 바보가 아닌 정신지체아의 모습이다 보니 영화 「오아시스」의 문소리처럼 정신지체아의 몸동작을 해야 했는데 그것을 잘 해냈기에 눈에 띄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네 사람의 주연 배우는 연계가 부족한 시나리오 안에서도 자기 몫을 잘 해주었고, 그 결과는 몹시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오히려 시나리오에 비해 배우들의 연기가 더 좋았기 때문에 시나리오가 더 좋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더욱 들었다. 뒷부분에 잠시 느껴졌던 캐릭터의 현실성에 관한 문제는 아무래도 시나리오 탓이기 때문이었다.
  극의 전개 외, 무대 장치 부분에서 조명은 처음 보았던 때의 단조로운 느낌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는 모습을 내내 보여주었다. 몇 가지 변화 말고 획기적인 느낌의 조명의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 배경음악에 관한 부분은 형편없게 느껴졌다. 조명만큼이나 단순한 배경음악의 삽입이 이루어졌지만, 그다지 슬프지 않은 장면을 슬프게 느끼게끔 하려는 의도가 너무나 명확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일주일을 보고는 밋밋함만을 느꼈고, 내가 시나리오에서 느낀 밋밋함 때문에 배경음악을 짜증과 함께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연극이 끝난 뒤에는 ‘관객과의 대화’라는 다소 생소한 일이 벌어졌다. 이 때 한 관객이 연극의 제목 ‘일주일’의 의미를 물어보는 일이 있었는데, 답변자는 천지 창조의 일주일의 의미로서 창조와 인간의 파괴 등을 다룬 것이라고 했었다. 나는 이 때, 시나리오를 통해 말해야 할 것이 타인을 통해 대답되는 것에서 아이러니를 느끼며 시나리오의 실패를 보았다.
  나는 내 자신이 훌륭한 관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에 쉽게 감동하는 편이고, 비평에 약하다. 그것이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3류 작품이라도 쉽게 나를 울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비해 연극 「일주일」은 밋밋하다. 내게 어떠한 감동이나 혹은 교훈을 안겨주지도 못했다. 그 부족을 나는 시나리오에서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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