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이청준문학전집:중단편소설 6)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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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광대」라는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딱히 이청준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청준의 소설 중에서도 유명한 소설인지라 읽어볼 기회가 제법 많았었기 때문에 읽게 된 것이었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무슨 소리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애를 먹었었다. 그렇기에 나중에 학교에서 그 주제가 ‘장인 정신의 발로’라고 배웠을 때 그러려니 했었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작품을 깊게 볼 만한 지식은 없었고, 배우려는 열정도 많이 부족했다. 거기에 허 노인의 모습에서는 확실히 장인정신과 같은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쉽게 받아들였던 것도 같다.

  몹시 오래간만에 다시 읽게 된 「줄광대」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일전에 그저 주입식으로 배웠던 ‘장인 정신의 발로’라는 주제가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은 왜일는지. 그것은 「줄광대」를 처음 읽었던 때의 나보다 조금 더 생각의 깊이가 깊어졌기 때문일까. 이전에는 쉽게 넘어갔던 것들이 자세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저 글자를 읽어 내리기에 바빴던 독서 습관이 슬그머니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나의 무지를 핑계로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 테니까.

  액자형 구조로 되어있는 이 소설은 남 기자를 서술자로 내세움으로써 시작을 하는데, 그러면서도 액자 안의 제 3자인 트럼펫 부는 사나이를 통해 틀 안의 이야기를 전달받는 것이 조금 특이하게 느껴졌다. 내게 액자 안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액자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그 안의 인물이(그것이 비록 제 3자일지라도)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직접적인 등장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안 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었다. 액자의 틀을 구성하는 또 다른 인물인 여자에 대해서 나는 처음에는 이 여자가 그저 부수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여자를 접할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통해 소설에 깔려있는 복선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속 알맹이인 액자 내의 이야기는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이 액자 속에는 액자 틀에도 존재하는 트럼펫 사나이가 등장하고,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허 노인과 그의 자식 운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액사 속은 크게 이렇게 나뉜다.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서술에 따라 이야기는 허 노인과 그의 자식 교육, 그리고 허 노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하나의 액자 속이 완성된다. 그리고 뒤이어 또 다른 이야기로서 운의 사랑과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다른 액자 속이 완성 된다. 똑같은 과거의 이야기인데 이렇게 둘로 나눈 의도는 무엇일까? 나는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두 부자의 죽음을 비교하게끔 만들려 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허 노인의 죽음과 운의 죽음은 그 모습이 몹시 일치하는 듯 하면서도 미묘한 구석에서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허 노인은 오직 줄 위에서만 살아온 줄광대이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줄타기 신념이 있고, 그것을 평생 지켜 나간다. 서커스단의 단장에게 혼이 나더라도 자신의 줄타기 법을 바꾸지 않는 것도 그렇고, 아내가 죽은 그 날 이외에 줄을 타지 않은 날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신념은 굉장히 독선적인 모습이 될 수도 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장인정신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아들 운에게 줄타기를 가르치는 모습에서 그의 신념의 모습이 잘 나타나는데, 이를 지켜보면 허 노인은 단순히 줄 위에서 노는 광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평생을 줄타기만을 위해 바쳐온 그는 이미 광대가 아닌 한 명의 장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단순히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모습이 있는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에서는 그저 줄 위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은 것이지만, 허 노인의 죽음이 단순히 그런 실수에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의 죽음의 명확한 이유에 대해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허 노인이 말했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줄광대는 줄 이외의 곳에 발 디딜 데가 없다고 한 것 말이다. 운에게 모든 것을 전수한 그는 줄 위에 두 명의 광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발을 일부러 헛디딘 것이 아닐까. 과도한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내가 허 노인에게 느끼는 그의 장인 정신은 이러한 부분에서 나온 것이니까.

  반면 운의 죽음에서는 나는 허 노인과 같은 장인 정신을 보지는 못했다. 줄 위에 있는 그는 그저 광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만 같다. 허 노인이 죽은 뒤 그도 허 노인과 같이 줄을 탔지만, 결국은 한 여자에게 빠짐으로서 그 줄에서 떨어지고 말았지 않은가. 처음에는 허 노인의 뒤를 이으려는 듯 보였지만 결국 그는 허 노인과 같은 장렬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 듯 하다. 절름발이 여자가 그가 무섭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은 이제 줄을 탈 수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고 줄을 탈 수 있었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말이다. 이것이 허 노인과 운의 차이를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허 노인은 줄광대로서 온전히 그 장인 정신을 평생을 통해 발휘했고, 죽음에서 마저도 그의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그러나 운은 사랑에 빠짐으로 인해 바른 줄타기를 버리고 한낱 광대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앞서 나는 허 노인의 죽음과 운의 죽음은 그 모습이 몹시 일치하는 듯 하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한 어긋남은 그 둘이 가졌던 장인 정신의 차이였다. 그렇다면 일치한다 생각하는 부분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나는 그것을 운의 마지막 줄타기에서 찾는다. 자신의 줄 타는 모습만을 좋아했던 절름발이 여자를 위해 마지막으로 줄타기를 하고 죽는다. 그의 죽음은 쉽게 보면 여자에게 빠져 이루어진 하찮은 종류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한 운의 줄타기에서 비장한 그 무엇인가가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운의 비장함은 내게 허 노인과 운을 동일시해서 보게 했던 유일한 것이었다.

  트럼펫 부는 사나이가 전하는 줄광대의 이야기는 남 기자를 복잡한 심경으로 이끈다. 나는 이 이유를 트럼펫 부는 사나이가 가진 죄책감에서 찾는다. 내게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말은 꼭 고해성사처럼 들린다. 그가 하는 말은 자신의 죄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운의 죽음의 원인인 절름발이 여자가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아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복선에서 그의 죄책감을 느낀다. 그가 남 기자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덜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아내가 절름발이 여자였다는 복선은 속으로 많이 감추어져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트럼펫 부는 사나이가 마을에 정착한 이유 등을 통해 그의 아내가 누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액자 틀에서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을 찾는다. 바로 트럼펫 부는 사나이와 절름발이 여자 사이에서 난 딸이다. 그녀는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죽음을 예견하고 돈을 모은다. 나는 그녀가 믿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이 소설의 총체적인 결말을 아스라이 혼돈으로 묻어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줄광대」는 아비의 삶과 그 자식의 삶을 통해 줄 위에서 사는 이의 내면을 그리고 두 세대의 대비로 장인 정신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줄광대」를 온전히 장인 정신에 관한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깊은 듯 하다. 남 기자와 트럼펫 부는 사나이, 몸을 파는 여자에서 나는 혼돈을 둘러싸고 있는 현재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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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과제. 음 내 말투가 보이는 것도 같다.
밤은 노래한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연수 (문학과지성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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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일을 다루는 것만큼 어려운 소설이 어디에 있을까.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일들을 역사를 통해 간접체험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체험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김연수의 장편소설 「밤은 노래한다」는 1930년대 민생단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나는 근현대사를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민생단 사건을 알지 못했다. 오로지 김연수의 시선을 통해 이 민생단 사건을 처음 알 게 된 것이니, 기초 정보가 좀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다 읽은 뒤 나는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민생단 사건 자체는 소설의 소재이며 배경이 될 뿐, 전체적인 이해를 방해하는 것임이 아님을 말해준다.

  「밤은 노래한다」는 시대적 상황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혼돈 속에 갇힐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인 김해연을 내세운다.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서 처참하게 부서져간 사람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할 뿐 아니라,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을 통해 개인의 삶이 입게 된 피해를 말하고 있다. 단순히 개인의 삶이 타인에 의해 휘몰아치듯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무게가 더해지는 느낌이 있다.

  이정희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나름의 액자식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정희가 죽기 전까지 김해연은 그저 사랑에 빠진 남자였을 뿐이다. 그 전까지 그에게 자신이 처한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정희를 만나게 됨으로 인해 그는 이데올로기를 접하며 그를 통한 현실인식을 하게 된다. 주인공인 김해연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때문에 왜? 라는 물음이 많다. 이정희가 죽은 이유를 캐물어가던 것을 시작으로, 김해연은 지속적으로 그의 삶 주변의 굴레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그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사실 같았던 거짓이었음을 발견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는 그때까지 현실인식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이, 질문을 하다 막혀버린 시점에서는 그는 목을 매단다. 가까스로 살아났을 때엔 운명적으로 이정희가 가졌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맞닿은 인물들을 또 다시 만나게 된다. 새로운 연인이라 할 수 있는 여옥과의 만남도 그에 맞닿아 있다. 길고 긴 침묵의 시간을 깨고 나왔을 때, 이 때 어쩌면 김해연은 다시 평범한 삶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질문을 하다 막혀버렸던 그 때처럼, 평화로운 길은 다시 막혀버린다. 여옥과 떠나기 위해 준비했던 모든 것들과 함께, 김해연의 삶은 다시 평화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이데올로기에 심취하여, 이제까지 무시하였던 현실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게 된다.

  사회주의 이념에 푹 젖은 사람들과 그들의 생산적인 삶은 독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답답한 구석이 있다. 그들은 사회주의 이념의 논리를 믿고 그를 굳게 따르지만, 사실 그들이 원하는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혹은 사회주의 이념의 진짜 논리가 무엇인지는 모른 채 무작정 그것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집단논리에 매혹된 사람들처럼 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사실 본질적인 사상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그저 집단을 따르고, 집단이 옳지 않다 하면 자신도 그것을 무작정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논리는 생과 사의 기로 앞에서 의외로 쉽게 허물어지기도 한다. 마치 그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알리려는 듯이.

  「밤은 노래한다」는 이정희와 박길룡, 안세훈, 박도만이라는 네 청소년들이 어떤 신념을 가지게 되면서 그를 통해 어떻게 살아가는 가에 맞닿아 있기도 하다. 「밤은 노래한다」는 어떤 이념적 바탕을 주장하는 소설이 아니다. 다만 이를 통해 그에 얽힌 사람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 수 있는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시작은 넷의 이야기였을지언정, 마지막에 가서는 수백 명의 사람이 얽힌 이야기가 된다.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김해연 외의 다른 사람들까지 전부 다 얽힌 커다란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 모두가 바로 우리가 입이 닳도록 말하는 민족이 되고, 그들의 사고가 뭉쳐 이데올로기가 된다.

  나는 한 민족이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어떤 색 없이 하나의 민족으로 묶인다는 것을 다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단주의 논리 또한 내게는 거북한 것이 된다. 그리고 「밤은 노래한다」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모종의 불편함은 이런 데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다수의 논리가 잘못 적용될 때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사고가 굳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밤은 노래한다」는 민생단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기보단 그를 통해 작가가 생각하는 논리를 전달하려 한다. 모든 것의 바탕에 있던 개인적 인물인 김해연이 어떤 식으로 커다란 민족의 덩어리에 얽매일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김해연의 시점을 통해 세밀하게 그려내 이를 통해 집단주의의 폐단을 그려낸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김해연이 맑시즘을 잘 수용하여 그를 통해 새로운 발전을 이루어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밤은 노래한다」는 거기까지 이뤄내진 않는다. 다만 하나로 뭉쳤던 민족이, 어떻게 가장 안 좋은 방식으로 와해되는가를 보여주며 그에 섞여 혼란을 겪는 김해연의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김연수는 이런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 자질구레한 설명 대신 김해연을 등장시켰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김해연을 통해 그를 처참한 사지로 내몬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이정희와의 로맨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해 주는 장치이지만 그와 동시에 김해연의 개인적 삶을 민족의 삶으로 끌어들인 것이기도 하다. 내게도 그렇고 일반 독자들에게 있어서도 많은 설명보다 이런 전달 방식이 주제를 말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밤은 노래한다」의 주제와 맞닿아 있는 소재는 민족이다. 그리고 이 소설이 현재에 이르러 가지는 가치 또한 여기에서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단일민족을 강조하며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이다. 집단주의가 좋은 식으로 발휘되기도 하지만, 좋지 않은 방식으로 발현되는 일 도한 허다하다. 문제는 이런 굴레를 그 굴레를 쓰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마치 일이 다 벌어진 후에 무언가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았던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밤은 노래한다」를 통해 우리를 가두고 있으며, 자신의 생각이라 착각하게 만들어 우리의 행동을 제어하는 집단의 굴레를 돌아보고, 그것을 벗어나는 시도를 해 보는 것 또한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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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였는데 무슨 개소리를 쓴건지.....
벌레 이야기(이청준문학전집:중단편소설 10)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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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요새 나오는 소설들이 발랄함을 좋아하고 그렇기에 그러한 소설들을 치중해서 읽어왔다. 결국은 이전에 나온 진지한 소설들에 눈을 잘 돌리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런 나의 편협적인 독서 때문에 나는 진지한 글들을 읽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이청준의 단편들을 읽을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요 근래에 읽었던 이청준의 소설들은 대부분, 최근 시대 기류에 편승하고 있는 가볍고 발랄한 소설들과는 반대되는 것들이었다. 그의 소설들은 작가의 생각을 깊이 있게 전달하고 있었고(반대로, 작가의 생각이 깊이가 깊은 것일지도) 그렇기에 나는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중「비화밀교」는 내가 가장 어렵게 읽은 소설이었다.

  난해하다. 「비화밀교」를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서술하는 ‘나’ 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것을 읽는 나는 오죽하랴. 「비화밀교」는 그 안에 숨어있는 정치적 색채와 종교적 색채가 버무려져 도대체 내게 쉽게 이해할 기회를 주지 않는 소설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친구들에게 그것에 대한 질문을 내던져야 할 지경이었다.

  서술자가 작가라는 점에서 몇몇 이청준의 소설이 생각났다. 「매잡이」나 「줄광대」같은 소설 말이다. 서술자가 작가여여서 그런지 액자형 소설인가 싶었는데, 액자형의 소설은 아니었다. 다만 소설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화자는 액자형의 소설 구조를 떠올리게 했다. 쉽게 보면 주인공 ‘나’가 ‘조 선생’과 함께 고향에 돌아가 산에서 하는 비밀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이야기이지만 소설의 중심은 그 행사의 내용이다. 나는 주인공인 ‘나’가 행사에 직접적인 참여를 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고, 그렇기에 그를 중심 안에 있지 아니한 서술자로 보았다. 그가 ‘조 선생’의 말대로 자신의 소설에 행사에 대해 서술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직접적인 참여라고 보기에는 그렇게 보기에 매끄럽지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고향에서 매년 이루어지는 행사는 비밀 행사이다. 단순히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한해를 맞이하는 종류의 신년 행사가 아니기에 이 행사는 그 의미가 있다. 지방민속을 뛰어넘는 역사나 종교행사로도 볼 수 있는 이 행사는 일종의 밀교이다. 행사의 내용은 그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자신이 가진 불을 한 곳에 묻고 떠나는 것뿐이다. 그런 단순한 것임에도 누구도 그 행사에 대해서 떠벌리지 않으며 그저 조용히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은 이 밀교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밀교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이 밀교의 의미는 산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세속의 질서가 사라지고 그저 서로가 서로를 한 가지 소망으로 묶어나가는 행사라는 데 있다. 세속의 질서가 사라진다는 것은 모든 세속적인 감정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의 소망만을 바라는 존재로 거듭난다는 것인데, 모두가 이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밀교의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할 수 있다. 산 아래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을 잊고 서로의 죄를 용서하며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조 선생’의 아버지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친일파인 ‘조 선생’의 아버지는 산 아래에는 손가락질 받는 친일파이지만 산 위에서는 모든 사람들과 평등한 존재가 된다. 사람들에게 암묵적인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때, 그가 밀교에서 종화주가 되고 싶어 아들을 내세웠던 것에서 그의 죄책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밀교에서 암묵적인 용서를 받은 ‘조 선생’의 아버지는 밀교에 있을 때 그 마음의 평온함을 느끼고, 그 때문에 그 밀교의 다음을 잇는 종화주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요컨대 내가 본 밀교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현실 세계에서 모두가 그것을 잊고 평등해 지는 사회이다.

  밀교의 소망으로의 의지는 폭발을 일으키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행사의 절정 때 모두가 입속에서 맴도는 아아 소리를 낸다. 이것은 모두가 바라는 소망에로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 않은가. 모두가 바라는 소망은 그저 가슴 안에서 존재할 뿐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단 것이다. 마치 일제시대 교장에게 반항했던 무리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온전히 이 소망의 모습이 유지 되었다면 이 소설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본연의 것은 퇴색하며,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려 하는 움직임이 이는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입장의 사람들은 장화대(藏火臺) 앞에서 춤을 추며 불씨 묻기를 방해하던 청년들이다. 그들은 무언의 춤판으로 사람들에게 위협을 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나타내려 한다. 그들은 여태까지 조용하게 유지되며 소망을 가슴 속으로만 품도록 하는 밀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폭발을 대신해 기다림만을 계속하던 밀교는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기다림보다는 폭발을 택하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소망을 입속으로만 웅얼거리지 않고 밖으로 직접 내보이며, 사람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온건하게 지켜져 왔던 사회에의 개혁파의 등장. 이것은 내게 마치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보였다.

  ‘조 선생’은 ‘나’에게 이 밀교 안에서의 일은 비밀이라고 당부하면서도, 밀교 안에서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를 부탁한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가시적인 질서에서 나타나지 않는 힘,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인 밀교는 ‘조 선생’에게 아름다운 질서의 조화로 비춰지고 있다. 그렇기에 ‘조 선생’은 지금 이대로의 온건한 저항을 하는 밀교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조 선생’은 이 밀교가 온전히 유지되기를 바라는 온건파의 입장이다. 하지만 ‘조 선생’은 밀교가 언제까지나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이 밀교가 가진 음의 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이 음력의 세계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나’에게 그런 모순적인 부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소설 작가이다. ‘조 선생’의 부탁으로 쓰게 될 소설에 대해, 밀교에 대해 모르는 이라면 단순히 흥미로운 소설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밀교를 아는 이, 특히 앞선 청년들과 같은 자라면 그 밀교의 폭발을 잠시라도 막을 수 있게 된다. ‘나’로 인해 밀교가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면, 적어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힘의 조화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개혁파의 청년들은 ‘조 선생’보다 한걸음 빨랐다. 청년 중 한 명의 분신자살을 뜻하는 듯한 문장이 뒤에 나온다. 그들의 폭발은 이미 이뤄져버린 것이다. 때문에 ‘조 선생’의 바람은 너무 늦은 것이 되어서, 밀교의 정치적인 싸움은 결국 온건파의 패배로 끝을 맺는다. ‘조 선생’이 ‘나’에게 그의 생각을 털어놓는 것은 싸움의 패배로 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패배로 ‘조 선생’에게 있어 ‘나’가 쓰게 될 소설의 가치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나’는 이 내용을 소설로 서술한다.
 
  앞서 말했듯, 「비화밀교」는 난해하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과 몇 가지 주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서야 그 숨은 뜻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밀교가 가진 의미에서 종교적 색채를 보았고, 조 선생의 말들을 통해 정치적 입장의 한 단면을 보았다. 「비화밀교」는 사람들이 가진 내면의 저항과 그러한 심리를 잘 드러내 준 작품으로서 내 머릿속에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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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꼬꼬마 시절에 쓴 과젠데... 이걸 쓸 때만 해도 내가 논문 주제로 비화밀교를 선택할 줄 몰랐다. 사실은 김승옥을 쓸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차라리 벌레 이야기를 쓸 걸 그랬나 싶기도 한데... 뭐 나름대로 애착은 있는 작품이다.

헨리와 준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아나이스 닌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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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무니에게 빌려서 읽었다. 사실 처음에 줄거리를 듣고 '그게 뭐야' 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문득 난데없이 소설에서의 성애묘사가 어떨까 싶어서 읽고 싶어짐. 그래서 빌려왔는데 뭐 그런 궁금증 부분은 잘 충족되었으었느나 나머지 부분에서는 글쎄다 싶은 부분이 꽤 있었다.

  『헨리와 준』은 작가 아나이스 닌이 쓴 일기 일부를 편집해 만들어 낸 글이다. 따라서 허구적인 면이 전혀 없는 실제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이라기엔 뭐하긴 한데, 내용이 극히 소설적이라거나 편집에 따라 단순 일기 이상의 장점을 얻어낸 듯한 글이었다. 『헨리와 준』의 성애묘사 자체는 사실 그렇게 대단할 것이 없다. 관능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사실 그대로를 적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일기에서의 성애는, 그런 행위를 벌이는 인간의 심리묘사가 완벽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청교도적 소녀였으며 자상한 은행원인 남편 휴고와 함께 그럭저럭한 나날을 살아가던 작가 '아나이스 닌'은, 자유분방하며 강렬함을 가진 미국 작가 '헨리(그러니까 하인리히)'를 만나 정열적인 사랑에 눈을 뜬다. 또한 헨리의 아내인 '준'을 만나 조심스러우면서도 은은하게 타오르는 듯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여태까지 그런 사랑을 해보지 않았으므로 아나이스 닌은 그 둘을 향한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는 듯한 모습를 보여준다. 헨리를 사랑하며 준을 질투하기도 하고, 준을 사랑하기에 헨리를 하찮게 여기기도 하는 방식이다. 이런 감정의 혼돈은 처음에는 준의 강세인 것 처럼 보였지만, 준이 잠시 도시를 떠난 틈을 타 헨리와의 불장난에 초점이 크게 맞춰지게 된다. 그런 감정의 혼돈에는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고뇌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알고파하는, 자기 탐색적인 면모가 강하게 느껴졌다. 또 남들의 감정을 분석하려 드는 태도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런 분석적인 태도는 정신과 의사인 '알렌디'를 만나면서 더욱 강해진다. 그런 갈등의 위치 때문에 몇 몇 부분들은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그에 대한 죄책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헨리와 준을 동시에 사랑하고, 휴고를 아끼며, 사촌인 에두아르도나 정신과 의사인 알렌디와도 엮이는 아나이스 닌의 사고방식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짓을 벌이는 아나이스 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서 그런 부분은 좋았다. 단편적이지 않은 오랜 시기의 묘사가 이런 점을 더 부각되게 만들어준 것 같다.

  하지만 작품 외적으로는 보면서 이 여자가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뭐 그런생각까지 들었다. 벌이는 행각들이 해도 해도 너무 심하잖아....... 차라리 휴고랑 이혼을 하라고...... 이걸 출판까지 했다는 점에서 휴고와 에두아르도에게 눈물을 보낸다...

  헨리는 질투를 느끼고 걱정이 되어서, 한꺼번에 두 세 명의 남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히스테리컬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고 내게 말한다. 내가 그런 여자일까?

『헨리와 준』, 아나이스 닌,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p.334

  나는 깜짝 놀란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린다. 나는 헨리와 준 사이에서, 그들의 상반된 모습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진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나는 헨리의 문학적이 극악무도함은 충분히 알지만, 그의 인간적인 모습도 믿는다. 준의 순수한 파괴력과 그녀의 거짓말을 알지만, 그녀를 믿는다.

『헨리와 준』, 아나이스 닌,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p.358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프랑수아즈 사강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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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히 사강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서점에서 책 뒤적이다가 마음에 들어서 샀다. 주인공은 40이 가까워진 인테리어 디자이너 폴, 한없이 자유로운 그녀의 연인 로제, 그리고 폴에게 푹 빠진 25살의 혈기왕성한 청년 시몽. 심리묘사에 탁월하다는 평을 듣는 사강이니만큼 세 사람의 묘한 심리변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연애 이야기는 뻔한 전개 때문에 식상해 질 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진행인데, 이 소설은 짧으면서도 그 세 사람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세심하게 전달해 줘서 그 부분이 좋았다.

  다만 진행 자체가 짜증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닌데, 너무 현실적인 연애 이야기라서 마지막에 폭삭 가라앉아 버렸다. 이스트 집어넣은 빵마냥 부풀어 오르던 환상이 푹 꺼져버려서 조금 슬펐다. 하긴 아마 환상같은 진행대로 갔다면 그 나름대로 소설의 격을 떨어뜨렸을 것 같긴 한다.

  39살이 된 여자 폴은 더 이상 모험을 할 수가 없다. 그녀에게 안락함을 줄 수 있는 연인 로제는 자유연애로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그래도 언제나 담담하게, 그 자리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폴이었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쟁취하려는 25살의 청년 시몽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순수하면서 정열적이고, 또한 조심스러운 시몽의 구애에 결국 폴은 넘어가버린다. 여기까지만 가면 통속 소설이다.

  문제는 폴이 시몽과 함께하게 된 후이다. 그녀는 시몽의 정열적인 사랑을 느끼지만, 동시에 로제의 빈자리 또한 느낀다. 슬프게도, 그녀는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 없는 타입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꽃처럼 사랑하며 모든 것을 바치려 드는 시몽의 열정보다, 로제와 함께 있을 때 느꼈던 편안함이나 안락함이 더욱 그리운, 39살의 여자였다. 폴은 모험에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었기에, 로제에게 느끼는 실망과 시몽의 신선함이 만나 잠시동안 시몽을 선택했지만, 결국은 로제에게 돌아가버리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 사람 다 자신들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갈팡질팡 고민하며 흔들려하는 폴의 심정을 볼 때, 폴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조금은 유치하게도 보였던 시몽의 담대함을 보았을 때, 자유연애를 중시하면서도 폴을 그리워하며 그녀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로제의 마음을 보았을 때... 그런 묘사들이 참 공감이 가고 좋았다고 생각한다. 셋 다 완전히 나는 아니면서도, 셋 다의 생각에 공감하게 되어서.

  하지만 마지막의 결말은 여전히 좀 슬펐다. 완연히 상처받은 시몽, 지쳤다고 말하는 폴, 그리고 여전히 이전과 같은 일을 반복하는 로제. 기묘하게 현실적인지라 짜증도 좀 났던 것 같다. 그래도 한 번 읽어보기에 괜찮은 소설이었다.

"제겐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제겐 당신을 사랑할 권리가 있고,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서 당신을 빼앗아 올 권리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민음사, 2008, p.65
 
  "(…) 폴. 내게는 당신을 이해할 능력도, 당신을 도울 능력도 있어. 알다시피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어서 무척 행복해.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 이상이야. 난 당신도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금 당신은 행복해지기에는 지나치게 로제에게 집착하고 있어. 당신은 우리의 사랑을 우연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해.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는 힘들여서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폴은 경이와 희망에 차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그가 별 생각 없이 지내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완전히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알다시피 나는 경솔한 사람이 아냐. 나는 스물다섯 살이야. 당신보다 먼저 세상을 살진 않았지만, 앞으로 당신이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아. 당신은 내 인생의 여인이고, 무엇보다도 내게 필요한 사람이야. 나는 알아. 당신이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신과 결혼하겠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민음사, 2008, pp.132-133

  "잊지 않을거야." 폴이 말했다. 그녀는 그를 향해 눈길을 들어올렸다.
  "나 역시 잊지 않을 거야. 그건 다른 문제야. 다른 문제라고." 시몽이 말했다.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중간쯤에서 몸을 휘청하더니 그녀를 향해 일그러진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서 몸을 빼더니 짐을 놓아 둔 채 나가버렸다. 그녀는 그를 따라 나가 난간 너머로 몸을 굽히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하지만 시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민음사, 2008, p.150
호밀밭의 파수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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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 읽었다. 1인칭이고 고등학생 시점이었는데 술술 읽혔다. 처음에는 홀든 콜필드를 보며 뭐야 이거, 완전 사춘기 소년이잖아...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 읽고나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홀든 콜필드는 그냥 자기 고민이 많고 세상에 대해 불만이 많은 녀석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홀든은 약간의 허세야말로 그나이에 꼭 걸맞는 것들이었고, 그 외의 부분에서 딱히 악행이라고 할만한 것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순진하고 마음씨 좋은 행동들을 더 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서 그 정도 허세에 젖은 행동을 하지 않거나, 그 정도 불만에 찬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야 말로 더 드물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십대라면. 그 점에서 샐린저는 이 소설을 참 잘썼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의 감성들이 생각할 만한 것들을 일인칭으로 정확하게 서술했다는 느낌이었다.

  홀든이 고등학교에서 또다시 퇴학을 당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며칠 동안 그가 겪는 일들은 단순한 노선을 따르면서도 여러 모로 험난한 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 동생 앨리의 죽음과 몇 번의 퇴학 등 개인적으로 힘든 일들을 겪은 반항아 아닌 반항아 홀든은, 그 사흘 간 더 더럽고 치사하며 나쁜 세상의 모습을 다 겪게 되었다. 어떻게 삐뚤어지게 나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택하는 것들은 나쁜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그저 먼 곳으로 떠나 혼자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었다. 나아가야할 멘토가 되어주어야 할 어른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그나마 마지막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마저 그를 성희롱 하려 했으니, 그에게 어른들이 쥐어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어봤자 부모님이 쥐어준 알량한 돈 몇푼 뿐.

  방황하는 그를 구원하는 것은 어른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어린 여동생 피비이다. 아직 초등학교에 다닐 뿐인 이 소녀의 맑은 영혼은 홀든을 구원하는 밧줄이었다. 고작 아이들이 노는 호밀밭을 지키는 게 꿈일 뿐인 순수한 홀든의 영혼은, 마찬가지로 순수한 아이에게서 구원을 얻는다. 그가 '사회적으로' 나쁜 길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동생 뿐이다. 그가 나아갈 길로 이끌었어야 할 어른들은, 그를 이해시키거나 혹은 그를 이해하기에 너무나 더럽혀져 있었다.

  피비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홀든은 이대로 가다간 사회의 낙오자가 될 지도 몰랐지만, 그렇더라도 영혼만은 순수한 채로 유지되었을 지도... 마지막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에서 조금 멍해졌다. 홀든같이 순수한 이에겐 사회로 적응하기 위한 치료가 필요했나보다.

  음, 잘 모르겠다. 내가 좀 더 어릴 때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무슨 생각을 했을지. 다만 지금 읽어도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게 정리가 잘 안 되어서 아쉽다. 그 짧은 며칠 동안에 진행되는 홀든이 겪는 일들과 그에 대한 심리묘사가 참 좋았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 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 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민음사, 2001, pp.229-230

  「지금 네가 떨어지고 있는 타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정말 무서운 거라고 할 수 있어. 사람이 타락할 때는 본인이 느끼지도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끝도 없이 계속해서 타락하게 되는 거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그냥 생각해 버리는 거야. 그러고는 단념하지. 실제로 찾으려고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냥 단념해 버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민음사, 2001, p.247-248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빌헬름 스테켈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민음사, 2001, p.248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세계문학전집108)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라우라 에스키벨 (민음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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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왜 '쌉싸래'라는 표준어를 두고 쌉싸름을 선택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분량이었지만서도 술술 읽히던 책. 부엌에서 시작된 티타의 삶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인생의 이야기. 티타의 인생을 따라가며 티타가 느끼는 절망과 기쁨, 슬픔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 기복은 한없이 비참하다가도 희망의 실마리를 주기 때문인지, 읽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줄거리만 따지면 조금 이상한 느낌을 준다. 가부장도 아니고, 가모장이라고 해야하나? 막내딸의 인생은 무조건 어머니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집안의 이상한 법도에 따라 티타의 인생은 철저하게 희생된다. 집안일 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결혼도 못하고 평생 마마 엘레나만 수발해야 한다는 거다. 게다가 이 마마 엘레나의 폭압 앞에 티타는 사랑하던 연인 페드로가 큰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하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페드로는 '사랑하는 그녀의 옆에 평생 있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며 로사우라와 결혼했는데 이 부분은 정말 싫었다. 차라리 둘이 도망을 갔으면 가지, 도대체 몇 명에게 상처를 주는 페드로인지.

  부엌과 함께 자란 티타이기에 각 에피소드는 각각의 요리가 등장하며 티타의 감정을 표현해준다. 요리를 만들어내는 감정 뿐 아니라, 요리를 통해 각종 신기한 묘사로 감정을 표현했기에 이런 부분이 참 좋았다. 그 요리들에 영향을 받는 주변인물들에 대한 표현도 좋았고. 특히 둘째언니였던 헤르트루디스가 펄펄 날아서 도망가버리는 이야기에서는 장미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페드로와 로사우라가 떠나고 티타가 혼자 앓던 시간들이 보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기력을 완전히 쇠해버린 티타의 마음을 보듬어줄 사람이 곁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유모 나차가 죽은 후 티타가 더 힘들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시간 만큼은 티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다. 티타가 의사 존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헌신적이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존과 함께 행복하길 바랐다. 티타 인생에 소박한 행복이 찾아온 것 같았으니까. 존을 만난 후 티타는 강해졌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자기 의지를 똑바로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티타의 변화가 좋았다.

  하지만 역시 아쉬운 것은 티타의 마지막 선택. 평생을 마마 엘레나를 돌봤고, 언니 로사우사를 위해 아낌없이 주던 티타가 좀 더 이기적인 결정을 하길 바랐다. 이 선택 자체도 자신이 한 선택이라 티타를 탓할 수 없지만, 아쉬운 건 사실.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급 찌질해지던 페드로는 정말 싫었는데. 그리고 티타의 선택을 받아들인 존은 정말 좋은 사람이로구나. 로사우라와 페드로의 딸인 에스페란사와, 존의 아들인 알렉스가 맺어진 것, 그리고 그 오랜 시간 후에야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페드로와 티타. 남들의 시선이 어땠건간에, 티타는 자기 자신이 선택할 수 있어 행복했을 것 같다.

  이야기를 보니 뭐 혁명이니 뭐니 나오던데... 역사같은걸 알고 봤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뭐 몰라도 재미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페드로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 순간 티타는 팔팔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집어넣었을 때의 느낌이 이런 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얼굴과 배, 심장, 젖가슴, 온몸이 도넛처럼 기포가 몽글몽글 맺힐 듯이 후끈 달아올랐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민음사, 2004, p.24

  "아시다시피 우리 몸 안에도 인을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이 있어요. 그보다 더한 것도 있죠.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알려드릴까요?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잠시 동안 우리는 그 강렬한 느낌에 현혹됩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따듯한 열기가 피어오르지요.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나중에 다시 그 불길을 되살릴 수 있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육체에서 달아나 자신을 살찌워 줄 양식을 찾아 홀로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헤매게 됩니다. 남겨두고 온 차갑고 힘없는 육체만이 그 양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중략)

  "그래서 차가운 입김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장 강렬한 불길이 꺼질 수 있으니까요. 그 결과는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 입김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가 훨씬 더 수월하답니다."

(중략)

  "축축해진 성냥갑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이 있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민음사, 2004, p.124~12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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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책 내용은 알지 못할지언정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책의 제목이다. 나 또한 그랬는데, 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주변인들로부터 들은 책의 감상들(‘몹시 재미있다.’, ‘너무 어려워.’ 라는 식의 상반된 의견들)과 철학적 요소를 담은 소설이라는 것뿐이었다. 철학이라니. 게다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앞서 읽었던 단편들과 달리 긴 장편이었기에 처음 대하는 마음가짐이 편치 못했다. 책 표지에 있는 기괴한 그림이 책을 읽기전의 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고, 첫 페이지에 있는 ‘영원 회귀’니 뭐니 하는 말들은 나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러나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생각 외로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네 사람의 특징적인 주인공들을 통한 서술방식이 다른 소설들과 크게 다른 점을 안겨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라는 네 명의 주인공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한다. 여기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인간이란 존재가 가지고 있는 무거움과 가벼움, 그 경중. 그리고 우연의 필연성. 이것을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 전하고 있는 듯 하다.

  주인공들은 각각의 특징이 도드라지는 인물들이다. 삶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며, 테레사와의 관계를 통해 삶의 무거움을 배우나 그 가벼움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인 토마스. 운명적 사랑을 믿으며 무거움으로 대표되는 테레사,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구속받고 싶지 않아하는 사비나. 사비나의 애인이니 프란츠. 이 불안한 존재인 네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사랑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고, 토마스와 테레사 라는 한 커플과 사비나와 프란츠라는 한 커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난다 할 수 있다.

  토마스와 테레사는 서로 반대되는 캐릭터이다. 이런 상반된 인물의 관계는 서로를 참을 수 없어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는데 토마스로 하여금 그의 애정관계를 계속하게 하고 테레사에게는 그에 반항하려 하는 마음을 품게 한다. 토마스는 테레사의 무거움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의 행동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테레사는 테레사대로 토마스의 가벼움을 이해할 수 없고 그로 인해 반항하려 하지만 캐릭터 본질의 무거움 때문에 그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사비나와 프란츠는 앞선 토마스와 테레사와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인다. 사비나는 가벼움의 이미지로 대표되며 프란츠는 무거움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프란츠와 사비나는 서로 다른 언어 소통과정을 가지며, 프란츠는 사랑에 있어서 충실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사비나는 모든 억압을 거부하는 모습처럼 사랑도 자유이며 구속으로 느낀다.
 
  이런 상반된 캐릭터들에게서 거론될 수 있는 것은 우연의 문제이다. 예를 들면, 토마스와 테레사는 정말이지 닮은 구석이 없는 반대되는 인물이다. 비단 성격만의 문제가 아니라, 직업조차도 그러하다. 의사이며 가벼운 토마스, 소도시의 여급이며 무거운 테레사. 이렇게 다른 둘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둘은 결혼하게 된다. 여기에는 우연의 필연성이 반드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의 문제가 나온다.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니체가 말한 영원 회귀는 영원한 시간은 원형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일체의 사물이 그대로 무한이 되풀이되며, 그와 같은 인식의 발견도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내가 으레 겁을 먹었던 소설의 첫 부분. 여기에서 영원 회귀의 말을 담고 있다. ‘한번은 없는 것과 같다’라는 말에서 그것은 드러난다. 무경험의 행성으로서 우리의 세계를 생각할 때, 재귀의 가능성이 없기에 인간은 계속해서 똑같은 실수를 범하게 된다. 한번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두 번 살면서 이전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며 때문에 결과의 예측이 불가능하다.

  이 반복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괜찮겠지만 부정적인 것이라면 이것은 문제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영원 회귀는 무거움을 가지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이 가지는 영원 회귀는 서로에 대한 이해 불가능함으로 인한 것이고 이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한 영영 계속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소설속의 인물들은 이러한 반복을 계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의 가벼움을 택함으로서 이러한 반복을 그만두고 사회나 존재 스스로로부터의 해방욕구를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여태까지의 긴 네 캐릭터들의 성격과 그로 인한 이야기 전개는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캐릭터들은 인간의 존재를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나누어 보여주며, 영원한 사랑과 순간적인 사랑과 같은 모순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인간 존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과 동시에 이러한 캐릭터들을 통해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한계, 덧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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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너무 힘들어갔다.
파리대왕(세계문학전집 19)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윌리엄 골딩 (민음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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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읽으려고 했는데 다류가 사더니 바로 빌려줘서 읽었다(이런). 확실히 빨리 읽을 수 있었고, 읽는 내내 재미있었지만 동시에 괴롭기도 했다. 으 난 인간의 악마같은 본성을 대놓고 꿰뚫는 책이 제일 소름 돋는 것 같다. 내가 몹시나 감성적인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을 믿고 싶어하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나는 인간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가 그 본성을 끄집어 낸다던가, 혹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이게 더 처참하다) 사실은 인간 본성은 이러이러하다 라는 점을 짚어내는 이야기들이 참 껄끄러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파리대왕은 그런 이야기가 맞다. 어른들 없이 '어느 정도로' 교육받은 문명인인 아이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처음에 그들은 나름의 규칙을 정하고 랠프를 대장으로 추대해(과정이 좀 우습긴 했다만) 무인도에서 인간사회의 규칙을 세워 그것을 지켜나가려 했다. 사실 이 순간에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돼지Piggy가 무시되는 것과, 사사건건 부딪힐 것을 예고하고 있는 잭의 성격이 눈에 보여서 그 파탄이 눈에 보이는 듯 했지만. 그래도 뭔가 이해가 되는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 왕국은 권력에의 욕심과, 식욕이라는 본능, 실체없는 두려움에 선동된 탓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것도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무너져버렸다. 사이먼의 죽음까지는 광기에 휩싸인 결과라 치부할 수 있다 해도, 최후의 지식인이었던 돼지가 죽은 이후에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랠프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였던 쌍둥이들조차 잭의 편으로 돌아서 버리고, 모두가 랠프를 사냥감처럼 사냥하려 드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마치 이성이라고는 한 톨만치도 남지 않은 짐승처럼 변해버린 모습이라서... 사실 짐승도 자신에게 투항할 의지가 없는 다른 짐승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죽이려 하진 않는다. 인간이 짐승보다 한 단계 아래로 퇴보해버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랠프 하나를 잡기 위해 섬에 불을 내는 건 또 어떤지. 마치 야만인의 제의 같다고 생각했다.

  구조대들이 왔을 때, 처음에는 그렇게 자기 이름을 잘 읊더대던 퍼시벌 윔즈 메디슨는 머리 속을 텅 비워버린 양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성이 없는 우리는 결국 점점 더 멍청하게 변해버리고 만다.

  랠프와 다른 아이들이 무사히 구조되었다지만 이것을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너무 낱낱이 드러나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 앞에 기묘한 역겨움이 느껴졌다. 그건 그 추악함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인간, 우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것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나 또한 자신의 치부를 보고 싶지는 않다.

  랠프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 전에 모래사장을 뒤덮고 있던 신비로운 마력의 모습이 잽싸게 눈을 스쳐갔다. 그러나 이제 섬은 죽은 나무처럼 시들어져 버렸다―사이먼은 죽고― 잭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목매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민음사, 2000, pp.302-303


멋진 신세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올더스 헉슬리 (문예출판사,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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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류의 강력추천으로 산 책. 사실은 스트록스 노래인 'soma'가 떠올라서... 난 디스토피아 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볼까 말까 꽤 망설였었는데, 열고 나니 굉장히 재미있어서 거침없이 읽을 수 있었다. 디스토피아 물이지만 특별히 어두운 느낌을 준다기보다 묘사하는 모습들이 너무 깔끔하고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이라서 읽는 데 편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1984를 읽으며 느꼈던 그 불안감이나 갑갑함이 없었다.

  처음엔 주인공이 버나드인줄 알았다. 멍청한 레니나를 옆에 끼고 뭔가 하는건가 했었어... 헬름홀츠도 뭔가 있어 보였었는데, 막상 정말 요주의 인물은 '야만인' 존이었다. 1/3이 지난 시점에서야 등장하는 인물인지라 뭔가 했었어. 어머니가 있는 자연상태로 태어나, 소위 문명세계란 곳에 성인이 되어 돌아온 야만인 존. 문명세계의 씨를 타고 났기에 '야만인 보호구역'에서는 따돌림을 받았던 존은, 행복할 줄 알았던 문명세계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 야만인의 세계에선 배척당했다지만 그곳의 정신을 가지고 자랐기에, 문명세계에는 그가 추구하는 사랑과 영혼의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만약 린다가 좀 더 책임감 있는 엄마였다면, 야만인 세계의 사람들과 동화되어 잘 자랄 수 있었다면 존이 이렇게 불행해지진 않았을텐데. 그런 생각도 들었고...

  이런 존의 혼란은 총통과의 대화가 나오는 17장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읽으면서 어느 쪽이 맞는가에 대해 몇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 현실의 나는 존의 손을 들겠지만, 만약 그렇게 교육받아진 사람이라면 나도 멍청이 레니나처럼 행동하려 들지 않을까. 혹은 책임감 없이 술만을 찾고 종당에는 소마와 함께 죽어버린 린다처럼.

  철학적인 질문이 오가는 것도 괜찮았다지만, 사람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듯 만들어지고,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져있으며, 세뇌받으며 자라는 신세계의 모습이 나오는 초반 부분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징그럽게 보여야 할 모습인데 이 부분이 꽤 깔끔하게 묘사되며 넘어간다. 게다가 이 세계의 사람들은 반그램, 혹은 일그램의 소마 한 알로 행복해 질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하다. 불행한 세계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어둡고 컴컴한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읽는 내가 현재의 사람이며 그들이 말하는 야만인이라는 점에서 느껴지는 불쾌함은 어쩔 도리가 없다.

  * 소립자에 나왔던 미래상과 이런 미래 상 중에서 고르라면, 나는 차라리 지금의 인류가 몽땅 없어지고 새로운, 종이 다른 인류가 등장하는 소립자 쪽의 미래상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왜일까.

  "여러분들은 노예 신분이 좋습니까?"
  그들이 병원으로 들어갔을 때 야만인이 말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망울은 정열과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여러분은 갓난아기 상태가 좋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갓난아기들입니다. 보채고 앵앵우는 젖먹이들입니다."
  야만인은 그들의 짐승 같은 우둔성에 어찌나 분개했떤지 자신이 구해주러 온 대상인 그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있었다. 모욕적인 언사는 거북등과 같은 완강한 그들의 우둔성 앞에서 무력한 메아리처럼 되튕겨왔다. 그들은 분노에 찬 표정을 눈에 담고 야만인을 멍하고 침울하게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앵앵 울고 있을 뿐입니다!"
   비애와 회오, 연민과 의무―이 모든 것을 이제 망각한 상태였다. 이제 이들 인간 이하의 괴물들에 대한 강렬하고 위압적인 증오심에 빠져들고 있었다.
  "당신들은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인간다움과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릅니까?"
  분노가 원동력이 되어 그의 말이 유창해지고 있었다. 어휘가 술술 터져나왔다.
  "그것도 모릅니까?" 그는 반복해서 물었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한 응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을 계속했다.
  "그러면 내가 가르쳐주겠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들을 자유롭게 해주겠습니다."
  그러고는 병원의 안뜰로 향한 창문을 열더니 약상자를 열고 소마 알약을 한 주먹씩 꺼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문예출판사, 1998, pp.269-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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