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보르헤스전집 2)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민음사,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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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니, 글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머릿속에 펼쳐진 것은 당연히 미로였다. 여러 방향으로 꼬여 있어서 빠져나오려면 한참을 애써야 하는. 그런 미로에도 길은 있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의 정원은 결코 끝이 나지 않는 시간의 미로이며 삶의 미궁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아주 옛날에 봤던 프로그램 하나를 떠올렸다.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어떤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주고 그 중 한 가지를 선택했을 때의 결과를 각각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대부분 앞부분에서 선택하게 되는 아주 작은 선택 때문에 당착하게 되는 극과 극의 결말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한번 쯤 하는 후회에서 나오는 ‘내가 전에 이런 식의 선택을 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간단한 물음을 이야기로 풀어낸 셈이었다. 이런 심리를 건드리고 있었기에 궁금증을 자극하는 면이 강하고 내용적 측면에서도 꽤 재미가 있었기에 인기가 많았던 기억이 난다.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인생극장’에서 건드렸던 그 물음을 근본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소설은 처음 부분에서 리차드 메든이라는 영국 군인에게 쫒기고 있는 중국계 독일군 스파이인 유춘의 상황을 설명하며 그 때문에 그가 선택하게 되는 방향, 그리고 그로 인한 만남과 뒷마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그의 선조 취팽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적절한 배경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 안에서의 유춘은 자신의 대장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어떤 것이든 그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은 후에 그가 만나게 되는 스티븐 알버트와의 만남에 필연성과 개연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유춘의 조상인 취팽의 기이한 책은 책 자체로서 결말이 나지 않는 소설이다. 책과 미로를 합쳐 놓은 듯한 이 책은 결말이 나지 않으며 그 플롯 또한 복잡해 그냥 읽었을 때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취팽이 남긴 편지에서는 <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모든 미래들이 아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알버트는 <다양한 미래들(모든 미래들이 아닌)>이라는 구절에서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의 무한한 갈라짐을 연상하고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의 정체를 알아챈다. 정원은 공간적인 것이 아닌 시간적인 것으로, 소설의 복잡한 플롯은 이로 인해 기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취팽의 소설은 어떤 일을 했을 경우에 일어나는 후일에 대한 경우의 수를 모두 차용함하고 그 차용된 사건들도 또 다시 분화해 나가면서 가지를 뻗어나가 종당에는 그것들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진 길들이 있는 정원을 만들어 낸다.

  소설 안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다루고 있는 취팽의 이 책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을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을 떠올렸다고 했다. 요컨대, 나는 이 소설이 현재의 시간과 선택의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취팽은 뉴턴과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을 믿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뉴턴과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이란 이러하다. 뉴턴이 보는 시간은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과 절대적 시공 안에 모든 실재가 존재하는 시간이며 쇼펜하우어의 시간은 개인적이고 특별한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공통적으로 이 두 사람은 시간을 절대적인,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취팽이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는 시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시간 안에 있는 사건들과 인물들을 통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취팽의 소설, 나아가 보르헤스의 이 소설은 현실에서 내가 어떠한 일을 선택함으로 인해 발생되는 사건들의 분화 속에서 미래의 시간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예는 소설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살인이라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다. 만약 앞부분에서 빅토르 루네베르크가 죽지 않았더라면 유춘이 알버트를 살해할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알버트와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 죽게 됨으로서 알버트가 죽게 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은 시간과 그 사건에 의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또 유춘은 알버트를 죽이기 전 현실과 다른 시간을 잠시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유춘과 알버트가 존재하는 현재의 시간과 다른 또 다른 시간(곧, 취팽이 생각하는 개념의 시간)을 보여주는 보르헤스의 소설적 장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현실은 수많은 필연성이 결집한 결과물이다.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는 ‘아 내가 그때 이러저러 했다면 지금 이렇지 않았을 텐데.’라는 후회는 과거의 선택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하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개인적으로 취팽의 시간개념에 공감을 하는 편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수많은 우연과 필연으로 결집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이 소설은 소설 안 취팽이라는 인물이 쓴 소설과 유춘이라는 인물의 예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선택, 그에 따른 삶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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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이거 굉장히 짧은 단편인데 지금 봐도 재밌다. 『픽션들』 안에 있는 짧은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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