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스피치
감독 톰 후퍼 (2010 / 영국,오스트레일리아,미국)
출연 콜린 퍼스,제프리 러시,헬레나 본햄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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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싶다 보고싶다 했는데 이제야 봤음. 기대한 대로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밑천이 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이 영화 역시 그러했으며 동시에 그 힘을 묵직하게 잘 살려냈더라. 확연히 내 취향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잘 재단되어 편안한 클래식 수트를 입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누가 보아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영화고 동시에 내게도 괜찮은 영화였다.

  말더듬이었던 조지 6세(콜린 퍼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요크의 공작 이었을 시절부터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그가 훌륭하게 망친 괴로운 연설 장면으로 영화 속 주인공의 고민을 드러냈다. 옆에는 그를 헌신적으로 내조하는 엘리자베스(헬레나 본햄 카터)가 있고, 그녀가 언어 치료사인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를 찾아냄으로써 라이오넬과 '버티'의 만남이 이뤄진다.

  치료의 과정과 더불어 버티가 왕에 오르는 사건 등이 뒤섞여 괜찮은 진행을 보여준다. 아버지인 조지 5세(마이클 갬본)에게 치이는 것이나, 형인 에드워드 8세(가이 피어스)가 심슨 부인(이브 베스트)를 위해 왕위를 져버려 뜻하지 않게 왕위를 계승하게 된 상황 등이 버티 자신의 고난과 더불어 보이는데 뭐 하나 지나칠 것 없이 묘사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극복하게 되는 과정에 있어서 버티 본인의 노력과 아내, 그리고 라이오넬의 도움들이 힘들지만 부드럽고 재치있게 나타나더라.

  딱히 대단한 위협이랄 건 없는 영화였는데 그럼에도 차분히 보게 되었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조지 5세의 삶 자체가 왕족으로서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하는 삶이고, 그런 고민과 긴장감이 계속 나타나서 그런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의 연설이 끝났을 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게 되는. 왕족이라는 화려한 일면 뒤에서 개인이 어떤 식으로 애쓰고 있는지를 보여주어서 좋았다. 뭐 난 이런 신분제에 껄끄러운 반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요건 그 안의 고민을 보여주어서 보기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안전한 영화다. 하지만 모든 안전한 플롯을 따르는 영화들이 이 만큼의 색을 낼 수 있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겠지. 좋았다.


  1981년 영국 드라마.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난 작품을 알게 된 게 제레미 아이언스를 검색하다가... 제레미 아이언스가 동명 소설을 읽은 보이스 북으로 책을 알았고, 책을 검색하다가 드라마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었다. 흥미를 느껴서 바로 찾아 봄. 나온 지 삼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이름이 나 있던데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가 궁금하기도 했고. 총 11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봤다. 다 본 감상은 잘 다듬어진 고전 명작을 읽은 느낌이다. 본 게 아니라 읽은 느낌. 서두르지 않았고 고전 소설을 읽을 때의 그 느낌 처럼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좋았는데 좋고도 슬퍼서 원작은 읽고 싶지가 않아졌다. 보통 이런 원작 있는 영활를 보면 소설이 절로 읽고싶어지는데도.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찰스 라이더(제레미 아이언스)가 옥스퍼드에 진학해, 학교의 괴짜 세바스찬 플라이트(앤소니 앤드류스)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너드 스타일이었던 찰스가 세바스찬을 만난 뒤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참 신기했다. 찰스는 밝아지고, 건방져졌으며 좀 더 다른 인물이 되었가는데 두 쪽 다 매력이 있었다. 다만 끝까지 약간 우유부단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천성은 안 변하는 거지. 세바스찬은 처음부터 매력이 팡팡 터지는 캐릭터인데 찰스가 첫눈에 반할 만 했다. 곰인형을 들고 다니며 짓궂은 장난을 일삼는 성인 남자가 매력적일 수 있다니. 그런데 그럴 수 있었다. 그들의 첫만남은 찰스에게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을망정 불쾌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 이후에 세바스찬과 친해지는 과정도 보는 내내 유쾌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다시 찾은 브라이즈 헤드에서 씁쓸하지 않은 건 그 둘이 같이 있을 때 뿐이었다.

  찰스가 플라이트 가문의 가족과 섞이게 되면서, 세바스찬이 예견하며 슬퍼했던 대로 찰스는 이 가족과 깊게 연관되었고 그 때부터 불행이 시작된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독특한 캐릭터인 세바스찬이 무너질만한 기반은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었는데, 찰스가 끼어들고 그의 다소 어리석은(내눈엔 그랬다) 태도가 섞이어 더 좋지 않은 길로 빠져든 것 같기도 했다. 찰스가 좀 더 세바스찬을 말렸더라면, 혹은 그에게 약간만이라도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더라면 세바스찬은 쉽게 돌아왔을 것 같은데. 이건 내가 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그런 편이라 그런지 찰스를 보며 답답함만 늘더라. 세바스찬은 너무 자유로웠으나 그는 억압되어 있었다. 그를 이끌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듯 하다. 모나코에서 찰스가 세바스찬을 끌고가지 않을 때 굉장히 안타까웠었다. 둘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있었단 건 분명하다. 세바스찬의 아버지 로드 마치메인(로렌스 올리비에)의 정부 카라(스테판 오드랑)가 언급한 것처럼, 육체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둘의 사랑은 정신적으로 강했다. 그 강한 유대감도 그렇게 쉽게 흐트러져버린다.

  플라이트 가문 사람들은 세바스찬이 왜 그런 캐릭터를 형성하게 되었는지 그 근원이 되는 사람들이다. 플라이트 가문은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어머니인 레이디 마치메인(클레어 블룸)의 뜻을 따라 가톨릭을 믿고 있다. 영국에서 가톨릭이니 이교도인 셈인데, 큰 아들인 로드 브라이즈헤드(사이먼 존스)와 막내인 코델리아(피비 니콜스)는 굉장히 신실하나, 세바스찬과 그 아래 여동생 줄리아(다이애나 퀵)은 형식만 따르는 신자. 둘 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이 조금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는 가톨릭을 믿지 않는데다가 어머니를 피해 베니스에서 정부 카라와 살고 있기에 이 가족은 완전히 모계 위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겉으로는 완전한 듯 하나 그 안에서 썩어가는 것들이 고스란히 보여서 씁쓸했다. 어머니를 좋아하면서도 또 몹시 증오하는 세바스찬이 갈피를 잃을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 모두 가족에게서 나온다. 특히 어머니 레이디 마치메인을 볼 때마다 나까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상냥하고 고상한 말투로 다정하게 세바스찬을 다루지만 본인의 룰 아래에서 아이들을 키우려 했던 것 같다.

  형제들은 첫째 브라이디는 다정한 부분만 제외하면 그야말로 레이디 마치메인과 꼭 닮아 있었다. 게다가 종교 이야기만 나오면 다소 무례하기까지 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코델리아는 그냥 철없는 아가씨 같았다. 그 코델리아가 나중에 성장하여 차분해진 모습을 보면 저절로 신기해진다. 줄리아의 경우 세바스찬 만큼이나 중요한 캐릭터였다. 초반에는 굉장히 좋아했는데 후반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갑자기 선해지고 또 마찬가지로 플라이트 가문의 여자가 되어버린 이 캐릭터의 변화를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난 회의주의자인 찰스의 눈으로 줄리아를 봤을런지도. 렉스 모트람(찰스 키팅)과 사귈 당시의 줄리아는 철없었으나 그래도 자신만의 강단이 있었던 것 같은데. 10년 후 찰스와 재회한 뒤의 줄리아까지도 괜찮았는데... 이혼을 거쳐 막상 찰스와 살게 되자 그녀 안에 있던 레이디 마치메인의 피가 살아난 것 같았다. 하긴 그 로드 마치메인 조차도 죽음에 이르러서는 다시 종교인이 되었으니 플라이트 가문의 것이라 해야 할까. 세바스찬도 외국에서 종교에 귀의한 것 같으니. 아 쓰고 보니 이 소설 굉장히 종교적이다. 근데 맞았다. 회의주의자 찰스도 로드 마치메인의 죽음 앞에서는 기도를 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아쉬웠다. 그러고보니 찰스는 그 때도 줄리아를 붙잡지 않았는데 이런 부분에서도 찰스의 우유부단함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찰스는 본인의 이혼을 실행할 때만 빼고는 항상 남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

  이상하게 고통스러운 후일담. 그런 소설을 읽은 기분. 그러나 기쁘고, 슬프고, 온갖 먹먹한 감정들이 다 있었기에 좋았다. 이런 게 고전이다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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