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세계문학전집 19)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윌리엄 골딩 (민음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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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읽으려고 했는데 다류가 사더니 바로 빌려줘서 읽었다(이런). 확실히 빨리 읽을 수 있었고, 읽는 내내 재미있었지만 동시에 괴롭기도 했다. 으 난 인간의 악마같은 본성을 대놓고 꿰뚫는 책이 제일 소름 돋는 것 같다. 내가 몹시나 감성적인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을 믿고 싶어하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나는 인간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가 그 본성을 끄집어 낸다던가, 혹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이게 더 처참하다) 사실은 인간 본성은 이러이러하다 라는 점을 짚어내는 이야기들이 참 껄끄러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파리대왕은 그런 이야기가 맞다. 어른들 없이 '어느 정도로' 교육받은 문명인인 아이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처음에 그들은 나름의 규칙을 정하고 랠프를 대장으로 추대해(과정이 좀 우습긴 했다만) 무인도에서 인간사회의 규칙을 세워 그것을 지켜나가려 했다. 사실 이 순간에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돼지Piggy가 무시되는 것과, 사사건건 부딪힐 것을 예고하고 있는 잭의 성격이 눈에 보여서 그 파탄이 눈에 보이는 듯 했지만. 그래도 뭔가 이해가 되는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 왕국은 권력에의 욕심과, 식욕이라는 본능, 실체없는 두려움에 선동된 탓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것도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무너져버렸다. 사이먼의 죽음까지는 광기에 휩싸인 결과라 치부할 수 있다 해도, 최후의 지식인이었던 돼지가 죽은 이후에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랠프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였던 쌍둥이들조차 잭의 편으로 돌아서 버리고, 모두가 랠프를 사냥감처럼 사냥하려 드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마치 이성이라고는 한 톨만치도 남지 않은 짐승처럼 변해버린 모습이라서... 사실 짐승도 자신에게 투항할 의지가 없는 다른 짐승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죽이려 하진 않는다. 인간이 짐승보다 한 단계 아래로 퇴보해버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랠프 하나를 잡기 위해 섬에 불을 내는 건 또 어떤지. 마치 야만인의 제의 같다고 생각했다.

  구조대들이 왔을 때, 처음에는 그렇게 자기 이름을 잘 읊더대던 퍼시벌 윔즈 메디슨는 머리 속을 텅 비워버린 양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성이 없는 우리는 결국 점점 더 멍청하게 변해버리고 만다.

  랠프와 다른 아이들이 무사히 구조되었다지만 이것을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너무 낱낱이 드러나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 앞에 기묘한 역겨움이 느껴졌다. 그건 그 추악함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인간, 우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것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나 또한 자신의 치부를 보고 싶지는 않다.

  랠프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 전에 모래사장을 뒤덮고 있던 신비로운 마력의 모습이 잽싸게 눈을 스쳐갔다. 그러나 이제 섬은 죽은 나무처럼 시들어져 버렸다―사이먼은 죽고― 잭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목매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민음사, 2000, pp.302-303

소립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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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보니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던 소설. 이 책을 읽는 중간에 꼬마 니콜라 5권 세트와, 고우영 삼국지 10권 세트를 읽었다(...) 아무튼 이 소설은 서점에서 우연히 보고 집에와서 바로 샀었는데, 내가 적나라한 성애 묘사 장면 때문에 샀던건지 뭔지(하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알다시피 이 묘사는 전혀 야하지 않다, 그냥 적나라할 뿐.) 그냥 홀리듯 샀던 걸로 기억한다.

  중간 정도까지 읽었었을 때도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지, 이 소설의 주제는 뭔가 한참 생각했는데 결말까지 가서야 겨우겨우 생각할 여지가 생긴 것 같다. 결말이 생각치 못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꽤 놀랐고, 처음 소설이 왜 미셸 제르진스키를 다룬다 했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요컨대 소설 안의 '현재'를 만들어 낸 선구적인 인물이라 이거지. 아무튼 읽는 도중에는 이거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결말에 놀랐던 것 같다. 중간 중간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무지막지하게 나오는데 그 이유는 이거겠지.... 읽을땐 몰라서 이게 뭔가 했어.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 일단 브뤼노와 미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철학적인 질문에 와닿게 된다. 이 완벽하게 다른 형제는 같은 뱃속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완벽하게 다른 사고와 성향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교류하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

  브뤼노는 혐오스러운 종류의 인간이었고, 그 사고 자체는 동의할 만한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가 그런 생각을 머리에 품게 된 동기만큼은 이해가 갔기에 미운 인간은 아니었다. 크리스티안을 만난 이후 둘이 같이 긍정적으로 변하나 했었는데, 결말이 그리 되어 아쉬웠다. 크리스티안은 정말 좋은 여자였는데. 브뤼노도 그걸 알기에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간 것이겠지. 정신병원 이후의 생활이 아무런 문제 없이 '행복하기만 해'서 소름이 돋았다. '멋진 신세계'의 소마를 먹은 사람들 같아서. 으응, 역시 이런 건 싫어. 차라리 혐오스러운 브뤼노 쪽이 낫다.

  미셸은 어릴 때부터 유지했던 그 무덤덤한 성격 탓에 성장 이후의 일들은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아나벨과 사십이 되어 재회한 뒤의 움직임은 꽤 흥미로웠다. 그렇게 감정에 무감각한 사내가 실제로 감정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느낀 것 같아서 말이다. 미셸은 아나벨을 사랑하진 않았지만 아나벨을 통해 사랑을 배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그저 두려움의 표정을 띄우던 그가, 자기도 모르는 새 울어버렸다는 데서 진화를 느꼈었다.

  미셸의 실종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프레데릭 허브체작이라는 과학자는 막상 미셸이 생각하고 고려했던 깊은 성찰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의 과학적 성과들만이 밀어붙여진 듯 해 슬펐다. 그 사람들이 좀 더 생각했다면 인류는 여전히 지금의 인류일 수 있었겠지. 완벽한 인간이라는 것은 이상적인 것일 뿐, 실제로 있다면 그다지 행복하진 못할 것 같다. 아니면 이건 내 소망일까?

  유쾌하진 않았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책.

  아스페의 실험은 정확하고 엄밀했으며 완벽한 자료로 뒷받침되어 있었다. 이 실험은 학계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35년에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와 로젠이 양자 이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이래, 처음으로 그것에 대한 완벽한 제반론이 나왔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실험 결과는 양자 이론의 예안과 완벽하게 일치하였고, 아인슈타인의 가설에서 나온 벨의 부등식은 명백하게 부정되었다. 그럼으로써 이제 두 개의 가설만이 남게 되었다.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의 운동을 결정하는 감추어진 속성들이 국소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립자들은 서로 얼마만큼 떨어져 있든 간에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또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들이 관측 문제와 무과하게 내재적인 속성을 지닌 소립자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우리는 깊디깊은 존재론적 공허 앞에 놓이게 된다. 실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고 관찰 가능한 것을 예측하는 수학적 형식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연구자들의 대부분은 물론 두 번째 가설 쪽으로 결집하였다.

『소립자』,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pp.135-136

  「두 개의 소립자가 결합되면,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가 형성됩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한 몸에 관한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미소를 짓고 있던 목사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미셸은 활기를 띠며 말을 이었다.
  「제 말씀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힐베르트 공간에서 양자에게 고유 상태 벡터를 부여할 수 있지 않겠는냐 하는 것입니다. 제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소립자』,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p.187

  1999년 12월 31일은 금요일이었다. 브뤼노가 여생을 보내게 될 베리에르 르 뷔이송 정신병원에서는 환자들과 의료진이 함께 모여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그들은 샴페인을 마시며 파프리카 향을 가미한 칩을 먹었다. 파티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브뤼노는 어떤 간호사와 춤을 추었다.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 약이 제 효능을 발휘한 덕에 그의 욕망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오후의 간식을 좋아하였고, 저녁 식사 전에 모두와 함께 보는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을 좋아하였다. 그는 무엇 하나 기대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평온하게 살고 있었다. 두 번째 밀레니엄이 끝나는 그 밤도 그에게는 마냥 기분 좋은 밤이었다.
  세계 전역의 묘지에서는 묻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들이 무덤에서 계속 썩어 조금씩 해골로 변해가고 있었다.

『소립자』,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pp.316-317
우상의 눈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전상국 (민음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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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선과 악의 모호한 구분과, 우매한 전체 집단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화자이며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대, 선으로 보이나 사실은 위선에 둘러싸인 임형우와 담임선생님. 절대 악이나 집단에 의해 변모하게 되는 최기표.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의 집단으로 구성된다. 소설은 각 인물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크게는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는 인물들의 성격은 결과적으로는 선과 악 중 어느 것도 아닌 모호한 것이 되어버린다.

  소설 안에서 최기표는 악으로 대표되는 존재이다. 그에게 피해를 당하는 아이들은 함부로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나는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 의문점이 있다. ‘머리에 털나고 처음인 그런 무서운 린치’를 당한 이유대조차도 담임이 최기표를 미워하는 데에 반감을 가진다. 최기표가 행하는 악에 피해를 입은 이러한 집단이 최기표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나는 그것을 일단은 최기표가 가진 악행의 순수성에서 찾고 있다. 악행에 순수가 있다는 것은 모순되는 말일지 모르지만, 그의 악행은 정직하다. 누군가를 괴롭히고자 몇날 며칠을 고민하여 괴롭히거나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해 도시락을 훔쳐 먹는 것이 아니다. 그저 메스껍기에, 배가 고프기에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그가 행하는 악은 계획적이지 않다. 보기에 메스껍기 때문에 사람을 때리고, 배가 고프기 때문에 도시락을 훔쳐 먹는다. 이러한 그 악행의 순수성-순전히 단순한 감정 욕구에서 불러일으켜진 악행-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품을지언정 집단적으로 책망치 않는 최기표에 대한 규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한다. 담임선생님과 임형우가 그 규제의 발원지이다. 담임과 임형우는 그 성격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성격의 인물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위선에서 드러난다. 담임은 임형우보다 노골적이다. 그에게 있어서 최기표는 자신의 완벽한 항해에 방해 요소가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방해 요소인 최기표를 규제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지는 않는다. 그 필요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 임형우다. 임형우는 천천히 자신의 계획을 실행해 나가는 야심가다. 최기표를 몹시 위하는 척 하면서도 담임이 그를 옭아매는 데 일조하는 인물이다. 임형우는 단순히 담임의 말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는 아니지만 담임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최기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데 한몫을 한다. 이 둘은 최기표를 ‘구원’한다는 슬로건을 앞에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최기표를 통해 자신들을 치켜세우는 데에 마음이 쏠려 있다. 소설 중반부에 나오는 신과 악마에 대한 짧은 말은 이런 상황의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보이게끔 한다. 그들은 선을 가장한 위선이다.

  소설에는 이러한 선과 악의 대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을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대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화자이니까 빼 놓는다 하더라도 나머지 아이들은 도대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은 그저 우매한 집단이다. 담임과 임형우가 꾸며놓은 일대로 이끌어지는 집단에 불과하다. 그러한 그들을 나는 우매한 집단이라 표현한다. 그렇다고 이런 우매한 집단을 만만하게 여겨도 되는 것일까?

  임형우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먼저 집단을 섭렵한다. 최기표에게 어느 정도 다가섰을 뿐더러 나중에는 자기희생을 통해 재수파 아이들(그들도 결국은 집단의 일부분이다.)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임형우는 왜 집단을 끌어들였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 우매함과 동시에 드러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누가 말했던가. 개인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며 집단에 의해 평가받으며 집단의 평가에 따라 개인의 가치는 성립된다. 이러한 것을 따져 볼 때 소설 안에서 최기표가 가지고 있는 위치는 최기표 자신이 쟁취한 것도 있지만 집단에 의한 힘이 더 강했으리라 본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반의 대장이었던 엄석대가 가지던 집단에 의한 권력과 같이 말이다. 최기표는 재수파 라는 소수의 집단에 의해 악의 근원지로 자리 잡고 반 아이들이라는 집단에 의해 그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임형우가 대중이라는 집단을 이끌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형우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유대와의 대화에서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임형우는 재수파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는 것에서 이미 완벽하게 대중을 사로잡았다. 임형우는 이유대에게 ‘우리가 무서워했던 건 기표가 아니라 기표를 둘러싸고 있는 재수파들’ 이라는 말을 한다. 즉 최기표가 가지고 있는 힘이 최기표 본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집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집단을 손에 넣으면 최기표도 자연스럽게 손에 넣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반의 순탄한 항해에 방해가 되는 최기표를 얌전히 시키기 위해서 임형우는 집단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영악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정확한 판단이다. 이후 최기표가 반에서 원래의 입지를 잃고 단순히 불쌍한 아이로 전락해 버린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집단의 무의식적인 행동은 임형우와 담임이 계획했던 대로 최기표를 규제하게 된 힘이다. 

  집단은 최기표를 무서워함으로써 최기표를 반의 권력자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최기표를 나약한 인물로도 만들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집단은 지도자에 의해 전에 가졌던 개인의 인상을 잊고 새로운 인상을 덧그려 나간 것이다. 최기표가 가출까지 할 정도로 가졌던 두려움은 자신의 현실 변화뿐만 아니라 과거와 너무나 대비되는 집단의 태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소설 안에서는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인물들이 소설 밖에서 볼 때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모호성을 통해 인간의 선악에 대한 물음을 던져준다. 또, 집단의 우매함과 더불어 집단의 무서움을 보여줌으로써 명확한 세태 판단 없이 휩쓸려가는 대중을 비판하는 모습도 들어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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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다시 기억남. 이거 재밌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영하 (문학과지성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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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김영하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단편집인 「오빠가 돌아왔다」였다. 전체적으로 참 유쾌한 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가슴 한구석을 쓰라리게 한다는 느낌도 있었다. 또, 상황을 유쾌하게 풀어내지만 동시에 그를 통해 몹시 비꼬아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범한 일상 혹은 현실을 그려내는 척 하면서 그 안에서 이리저리 현실을 비꼬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데에서 조금의 메스꺼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읽게 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내가 알고 있는 김영하 특유의 글을 복습하게 한 기분이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가 먼저 나온 작품이지만 말이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김영하의 다른 작품들처럼 현실을 비꼬면서 그것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이 안 풀리는 듯한 날이 있다. 모두가 겪어봤을 법한 그런 평범한 사건에서 하나의 극적인 요소(즉,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발견하게 된 것)가 더해지면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팽창되며 나중에는 펑 터져버려 의외로 맥없이 끝난다. 마치 이건 그냥 이런 이야기야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읽고 느끼는 건 순전히 읽는 너의 몫이야. 라고 말하는 듯도 하고. 

   내가 봤을 때 이 소설은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119에 신고하기 위해 하루 종일 노력하는, 그러나 잘 풀리지 않는 남자를 통해 요즘 사람들의 냉혹함을 전달하고 있는 것 같다. 휴대폰 하나 빌려주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엘리베이터에 갇혔음에도 혼자 나간 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여자. 크게는 이런 뼈대부터 세세한 화자의 감정 표현에까지 이런 현실의 냉혹함이 묻어나온다. 화자가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하며 마지막에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은 씁쓸함을 더해주기도 한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이전에 읽었던 김영하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읽고 난 뒤 기분이 조금 메스꺼웠다. 이게 정말 현실에서도 일어날 법 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이에게 휴대폰 하나 빌려주려 하지 않는 태도, 매일 보는 얼굴이라도 요금이 없으면 매몰차게 내리라 하는 버스 운전기사, 같은 위험 안에 있었음에도 자신이 그 위험에서 빠져나가면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 모두 현실 안에서 제법 있을 법한 인물이고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읽고 메스꺼움을 느낀다. 이 현실이 냉혹하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 하듯 유쾌하고 스스럼없는 말투로 전달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욱 배가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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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아마 책 전부를 읽진 않은듯?
나쁜 어린이 표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황선미 (웅진주니어,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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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동화를 읽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어릴 적에 재미있게 읽었던 몇 편의 이야기들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고 두루뭉수리 머리 속에 아른거릴 뿐이었다.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를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이번에 읽게 된 황선미의 「나쁜 어린이표」는 내게 꽤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누구나 어린 시절, 아니 꼭 어린 시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해받거나 억울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쁜 어린이표」는 건우라는 어린이의 이런 상황을 통하여 오해가 싹트는 상황과 건우의 마음속에서 일으켜지는 미움의 상황을 잘 전달하고 있다.

  「나쁜 어린이표」는 단순히 아이의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이들의 사회적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나쁜 어린이표’를 받음으로써 주변 아이들에게 ‘저 애와 놀면 나도 나쁜 어린이표를 받게 될 거야’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상황이 그러한데, 이것은 건우를 또 한번 상처 입히는 일이 된다. 건우의 상황에서 볼 때 오해 받아지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주변 아이들의 시선이 더 괴로운 것이었을 것이다. 「나쁜 어린이표」는 사소한 어른들의 행동이 어린이의 세계에서 어른의 의도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계속 오해를 받음으로써 건우가 노트에 ‘나쁜 선생님표’를 적어 넣는 것은 건우의 선생님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한번 ‘나쁜 어린이표’를 얻음으로써 계속 그러한 아이로 보여지는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 선생님의 모습이 아이에게는 더욱 커다란 상처로 번져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갈등은 동화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다가 결말에 가서는 선생님이 ‘나쁜 선생님표’를 발견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는 구조로 끝나고 있는데, 이런 결말은 그동안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소하며 1인칭 시점을 따라 건우와 감정을 공유하던 독자에게도 이해하기 쉬운 갈등의 해소를 전달한다.

  「나쁜 어린이표」는 철저하게 어린이의 시각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이 동화는 건우의 시선을 통해 선생님의 모습과 주변상황을 보여줌으로서 어른의 세계에서만 판단되던 것들을 어린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어린이의 시선을 이해하며 그것에 공감하게 한다. 읽는 이가 어린이라면 ‘나도 이런 적이 있어!’ 라는 식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이고, 읽는 이가 어른이라면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회상해 보거나, 어린이들의 시선을 이해하는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이 동화를 인기 있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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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예전에 읽을 때도 흥미로왔던 동화. 애들 과외를 다니면서 그 집에 있는 동화책을 읽게 되는데, 동화책도 재밌는건 진짜 재미있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세계문학전집 104)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민음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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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이다. 그 영화를 재작년인가, 시창작 시간에 교수님이 보여주셔서 봤었다. 메타포에 대한 감을 살려주는 영화이기도 했지만, 내용도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홀딱 빠져서 봤던 영화. 그 영화의 원작이라니까 안 볼 수가 없었다. 언제 사야지 사야지 벼르다가 사던 책 사이에 끼워넣었던 소설.

  아무래도 영화보다는 세세해서 결말 부분에 가서는 영화의 결말보다 훨씬 우울한 감이 있었다. 앞 파트를 읽는 내내 행복하고 즐겁다가, 뒷 파트에 가서는 정말 슬퍼졌던 소설. 실제 시인이었던 '파블로 네루다'를 픽션 안에 끼워넣다 못해 주인공 중 하나로 내세우는 재치를 발휘하고 있다. 시골 촌부에 불과했던 마리오가 그를 만나게 되면서 쌓는 우정을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처음 마리오의 행동들은 어떻게 보면 민폐이기 짝이 없었지만, 진솔한 그 모습 때문에 악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때문인지 그들은 점점 친분을 쌓게 되고, 네루다는 마리오가 시를 쓰도록 도왔을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베아트리스와의 중매에도 적극 나서준다. 둘의 교류는 사회의 편견을 뛰어넘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마리오에게 항상 힘이 되어주던 네루다가 마을을 떠나고 정치를 하게 되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칠레의 역사와 맞물려 꽤 어두운 방향으로 진행된다. 네루다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사건이 지나버린 뒤엔 모든 것이 빛바랜 듯 쇠락해버리는 느낌이었다. 마리오가 경찰조사를 받으러 가는 길이 그의 마지막 길이었다는 건 누구나가 알 것이다.

  이야기의 진행은 무거운데 재미있기는 무척 재미있어서 책장이 금방금방 넘어가던 소설책.

  "마리오, 내게는 『일상 송가』보다 훨씬 더 괜찮은 책들이 있네. 그리고 온갖 메타포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건 부당한 일이야."
  "뭐라고요?"
  "메타포라고!"
  "그게 뭐죠?"
  시인은 마리오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예를 하나만 들어주세요."
  네루다는 시계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좋아. 하늘이 울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뜻일까?"
  "참 쉽군요. 비가 온다는 거잖아요."
  "옳거니, 그게 메타포야."
  "그렇게 쉬운 건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부르죠?"
  "왜냐하면 이름은 사물의 단순함이나 복잡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거든. 자네 이론대로라면 날아다니는 작은 것은 마리포사(*스페인어로 나비)처럼 긴 이름을 가지면 안 되겠네. 엘레판테(*코끼리)는 마리포사와 글자 수가 같은데 훨씬 더 크고 날지도 못하잖아."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메르타, 민음사, 2004, pp.27-28

  "저 사랑에 빠졌어요."
  "이미 말했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저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내가 이 나이에!"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메르타, 민음사, 2004, p.42
 
  "로사 부인이세요? 또 파블로 네루다입니다."
  마리오는 수화기를 통해 과부의 대답을 엿듣고 싶었다. 하지만 과부의 대답은 시인의 고막만 괴롭혔을 뿐이다.
  "당신이 열두 사도를 거느린 예수라 해도 우체부 마리오는 결코 이 집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겁니다."
  네루다는 귓불을 어루만지면서 공허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아냐, 아무것도. 다만 첫 회에서 케이오 패 한 권투 선수의 심정을 이제 알 것 같아."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메르타, 민음사, 2004, p.86

픽션들(보르헤스전집 2)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민음사,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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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니, 글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머릿속에 펼쳐진 것은 당연히 미로였다. 여러 방향으로 꼬여 있어서 빠져나오려면 한참을 애써야 하는. 그런 미로에도 길은 있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의 정원은 결코 끝이 나지 않는 시간의 미로이며 삶의 미궁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아주 옛날에 봤던 프로그램 하나를 떠올렸다.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어떤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주고 그 중 한 가지를 선택했을 때의 결과를 각각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대부분 앞부분에서 선택하게 되는 아주 작은 선택 때문에 당착하게 되는 극과 극의 결말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한번 쯤 하는 후회에서 나오는 ‘내가 전에 이런 식의 선택을 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간단한 물음을 이야기로 풀어낸 셈이었다. 이런 심리를 건드리고 있었기에 궁금증을 자극하는 면이 강하고 내용적 측면에서도 꽤 재미가 있었기에 인기가 많았던 기억이 난다.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인생극장’에서 건드렸던 그 물음을 근본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소설은 처음 부분에서 리차드 메든이라는 영국 군인에게 쫒기고 있는 중국계 독일군 스파이인 유춘의 상황을 설명하며 그 때문에 그가 선택하게 되는 방향, 그리고 그로 인한 만남과 뒷마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그의 선조 취팽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적절한 배경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 안에서의 유춘은 자신의 대장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어떤 것이든 그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은 후에 그가 만나게 되는 스티븐 알버트와의 만남에 필연성과 개연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유춘의 조상인 취팽의 기이한 책은 책 자체로서 결말이 나지 않는 소설이다. 책과 미로를 합쳐 놓은 듯한 이 책은 결말이 나지 않으며 그 플롯 또한 복잡해 그냥 읽었을 때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취팽이 남긴 편지에서는 <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모든 미래들이 아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알버트는 <다양한 미래들(모든 미래들이 아닌)>이라는 구절에서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의 무한한 갈라짐을 연상하고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의 정체를 알아챈다. 정원은 공간적인 것이 아닌 시간적인 것으로, 소설의 복잡한 플롯은 이로 인해 기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취팽의 소설은 어떤 일을 했을 경우에 일어나는 후일에 대한 경우의 수를 모두 차용함하고 그 차용된 사건들도 또 다시 분화해 나가면서 가지를 뻗어나가 종당에는 그것들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진 길들이 있는 정원을 만들어 낸다.

  소설 안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다루고 있는 취팽의 이 책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을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을 떠올렸다고 했다. 요컨대, 나는 이 소설이 현재의 시간과 선택의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취팽은 뉴턴과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을 믿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뉴턴과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이란 이러하다. 뉴턴이 보는 시간은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과 절대적 시공 안에 모든 실재가 존재하는 시간이며 쇼펜하우어의 시간은 개인적이고 특별한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공통적으로 이 두 사람은 시간을 절대적인,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취팽이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는 시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시간 안에 있는 사건들과 인물들을 통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취팽의 소설, 나아가 보르헤스의 이 소설은 현실에서 내가 어떠한 일을 선택함으로 인해 발생되는 사건들의 분화 속에서 미래의 시간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예는 소설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살인이라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다. 만약 앞부분에서 빅토르 루네베르크가 죽지 않았더라면 유춘이 알버트를 살해할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알버트와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 죽게 됨으로서 알버트가 죽게 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은 시간과 그 사건에 의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또 유춘은 알버트를 죽이기 전 현실과 다른 시간을 잠시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유춘과 알버트가 존재하는 현재의 시간과 다른 또 다른 시간(곧, 취팽이 생각하는 개념의 시간)을 보여주는 보르헤스의 소설적 장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현실은 수많은 필연성이 결집한 결과물이다.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는 ‘아 내가 그때 이러저러 했다면 지금 이렇지 않았을 텐데.’라는 후회는 과거의 선택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하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개인적으로 취팽의 시간개념에 공감을 하는 편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수많은 우연과 필연으로 결집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이 소설은 소설 안 취팽이라는 인물이 쓴 소설과 유춘이라는 인물의 예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선택, 그에 따른 삶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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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이거 굉장히 짧은 단편인데 지금 봐도 재밌다. 『픽션들』 안에 있는 짧은 단편.
마틴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데일 펙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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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자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책 중 한권. 퀴어문학이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고 하기엔 가슴에 애틋하게 남는 응어리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주제가 헤어짐 혹은 사랑을 할 때 느끼는 부푼 감정, 그것이 빠져나가는 과정 들을 그리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단편집이라고 해야할까... 각각의 에피소드는 독립되어 있지만, 기묘하게도 유기성을 띄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마틴과 존』안에 있는 각각의 소설들에서 주인공들은 항상 마틴과 존이며, 주변 인물은 비, 수전, 헨리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마틴이 부자건, 길에서 만난 십대 소년이건, 지금 욕조에서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이건 간에. 혹은 존이 또 다른 인물이건 간에 그들은 항상 마틴과 존이다.

  단편들은 각각 그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이 행복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속이 쓰렸다. 행복한 이야기도 얼마 없거니와, 행복하다고 방심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항상, 그리고 영원히」같은 단편에서는 행복한 모습을 내내 보여주더니만은 마지막 강도들의 습격 탓에 기분을 잡쳐버리고 말았었으니까. 이 단편은 묘하게 뒤쪽에 위치한 「빌어먹을 녀석, 마틴」이라는 단편과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을 주었다. 「빌어먹을 녀석, 마틴」은 이 단편집 내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는데, 이미 마틴이 죽어버린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 외에도 존이 헨리와 맺고 있는 관계, 수전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절절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변모」와 「바다의 끝」이 아닐까 한다.
「변모」의 경우 처음에는 그 소재 탓에 껄끄러운 감이 있긴 했다. 양아버지와 같은 상대와 미성년자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렇지만 어머니의 하룻밤 상대였으며 아버지의 죽음 뒤 피폐해진 어머니를 돌봤던 애인 마틴과, 아들인 존 사이의 감정이 기묘하게 잘 나타나 있다. 중간에 있는 그 짧은 성애 장면에 대한 묘사는 나까지도 숨죽이게 만들었다. 소설 마지막의 존이 마틴에게서 받은 편지 구절이 아른거렸다.

  나는 오늘 그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편지는 수개월 전에 부친 것이었지만, 네 개의 다른 주소지를 경유하여 내게로 왔다. 마치 편지의 내용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지도 모른다. 비록 글의 맥락이 닿지 않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도, 그런게 있다고 한다면, 주의 깊게 찾아내야 했지만 말이다. 이 편지의 끝부분에는 어떤 절박함 같은 게 있었다. 동시에 모호한 점도 많았지만.
  "사랑하는 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니?"

「변모」, 『마틴과 존』, 데일 펙, 민음사, 2008, pp.101-102

  『마틴과 존』안의 소설이 대부분 내 속을 쓰리게 만들었지만, 「바다의 끝」의 경우엔 달랐다. 겨우 세쪽의 이 짧은 소설은 정말 산뜻하고 둥실거리는 사랑의 기쁨을 그 안에 담아냈다. '사랑이 언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짧은 물음으로 말이다. 사랑은 존이 느끼는 것 처럼 육체를 나누는 밤, 그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틴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아침에 존재한다. 나는 이 논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사랑은 아침에 존재하는 거야."
  마틴이 다시 내 귀에 그 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내 귀에 갖다 대고 젖은 손으로 내 등을 위아래로 쓸어 주며 나로 하여금 더 이상 아무것도 원치 않게 만들었다.
  "긴 밤을 함께 보내고 나서 맞이하는 아침에."
  내 귀 아래에서 그의 심장이 피의 강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생각에 나의 일부는 떨렸고, 나의 일부는 따뜻했다.

「바다의 끝」, 『마틴과 존』, 데일 펙, 민음사, 2008, pp.175-176

  단편집인데도 생각보다 더디게 읽었다. 슬며시 소재 탓으로 돌려본다. 재미있고, 언제 또 꺼내 읽겠지. 아, 그리고 소설 안의 묘사들이 신기한 것들이 많아서 좋았다. 독특하면서 와닿는 표현들을 많이 본 것 같다.
귀로 웃는 집(창비시선 157)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임영조 (창작과비평사,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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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로 웃는 집의 시들은 소박하다. 임영조 시인의 시들은 소박한 삶의 느낌을 담고 있다. 내가 생활하는 삶의 터전, 그 생활 터전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과 소소한 이야기들. 그것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겪고 있는 삶 혹은 내 주변의 삶의 모습이기도 한데, 이런 시들이 무작정 어렵게 느껴질 리 없었다. 작가 후기를 살펴보면 임영조 시인 자신은 ‘철학적 심각성이나 종교적 엄숙함을 표출하려는 것보다 세상과 친하려는 따뜻한 시선을 갖고 싶다’고 했다. 이러한 작가의 마음가짐은, 내게 그의 시들을 한층 편하게 다가오도록 해 준 듯하다. 실제로도 그는 삶의 모습, 곧 세상의 모습을 담은 시들을 썼다.

  귀로 웃는 집의 시들은 삶의 모습을 피가 뚝뚝 흐르는 날것마냥 무작정 던져놓지는 않는다.(그런 것은 시로 취급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귀로 웃는 집의 시들은 자연물과 융합되어 삶을 나타내고 있다. 임영조 시인은 자신의 삶의 모습에 상상을 덧씌운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는 작게는 곤충의 모습, 크게는 커다란 풍경 등에 빗대어지거나 하여 다듬어진다. 피가 흐르는 날것을 상상력으로 데치고, 비유라는 초록색 잎으로 감싸 쌉싸래한 삶의 맛이 나도록 내놓은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해서 임영조 시인의 시들이 무작정 안락하고 편안한 삶의 모습을 설겅설겅 담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체험하는가?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개인의 생각들은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부정적인 것도 있다. 남진우 씨의 해설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곤충채집 시리즈는 변신을 거듭하며 사는 사람들의 문제성을 해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임영조 시인은 단순하게 일상적 감정만을 담아내지 않았다. 그는 여러 가지 문학적 표현을 통해 자신의 사상 또한 시에 담아낸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내면을 독자에게 시를 통하여 드러낸다. 편안하게 한번 읽고, 두 번째 정독을 하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의 낱개로 풀어보는 시 공부로 인해 시에 대한 막연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시는 무작정 어렵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시를 느끼려고 해 본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시는 전체적으로 그 시의 향을 맡으며 느껴야 한다. 분석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어쩌면, 그것이 어떠한 형식을 통해 탄생했는지는 그 시에 담긴 향을 느낀 후에 하는 편이 더 수월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한다.

  임영조 시인의 시들을 통해 나는 시를 좀더 쉽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가 쉽다는 말은 아니다. 시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어렵고, 막연하고, 알 수 없는 말의 나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귀로 웃는 집의 시들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을 통해 부담 없이 작가의 내면의 성찰을 세상에 뱉어낸다. 아주 조금이라도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시를 친근하고 어렵지 않은 느낌으로 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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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제로 냈던 거 앞 뒤 뭉텅 잘라버린 중간 내용. 저 시집 아직도 갖고 있는데 편하다.
장미의 이름(상)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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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변 아이들을 상대로 말을 들어보니 평가가 극과 극을 달렸다. 그러나 이건 소설적인 평가는 아니고, 재미의 측면에서 말을 들어본 것이었다. ‘재미있다’ 혹은 ‘어렵다’라는 대답이 나왔는데, 재미없다가 아닌 ‘어렵다’였기에 책을 읽기 전 바짝 긴장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실재로 책을 구매하고 나니 일반 책보다 더 두꺼우면서도 두 권이나 되는 분량이 아닌가. 맘을 단단히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장을 열고 몇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을 때는 더욱 절망했다. 긴 주석에 잘 알지 못하는 내용. 초반부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주석을 읽다보면 내용을 잊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내용 이해의 틀을 잡고 나자 읽는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 영화를 본 것이 내용의 틀이 되는 이야기를 잡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책의 내용을 잘 담은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장미의 이름은, 주 내용의 뼈대를 빼 놓고 보더라도 그 살집이 비대하다. 쉴 새 없이 늘어대는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의 대화, 또는 윌리엄 수도사와 다른 수도사들과의 논쟁은 장미의 이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살집이다. 그들의 대화는 수많은 종교적 논쟁과 철학적 물음으로 점철되며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고 있기에 쉽사리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차근차근 살펴보면 그 반론의 반론이라는 것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종파라도 그 안에서 끝없이 갈려나가는 의견과 의견의 대립은 장미의 이름이 왜 단순한 소설로 치부되지 않으며, 움베르토 에코가 지식인으로서 높게 평가되는지 알게끔 한다.

  소설의 초반부에 나오는 윌리엄과 우베르티노의 논쟁은 소설에 등장하는 어느 논쟁보다 어렵고 지루하면서도 재미있다. 우베르티노는 꼬장꼬장하면서도 이미 머리가 굳은 노인이다. 그는 당시 가톨릭인의 모습 중 하나를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그는 해박하지만 자신의 굳은 믿음, 어찌보면 신념인 그것을 통해 다소 보수적이며 일반적이지 못한 논리 구성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와 위트가 적절히 섞여있는 논쟁을 펼치는 윌리엄은 철저히 이성적인 틀 안에서 논쟁한다. 이 대화는 분명 서로의 논리가 치열하게 다투는 접점이고, 어느 한쪽의 편도 확실히 들어주지 않지만, 왜인지 나는 윌리엄의 손을 들게 된다. 내게 우베르티노는 믿음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둔해진 사람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결말 부분에서 언 듯 호르헤가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는 듯한 느낌인데, 이것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 그의 논리 전개가 타당성을 획득하기에 부적당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나의 규칙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논리 전개가 쉬이 이루어지지 않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후 나오는 윌리엄과 수도사들과의 논쟁에서도 나는 대부분 윌리엄의 손을 들었는데, 이것은 내가 무신론자인 것과도 조금은 관계있을지 모르겠다.

  윌리엄과 호르헤 수도사의 웃음에 관한 논쟁 논쟁은 단순히 종파가 다르고 가르치는 교리가 다르다는 것에서 설명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호르헤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웃음이 좋지 않다고 믿는다. 이것은 한 종파의 교리가 되기 이전에 호르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미 진리가 된 것 같다. 웃음이란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반응이다. 그런데 호르헤는 이것을 두고 이교도들이 관객을 웃게 만들고자 지은 것이라고 하며 웃음이 온당치 못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웃음을 육체를 뒤흔들고 얼굴의 형상을 일그러뜨리게 해 인간을 잔나비로 추락시키는 존재라고까지 말한다. 호르헤가 내세우는 또 다른 논리도 우습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의 논리는 ‘웃음이 나쁘다’라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고 단지 내게 그의 믿음을 강요할 뿐이다.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윌리엄의 주장 중 웃음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고 이성성의 기호라는 말 만 나에게 약간의 의문을 주었을 뿐(인간만이 웃었던가?), 나머지의 논리는 적절한 예를 들어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나의 반응은 무슨 차이일까. 그것은 앞서 말했듯 호르헤(혹은 그 외의 다른 수도사들)의 주장은 종교적 가르침으로의 믿음에 얽매여 있는 탓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요컨대 그들은 그들의 교리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은 거짓일 수 없고, 이 믿음을 온전히 보전함과 동시에 다른 논리를 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펼치는 수많은 논쟁거리는 온전한 자기주장만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고, 하나에 얽매인 상태로서는 적절한 토론을 펼칠 수 없다.

  그들의 수도원이 진리에 대한 수호라는 아름다운 이념을 가졌음에도 그런 이념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흥미를 억압했다는 것에서 하나의 믿음에 무작정 얽매인 결과를 알 수 있다. 그들이 펼치는 논리가 맞았더라면 다시 말해 그들의 진리가 정말 진리였다면, 그들의 진리는 억압하지 않더라도 그 진리로서 인식되지 않았을까. 중간에 윌리엄이 아드소에게 해 주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라에서도 나올 수 있는것이라고.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그 진리의 본질마저 흐리고 있는 것이다.

  star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도 그 덧없는 이름뿐.) 장미는 장미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장미 자체로서 장미인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을 통해 이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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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이게 대학 2학년 때인가? 이 땐 죽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재미있다. 이거 영화도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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