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09 -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 존 르 카레 (열린책들, 2005)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2011 / 영국,프랑스,독일)
출연 게리 올드만,콜린 퍼스,톰 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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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렛 미 인의 팬이라는 건 이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 된다. 한국에서 그다지 흥행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 그럴만 하다 라는 생각을 했다. 감독의 전작은 그렇다치더라도, 원작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스파이'라는 소재를 듣고 007 시리즈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영화는 액션이 난무하고 박진감 넘치는 스파이 영화가 아니다. 박진감이라는 게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은 내 딴에는 아주 조용히 숨을 죽이고 감상해야 했던 그런 영화였다. 원작을 봐서 모든 걸 알고 있었음에도 연출 방식과 전개 방식에 만족한 편이었다. 아, 그래도 짐 프리도(마크 스트롱) 캐릭터의 사소한 변화에 관해서는 섭섭한 마음이 남아 있기는 하다만...

  게리 올드만이 조지 스마일리에 캐스팅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잘 어울리겠다 생각은 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더 마음에 들었다. 카를라를 회상하는 조지 스마일리의 모습은 책 속의 그것이었는데, 아무튼 회상 장면 하나 없이 그를 떠올리는 게리 올드만의 연기가 탁월했다. 좁은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세월과 짙은 피로가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장면이랑, 피터 길럼(베네딕트 컴버배치)이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우는 장면. 짧은 데도 참 인상에 남더라.

  피터 길럼 하니까, 피터가 자료실에서 자료를 빼오는 장면도 좋았다. 최대한 덤덤하게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면 얕은 수를 가장 교묘하게 썼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거 너무 잘해서 좋았음. 그 와중에 긴장할 만큼 긴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고. 이 첩보 시리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건 조지 스마일리가 아니라 피터 길럼이었기 때문인가 보면서 더 애정을 주었던 것도 같다.

  책보다는 영화가 더 액션이 있었다. 그렇다고 물론 다른 스파이 영화처럼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책에서 읽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특히 리키 타르(톰 하디)의 작전 과정과 짐 프리도의 고문 과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리나(스베트라나 코드첸코바) 캐릭터 다뤄지는 거 보고서 깜짝 놀랐다. 아니 뭐 이리나를 이리저리 곱게 다뤄주어야 한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좀 놀랐다.

  정보국 고위 간부급에 침투된 스파이를 찾아내는 만큼 그 고위 간부급 캐릭터들도 가볍게 다뤄질 애들이 아니었는데... 로이 블랜드(시아란 힌즈)는 좀 심심하긴 했는데 나머지는 다 좋았다. 뻔뻔스러운 신사 느낌의 빌 헤이든(콜린 퍼스)야 말할 것도 없고, 무거운 인상으로 하지만 머리를 가장 많이 굴리고 있을 것 같은 퍼시(토비 존스)도 좋았고... 의외로 가자 좋았던 건 토비 에스터헤이즈(다비드 덴칙). 어떻게 보면 가장 먼저 조지에게 걸려든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 때의 연기도 발군이었고ㅎㅎ 난 이런식으로 비굴할 때 비굴한 캐릭터들이 사랑스럽기도 해서 그른가.

  범인 밝혀졌다고해서 우와! 뭐 이런 건 전혀 없었다. 내가 미리 책 읽어서는 아니고... 그냥 내용이 그랬다. 누가 봐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 범인이 드러나기 직전까지 장소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들 누가 범인인가, 누가 범인인가 이거에 집착하진 않게 되지 않았을까. 범인이 누구냐보다는 범인이 왜 그런 길을 선택했느냐가 더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그 분은 뻔뻔스레 잘 해내더라. 하지만 동시에 그 설명을 들으면서 그렇게 느낄 만도 하다는 수긍이 간다면 나쁜 것일까.

  콘트롤(존 허트)이 살아있을 때의 마지막 파티 장면이 계속 교차되는데 정보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캐릭터가 보여지기도 하고, 동시에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을 내면의 복잡함까지도 보이는 편집이었다. 짐 프리도와 빌 헤이든, 조지 스마일리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또 달랐고.

  별거 아닌데 리키 타르 영화 내에서 제일 젊은 데 제일 촌스러웠다. 뭐 임마... 하긴 젊은 애들이 유행을 따르는 법이겠지요.

렛 미 인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 스웨덴)
출연 카레 헤데브란트, 리나 레안데르손, 페르 라그나르, 헨릭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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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다 본다 하다가 이제사 다 봤다. 뱀파이어 물인지도 모르고 봤다가, 초반을 조금 본 후에서야 알았다. 최근 뱀파이어물을 보고 싶어서 난리치던 차에 더 잘됐다 싶었다.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스웨덴 영화다. 배경은 눈덮인 설원만이 기억에 남는, 특별하게 화려하진 않은 영화였다. 그래도 인상적이게 잔혹한 장면이 꽤 있고 조용함 속에서 그런 모습들이 더욱 부각됐다. 영화의 조용하면서도 뭔가 스산하게 스려있는 듯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쨍한 눈밭은 되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느낌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뱀파이어 공포 영화라기 보다는 소년과 소녀가 만나서 성장하는 이야기 쪽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 같다. 잔혹한 장면이 없지는 않은데, 주인공들이 만나서 서로 교감하고 서로를 아끼게 되는 과정들이 아주 좋았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 주변에 아무도 없는 오스카르(카레 헤레브란트)와, 지켜주는 보호자 호칸(페르 라그나르)가 죽은 후의 12살(혹은 그보다 더, 덜한)짜리 뱀파이어 엘리(리나 레안데르손). 서로를 의지하며 자라나는 이 소년소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모스 부호 같은 것을 통해 대화하던 것, 큐브를 통해 마음을 나누기 시작하던 것... 수영장에서 오스카르의 손을 잡으며 끌어내던 엘리의 표정이 가장 좋았다.

  가장 인상적이던 장면은 엘리가 뱀파이어인 것을 알게 된 오스카르가 조금 냉정하게 구는 부분이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는 엘리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던 오스카르. 그에게 "초대해 달라."고 말하던 엘리. 강아지를 들이듯 손짓으로 엘리를 들여놓았을 때, 엘리는 그 분노를 속으로 참아내듯 온 몸에서 피를 쏟아냈다. 뱀파이어의 '초대' 방식에서 기인한 결과였지만, 나는 그 상태에서도 엘리가 오스카르를 죽일 수도 있었고 생각한다. 엘리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오스카르를 그만큼 아꼈기 때문이 아닐까. 배신감 또한 컸던 것을 것 같다. 다행히 그 뒤로 둘은 잘 풀렸지만.

  영화에서 살인은 무차별적이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딱히 선악에 따라 판단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짐승의 본능처럼 엘리는 사냥을 하고, 엘리의 보호자 또한 그랬다. 엘리는 오스카르에게 "당한만큼, 당한 것보다 더하게 갚아줘라."라고 가르쳤다. 이건 완전히 자연계 법칙이고, 엘리의 삶은 완전히 그 규칙 안에서 굴러가는 것 같다. 엘리의 살인에는 어떠한 가치 판단도 들어있지 않다. 오스카르를 괴롭히던 패거리를 죽일 때 빼고는 엘리의 살인에 어떤 법칙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살기 위해 살인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은 오스카르도 엘리와 비슷하기 짝이 없어서, 엘리 말대로 오스카르 또한 "죽일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살해했을 것" 같다.

  시놉시스 소개에는 호칸이 엘리의 아버지처럼 소개되어 있던데, 원작에서는 다르다. 엘리의 연인같은 존재라고 해야하나. 하지만 엘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쨌건 영화에서도 그다지 아버지 같은 구석은 없었고... 어쩌면 오스카르가 커서 호칸 같은 존재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음 아니겠찌.

  마음에 들었다. 조용한 마을에서 큰 소동이 조용한 것처럼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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