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감독 나카시마 테츠야 (2006 / 일본)
출연 나카타니 미키,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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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개봉 당시에 보려고 했던 거 같은데 언제나 그랬듯 이제야 봤다. 전작인 불량공주 모모코를 꽤 재밌게 봐서 이것도 그런 식으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으 이거 무슨... 그냥 잔혹동화. 알록달록 예쁘게 환상적으로 꾸며놓았기에 받아들일 때 직접적인 고통이 덜하지만, 오히려 더 기괴하게 비틀어진 채 슬퍼보이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보기 힘들어.

  한 마디로 카와지리 마츠코(나카타니 미키)라는 여자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망가져 굴러떨어졌는지 보여주는 영화였다. 이미 카와지리 마츠코가 죽은 시점에서 조카인 쇼(에이타)가 그녀의 죽음 이야기를 들어가는 과정이라서, 결말이 정해진 탓에 보는 게 더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사랑과 희망이란 말로 포장을 해도 내겐 와닿지가 않는단 말이다. 주는 것이, 베푸는 것이 그 사람의 뭔가를 나타내주면 뭐하냐. 본인은 버려지고 채이고 얻는 게 없는데. 게다가 아픈 여동생(이치카와 미카코)만 아끼는 아버지(에모토 아키라)의 애정에 목말라 그런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한들, 이 여자가 만들어가는 인생은 자기가 자초한 게 너무나 크다. 한 번 상처 받을 때 배우는 것도 없고, 계속해서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 진짜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문제 해결 방식도 그랬고. 솔직히 초반부에 류 요이치(카가와 테루유키)와 관련하여 사건이 벌어졌을 때 처신만 잘했어도 학교에서 쫓겨나진 않았을 텐데 고 부분에선 본인 성격 탓이 너무나 커서 짜증이 폭발. 그 땐 동정도 안갔다...

  그 뒤 남자들 만나고 생활하면서 상황 판단하는 방식이 애처로울 지경. 우째 이렇게 최악의 남자만 골라서 만난단 말이냐. 작가였던 첫번째 남자 야메가와 테츠야(쿠도 칸쿠로)와의 관계는 그렇다 쳐. 폭력이나 저지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처음이잖아. 근데 두번째 샐러리맨 남자(게키단 히토리)부터가 완전 꼬였다... 그 남자한테 차였다고 업소 여자가 되는 것도 그렇고, 건달 오노데라(다케다 신지)랑 살다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것도 완전 본인 탓이지 않느냐... 이건 온전히 남자 탓만 할 수가 없다고. 그나마 착한 이발소 남자(아라카와 요시요시) 만나면 뭐해. 한 달 살고 잡혀가는데... 감옥에서도 이 남자 하나 바라보고 미용사 자격증 따는 것도 난 좀 웃겼다. 삶의 모든 이유가 애정이야. 이래서야 행복할 수가 없잖아 싶고. 기껏 사귄 친구 사와무라 메구미(구로사와 아스카)도 외로움을 이유로 쳐내버리고... 모든 진행이 안타까움. 현재가 지옥이니 더 나빠질 게 뭐 있느냐며 야쿠자가 된 옛 제자 류와 관계를 시작하는 것도, 그걸 기다리는 것도 모두 바보스러웠다. 이후 진행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그런고로 이 영화에서 받은 교훈은 하나도 없다. 진심으로 하나도 없다. 그냥 비참한 이야기를 특별한 형식으로 본 게 신기한 정도. 불쌍하고 애처로와. 근데 그게 끝이야.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듯한 이야기를 보며 대체 뭘 느껴야 하는거냐.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라고? 꺼져. 그래서 마츠코가 얻은 게 뭔데? 자기가 만든 정신학대? 그걸 가리는 자기만족?

  형식은 재밌고 영상도 즐거웠지만 그냥 불편했다.

키즈 리턴
감독 기타노 다케시 (1996 / 일본)
출연 안도 마사노부, 카네코 켄, 이시바시 료, 테라지마 스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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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하지 않는 청춘, 『키즈 리턴』

  사람에게 감명을 주는 영화는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다. 진한 감동을 주어 눈물을 쏟게 만드는 영화라던가, 강한 기쁨과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라던가. 그런 종류의 영화는 의외로 굉장히 많다. 나는 감정의 배설이 심한 편인지라 그러한 영화를 보고 쉽게 감동하는 편이다. 예술성이 하나도 없는 영화에서 감상적인 싸구려 억지를 만들어내도 나는 쉽게 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감동적인 영화를 골라보라’ 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나를 울게 하고 감동시키는 영화는 하나 둘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비단 운다거나 하는 강한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 감동을 받지는 않는다. 덤덤한 이야기가 가슴을 콱 찔러올 수도 있다. 영화를 보고 화려하게 감정을 내뱉지 않더라도 어떤 영화는 최고의 영화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영화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일본 영화 『키즈 리턴』이다.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키즈 리턴』이 아니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노라고.

  영화 『키즈 리턴』은 무척 덤덤하다. 이야기의 커다란 줄기는 이렇다. 과거의 단짝 친구였던 미야자키 마사루(카네코 켄)와 다카키 신지(안도 마사노부)는 오래간만에 재회한다. 그들은 옛 추억에 빠져 함께 자전거를 탄다. 그리고 그 둘의 과거가 펼쳐진다. 둘은 고등학교 때 유명한 문제아였다. 그들에게서 학교는 탈출하고 싶기만 한 곳이다. 그래서 결국은 탈출하고야 만다. 미야자키 마사루는 야쿠자로, 다카키 신지는 권투 선수로서 성장해 나간다. 둘 다 유망주로서 성장해 나가지만, 종당에는 파국을 맞는다.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중심 토대는 딱 저것뿐이다. 그것에 살이 되는 것은 학교생활의 모습, 야쿠자의 삶의 모습, 권투장 안의 모습이고, 곁들여지는 이야기는 그들의 친구인 만담꾼과 샐러리맨의 모습이다. 이 영화는 이해가 안될 만큼 잔잔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카롭게 찔러내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이 영화를 고등학교 때 처음 보았다. 적절한 시기였다. 수능 공부와 내신 성적과 씨름하기 바빴다. 밤에는 학원에서 새벽까지를 보냈다. 그래도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았다. 옆에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만이 가득했다. 그래서 고3 중반 즈음의 나는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공부는 영 손에 잡히지 않았고, 야간 자율학습은 밥 먹듯이 빼먹고 놀러 다녔다. 그리고 사람이 가득 찬 길거리에서, 누군가 내게 시비를 걸어오길 간절히 바랬다. 누군가 내게 먼저 시비만 걸어준다면 흠씬 패주든, 흠씬 두들겨 맞든 어느 상황이건 일어나길 바랐다. 나는 그 때 꽤 감상적인 사춘기 소녀가 되어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흘렀고, 아무도 건들지 않았음에도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사회의 모든 것에 불만을 가졌다. 문제아가 되어 마구 난동부릴 용기도, 자살할 용기도 없다고 자신에게 짜증을 냈다. 지금 생각하면 몹시 유치한 일이지만 그때는 꼭 그랬다.

  그렇게 불만이 쌓여 학교를 관둘까 하는 생각마저 하고 있을 때, 나는 『키즈 리턴』을 보았다. 영화라도 보면서 마음을 식히려는 마음도 있었고, 사실은 그냥 시간을 때우고 싶기도 했다. 고른 것도 우연히 고르게 된 것이었다. 처음엔 그저 그랬다. 영화 초반부터 흐르는 그 담담함이 싫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키즈 리턴』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두 명의 주인공들이 문제아로서 학교를 휘젓고 다니는 방식만 봐도 그랬다. 그들은 억압된 틀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려 애쓰고 있었다. 교사를 골탕 먹이거나, 길거리에서 돈을 뺏거나, 성인 영화관을 전전하는 모습들. 그리고 똑같은 장소에 서있던 나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했고 또 갈망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정화와 새로운 욕구를 느낀 것이었다. 폭발하지 못해 안달 나있던 나는 그들을 보며 그런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들이 제도교육을 벗어났을 때에는 그것이 더 했다. 드디어 거지같은 곳에서 탈출하는구나 싶었다. 그것이 비록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마사루가 야쿠자에 들어갔을 때에도(영화를 봤을 당시의 나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도 않았다.), 신지가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할 때에도 나는 마냥 보기 좋았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자신들의 억압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길로 한걸음 내딛은 것이었다. 그들이 운동장에서 한가로이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 교실 안 학생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장면이 있다. 물론 교사는 한심한 놈들 하고 내뱉고 만다. 나는 교실 안 학생들처럼 그들을 바라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승승장구했다. 중간 보스가 잠시 빠진 상황에서 마사루는 중간 보스를 꿰어 찼다. 신지는 권투에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체육관의 유망주가 내려가며, 본인이 유망주가 되었다. 그들의 인생을 참 술술 풀렸다. 나는 더욱 더 열광했다. 제도 교육을 벗어나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 나에게도 길이 보인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살고 있는 곳은 참 비정한 세계이다. 잠깐 붙여지는 그들의 친구들만 봐도 그렇다. 만담을 하는 두 아이들은 손님이 없는 곳에서 공연을 하고, 젊은 샐러리맨이 된 친구는 자살을 한다. 젊음은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성질이 몹시 고약했다. 그들은 점점 추락한다.

  마사루는 보스가 죽은 상황에서 다른 야쿠자들에게 말을 잘못하여 그것을 빌미로 추락했다. 안타까웠다. 처량한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신지가 추락하는 장면은 더 담담했지만, 더 극적이었다. 영화는 꽤 많은 부분을 권투 장면에 할애하고 있다. 권투를 행하는 장소는 체육관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인생의 여러 모습들이 담겨있다. 이제는 퇴물이 되어버린 늙은 복서, 이제 권투를 시작한 복서, 유망주가 된 복서. 그런 인생의 향연 속에서, 신지는 퇴물 선배와 함께 다니다 추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런 추락 앞에 신지는 담담하다. 첫 실패다. 그런 것 앞에서 담담한 것이다. 신지와 함께 했던 늙은 복서는 인생의 허무함과 존재의 무의미, 힘겨움에 대해 직설적으로 내뱉는다. 그가 한 말과 함께 신지의 실패는 무척 담담하게 느껴졌다. 인생의 쓴 맛을 대신 겪으며, 나는 내 가슴마저 쓰려왔다. 담담하게 느껴지면서도 가슴 한 켠이 그랬다.

  그들은 그들을 억압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들의 성공을 쫒았다. 그리고 그것은 젊은 치기와 함께 바람 불 듯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것이 슬펐으나 별 도리는 없었다. 이 영화를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때 즈음엔 영화는 새로운 결말을 내놓았다. 그 장면이 어찌나 평화로운지.

  그들은 재회 후에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탄다. 공기는 평화롭다. 교실 안의 선생님은 그들을 보며 여전히 혀를 차고, 교실 안의 학생들은 선망하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자전거를 타는 둘은 말없이 서로 교감한다. 그리고 신지가 묻는다. “우리 이제 끝난 걸까?” 마사루는 대답한다. “바보, 아직 시작도 안했어.” 그 얼마나 감동적인 대사인지. 보고 느끼지 않은 사람은 모를 대사이다. 그 말은 그렇게 불만이 가득 찬 내게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아직 젊으니까.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가득 차 있었고, 저 말은 내게 가장 용기를 북돋아 준 말이었다.

  그들은 성공하겠다는 굳은 신념,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 앞에 있는 현실을 그때그때 대처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삶 안에서 성공도, 실패도 겪는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젊은 삶의 모습이다. 나는 지금도 젊지만 영화를 볼 당시 몹시 젊었다. 주인공들을 따라 쉽게 그들의 삶을 경험했다. 그들이 결국에는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젊음과 생각 없음이 부러웠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제도권을 벗어난 그들의 행로가 분명치 않음에도 그들은 젊기에 아름답다. 젊음은 아름답다. 성공하지 못해도 가슴 쓰리며 훌훌 털어내면 되고, 불확실성에 모든 것을 거는 걸어도 아깝지 않은 이유이니까.

  나는 『키즈 리턴』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 이 영화를 찾아보며 용기를 얻는다. 이 영화 이후 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많이 극복했다. 가장 정서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매체였다. 다시 봐도 지루하지 않은 그들의 담담한 이야기. 모든 것이 꽉 막혀 있다 느낄 때 나는 이 영화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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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1학년? 2학년 때 쓴 옛감상. 나는 지금 꽉 막혀있다고 해도 이 영화를 찾지 않는다.
 
공각기동대
감독 오시이 마모루 (1995 / 영국, 일본)
출연 야마데라 쿄이치, 다나카 아츠코, 카유미 이에마사, 오오츠카 아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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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내내 지루해 했다. 유명세를 다 타고 난 후에야 접한 이 애니메이션은 정말 몹시 지루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사이보그화 등의 배경 상황은 그나마 다른 곳에서도 많이 접한 상황이라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스트 등의 알 수 없는 어휘는 뜻을 파악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고(슬프게도, 내가 뜻을 파악하지 못했어도 스토리는 흘러간다.) 스토리 진행은 더디게 느껴졌다. 거기에 나를 더욱 지루하게 만든 것은 온갖 현학적인 대사들이었다. 수월하게 이해할 수 없는 대사들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더욱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애니메이션이 나왔을 당시에는 일단 그 화려함에라도 감탄했겠지만, 나온 지 10년이 지난 이 애니메이션은 그다지 놀랄만한 효과를 보여주지도 못했다.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봤음에도, 애니메이션을 다 보고 나선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지루하게 본 영화는 보고 난 후 곧바로 잊어버리는 나이지만 왠지 계속 깔끔하지 못한 뒷맛은 영 나를 괴롭혔다. 목을 길게 빼는 것이 귀찮아 놓쳤던 자막 몇 개가 걸렸다. 질척한 느낌으로 진행되는 스토리와 애니메이션에 꼭 어울리는 소름끼치는 음악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결국은 영화를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애니메이션 안의 상황 판단이 된 상태에서 본 공각기동대는 처음 보았을 때 보다 훨씬 나았다. 자막이 보이지 않아서 놓쳤던 몇몇 대사들도 빠짐없이 보았다. 물론 대사 몇 개를 더 보았다고 해서 영화가 갑자기 쉽게 느껴진 건 아니었다. 영화는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고 생각했던 첫 번째 감상보다는 나아진 기분이었다.

  사이보그화 된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가? 아니 비단 사이보그화 된 인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가는가? 이것이 이 어렵기만 한 영화 속에서 내던지는 질문이다.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현학적 대사들은 전부 저것을 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인공인 쿠사나기는 사이보그 신체라서 가라앉아 버릴 수 있음에도 잠수를 계속한다. 온 몸이 몽땅 기계인 그녀는 그 신체로 잠수할 이유가 없다. 잠수에 대한 바트의 질문에 쿠사나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두려움, 불안, 고독, 어두움,... 그리고 어쩌면 희망? 해면으로 떠 올라갈 때, 지금과는 다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그런 느낌....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

  나는 이 대사가 이 애니메이션의 주제가 시작되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은 혼란한 미래사회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 혼란을 더욱 부각시킨다. 멋대로 기억이 조작되어 괴로워하는 청소부는 직접적인 설명이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나가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기억의 축적을 통해서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것이 교란될 수 있다는 상황을 가정해  ‘네 존재는 증명 될 수 있는가’ 하고 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과 나를 둘러 싼 기억이 모두 수정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기억이 수정된다면 기억이 수정된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어. 그렇게 이 애니메이션은 대답하는 것이다. 

 영화 어딘가에서 나온 대사 중 이런 것이 있다. 자세한 위치는 적어두지 않아서 어떤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대사의 내용으로 보아하니 아마도 쿠사나기나 인형사의 대사일 것이다. 

삶의 시작은 화학반응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정보는 기억 정보의 그림자일 뿐이지.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정신은 신경계세포의 스파크에 불과해. 육체나 두뇌가 기계로 바뀔 수 있다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인격’과 ‘기억’이라는 정보 뿐. 그런 정보들이 사라지면.. 그것을 죽음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아.

  나는 이 애니메이션의 생각에 완벽하게 동의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나의 기억으로서 더욱 명확한 내가 될 수 있다. 주변이 가지고 있는 나의 기억 또한 나의 존재를 명확하게 하는 부분일 것이다. 앞에 있던 질문을 다시 끌어다 써 보자. 만약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과 나를 둘러 싼 기억이 모두 수정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기억이 수정된다면 기억이 수정된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을 수 있을까? 완벽하게 같지는 않아도, 아주 다를 수는 없다는 게 나의 대답이다. 나는 나이고, 모든 기억은 어쨌든 나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인데 그것이 없다고 나의 존재가 부정 될 필요는 없다. 기억이 없다 하더라도 여기 내가 살아있고, 내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존재는 나의 기억을 뛰어넘을 수 있다. 오만한 생각일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말들만 늘어놓는다. 이 애니메이션이 어깨의 힘을 조금만 더 풀었다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내가 감상문에 풀어 넣은 것들이 영화가 담고 있는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래서 그 많은 내용들을 우겨넣느라 영화가 어려워 진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어깨의 힘을 조금 더 뺐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공각기동대의 후속 작으로  ‘이노센스’가 있다고 들었다. 안타깝게도 공각기동대보다 더 어렵다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언제 한번 보아야겠다. 공각기동대의 후속 작이 어떤 형태를 취하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두 번째 본 공각기동대는, 처음보다 매력적인 영화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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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릇파릇하던 대학교 1학년 때 쓴 감상. 과제 파일에서 찾았다. 신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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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슈슈의 모든 것
감독 이와이 슌지 (2001 / 일본)
출연 이치하라 하야토, 오시나리 슈고, 이토 아유미, 아오이 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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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대체 누가 추천해 준거지. 일본 특유의 감성이 미친듯이 묻어나는 영화다. 그거 까진 괜찮은데, 다루는 소재가 왕따에 관련한 것이다 보니까 보는 내내 불편했다. 10대의 나였다면 뭔가 구구절절히 느끼면서 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미 20대고, 이 영화가 참 불편했다. 시작에서부터 결말까지 내내 불편했다. 왕따를 시키는 아이의 심리변화라던가, 일종의 복수의 과정, 여자아이들의 대처. 모든 것들에 긍정하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그게 전형적인 일본 10대의 태도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의 내게는 모든 것이 변명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처음부터 하스미(이치하라 하야토)의 비참한 현재 상황을 보여주고, 행복했던 예전의 과거 모습을 보여줘서 그런지 보는 내내 입맛이 썼다. 하스미는 현재에서조차 완전한 피해자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그 세계 안에서 가해자의 입장 도 취하고 있다는 게 참 현실적이었다. 좋아하는 여자애인 쿠노(이토 아유미)를 창고로 보내면서 엉엉 울던 장면은 짜증도 났지만 이해도 됐달까.

  호시노(오시나리 슈고)는 짜증날 수밖에 없었던 게, 과거 자기가 당했던 상황을 다른 아이에게 복수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키나와 여행에서의 익사할 뻔한 사건이나 여행 당시 만났던 남자의 죽음 이후 뭔가 호시노 안에서 각성한 건 알았는데, 그럴 거면 좀 긍정적으로 하던가. 피동적이었던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휘어잡은 것은 좋지만, 그것을 위해 하는 일들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호시노가 원조교제를 시키던 츠다(아오이 유우)가 자살한 뒤 릴리 슈슈의 노래를 들으며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그 심정이 이해간다기 보다는 화를 증폭시켰다. 결과적으로는 그래 놓고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호시노가 느꼈던 건 자기 세계 안에서의 일일 뿐 겉으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릴리 슈슈의 세계 안에서 아오네코로써만 착한척하고, 실제 호시노는 똑같았다. 피리아, 혹은 하스미에 의한 호시노의 종말도 결국은 그가 초래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

  츠다가 참 안쓰러웠다. 츠다의 경우에는 기대고 있던 자가 겨우 하스미였으니까... 현실을 따진다면 자신에게 고백해 온 남자애에게 도움을 취했어야 겠지. 거기에 하스미에게 빌린 릴리 슈슈를 들으면서 그녀의 자살은 더욱 부추겨진 느낌이다. 쿠노의 경우 정말로 당당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머리를 밀고 교실에 돌아왔을 때 놀란 것은 반 아이들 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모자를 쓰고 당당히 생활하는 그녀의 모습이 좋았다. 츠다도 그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릴리 슈슈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모여 인터넷 상의 세계에서 대화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뭐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말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잘 보면 영화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부분도 많아서... 릴리 슈슈의 에테르 같은 것들? 에테르를 받아들이던 때의 아이들은 정말로 모두 우울하고 결과적으로 부정적은 결말을 맞지만, 릴리 슈슈를 포기해 버린 시점의 하스미나 드뷔시의 음악으로 자기를 달래던 쿠노의 경우 살아남는다. 그들을 달래주던 것을이 결국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 같아서 아이러니했다.

  장면이 재미있던 게 있었는데, 마지막 즈음에 하스미가 자살시도하려는 듯한 장면들. 집에서의 장면과, 어머니 미용실에서의 장면. 하스미 내면의 갈등을 잘 드러내주고 있어서 좋았다. 어느 정도 웃음을 주기도 했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하스미는 쿠노의 드뷔시를 들으며 자기 자신에게 삶의 의지를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영화였다. 모르겠다 나쁘다고 평할 수는 없는데 참 힘들었다. 보고 나서 힘든 게 아니라, 보는 내내 힘들었다는 느낌. 나는 이제 이런 감성을 즐기기엔 커버렸나보다.



메종 드 히미코
감독 이누도 잇신 (2005 / 일본)
출연 오다기리 죠, 시바사키 코우, 타나카 민, 니시지마 히데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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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보면 퀴어영화인데, 퀴어영화보다는 화해... 인간적 해소. 그런 것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스토리는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다.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게이 아버지를 둔 사오리. 사오리는 명백한 호모포브이다. 아버지는 히미코. 히미코는 늙어서 게이들만의 양로원인 메종 드 히미코, 곧 히미코의 집을 만든다. 그러나 죽어가는 상황. 사오리는 히미코의 애인인 하루히코의 꾐으로 우연찮게 히미코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의 게이들과 생활해 나가면서 패그해그로 전환한다. 

  영화에서는 사오리가 패그해그로 전환하는 모습이 인간적인 설득력을 담아서 진행한다. 때문에 때때로 웃음을 짓게도, 울상을 짓게도 만든다. 히미코의 애인인 하루히코가 가지는 불안감과 욕심들의 모습도 적당히 설득력 있었고, 그 때문에 사오리에게 인간적 관심을 더 쏟게 되는 것도 이해할 만 했다. 중간 즈음에 옷을 갈아입는 장면, 집단 군무 장면이 특별히 재밌었다. 사오리에게 손을 못 대는 하루히코를 보면서는 조금 특별한 감정을 느꼈고.

  영화는 참 깨끗하다. 밝은 화면과, 어둡지 않은 화해의 이야기. 소외된 한 집단의 이야기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즐겁게 풀어나가진다. 중간 중간 겪게 되는 시련들은 그다지 크지도 않았고... 나는 나름 깔끔하고 정돈된 영화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보는 내내 즐거웠다. 보고 나서 어떤 감정에 시달린 것도 아니었고. 그냥 말끔한 영화.
 
  조리되지 않은 깔끔한 영화. 일반적인 틀에서 나올 수 있는 깔끔함. 나는 좋았다.


스윙걸즈
감독 야구치 시노부 (2004 / 일본)
출연 우에노 주리, 칸지야 시호리, 토요시마 유카리, 모토카리야 유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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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로 보고싶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볼 기회가 생겼고 보기 싫은것도 아니어서 봤다. 깔끔한 느낌. 딱 기대한 만큼의 이야기였다. 여태까지 나온 이런 류의 음악과 별 다를 바는 없었다는 느낌. 그래서인지 일본 영화 특유의 느낌이 덜 났다. 뭐 딱히 일본풍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 상관 없지만. 덕분에 일본 영화인거 별로 의식 안하고 본 듯.

  우에노 주리는 말만 많이 들었지 처음 봤다. 양갈래 머리 어울리지 않아... 다른 아이들은 다 날라리 차림인데 왜 혼자서 저 양갈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배우 얼굴도 내 타입은 아닌듯. 그래도 뭐 연기는 볼 만 했다. 주연배우 네명 중 조정린 닮은 소녀 몹시 눈에 띤다. 낄낄. 캐릭터가 강한 느낌이랄까. 음악선생(진카마 말고)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기억이 안난다. 신주쿠 여고생 납치사건에 나온 사람이랑 헷갈리는건가? 그러면서도 찾아보기는 귀찮다. 아아. 게으름.

  스토리 무난, 배우 무난. 기대한 수준, 기대한 만큼의 영화.


하나와 앨리스
감독 이와이 슌지 (2004 / 일본)
출연 스즈키 안, 아오이 유우, 카쿠 토모히로, 히로스에 료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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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위에 잠을 못자고 있을때, 케이블 TV에서 하길래 보았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는 처음. 배우들은 어떻게 다 아는 배우들이었다. 하나 역의 스즈키 안, 앨리스 역의 아오이 유우, 미야모토 마사시 역의 카쿠 토모히로. 조연들도 많이 눈에 띄는 얼굴들이 많았고. 아베 히로시라던가, 히로스에 료코가 나올 때는 깜짝. 나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안봐서 얼굴을 몰랐는데, 남자 주인공인 오오사와 타카오가 사진기사 역으로 출연했다. 

  스즈키 안의 얼굴은 예쁘다. 그런데 왜 만날 내가보는거에서는 선머슴 같은 애로만 나오는지 모르겠다. 덥수룩하고, 털털맞고. 여기서도 그랬다. 그래도 귀엽긴 하지만. 근데 이 영화에선 좀 짜증났다. 실제로 이런 캐릭터가 있다면 몹시 싫어할 것 같다. 어려서 순간적으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는건 알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으면 나오는 행동들이라는것도 잘 알겠는데... 아, 그래도 질색. 

  아오이 유우의 얼굴도 예쁘다.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에서 볼때보다 좀더 성숙한 느낌의 얼굴. 아 귀여워. 귀여워. 왜 앨리스인가 했는데, 아리스가와 테츠코 라는 이름에서 아리스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앨리스는 아리스라고 부르니까. 그치만, 아오이 유우는 예쁘지만! 그래도 앨리스 역시 쵸큼 짜증나는 캐릭터인건 사실... 당최 주관이라고는 없는 놈 같이 보였으니까. 미야모토를 아버지와의 추억과 연계해서 바라보는 것 같다.

  아, 주인공인 이 두놈은 내 시선에 곱지만은 않다. 내가 이런 시절을 지냈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드라마 스탠드 업에서 카쿠 토모히로가 스즈키 안을 겁탈해 스즈키 안이 카쿠 토모히로를 무서워 했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스즈키 안이 카쿠 토모히로를 좋다고 따라다니니까 조금 웃겼다. 카쿠 토모히로는 아무리 봐도 토마를 닮았다.
  이야기 진행과 상관없는 듯한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또 그게 은근히 연계되어 있어서 재미있다. 아버지가 중국어를 가르쳐주게 되는 상황 같은게 그렇다. 그리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끼워넣는 다른 상황들도 즐거웠다.

   일본 영화 특유의 밋밋함이라던가, 허전한 느낌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 이 영화에선 그런 장면이 꽤 많다. 그래도 왠지 꿋꿋히 보게 하는 면이 있었지만. 영화 전반적인 느낌은 풋풋한 사과. 10대 청춘들의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은 듯 하지만 복잡하다. 그런 미묘한 심경이 잘 깔려있다. 그냥 귀엽다. 짜증이 났던 것들은 내가 아직 제대로 된 성인이 아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우울한 청춘
감독 토요다 토시아키 (2001 / 일본)
출연 마츠다 류헤이, 아라이 히로후미, 타카오카 소스케, 야마자키 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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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이 언제인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올해 이 영화를 보았고, 당시의 나는 정신적으로 꽤 많이 지쳐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를 한번 보고 푹 빠져들었으며 일주일 동안 이 영화를 여섯번쯤 보았다는 것.
  어쩌다가 고하토라는 영화를 알게 되어서 그 영화를 보았었다. 고하토는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사무라이들의 동성애 이야기이고- 칸느 영화제에 출품되었다지만, 상당히 지루한 영화였다. 거장이 만든 영화 치고는 맥빠질 정도인데다가 일본 정서 특유의 내용 전개는 이해 불가. 그 맥빠지는 영화의 히로인으로 나온 것이 우울한 청춘에 나오는 마츠다 류헤이이다. 고하토 영화 자체에서는 그닥 큰 흥미를 얻지 못했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적어도 마츠다 류헤이라는 사람은 발견했다.
  첫 연기라고는 하지만 무리없이 연기하는 모습- (사실 고하토 자체가 매니악한데다가 그 중에서 가장 매니악한 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묘하게 사람을 이끄는 독특한 외모. 나중에 알게 된 그의 집안내력. 결국 마츠다 류헤이라는 사람에게 이끌려서 그가 나왔다는 다음 영화를 보았다. 그게 이 우울한 청춘이다.

  우울한 청춘은, 10대의 이야기다. 삼류 고등학교의, 삼류 학생들의 이야기. 세상이 보기에 '불량'인 소년들의 이야기. 속없어 보이는 그들에게도 자신만의 세계는 구축되어 있고 껍질같아 보이는 그들에게도 녹아있는 우정이 있다. 그리고 10대에 겪게 되는 사회와의 혼란과 내적 성장의 이야기.. 그것들을 어떠한 여지 없이 잘 표현해준 영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용 부분에서는 이야기가 매끄럽지 진행되지 않는다던가 하는 단점이 있지만, 그 어떤가.
나는 이 영화처럼 공감하고 이 영화처럼 미친듯이 영화에 빠져들어 본 적이 없다.

"꽃은 피는 것이다."
(하나와 사쿠모노다.)

라는 난쟁이 교장 선생님의 대사가 머릿속에 남는다. 나도 피어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가, 몇번이고 생각했다.

"꽃은 피지 않을거예요. 검은 꽃이라면 몰라도."

라고 말하던, 쿠조의 대사도. 응. 저 말에도 공감해버렸다.

"같이가, 쿠죠. 응?"

하고 말하던- 아오키의 대사도. 이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영화 내용 자체는 희망적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이것은 이 영화가 토요다 토시아키 감독의 우울함 시리즈-첫번째는 포르노 스타, 두번째는 우울한 청춘, 마지막이 나인소울즈 이다.-의 일부라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렇지만 마지막에 꽃이 활짝 피어나는 장면이 계속해서 나오는 클로즈업 장면에서는 모순적이게도 나는 희망을 얻는다.
  모든것에서 방황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인물은 역시 쿠조라고 생각한다. 그가 옥상에서 박수를 칠때 하늘을 바라보는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친구를 바라보는 동경의 시선에서 버림받아 변하는 아오키의 모습은 공감이 가는 모습. 아라이 히로후미 또한 참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발전 가능성이 아주 큰.
  토요다 토시아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참으로 음악을 잘 활용했다. 영화 O.S.T는 THEE MICHELLE GUN ELEPHANT의 노래가 대부분인데, 이 노래라는 것이 화면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내지르듯 가슴을 피게 하는 미쉘건의 노래가 장면 장면마다 참 잘 활용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O.S.T음악은 네가지인데 그 중 두가지가 영화의 묘미를 가장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음악 중 한가지는 赤毛のケリ-(붉은 머리의 켈리)인데, 처음 부분 즈음 아이들이 옥상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그들이 내려오는 모습을 잡을 때 사용되었다. 그 장면에 이 음악이 얼마나 잘 어울렸는가는 참 설명하기 힘들다. 다른 한가지는 ドロップ(드롭). 이것은 영화 마지막 부분에 사용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검은 영상이 내려오면서도 이 음악은 계속되고, 마지막 숨겨진 컷 하나가 나온다. 노래의 가사는 자세히는 잘 모른다. 나의 짧은 일어 실력으로는 자세히 번역하기 힘드니까. 그렇지만 마지막의 그 우울함과 희망이 뒤섞인 미묘한 상황을 가장 잘 혼합해 주고 있다. 처절하게 울고 싶으면서도 끝내 희망을 놓을 수 없는 그 상황을..

  최근의 나는 힘들다.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다시, 보고싶다. 몇번이라도. 혼란함을 겪고 있는 10대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우울함만을 발견해서는 안된다. 여러가지 상황이 뒤섞인 가운데서 나타나는 그 얄팍한 희망을 쥐어야 한다. 그것이 이 영화가 영화를 보는 이에게 던져주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04.09.11
전에 네이버 블로그에 있던 것인데, 꽤 감상적이다. 고3때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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