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이청준문학전집:중단편소설 6)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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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잡이」를 보다 보면 이청준의 또 다른 소설인 「줄광대」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구성의 모습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두고 보면 「매잡이」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방식이 존재한다. 액자형 소설인 「매잡이」는 그 틀에서 ‘나’와 ‘민태준발견할 수 있으며, 액자 안에서 ‘곽 서방’과 ‘버버리 소년’을 발견할 수 있다. 액자 틀과 액자 안을 넘나드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 듯 해 꼭 인물들의 위치를 규정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또, 이 소설은 액자형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이야기보다 액자 틀에서의 이야기와의 연관성이 더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다.

  「매잡이」에서는 세 가지 작품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이미 발표한 ‘나’의 작품이고, 두 번째는 ‘민태준’의 유작이며, 세 번째는 지금 소설의 액자 틀이 되는 이야기이다. 시간 순서대로 본다면, 지금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가 앞선 두 작품을 통틀어 서술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 작품의 연관 관계를 통해서도 많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겠다. 특히 민태준이 남긴 소설과 지금 ‘나’가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의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매잡이」는 시대의 기류에 편승하지 못하고 전통을 고수하다 스러져 가는 이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매잡이는 한때 몹시 흥하던 직업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매잡이라는 직업은 그 의미를 잃게 되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해결책은 새로운 직업을 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곽 서방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곽 서방이야 말로 자신의 직업에 소명의식을 굳게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은 시대에 편승치 못하는 그의 모습 때문이다. 이전엔 매잡이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서 노인마저 그를 나무라는 것에서 매잡이의 현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매잡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곽 서방에게 매잡이는 모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매잡이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매잡이라는 직업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든 매잡이는 존재 가치가 없어져버린 직업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꾸준히 이어나가려는 사람이 있다. 이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매잡이는 어쩌면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소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 매잡이를 계속 이어나가려는 사람을 통해 보여지는 소명의식일 것이다. 스러져가는 가운데서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며, 매잡이만을 자신의 천직으로 생각하는 곽 서방의 소명의식. 그것이 매잡이라는 직업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곽 서방이 식음을 전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반항의 표현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곽 서방의 반항의 대상이 약간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다른 집도 아니고 하필이면 서 노인의 집 헛간에서 죽음을 맞이하려 드는 행동은 왜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전에 매잡이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지금은 매잡이인 자신을 구박하는(곽 서방을 챙기려는 행동이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구박하는 듯한 행동이다.) 서 노인에게의 불만을 나타내려 한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거처에 관해서는 그저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차라리 곽 서방의 반항의 행동에서 그 의미를 찾고 싶다. 그의 식음을 전폐하는 것은 일종의 한 반항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반항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 반항의 대상은 어쩌면 매잡이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것 일수도 있고, 매잡이를 더 이상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으며, 세상의 기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명확한 한 가지 이유를 집어내긴 힘이 드나, 어찌 되었건 곽 서방의 단식은 반항의 일종인 듯 하다.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단순하게 소명의식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여기서 민태준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매잡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민태준, 즉 민형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평생 소설에 대한 연구만을 했을 뿐 소설을 발표한 적은 없는 민형. 그런 그가 자살하기 전 ‘나’에게 취재 여행을 강권한다. 그런 민형의 권유로 인해 ‘나’는 매잡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민태준은 왜 죽기 전 나에게 그러한 권유를 했을까. 그 이유는 그가 남긴 유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곽 서방의 죽음을 예견한 민태준의 유작은 단순히 미래를 예측한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필연성과 개연성을 잘 잡아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민태준이 점쟁이가 아닌 이상 어떻게 미래의 모습을 그렇게 잘 그려낼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민태준의 현실을 바라보는 능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그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나’를 취재 여행에 보낸 것 같다. 자신이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까지 설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다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민태준이 그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자살을 실행했다는 점에서 민태준은 자신의 작품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자신의 눈으로 그 결과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닐까. 이러한 모습은 곽 서방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의 유작은 곽 서방과 민태준 자신을 동일성을 통해 탄생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소설을 위해 취재는 하되 소설은 결국 쓰지 못했던 민태준이 더 이상 매를 잡아 살아갈 수 없는 매잡이와 동일시되어 비춰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음에 답답함을 느낀다. 민태준과 곽 서방의 대화 부분이 특히 그러했다. 매를 아끼느냐는 민태준의 질문에 곽 서방은 스스럼없이 매를 아끼고 있다고 대답한다. 민태준이 학대와 굶주림과 사역만이 가득한 매를 부리는 방법만이 매를 부리는 방법의 전부냐고 묻는 장면에서, 곽 서방은 매의 몸짓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에 대해 되물으며 민태준을 죽이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솔직히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곽 서방은 민태준을 죽이고 싶다 말하는 것일까. 이 부분이 중요한 시사를 나타내고 있다 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기 힘드니 답답할 따름이다.

  「매잡이」는 간단하게 읽기 어려운 소설이었다. 나는 「매잡이」를 읽으면서도 그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이 들었다. 나 자신의 억측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면 많았다고 하겠다. 액자 속의 내용과 액자 겉의 내용이 서로 얽혀 있는 부분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설 내의 세 가지 종류의 매잡이 소설이 등장하는 것도 그 뜻을 알아내기 힘들었고 말이다. 내가 해석한 것이 맞는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매잡이」는 어떤 의미에서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한 이청준의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언젠가 이 소설에 대해 더 연구하고 이해할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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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랄리가 있나요...
서편제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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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편제」라는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알고는 있었다. 영화 「서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대본이 고교 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서편제」는 각색되어진 시나리오의 모습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서편제」가 여러 단편들로 구성된 이야기라는 것조차 잘 알지 못하고 있었고 소설을 읽게 된 이제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다섯 편의 연작을 쭉 읽고 나니 시나리오 「서편제」의 그것보다 넓은 의미의 한과 그 승화의 모습이 머릿속에 들어옴을 느낀다.

  「서편제」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한의 예술적 승화에 눈을 돌린다. 이것에 대해서 내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바가 없다. 「서편제」는 정말 한국인의 정서에서 이해될 수 있는 한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의 예술적 혹은 자연적 승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각각의 한의 승화의 모습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결국 큰 줄기를 보면 「서편제」 연작 다섯 편은 한의 승화를 보여 준다.

  「서편제」의 다섯 연작 중에서 한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며 그것을 잘 승화시킨 것은 역시 첫 번째 이야기인 「서편제」와 두 번째 이야기인 「소리의 빛」일 것이다. 이 부분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서편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리꾼과 그의 딸, 그리고 그녀의 동복 남매인 사내를 주축으로 진행되는 이 부분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의 승화를 이루어내는 모습을 그러내고 있다.

  그들이 가진 한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보통은 소리꾼의 딸인 송화의 한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 한다. 그러나 나는 송화의 한보다 사내의 한에 조금 더 시선이 간다. 사내는 소리꾼을 증오하고 죽이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그를 죽이지 못하고 도망치는 것에 그치고 만 사람이다. 나는 소리꾼에 대한 사내의 증오가 결국 한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단순히 원망의 이미지만으로 사내의 한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사내의 한이 만들어진 것은 그의 유소년기적 체험에도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삐에 매여 무덤가에서 보냈던 사내의 유년기가 사내에게 어떠한 의미로 작용하는 지 나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고삐에 매인 채 어머니의 요상한 노래를 듣고 자란 사내의 과거가 단순한 것이 아님은 알 수 있다. 뜨거운 햇덩이 아래에서 보낸 그의 유년기는 사내의 뇌리에 깊게 박혀, 그가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살게 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가 가졌던 속박과 괴로움의 시간은 그의 한의 토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사내는 소리꾼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사람이다. 실제로 소리꾼이 어머니를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소리꾼은 어머니를 앗아간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외디푸스적 심리에서 나온 것 같다. 사내를 뱀에 비유하는 것도 그렇고, 어머니의 죽음을 사내의 탓으로 무작정 돌리는 것도 그러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어머니의 소멸로 동복동생이 사내의 곁으로 찾아온 셈이지만 소리꾼에 대한 복수로 가득 찬 사내에게는 그것이 중요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사내가 동복동생의 탄생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였다면 소리꾼에 대한 증오가 없을 수 있었을까. 애초에 소리꾼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식했으니 그렇지 않았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다. 사내가 가진 한의 모습을 단순히 소리꾼에 대한 증오로 볼 수 없는 이유를 나는 그의 유소년기의 체험과 외디푸스적 심리에서 찾는다. 더 덧붙이자면 결국은 소리꾼을 죽이지 못하고 자의든 그렇지 않든 그를 용서하게 된 그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내가 이러한 한의 생성 화정을 거쳤다 하면, 딸인 송화의 한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소리꾼은 자신의 딸을 훌륭한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만든다. 이것은 온전히 소리꾼 자신의 욕심에 지나지 않으며, 그 욕심에 그의 딸이 희생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송화의 한은 단순히 아버지가 자신의 눈을 멀게 한 데서 나오지 않는다. 송화의 한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는 과정에서 탄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한의 생성은 한국인이 가진 한이 단순히 증오나 원망의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한국인의 한은 드러나는 복수나 원망으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다. 가슴 속에 꼭꼭 묻어두다가 그것이 사무치게 되어 삶의 원동력이 되었을 때 그 한이 진정한 의미의 한이 되는 것이다. 송화는 그녀가 가진 한을 판소리로 승화시키고 이것에서 한이 그녀에게 삶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내의 경우에서도 그의 한이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됨은 마찬가지이다.

  사내와 송화가 서로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한바탕 판소리를 한 것을 두고 송화는 그것이 서로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왜 그것이 서로를 보존하기 위한 길이었을까. 그것은 한이 가진 특성과 관련이 있다 할 수 있다. 한은 한으로 남아 있어야만 그 가치가 보존된다. 그들이 서로의 정체를 밝힘으로서 한의 해결을 도모한다면, 그들의 삶의 원동력인 한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삶의 원동력이 사라진다면 그들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 조용히 헤어져 간 것이다. 그들에게 한은 이미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벌이는 판소리 한 판은 그들의 한의 예술적 승화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되, 그것을 판소리로 대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편제」의 앞부분은 이런 식으로 소리를 통한 한의 예술적 승화에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작에서 이어진 다른 부분들은 어떠한가. 「서편제」의 다른 연작 소설에서는 한의 승화가 다각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이다. 「새와 나무」에서는 한의 자연을 통한 승화가 보여진다. 수림을 만남으로서 소유와 지배의 욕심을 놓는 시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의 자연적 승화를 본다. 「다시 태어나는 말」은 한을 용서를 통해 승화시킨다. 차를 마시는 행위를 통해 용서의 과정은 이루어진다. 모든 사람들이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한이며 그것을 용서하고 풀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한의 원동력이 탄생하는 것임을 「다시 태어나는 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의 원동력은 단순히 미움과 원망에서 나오지 않는다. 복잡하고 단계적인 감정의 변화와 용서의 과정. 그것이 쉽사리 터트려지지 않고 가슴 속에 맺혔을 때, 한을 통한 원동력이 발생할 수 있게 된다.「서편제」는 한국인의 정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감정인 한의 다양한 승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다른 민족에게는 한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미움과 원망과는 또 다른 감정인 한. 이것은 우리 고유의 특성이며, 우리 고유의 것을 창조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가슴 속에 응어리지고 사무쳐 있는 그 감정을 어떻게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복잡한 감정인 한의 생성 과정을 그리며 그 승화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서편제」는, 그런 의미에서 내게 다소 감정적인 생각의 진행을 택하게 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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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과제. 이거야 워낙 유명하니까...
병신과 머저리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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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신과 머저리」는 전형적인 액자형 소설이다. 다른 액자형 소설에 비해 조금 더 특이한 점은, 내부의 이야기가 현실의 모습을 비추는 듯한 가상의 소설이라는 데 있다. 그 소설은 액자 틀에서 존재하는 인물인 형에 의해 그려지고 그의 동생을 통해 전달된다. 액자 안을 구성하는 형의 소설은 현실이 아니지만, 읽는 이들은 이것이 현실에 바탕을 둔 소설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주인공인 ‘나’는 무기력 증에 걸린 듯한 청년이다.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계획은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의 여자친구인 ‘혜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느낄 정도로 무감각하다. 그는 마치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자유가 억압된 시대, 그 때의 전형적인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또 다른 인물인 ‘형’은 6.25를 겪은 인물로서 현실을 잘 살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나, 자신의 환자가 죽어버린 이후 모든 일을 관두고 소설을 쓰고 있는 사내이다. 그는 시대의 혼란을 직접 겪은 이로서 소설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혼란을 해결하려는 것 같다. 이 둘의 모습은 형과 동생 세대에서 대비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정신적 환부를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의 차이를 보여준다.

  형에게는 뚜렷한 정신적 환부가 있다. 그가 소설을 쓰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환부를 찾아 서술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그의 정신적 환부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 6.25를 겪으면서 남게 된 죄책감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이 6.25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있다.

  동생에게는 뚜렷한 정신적 환부가 없다. 그런데 통증은 있다. 환부가 없되 통증은 있다는 말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기 고뇌의 원인과 그 책임을 찾을 수 없는 그 시대 젊은이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혜인’의 말에서 통증 없는 환부를 가진 동생의 모습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전쟁을 겪음으로서 자신의 명확한 정신적 환부를 알며 그것에로의 책임 전가를 통해 환부를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는 형의 세대와는 달리, ‘동생’의 세대는 그렇지 못하다. 형과 ‘동생’이 갈등을 겪는 것은 이런 세대간의 차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동생이 형의 소설을 읽으면서 욕을 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안의 나’는 과거의 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설을 읽는 동생의 모습으로도 보인다. 오관모와 김 일병 사이에서 ‘소설 안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방관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김 일병의 몸이 썩어가는 상황에서 그는 오관모를 죽이지도, 김 일병을 죽이지도 못한다. 이것은 과거에 형이 겪었던 딜레마의 모습이며, 현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나’와 ‘형’과 ‘소설 안의 나’는 동일성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의 소설은 미완인 채로 오랜 시간 유지된다. 그것은 소설을 읽는 나를 답답하게 만들어 결국 소설의 끝을 쓰게끔 만든다. 현실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동생이 소설에 그만큼 집중했다는 뜻일 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가 소설의 결말을 스스로 썼던 것은 ‘소설 안의 나’와 ‘나’를 동일시해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형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정신적 상흔을 해결하려 했던 것과 비슷하게 나 또한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정신적 환부를 찾아내고 그것을 자기 식대로 해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가 맺은 결말은 ‘소설 안의 나’가 김 일병을 죽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상황을 직접 겪지 못한 나가 취하는 해결책이며, 형에게는 탐탁치 못한 것이 된다. 형에게 나는 뚜렷함이 없이 무기력하기만 한 수동적인 인간으로 보이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형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과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곧, 나가 맺은 결말은 이전에 자신이 했던 행동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곧 형은 과거 김 일병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오관모가 김 일병을 죽이는 것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가엾은 김 일병을 왜 죽이느냐고 나에게 소리치는 장면에서 그가 가진 죄책감을 보는 듯 하다.

  형은 과거의 죄책감으로 인한 환부 때문에 소설 쓰기를 시작했으나 쉽사리 그 끝을 맺지는 못했다. 과거의 상처를 쉽게 극복하기에는 그 환부가 크기 때문이며, 그의 죄책감을 해소할만한 용기와 독한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형이 구걸하는 소녀의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바로 형이 독한 마음을 먹고자 저지르는 행동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라도 오관모를 응징하고 싶어 하는 형은 그 일을 마음먹기 위해, 그리고 소설로 쓰기 위해 이러한 일을 벌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형에게 오관모를 응징하는 것은 형이 과거에 가졌던 죄책감을 덜 수 있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형에게 정신적 환부를 남긴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형은 어떤 결말을 택하는가? 형이 쓴 소설의 결말은 오관모가 김 일병을 죽이며, 뒤따라 ‘소설 안의 나’가 오관모를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은 형의 상흔의 치료이다. 과거에 형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을 ‘소설 안의 나’로 하여금 대신하게 함으로서 본인의 상처를 치료하려 했던 것이다. 형이 과거에 오관모를 죽이지 못했던 것은 ‘혜인’의 남편이 오관모라는 암시를 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소설에서는 ‘소설 안의 나’가 죽인 것으로 나오는 오관모가 멀쩡히 살아서 ‘혜인’과 결혼식을 한다. 이를 통해 과거에 김 일병을 오관모가 죽인 것까지를 사실로 볼 수 있으며 그 이후의 일은 형의 바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형의 정신적 상흔의 완벽한 해소가 형이 소설을 불태우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소설을 쓰고 그것으로 어느 정도의 정신적 상흔의 해소를 이루었지만, 결국 오관모는 살아 있으며 소설은 그저 형의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상처를 명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겨내려 했다. 그의 관념의 성은 무너졌지만, 정신적 상흔을 해소하려 들었던 용기는 그에게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형’과 ‘나’의 갈등은 어쩌면 총체적인 ‘나’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이 나의 모습과 행동에 분노한 것은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찌 되었건 간에 형은 자신의 정신적 상흔을 해결하였다. 그는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 확연한 자신의 정신적 상흔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정신적 상흔의 해결이 비교적 쉬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환부만을 안고 있다. 소설 끝에서 나는 그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허비될 것을 말한다. 나의 아픔 가운데에는 형에게서처럼 명료한 얼굴이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는 그의 정신적 환부를 이겨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을 안다. 작가는 뚜렷함이 없는 나를 통해 그 시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나 또한 명확한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이 막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듯 하여 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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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과제. 읽으면 끕끕해져서 많이 좋아하진 않는다. 내 인생 같은 이야기들은 읽기 싫어.
시간의 문(이청준문학전집:중단편소설 6)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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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광대」라는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딱히 이청준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청준의 소설 중에서도 유명한 소설인지라 읽어볼 기회가 제법 많았었기 때문에 읽게 된 것이었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무슨 소리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애를 먹었었다. 그렇기에 나중에 학교에서 그 주제가 ‘장인 정신의 발로’라고 배웠을 때 그러려니 했었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작품을 깊게 볼 만한 지식은 없었고, 배우려는 열정도 많이 부족했다. 거기에 허 노인의 모습에서는 확실히 장인정신과 같은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쉽게 받아들였던 것도 같다.

  몹시 오래간만에 다시 읽게 된 「줄광대」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일전에 그저 주입식으로 배웠던 ‘장인 정신의 발로’라는 주제가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은 왜일는지. 그것은 「줄광대」를 처음 읽었던 때의 나보다 조금 더 생각의 깊이가 깊어졌기 때문일까. 이전에는 쉽게 넘어갔던 것들이 자세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저 글자를 읽어 내리기에 바빴던 독서 습관이 슬그머니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나의 무지를 핑계로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 테니까.

  액자형 구조로 되어있는 이 소설은 남 기자를 서술자로 내세움으로써 시작을 하는데, 그러면서도 액자 안의 제 3자인 트럼펫 부는 사나이를 통해 틀 안의 이야기를 전달받는 것이 조금 특이하게 느껴졌다. 내게 액자 안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액자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그 안의 인물이(그것이 비록 제 3자일지라도)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직접적인 등장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안 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었다. 액자의 틀을 구성하는 또 다른 인물인 여자에 대해서 나는 처음에는 이 여자가 그저 부수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여자를 접할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통해 소설에 깔려있는 복선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속 알맹이인 액자 내의 이야기는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이 액자 속에는 액자 틀에도 존재하는 트럼펫 사나이가 등장하고,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허 노인과 그의 자식 운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액사 속은 크게 이렇게 나뉜다.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서술에 따라 이야기는 허 노인과 그의 자식 교육, 그리고 허 노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하나의 액자 속이 완성된다. 그리고 뒤이어 또 다른 이야기로서 운의 사랑과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다른 액자 속이 완성 된다. 똑같은 과거의 이야기인데 이렇게 둘로 나눈 의도는 무엇일까? 나는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두 부자의 죽음을 비교하게끔 만들려 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허 노인의 죽음과 운의 죽음은 그 모습이 몹시 일치하는 듯 하면서도 미묘한 구석에서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허 노인은 오직 줄 위에서만 살아온 줄광대이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줄타기 신념이 있고, 그것을 평생 지켜 나간다. 서커스단의 단장에게 혼이 나더라도 자신의 줄타기 법을 바꾸지 않는 것도 그렇고, 아내가 죽은 그 날 이외에 줄을 타지 않은 날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신념은 굉장히 독선적인 모습이 될 수도 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장인정신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아들 운에게 줄타기를 가르치는 모습에서 그의 신념의 모습이 잘 나타나는데, 이를 지켜보면 허 노인은 단순히 줄 위에서 노는 광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평생을 줄타기만을 위해 바쳐온 그는 이미 광대가 아닌 한 명의 장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단순히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모습이 있는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에서는 그저 줄 위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은 것이지만, 허 노인의 죽음이 단순히 그런 실수에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의 죽음의 명확한 이유에 대해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허 노인이 말했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줄광대는 줄 이외의 곳에 발 디딜 데가 없다고 한 것 말이다. 운에게 모든 것을 전수한 그는 줄 위에 두 명의 광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발을 일부러 헛디딘 것이 아닐까. 과도한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내가 허 노인에게 느끼는 그의 장인 정신은 이러한 부분에서 나온 것이니까.

  반면 운의 죽음에서는 나는 허 노인과 같은 장인 정신을 보지는 못했다. 줄 위에 있는 그는 그저 광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만 같다. 허 노인이 죽은 뒤 그도 허 노인과 같이 줄을 탔지만, 결국은 한 여자에게 빠짐으로서 그 줄에서 떨어지고 말았지 않은가. 처음에는 허 노인의 뒤를 이으려는 듯 보였지만 결국 그는 허 노인과 같은 장렬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 듯 하다. 절름발이 여자가 그가 무섭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은 이제 줄을 탈 수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고 줄을 탈 수 있었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말이다. 이것이 허 노인과 운의 차이를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허 노인은 줄광대로서 온전히 그 장인 정신을 평생을 통해 발휘했고, 죽음에서 마저도 그의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그러나 운은 사랑에 빠짐으로 인해 바른 줄타기를 버리고 한낱 광대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앞서 나는 허 노인의 죽음과 운의 죽음은 그 모습이 몹시 일치하는 듯 하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한 어긋남은 그 둘이 가졌던 장인 정신의 차이였다. 그렇다면 일치한다 생각하는 부분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나는 그것을 운의 마지막 줄타기에서 찾는다. 자신의 줄 타는 모습만을 좋아했던 절름발이 여자를 위해 마지막으로 줄타기를 하고 죽는다. 그의 죽음은 쉽게 보면 여자에게 빠져 이루어진 하찮은 종류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한 운의 줄타기에서 비장한 그 무엇인가가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운의 비장함은 내게 허 노인과 운을 동일시해서 보게 했던 유일한 것이었다.

  트럼펫 부는 사나이가 전하는 줄광대의 이야기는 남 기자를 복잡한 심경으로 이끈다. 나는 이 이유를 트럼펫 부는 사나이가 가진 죄책감에서 찾는다. 내게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말은 꼭 고해성사처럼 들린다. 그가 하는 말은 자신의 죄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운의 죽음의 원인인 절름발이 여자가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아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복선에서 그의 죄책감을 느낀다. 그가 남 기자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덜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아내가 절름발이 여자였다는 복선은 속으로 많이 감추어져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트럼펫 부는 사나이가 마을에 정착한 이유 등을 통해 그의 아내가 누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액자 틀에서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을 찾는다. 바로 트럼펫 부는 사나이와 절름발이 여자 사이에서 난 딸이다. 그녀는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죽음을 예견하고 돈을 모은다. 나는 그녀가 믿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이 소설의 총체적인 결말을 아스라이 혼돈으로 묻어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줄광대」는 아비의 삶과 그 자식의 삶을 통해 줄 위에서 사는 이의 내면을 그리고 두 세대의 대비로 장인 정신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줄광대」를 온전히 장인 정신에 관한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깊은 듯 하다. 남 기자와 트럼펫 부는 사나이, 몸을 파는 여자에서 나는 혼돈을 둘러싸고 있는 현재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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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과제. 음 내 말투가 보이는 것도 같다.
벌레 이야기(이청준문학전집:중단편소설 10)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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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요새 나오는 소설들이 발랄함을 좋아하고 그렇기에 그러한 소설들을 치중해서 읽어왔다. 결국은 이전에 나온 진지한 소설들에 눈을 잘 돌리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런 나의 편협적인 독서 때문에 나는 진지한 글들을 읽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이청준의 단편들을 읽을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요 근래에 읽었던 이청준의 소설들은 대부분, 최근 시대 기류에 편승하고 있는 가볍고 발랄한 소설들과는 반대되는 것들이었다. 그의 소설들은 작가의 생각을 깊이 있게 전달하고 있었고(반대로, 작가의 생각이 깊이가 깊은 것일지도) 그렇기에 나는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중「비화밀교」는 내가 가장 어렵게 읽은 소설이었다.

  난해하다. 「비화밀교」를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서술하는 ‘나’ 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것을 읽는 나는 오죽하랴. 「비화밀교」는 그 안에 숨어있는 정치적 색채와 종교적 색채가 버무려져 도대체 내게 쉽게 이해할 기회를 주지 않는 소설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친구들에게 그것에 대한 질문을 내던져야 할 지경이었다.

  서술자가 작가라는 점에서 몇몇 이청준의 소설이 생각났다. 「매잡이」나 「줄광대」같은 소설 말이다. 서술자가 작가여여서 그런지 액자형 소설인가 싶었는데, 액자형의 소설은 아니었다. 다만 소설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화자는 액자형의 소설 구조를 떠올리게 했다. 쉽게 보면 주인공 ‘나’가 ‘조 선생’과 함께 고향에 돌아가 산에서 하는 비밀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이야기이지만 소설의 중심은 그 행사의 내용이다. 나는 주인공인 ‘나’가 행사에 직접적인 참여를 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고, 그렇기에 그를 중심 안에 있지 아니한 서술자로 보았다. 그가 ‘조 선생’의 말대로 자신의 소설에 행사에 대해 서술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직접적인 참여라고 보기에는 그렇게 보기에 매끄럽지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고향에서 매년 이루어지는 행사는 비밀 행사이다. 단순히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한해를 맞이하는 종류의 신년 행사가 아니기에 이 행사는 그 의미가 있다. 지방민속을 뛰어넘는 역사나 종교행사로도 볼 수 있는 이 행사는 일종의 밀교이다. 행사의 내용은 그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자신이 가진 불을 한 곳에 묻고 떠나는 것뿐이다. 그런 단순한 것임에도 누구도 그 행사에 대해서 떠벌리지 않으며 그저 조용히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은 이 밀교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밀교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이 밀교의 의미는 산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세속의 질서가 사라지고 그저 서로가 서로를 한 가지 소망으로 묶어나가는 행사라는 데 있다. 세속의 질서가 사라진다는 것은 모든 세속적인 감정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의 소망만을 바라는 존재로 거듭난다는 것인데, 모두가 이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밀교의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할 수 있다. 산 아래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을 잊고 서로의 죄를 용서하며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조 선생’의 아버지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친일파인 ‘조 선생’의 아버지는 산 아래에는 손가락질 받는 친일파이지만 산 위에서는 모든 사람들과 평등한 존재가 된다. 사람들에게 암묵적인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때, 그가 밀교에서 종화주가 되고 싶어 아들을 내세웠던 것에서 그의 죄책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밀교에서 암묵적인 용서를 받은 ‘조 선생’의 아버지는 밀교에 있을 때 그 마음의 평온함을 느끼고, 그 때문에 그 밀교의 다음을 잇는 종화주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요컨대 내가 본 밀교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현실 세계에서 모두가 그것을 잊고 평등해 지는 사회이다.

  밀교의 소망으로의 의지는 폭발을 일으키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행사의 절정 때 모두가 입속에서 맴도는 아아 소리를 낸다. 이것은 모두가 바라는 소망에로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 않은가. 모두가 바라는 소망은 그저 가슴 안에서 존재할 뿐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단 것이다. 마치 일제시대 교장에게 반항했던 무리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온전히 이 소망의 모습이 유지 되었다면 이 소설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본연의 것은 퇴색하며,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려 하는 움직임이 이는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입장의 사람들은 장화대(藏火臺) 앞에서 춤을 추며 불씨 묻기를 방해하던 청년들이다. 그들은 무언의 춤판으로 사람들에게 위협을 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나타내려 한다. 그들은 여태까지 조용하게 유지되며 소망을 가슴 속으로만 품도록 하는 밀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폭발을 대신해 기다림만을 계속하던 밀교는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기다림보다는 폭발을 택하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소망을 입속으로만 웅얼거리지 않고 밖으로 직접 내보이며, 사람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온건하게 지켜져 왔던 사회에의 개혁파의 등장. 이것은 내게 마치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보였다.

  ‘조 선생’은 ‘나’에게 이 밀교 안에서의 일은 비밀이라고 당부하면서도, 밀교 안에서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를 부탁한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가시적인 질서에서 나타나지 않는 힘,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인 밀교는 ‘조 선생’에게 아름다운 질서의 조화로 비춰지고 있다. 그렇기에 ‘조 선생’은 지금 이대로의 온건한 저항을 하는 밀교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조 선생’은 이 밀교가 온전히 유지되기를 바라는 온건파의 입장이다. 하지만 ‘조 선생’은 밀교가 언제까지나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이 밀교가 가진 음의 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이 음력의 세계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나’에게 그런 모순적인 부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소설 작가이다. ‘조 선생’의 부탁으로 쓰게 될 소설에 대해, 밀교에 대해 모르는 이라면 단순히 흥미로운 소설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밀교를 아는 이, 특히 앞선 청년들과 같은 자라면 그 밀교의 폭발을 잠시라도 막을 수 있게 된다. ‘나’로 인해 밀교가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면, 적어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힘의 조화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개혁파의 청년들은 ‘조 선생’보다 한걸음 빨랐다. 청년 중 한 명의 분신자살을 뜻하는 듯한 문장이 뒤에 나온다. 그들의 폭발은 이미 이뤄져버린 것이다. 때문에 ‘조 선생’의 바람은 너무 늦은 것이 되어서, 밀교의 정치적인 싸움은 결국 온건파의 패배로 끝을 맺는다. ‘조 선생’이 ‘나’에게 그의 생각을 털어놓는 것은 싸움의 패배로 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패배로 ‘조 선생’에게 있어 ‘나’가 쓰게 될 소설의 가치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나’는 이 내용을 소설로 서술한다.
 
  앞서 말했듯, 「비화밀교」는 난해하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과 몇 가지 주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서야 그 숨은 뜻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밀교가 가진 의미에서 종교적 색채를 보았고, 조 선생의 말들을 통해 정치적 입장의 한 단면을 보았다. 「비화밀교」는 사람들이 가진 내면의 저항과 그러한 심리를 잘 드러내 준 작품으로서 내 머릿속에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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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꼬꼬마 시절에 쓴 과젠데... 이걸 쓸 때만 해도 내가 논문 주제로 비화밀교를 선택할 줄 몰랐다. 사실은 김승옥을 쓸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차라리 벌레 이야기를 쓸 걸 그랬나 싶기도 한데... 뭐 나름대로 애착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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