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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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 M. 포스터 (열린책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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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자에게 작년 생일 선물로 받은 세 권의 책 중 하나인데 이제서야 다 읽었다. 사실 읽는 데 걸린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음. 생각보다 몰입이 잘되어서 놀랐던 소설이었다. 초반 부분에서만 약간 헤맸다가 익숙해진 다음에는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읽었던 퀴어문학에 속하는 것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음울하고 우울하며 그 특유의 정서가 있었다. 소재가 소재인지라 고뇌가 많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일면 밝은 부분도 보고 싶었던 게 사실. 모리스는 소재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고뇌를 섬세하고 정확하게 풀어내는 반면 동시에 밝은 부분도 가지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100년 전에 이런 소설이 나오다니.

  여기서는 주인공인 모리스 홀을 특별한 인간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은 세속적이고, 교육받았지만 동시에 속물적인 근성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리스가 어떤 식으로 개화해나가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반면 완전히 성숙한 사람처럼 그려지던 '클라이브'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씁쓸함을 느낄 수 있다. 교육이나 본성에 관한 설명이 거의 없는 '알렉 스커더'는 진솔하고 솔직한 모습이라서 마음에 들었다. 이리저리 둘러대는 클라이브보다 직설적인 알렉이 백배 매력적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1, 2장은 클라브와의 관계 3, 4장은 알렉과의 관계로 나뉘어 있는데 더 재미있었던 건 3, 4장이었다. 혼돈에 빠진 모리스가 병원에 동성애를 치료하러 다니며 내면과의 혼란과 싸우는 모습은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이뤄지는 알렉과의 관계는 빠르면서도 깊숙이 다가왔다. 흐릿한 인상이던 알렉이 점점 짙어질 때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창문을 넘어 '나리께서 절 부르셨죠' 하고 다가온 알렉. 편지를 보내고, 모리스를 만나려 하고, 모리스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포기할 수 있었던 알렉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클라이브와의 관계에서 못봤던 뜨끈뜨끈한 열정을 본 느낌. 대영 박물관 장면을 보았을 땐 심장이 터질 뻔 했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다가 미지근한 긴장을 터트리고, 손을 잡은 순간 모든게 괜찮아지는 그 과정이 너무 좋았다.

  클라이브도 사실 1부에선 아주 마음에 들었었는데. '네가 향연을 읽었다는 걸 알아'하고 다가왔던 지적인 청년은, 시름시름 앓고 난 뒤 딴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클라이브는 '여자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지만, 글쎄. 아내와의 잠자리 묘사를 보면 썩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너무 피상적이다. 게다가 뒤로 갈 수록 클라이브가 사회의 시선 같은 것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을 가릴 수가 없었다.

  모리스라는 개인의 발전을 보는 재미도 있고, 그냥 로맨스 소설로 보아도(그렇게 보면 너무 미안한가) 엄청 재미있었다. 마지막 부분으로 갈 수록 재미 있었는데 선착장에서의 모습과 그 이후 모리스가 보트하우스로 향하는 과정은 내가 모리스가 된 것마냥 같이 떨리고, 피곤해지고, 지치다가 나른해졌다. 후에 모리스와 클라이브의 대화도 아주 좋았다. 이전의 모리스와 달리 훌쩍 성장한 느낌이었고, 클라이브의 어리석음을 비춰주는 장면이었다.

  좋았다. 오래간만에 즐거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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