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만이과일은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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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지넷 윈터슨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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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모던 클래식 판본 너무 좋다. 종이가 가벼워서 쓱쓱 잡히고 크기도 적당하고...

  이 책을 왜 샀더라. 암튼 모던클래식에서 나온 책들 보다가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랑 이 책중에 고민하면서 샀던 것 건 기억난다. 세라 워터스의 소설들을 읽은 직후라 레즈비언 문학이 읽고 싶었던 것 같기도... 물론 살 때에도 세라 워터스랑 완전 다를 건 각오했다. 그건 역사소설이자 연애물이었고, 이건 개인의 성장기에 가깝다.

  레즈비언으로서 정체성을 자각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일반 성장 소설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두드러지는 가정사 때문이었다. 입양아인 지넷의 엄마는 기독교 원리주의자. 이 쯤되면 답이 나오는 상황 아닌가. 원리주의자들과 함께 하며 자라난 지넷이 그 틀에 온전히 복종하고 있다가 그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뭐 그런 이야기인데... 내 생각보다는 충격이 좀 없었다. 묘사가 자기 성향에 대해 그렇게 큰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어린 시절 이후의 이야기를 큰 시간라인에 따라 진행시켜서 감정이 썩 잘 드러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성장통보다는 그 성장에 초점을 둔 이야기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고난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설명되는 것들의 중점이 거기 있는거 같지 않았다.

  지넷보다 엄마 캐릭터에 더 집중하게 된다. 아무래도 캐릭터가 엄청나게 강렬하다보니까 어쩔 수 없었다. 보기만해도 소름끼치는 인물상이지만 소설 안에서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지넷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약간 안타깝기도 했다.

  중간 중간 끼워진 우화 형식의 이야기들은 본래의 이야기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말할 순 없지만 적당히 연관되어 있다. 따로 읽어봐도 무방하지만 본래 이야기를 생각하며 읽으면 더 재미있음.

  작가의 자전소설에 가깝다. 물론 어느 정도 허구가 섞여 있기야 하겠지만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지넷이고, 똑같이 입양아에다가 기독교 원리주의자 어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소설 후반부에 지넷이 고생했던 이야기는 별로 없이 집에 돌아와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이야기만 있어서 똑같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작가 본인의 환경이 없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 소설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책장은 잘 넘어가고, 집안 환경에 관한 부분 때문에 즐겁게 읽긴 했음. 마음에 아주 쏙 들 정도는 아니었고. 이것보다 더 기대를 했었나보다.
핑거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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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세라 워터스 (열린책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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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기무니에게 빌려서 읽은 세라 워터스의 소설. 벨벳 애무하기에 이은 레즈비언 3부작 중 하나인데, 나머지 한 권은 언제 발매가 될지 모르겠다. 좀 됐으면 좋겠는데요...

  일반 사람들에게 레즈비언 문학을 추천하라면 벨벳 애무하기 보다는 이 소설을 추천할 것 같다. 벨벳 애무하기 쪽이 연애담으로서 훨씬 더 재미있었지만 아무래도 좀 강렬하니까. 가볍게 이 소설로 시작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소설이 가볍다는 소리는 아님. 1부 끝나고 나오는 반전에서 너무 놀라서 문자했을 정도니까. 2부 시작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의 전말인 인물에 대해서는 정말 충격받았었고... 굳이 레즈비언 소설이 아니더라도 미스터리 소설로서도 좋았다.

  핑거스미스는 도둑을 뜻하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은어. 교수형을 당해 죽은 어머니를 가진 핑거스미스 수전은 석스비 부인의 손에서 자라난다. 석스비 부인은 자기가 맡고 있던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수전을 정성들여 키우고, 수전 또한 런던의 빈민가에서 자란 거 같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수전의 앞에 젠틀먼이 나타난다. 젠틀먼은 번듯한 사기꾼으로 종종 석스비 부인의 집에 들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결혼을 해야만 재산을 받을 수 있는 부잣집 딸 모드 릴리를 꼬셔서 재산을 가로채는 일을 하려 한다. 그리고 이 계획에 수를 필요로 하며, 수는 석스비 부인에게 한몫을 안겨주기 위해 이 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그렇게 모드의 집에 가게 된 수는 연약하고 지켜줘야 할 대상인 모드를 맞이하고, 그녀와 수족처럼 붙어있으며 점점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모드를 정신병원에 집어넣는 길까지 이어지는 둘 사이의 고뇌는 참 볼만했음. 삼촌의 손에서 억눌리며 자란 모드의 속이 드러나는 2부 이후로는 회상의 느낌이 강했었다. 교차편집이 되었다면 더 보기 편했겠다만, 1부 마지막의 반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듯. 2부에도 나름의 반전이 있는데 1부의 그것이 너무 격심해서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수는 석스비 부인의 보호탓인지 주변 환경에 비해 머리를 못쓰는 느낌이 있었다. 독한 느낌도 그렇게 크지는 않고, 나쁜 짓을 좀 할 수는 있어도 속 마음까지 악한은 아닌 느낌. 모드는 반대로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연약하지만 강단이 있어보였고. 다만 갈수록 그 강단이라는 게 사라져가는 모습이라 보기 아쉬웠다. 똑똑한데, 세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는 헛똑똑이였던지라 어쩔 수 없었다.

  수와 모드를 빼면 젠틀먼과 석스비 부인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인데, 난 젠틀먼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번듯한 악역은 정말 좋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가리지 않으면서 자기를 번듯하게 꾸밀 줄 알고, 또 어느 정도의 예의도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곁에 있으면 얄밉겠지만 보는 재미가 있는 악역. 석스비 부인은 마음에 안들었던게 이리저리 선악 사이에 걸쳐있는 느낌이 있어서. 차라리 끝까지 일관되었다면 좋았을텐데 싶었다.

  총 3부로 나뉘어 있지만 1부 끝날때 까지가 가장 재미있었고, 뒤로 갈수록 그 재미가 감소하는 느낌이 드는 게 아쉬웠다. 특히 갈등의 해결파트가 좀 약하지 않았나 싶다. 모드와 수가 오해를 푸는 과정이 좀 이해가 덜 되더라... 드러나는 인물 중 누구를 봐도 하고 싶은 말은 그러게 사람은 정직이 중요한 거예요. 정도...?

  재미는 벨벳 애무하기 쪽이 더 있긴 한데, 이 책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벨벳애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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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세라 워터스 (열린책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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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무니에게 빌려서 읽기 시작. 처음에는 약간 시큰둥한 느낌으로 책장을 넘겼는데 (역사소설이 재미있을까?) 와... 1장 읽으면서 가슴 터지는 줄 알았다. 난 내용 하나도 모르고 보기 시작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이건 낸시 애슬리의 레즈비언으로서의 성장기. 그렇지만 인간으로서의 성장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낸시 자체가 소설 끝날즈음엔 꽤 철이 들어있다. 일단 얼굴만 밝히지 않아요... 아무튼 끝까지도 꽤, 아니 사실 엄청 재미있었다.

  1장, 2장, 3장으로 나뉘어서 낸시의 인생이 얼마나 널뛰며 변화하는지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1장이 제일 재밌긴 했다. 로맨스 소설 읽는 기분이었다. 레즈비언판 로맨스 소설... 심지어 잘 쓴. 남장 가수였던 키티 버틀러에게 한 눈에 반해 그녀를 쫓고,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기까지의 장면은 진짜 여느 로맨스 소설 뺨치는 긴장의 연속. 이게 낸시의 시점이다 보니까 감정이 절절하게 전해들어와서 또 좋더라. 촌뜨기 소녀였던 낸시가 사랑때문에 런던에 가며 인생이 확 바뀌어나간다.

  다이애나를 만나기 전 까지 낸시의 삶은 그다지 풍요롭지 않았고 어찌 보면 비참하기 까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낸시에게 완벽한 풍요와 향락을 가져다 준 다이애나를 만난 뒤의 일이 썩 즐겁게 보이지만도 않았다. 돈 많은 과부의 애인이 된 낸시의 모습은 완벽한 애완동물이었다. 예쁨받지만 자신의 의견을 낼 수도, 존중받을 수도 없었다. 화를 낸다 치더라도 한낯 어린애의 화처럼 치부됐을 뿐이지. 제나와 그렇게 사고를 친 게 잘했다는 말하려는 건 아니다. 애초에 낸시 자체가 썩 도덕적이지 않은데다 캐릭터가 철 없을 나이의, 철 없는 애인지라 좀 열받게 하는 구석이 간간히 있긴 했다. 그래도 그렇게 된 데에는 다이애나의 탓이 절반은 넘는다고 생각. 뭐 낸시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없긴한데, 이 부분은 그랬다.

  플로렌스를 만난 뒤 낸시는 레즈비언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완성된다. 그렇게나 철없던 그녀가 처음에는 살려고 발버둥치고, 플로렌스의 집에 들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탕아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더라. 처음엔 플로렌스의 캐릭터 역시 썩 마음에 들진 않았는데(아 죽은 사람 붙잡고 살다니 이게 무슨 말이요), 갈수록 좋아졌다. 상처를 가지고 있는 만큼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질투하는 모습도 나름 귀여웠고... 둘 사이 연애가 크게 꼬이지 않아서 다행. 서로 솔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난 굉장히 재미있게 봤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추천하기 난감할 것 같다. 앞서 말했듯 생각보다 자세하게 묘사되어서. 퀴어문화에 조금 열려있지 않으면 난관일 듯. 그걸 감당할 사람에게라면 추천. 너무너무너무 재밌다. 핑거스미스도 완전 기대중.
마틴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데일 펙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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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자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책 중 한권. 퀴어문학이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고 하기엔 가슴에 애틋하게 남는 응어리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주제가 헤어짐 혹은 사랑을 할 때 느끼는 부푼 감정, 그것이 빠져나가는 과정 들을 그리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단편집이라고 해야할까... 각각의 에피소드는 독립되어 있지만, 기묘하게도 유기성을 띄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마틴과 존』안에 있는 각각의 소설들에서 주인공들은 항상 마틴과 존이며, 주변 인물은 비, 수전, 헨리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마틴이 부자건, 길에서 만난 십대 소년이건, 지금 욕조에서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이건 간에. 혹은 존이 또 다른 인물이건 간에 그들은 항상 마틴과 존이다.

  단편들은 각각 그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이 행복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속이 쓰렸다. 행복한 이야기도 얼마 없거니와, 행복하다고 방심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항상, 그리고 영원히」같은 단편에서는 행복한 모습을 내내 보여주더니만은 마지막 강도들의 습격 탓에 기분을 잡쳐버리고 말았었으니까. 이 단편은 묘하게 뒤쪽에 위치한 「빌어먹을 녀석, 마틴」이라는 단편과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을 주었다. 「빌어먹을 녀석, 마틴」은 이 단편집 내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는데, 이미 마틴이 죽어버린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 외에도 존이 헨리와 맺고 있는 관계, 수전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절절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변모」와 「바다의 끝」이 아닐까 한다.
「변모」의 경우 처음에는 그 소재 탓에 껄끄러운 감이 있긴 했다. 양아버지와 같은 상대와 미성년자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렇지만 어머니의 하룻밤 상대였으며 아버지의 죽음 뒤 피폐해진 어머니를 돌봤던 애인 마틴과, 아들인 존 사이의 감정이 기묘하게 잘 나타나 있다. 중간에 있는 그 짧은 성애 장면에 대한 묘사는 나까지도 숨죽이게 만들었다. 소설 마지막의 존이 마틴에게서 받은 편지 구절이 아른거렸다.

  나는 오늘 그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편지는 수개월 전에 부친 것이었지만, 네 개의 다른 주소지를 경유하여 내게로 왔다. 마치 편지의 내용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지도 모른다. 비록 글의 맥락이 닿지 않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도, 그런게 있다고 한다면, 주의 깊게 찾아내야 했지만 말이다. 이 편지의 끝부분에는 어떤 절박함 같은 게 있었다. 동시에 모호한 점도 많았지만.
  "사랑하는 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니?"

「변모」, 『마틴과 존』, 데일 펙, 민음사, 2008, pp.101-102

  『마틴과 존』안의 소설이 대부분 내 속을 쓰리게 만들었지만, 「바다의 끝」의 경우엔 달랐다. 겨우 세쪽의 이 짧은 소설은 정말 산뜻하고 둥실거리는 사랑의 기쁨을 그 안에 담아냈다. '사랑이 언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짧은 물음으로 말이다. 사랑은 존이 느끼는 것 처럼 육체를 나누는 밤, 그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틴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아침에 존재한다. 나는 이 논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사랑은 아침에 존재하는 거야."
  마틴이 다시 내 귀에 그 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내 귀에 갖다 대고 젖은 손으로 내 등을 위아래로 쓸어 주며 나로 하여금 더 이상 아무것도 원치 않게 만들었다.
  "긴 밤을 함께 보내고 나서 맞이하는 아침에."
  내 귀 아래에서 그의 심장이 피의 강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생각에 나의 일부는 떨렸고, 나의 일부는 따뜻했다.

「바다의 끝」, 『마틴과 존』, 데일 펙, 민음사, 2008, pp.175-176

  단편집인데도 생각보다 더디게 읽었다. 슬며시 소재 탓으로 돌려본다. 재미있고, 언제 또 꺼내 읽겠지. 아, 그리고 소설 안의 묘사들이 신기한 것들이 많아서 좋았다. 독특하면서 와닿는 표현들을 많이 본 것 같다.
싱글맨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그책,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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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자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퀴어문학 3종 중 하나. (나머지는 마틴 앤 존, 모리스. 셋 다 내가 골랐다.) 이 책이 가장 얇기도 했고, 세 책 중 가장 읽고 싶었던 것이기도 해서 아르바이트 가는 길에 집어들었다. 오며가며 하는 시간에 다 읽었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진 건 당연히 영화 싱글맨 때문. 내가 콜린 퍼스도 좋아하고 니콜라스 홀트도 좋아하고 하다보니까 영화에 대해 알게 되었었다. 개봉하면 보러 가야지... 했는데, 개봉 전에 어째 원작을 먼저 읽게 되었다. 좋은 걸지 나쁠 걸지는 영화를 보고 나서 판단해야지. 하지만 책을 읽은 결과, 영화가 몹시 보고싶어졌다. 이 내용을 도대체 어떻게 각색했는지 너무 궁금해서.

  배경은 1962년의 미국. 주인공은 58세의, 이제 막 같이 살아오던 동성애 파트너를 잃은 영국인 교수 조지. 처음엔 1인칭 소설인 줄 알았는데 3인칭이다. 시종일관 조지는 -한다. 라는 투라서 1인칭이라고 생각해도 거의 무방했다. 책 한권이 조지의 하루 아침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의 이야기. 그만큼 묘사가 자세하고도 또 내용이 섬세하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한 조지의 내면을 보고 있자면 나까지 약해져버리는 기분이 든다.

  교통사고로 파트너 짐을 잃고, 이제는 나이까지 먹어버린 몸뚱아리로 혼자만의 고독한 삶을 이어가는 조지의 인생은 처음부터 무겁고 짓눌려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조금조금씩 느낌이 바뀌긴 하지만 케니를 만나게 되기 전까지는 전체적으로는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게 짐의 빈자리는 너무나 크다.

  집, 고속도로, 학교, 도리스의 병실, 체육관, 슈퍼마켓, 샬롯의 집, 케니를 만나게 되는 바, 집으로 이어지는 조지의 하루 여정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이나 길고 인내를 요구한다. 하지만 동시에 흥미롭다. 이 하루 동안에 나는 조지가 지금 생각하는 일들 뿐 아니라, 최근에 겪은 일들까지 전부 알 수 있으니까.

  소설에 담긴 모든 것을 어떻게 풀어내기가 힘들다. 이건 한 꺼져가는 인간의 삶의 불꽃이 어떻게 흔들리느냐의 문제같았다. 다만 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침의 집과 도리스의 병실. 나머지 부분이야 조지의 늙고 힘든 몸뚱아리를 가누기 위한 여정에 기댄 바가 컸지만, 이 부분은 짐과 연관되어서 가슴 시리게 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략) 이렇게 작은 집에서 조지는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낀다. 외로움을 느낄 빈 공간이 없으니까.
  그래도……
  매일, 해마다, 이 좁은 장소에서, 작은 스토브 앞에 팔꿈치를 맞대고 서서 요리하고, 좁은 계단에서 간신히 서로 스쳐 지나가고, 작은 욕실 거울 앞에서 함꼐 면도하고, 계속 떠들고, 웃고, 실수든 고의든, 육감적으로, 공격적으로, 어색하게, 조급하게, 화나서든 사랑해서든 서로 몸을 부딪은 두 사람을 생각하라. 두 사람이 곳곳에 남긴, 깊지만 보이지 않는 길들을 생각하라! 주방으로 가는 문은 너무 좁다. 손에 그릇을 든 두 사람이 서둘러 가면 이 문에서 부딪치기 십상이다. 거의 매일 아침 계단 아래를 내려온 조지가 자기도 모르는 새 갑자기 참혹하게 꺾인 듯, 날카롭게 갈린 듯, 길이 산사태로 사라진 듯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늘 처음인 양 또다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짐은 죽었다. 죽었다.
  통증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선 채로 꼼짝도 않는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혹은 기껏해야 짐승의 끙끙소리를 짧게 뱉는다. 그런 뒤 주방으로 걸어간다. 이 아침의 통증이 심인성일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럽다. 통증이 지난 뒤에는 약하게나마 안도감을 느낀다. 심한 경련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것과 비슷하다.

『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그책, 2009, pp.10~11

  내가 다 아팠던 묘사. 일상적인 부분에서의 상실감이 너무 잘 드러나 있었다. 책 중간중간 아픈, 그런 부분들이 있다. 담담하게 짐의 죽음을 전해듣고, 5분만에 샬롯을 찾아가 엉엉 울었던 조지의 모습이라던가.

  결말은 오히려 오늘의 조지에게 어울리는 일일런지도 모른다. 도리스를 방문했고, 샬롯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안했고, 케니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욕망을 다시 한 번 일깨웠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남은 것도, 남을 것도 없다.

거미 여인의 키스(세계문학전집 37)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마누엘 푸익 (민음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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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후...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냐. 마지막에 울었다. 짧게 전달되는 사실 한 줄에 숨이 턱 막혔다. 몰리나, 몰리나... 아름다운 몰리나. 그리고 발렌틴. 그들이 감옥 안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는. 영화는, 사상은, 감정은. 뭐라 정리할 수 없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몰리나밖에 떠오르지 않아. 죽겠다. 너무너무 슬퍼. 1부 끝나고 나서 몰리나에게 느꼈던 감정들은 2부가 끝나고 나서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래 몰리나에게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랬지만. 미치겠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영화들이 매력적이다. 몰리나의 시각에서 재창작되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훨씬 더 감성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캣피플과 같은 스릴러조차 몰리나에게 전달받을 때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치의 홍보 영화조차 몰리나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전달된다. 나는 몰리나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몇 몇 이야기는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고, 몇 몇 이야기는 본래 있는 영화라고 한다. 많이 각색 되었지만... 여섯 종류의 이야기를 볼 때 각각의 주인공들에게 발렌틴과 몰리나를 넣어서 볼 수 있다.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빠져버린 것도 볼 수 있다. 나치 선전물속의 레니는 아무리 봐도 몰리나다. 매혹의 오두막에 나오는 못생긴 하녀도 몰리나이다. 마지막 싸구려 멜로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그녀도 몰리나이다. <내가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답니다…… 내 마음을 빼앗아 갈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멀리 있으나…… 가까이 있으나 항상 당신을 그립니다……> 모두가 다른 이야기인데, 모두가 몰리나와 발렌틴의 이야기야. 본 바탕이 확실한 영화는 세 개. 캣피플, 매혹의 오두막, 좀비와 함께. 그렇지만 보지 않아도 상관 없다.

  초반엔 동성애자인 몰리나(내가 보기엔 트랜스젠더 같기도 한데, 흠.)를 무시하던 발렌틴이 점점 변화하는 과정이 경이롭다. 물론 몰리나의 엄청난 희생정신, 부족한 자존감 따위가 발렌틴의 비참한 상황과 맞물려 벌어진 일이지만... 정말 꽉 막혀있던 발렌틴이 변화하는건. 그가 대화를 통해 마음을 열어서이기도 하지만, 몰리나의 정신이 너무나 대단해서. 남자를 최고로 알고, 남자이면서도 자신을 여자로 생각해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몰리나. 그런 몰리나를 이제는 그러지 말라 설득하는 발렌틴. 둘이 섹스하는 장면도 그렇거니와, 마지막에 몰리나의 부탁으로 키스하는 장면은.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한 채로 헤어나오질 못한다. 몰리나는 언젠가부터 가브리엘보다는 발렌틴을 위주로 생각하고 있었지... 그가 말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몰리나와 가브리엘이 아니라, 몰리나와 발렌틴이었어. 마지막 장면, 고문을 당해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발렌틴이 보는 환상들은. 그가 몰리나에게 가지는 죄책감의 크기는. 거미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은. 아아 몰리나...

  발렌틴이라는 게릴라와 몰리나라는 동성애자를 통해 그 시절의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 그런 것도 이해가 안 되는 바 아니지만. 나는 왜 그런 현실보다 발렌틴과 몰리나가 교감하는 감정들에게 시선이 가는 것일까. 좋았다. 굉장히.

「내가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좀 내버려둬 달라는 말이야. 내가 더 이상 현실을 비관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미치기를 원해? 하긴 난 이미 미친년이니까」
「그래, 솔직히 말하면, 네 말도 맞아. 여기서 네가 미칠 수도있어. 하지만 그것은 네가 현실을 비관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네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지금 네가 하는 행동처럼 말이야. 네가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만 생각하는 네 태도는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단 말이야」
「왜 그렇지? 그렇지 않아」
「그렇게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마약처럼 해로운 거야. 내 말 좀 들어봐. 네 현실, 바로 네 현실은 단지 이 감옥만이 아니야. 이 감옥을 뛰어넘어 생각해 봐. 내 말 알겠지? 그래서 난 책을 읽고 하루 종일 공부하는 거야」

「그래. 그리고 나도 살아 있어…… 그런데 내 삶은 언제부터 시작하지? 언제가 되어야 내가 내 것을 만질 수 있고, 내 것을 가질 수 있지?」

「행복하다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면 더욱 고통스럽지 않을까?」
「몰리나, 한 가지 명심해 두어야 할 게 있어. 사람의 일생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지만, 모두 일시적인 것이야. 영원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그래, 맞아. 하지만 조금 더 오래가는 것은 있어」
「우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 좋은 일이 일어나면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하기는 쉬워. 하지만 그걸 진정으로 느낀다는 것은 다른 문제야」
「그러면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자기 자신을 납득시켜야 되는 거야」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옳아매는……」
「아주 멋진 말인데! 그 말, 정말 맘에 들어」
「……」
「내 생각 많이 할거야?」
「너한테 많은 것을 배웠어…… 몰리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난 멍청인데……」
「행복하게 지내길 빌어. 그리고 나를 좋은 놈으로 기억해 주길 바래. 나도 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나한테 뭘 배웠지?」
「설명하기 아주 어려운 것이야. 하지만 나한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주었어.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네 손은 항상 따뜻해, 발렌틴」
「네 손은 항상 차고」
「발렌틴, 너한테 한 가지 약속할게. 널 떠올릴 때마다, 난 행복할 거야. 네가 나한테 가르친 대로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해 줘…… 다른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 않도록 행동하고, 아무도 널 함부로 다루게 하지 말고, 착취당하지도 말아. 그 누구도 사람을 착취할 권리는 없어. 한 얘기 또 해서 미안해. 전에 한번 말했는데, 넌 그 말을 별로 달갑게 여기질 않았어」
「……」
「몰리나, 남한테 무시당하면서 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그래, 약속할게」

마르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이 말만은 당신한테 할 수 없었어, 당신이 그것을 물어볼지 몰라 두려웠고, 그러면 당신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았어, <아니에요, 사랑하는 발렌틴,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이 꿈은 짧지만 행복하니까요.>

마누엘 푸익, 『거미 여인의 키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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