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수첩(김승옥소설전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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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승옥 (문학동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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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단편집이라고 해야하나. 단편이라기엔 약간 긴데...  '환상수첩', '다산성', '재룡이', '빛의 무덤 속', '먼지의 방(미완)'이 실려있다. 먼지의 방은 지금 쓰고 계신다는데 언제 나오려나 모르겠다. 이거 미완인지 모르고 보다가 막판에 미완, 글씨 써있는 거 보고 어찌나 당황했던지.

  책 제목과 같은 '환상수첩'은 굉장히 서글픈 소설이었다. 애당초 이야기 서두에, 이 수기를 쓴 친구가 죽었다. 로 시작했기 때문에 깔끔할 거라고는 기대 안했지만서두... 내 생각보다도 훨씬 처절하고, 찝찝하고, 힘없어서 읽으면서 슬프단 생각을 자꾸 했다. 여자친구였던 선애의 삶과 죽음도 그랬고, 꿈을 잃은 듯한 수영과 윤수의 모습도. 그리고 얼굴이 무너져버린 형기의 모습도 다 애처롭기만 했다. 중간 중간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보였음에도 그게 모두 좌절되어 버린 것이 씁쓸. 가장 안타까운건 윤수였고(아 미아는 어쩌란 말인가) 형기의 "바다로 데려다줘"라는 말도 너무 슬펐다. 수영은 솔직히 진짜 밉고 짜증나긴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이해도 되고. 여튼 여기 나오는 애들 다 안쓰러웠다.

  '다산성'은 솔직히 내가 잘 이해를 한 거 같지는 않아서 뭐라 말은 못하겠고, 이런 저런 이미지들은 꽤 인상 깊게 남았다. 노인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재룡이'는 입담이 살아있는 이야기라는 느낌.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재룡의 삶을 통해, 전쟁이 사람을 어떤 식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직접 참여한 재룡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태도나 뭐 그런 것들도. 이념이라는게 거 참. '빛의 무덤 속'은 보면서 즐거웠다. 환상이 가미된 두 편의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로우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라. 자라나는 귀라는 설정은 좀 소름끼쳤지만. 음 뭐 재밌었어.

  약간씩 긴 단편들이지만 원체 문장도 잘 읽히는데다 가슴 답답하면서도 여전히 재미있는 소설들인지라 즐겁게 읽었다.
한밤중의작은풍경(김승옥소설전집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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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승옥 (문학동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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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옥 문학전집 다섯 권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책이 '한밤중의 작은 풍경'이다. 단편이라기엔 뭐한, 꽁트 길이의 글들이 삽입되어 있는데 길이가 짧은 글들인지라 읽는데 지친 적이 없다. 오히려 호흡 빠르게 읽을 수 있어서 읽는 내내 즐거웠고, 그 짧은 글 속에서 무수한 감정들을 칼같이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정말 놀라웠던 책.

  짧은 글인지라 세세한 배경을 다루는 일보다는 일상 속의 사건을 다루는 일이 많은데 으아, 이게 엄청 크게 다가온다. 무난무난한 사건들조차도 김승옥이 쓰면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위트가 있어서 실소를 짓거나 쓴웃음이라도 짓게 만드는데 몇몇 글들은 애틋하기도 했다.

  가장 좋았던 건 '준의 세계'인데, 이걸 읽고 되게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미래 SF가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룰 줄이야. 미래 배경이면서도 주제는 또 현실적인 지라 읽으면서 놀라고 감탄했었다. 재미있게 읽었던 건 '중매'. 이건 지하철에서 읽다가 소리내서 웃기까지 했다. "오…… 그 기집애…… 결혼 안 돼버렸으면 좋겠다!"하고 외치는 아내의 모습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귀여운 이야기였다. '남편의 호주머니'도 기억이 남는데,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소한 의심이 낳은 치명적인 결과라는 점에서 충격이 있었고, '시골 처녀'같은 경우에는 내가 머리카락을 잘린 것마냥 서슬퍼런 기분이 들어서 가슴이 쿵 내려앉더라. '이상한 학우'같은 경우에는 이 짧은 단상 속에서 누가 평범하고 누가 평범하지 않은지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하게 했고.

  이 이외에서 많은 단편이 실려있는데 다들 몹시 재미있다. 무엇보다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매우 짧으니까 머리를 식힐 때 읽어도 좋을 듯.

  으 언제 읽어도 김승옥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다.
무진기행(김승옥 소설전집 1)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승옥 (문학동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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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때인가 다니던 학원의 국어 선생님과 제법 친해졌던 일이 있다. 그 때 난 정말 어렸고 물론 그 분에게도 내가 한 없이 어렸겠지만, 친절하게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시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그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던 소설이 무진기행이었다. 버스를 타고 갈 때 그 흔들림을 턱이 움직이는 것으로 표현하던 그 표현력에 너무나 감탄했다고 그랬다. 그리고 내게 무진기행을 빌려주셨었는데 그 때 당시의 난 별로 재미있게 읽지 못했던 것 같다.

  대학교 졸업반이 되어 논문을 쓸 때 무진기행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김승옥 전집을 덜컥 샀었는데 음, 뭐 결론적으로는  어떻게 일이 꼬여서 이청준의 '비화밀교'로 논문을 쓰게 됐다. (논문 주제를 정할 당시의 내 생각이 좀 짧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뒤로 김승옥 전집은 사 놓고서도 잘 안읽고 있었는데... 요번에 읽어봐야지 하고 무진기행이 있는 김승옥 전집의 1권을 읽었을 때 굉장히 충격받았었다. 어떻게 이런 표현들을 쓰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뭐 그런 것들이 뒤섞이더라. 대표작인 무진기행 말고도 다른 작품들에 담긴 표현들이나 깊이가 놀라웠다.

생명연습(生命演習)
건(乾)
역사(力士)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무진기행(霧津紀行)
싸게 사들이기
차나 한잔
서울 1964년 겨울
들놀이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夜行)
그와 나
서울의 달빛 0章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무진기행에는 이렇게 총 15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가장 여운이 강하게 느껴졌던 것은 '서울의 달빛 0章'이었고,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읽으며 씁쓸했던 건 역시 '무진기행'과 '염소는 힘이 세다' 였다. 이런 씁쓸한 소설들 중에서도 '역사'는 위트가 느껴져서 좋았다. 굳이 하나 더하자면 '차나 한잔' 쪽도 약간 유머러스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모든 소설들은 1960년대의 답답하고 억압된 감성이 묻어나서 읽으며 썩 편한 소설들은 아니었다. 아, 재미가 없단 소리가 아니었다. 난 소설에 빠져들어 읽었고 앞으로도 종종 책장에서 꺼내볼 생각이다. 다만 재미있고 빠져들지만 그 뒤에는 끕끕하고 가슴이 답답했던 그런 글들이었다는 거다. 1960년대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갑갑함을 해소하려 뛰쳐나갔을지, 갑갑함을 감추려 가슴께를 여몄을지... 나는 모르겠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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