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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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투르게네프 (웅진씽크빅,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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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첫사랑의 미묘한 감정을 잘 담아낸 이야기라고 해서 보고 싶어서 샀다. 책이 얇아서 보기 편할 거라 생각한 것도 있었고... 그리고 진짜 괜찮았다. 러시아 소설은 그 이름 때문에 읽기 전에도 지레 겁먹는 편인데 이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이 단순한데다가(지나이다의 구혼자들이 많긴 하다만 뭐 굳이 이름을 외우려 하진 않았고 성격에서 판명나니까) 부칭을 담는 러시아의 이름 짓는 양식을 이용한 구석이 약간 있기도 해서 마음에 들었다.

  (만) 열여섯이 되어 대학교 입학 시험 준비를 하는 소년과 청년 사이의 남자,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그 주인공. 그의 집에 새로 세를 얻게 살게 된 궁핍하고 몰락한 자세키나 공작부인이 있다. 공작은 이미 세상을 떴고, 공작부인과 함께 하는 것은 그녀의 딸 지나이다. 스무살의 지나이다는 아름다운 외모와 그에 어울리는 영악한 모습으로 여러 구혼자들을 데리고 논다. 블라디미르는 그녀에게 말 그대로 첫눈에 반하게 되는데, 이런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평소엔 좋아하지 않지만 도리어 이 소설에서는 첫사랑의 풋풋함과 무절제함의 느낌을 주어서 더 현실감 있었다.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은 연상의 여자. 게다가 자신을 어린 대상으로만 보는 지나이다의 시선을 블라디미르 또한 느낄 수 있다. 거기서 오는 막막함과 가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틋함, 간절함이 뒤섞여서, 신기하게도 편하게 읽는 내내 가슴 한 켠에 물이 스미듯 서서히 내 마음을 적시는 감정들의 묘사가 마음에 들다. 어린 청년은 주변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빠삭하게 파악할 만큼 영특하진 않지만 그런 기류는 느낄 수 있었기에 그런 답답함 속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잡을 수 없는 심정이 절절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소설에선 블라디미르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가 꽤 흥미롭게 그려진다. 블라디미르를 아끼긴 하지만 자식에 대한 예의 그 이상의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 아버지의 캐릭터는 화를 돋구면서도 흥미롭다. 이런 캐릭터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나 했더니 이건 투르게네프 작가 본인의 삶에서 기인한 것이라서 더 신기했다. 이 소설은 비현실적이네, 말도 안된다 하는 생각을 들게 하면서도 그것을 믿게 하는 진실성이 있었다. 그런 진실성은 작가의 현실에서 기반한 것이겠지. 사랑이 없는 결혼을 한 아버지, 어머니를 똑 닮은 아들을 사랑할 수 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는 어머니.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투르게네프에게는 현실이었으니 이런 소설이 나올 법도 하다. 하여간에 내게는 소설 안에서 나오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가 지나이다에 대한 묘사보다 더 흥미로웠다. 뻔히 악한데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좋아해서 그런가.

  지나이다에게 진실로 사랑하는 대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살인까지도 불사하려던 청년은 그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모든 것을 접게 된다. 그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야기는 통속극으로 흘렀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이 사랑을 갈구해 마지않는 아버지임을 깨달았을 때 이야기는 바뀐다. 그는 심지어 그런 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없다. 감정이 마구마구 부풀어오르는데도 폭발이랄 것이 일어나지 않는 기이함이 여기 있다. 그런데도 그의 감정은 구구절절이 이해할 만 해서 씁쓸하기도 했다.

  음... 편하고 좋았다. 엄청 몰입할 정도는 아니고.

  아버지는 나에게 기이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도 기이했다. 아버지는 내 교육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한 번도 나를 무시한 적은 없었다. 그는 나의 자유를 존중해 주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아버지는 내게 예의 바르게 대했다……. 단지 아버지는 나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뿐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매료시켰으며 나의 이상적인 남성상이었다. 그의 손이 나를 밀쳐내고 있다는 것을 내가 끊임없이 느끼지 않았다면, 아버지에 대한 나의 애착이 얼마나 커졌을 지 알 수 없다. 대신에 원하기만 하면 거의 순식간에, 한마디로 말하면, 몸짓 하나로 아버지는 내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내 영혼은 활짝 열려서, 마치 현명한 친구나 관대한 교사에게 하듯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못 본 체하곤 했다. 아버지의 손이 다시 나를 밀어냈다. 상냥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밀어냈다.
  때로는 그도 유쾌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의 아버지는 장난치며 소란을 피우기도하고, 소년처럼 나와 같이 놀기도 했다. (아버지는 몸으로 하는 힘든 운동은 모두 좋아했다.) 한 번, 딱 한 번! 아버지가 너무 상냥하게 나를 귀여워해서 나는 거의 울 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쾌함과 부드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은 마치 꿈처럼 내게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도 품게 하지 못했다. 나는 이지적이고 밝게 빛나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얼굴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내 심장이 떨려왔고 내 몸 전체가 그에게 빨려들 듯했다……. 아버지는 마치 내 마음속을 읽기라도 하듯, 내 옆을 지나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집을 나서다가, 일을 하다가, 혹은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갑자기 몸 전체가 굳어지곤 할 때면 바로 내 몸도 움츠러들고 차갑게 식었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호의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분명 아버지도 알 수 있는 내 애원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갑자기 일어나는 드문 발작과 같았다. 나중에 아버지의 성격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는 나나 가족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으며 그것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선택해라. 타인의 도움을 바라지 마라. 너는 너의 것이란다. 그것이 바로 삶이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젊은 민주주의자로서 내가 자유에 대해 논할 기회가 있었다. (내 식으로 부르자면 그날의 아버지는 '선량'했다. 그럴 때는 아버지와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었다.)
  "자유." 아버지가 되뇌었다. "무엇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지 알고 있니?"
  "네?"
  "그것은 의지, 자신의 의지란다. 그것은 자유보다 더 좋은 권력을 준단다. 무언가를 원하는 능력을 가져라. 그렇게 되면 자유를 얻고 다른 사람들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pp. 6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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