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천운영 (문학과지성사, 2004년)
상세보기

  추천받아서 산 책인데 내 취향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똑같이 기괴한 소재라고 해도 한강의 '어느날 그는'같은 건 굉장히 느낌이 좋았는데, 이 소설집에 실린 몇 개의 단편은 소재는 내 취향인가 싶다가도, 다 읽고나면 그렇게 찝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찝찝한 느낌이 소설집 전반에, 모든 소설 안에 있기 때문에 이건 천운영 본인의 느낌인 것 같다. 확고하게 밀어붙이는 천운영만의 감성이 있는데 이게 썩 나와 맞는 것 같지는 않다. 꼭 내가 졸졸 따라붙어도 별 대답을 내어주지 않는 무심한 표정의 여자를 만나는 느낌이다. 그런데 난 그녀의 속마음이 빤히 보인다. 뭐 그런거?

  주인공들은 꼭 뭔가가 결핍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소설들 안에서 느껴지는 욕구, 욕망에 대한 절박함이 있다. 어떻게 보면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모습인데 이게 내게는 불편하다. 간절하고 절박하게 뭘 갈구하고 있는데 표정은 안 힘들다, 난 괜찮아. 그러고 있는 것 같다. 속이 문드러진 담담함이 나는 싫다. 근데 못썼다는게 아니라 그냥 내 취향에 안 맞는 거다. 소설 자체는 마음에 든다. 느낌이 싫어서 여러 번 읽기는 싫은 거. 그 와중에도 '멍게 뒷맛' 같은 건 몇번이나 들춰봤지만...

명랑
늑대가 왔다
멍게 뒷맛
모퉁이
세번째 유방
어버지의 엉덩이
입김
그림자 상자


  '명랑'이라는 제목 때문에 명랑한 내용인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진통제 이름이야. 힘이 없어진 할머니, 억척스럽게 살고 있는 엄마, 어딜 가야할 지 모르는 백수인 나. 전체적으로 '나'의 시점에서 관찰되고 있는데 나름의 서늘한 긴장감이 좋았다.

  '늑대가 왔다'는 불쾌한 동화를 읽는 기분이었다. 꼬질꼬질하고 때묻은 채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 여자아이를 생각하면 불편한 기분이 든다.

  '멍게 뒷맛'은 철저한 열등감 속에 갇힌 주인공 여자 때문에 흥미로웠다. 모두가 이런 심정을 완벽히 100퍼센트까진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다른사람에게 느껴본 적이 있을 것 같다. 이 여자는 좀 더 극단적이었고 찌질했다. 사실 문을 안열어준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만, 그 뒤의 행보들이 좀. 어울리면서도 웃긴.

  '모퉁이'는 묘하게 마음에 들었었던 소설. 어린아이 시점에서 보여지는 가족의 모습이 썩 달갑지 않으면서도 파고드는 맛이 있었다. 인상적인 문장이 있는데,

네 엄마는 참 예뻤어. 키도 크고, 새침데기였지. 어떻게 해서든 네 엄마랑 결혼하고 싶었다. 아빠는 결혼식 사진을 보며 말하곤 했다. 나는 아빠가 말한 '어떻게 해서든'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모퉁이」, 『명랑』, 천운영, 문학과지성사, 2004, p. 103

이거다. 담담한 느낌으로 읽다가 소름이 쫙 끼치더라.

  '세번째 유방'은 어쩔 수 없이 '모퉁이'의 오빠가 주인공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것보다도 이 남자의 결핍된 삶이 그냥 좀 불쌍했다. 마지막에 그런식으로 폭발하게 된 것도 안타깝고.

  '아버지의 엉덩이'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밝지 않나 싶은데... 할머니니가 죽은 뒤 남겨진 나와 아버지 사이의 모습이 좋았다. 팽팽한 줄타기를 하는 듯하던 나의 심리가 점차 안정적인 느낌으로 이동해나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초반에 아버지가 할머니의 무덤을 타고 오르는 장면이 독특하게 느껴졌었다.

  '입김'은... 음... 엄청 소름끼치고 불쾌하다기보다는 그냥 힘이 쭉 빠진다. 그런 내용이었다. 사채를 끌어다 쓰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텅 비어 보였다. 돈보다도 가족을 잃은 게 더 큰 것 같았다. 그렇게 건물과 하나된 사내의 절망의 깊이가 엘레베이터 통로 만큼이나 어둡고 깊어보인다.

  '그림자 상자'는 가족에 상처입은 남녀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뭐 읽으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좀 비정상적이 되어버린 여자와, 그런 여자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된 남자. 연애 이야기는 아닌데 둘의 공통점을 보고 있노라면 둘이 통하는 부분이 많겠다 싶기도... 여자가 느끼는 공복은 식욕보다는 다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가족에 대한 감정이라던가) 느껴지는 공복이겠지...

  모르겠다. 아 내 느낌은 아냐! 하고 몸서리쳐지다가도 또 마음에 드는 구석도 분명히 있는 이상한 소설집.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