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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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 읽었다. 1인칭이고 고등학생 시점이었는데 술술 읽혔다. 처음에는 홀든 콜필드를 보며 뭐야 이거, 완전 사춘기 소년이잖아...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 읽고나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홀든 콜필드는 그냥 자기 고민이 많고 세상에 대해 불만이 많은 녀석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홀든은 약간의 허세야말로 그나이에 꼭 걸맞는 것들이었고, 그 외의 부분에서 딱히 악행이라고 할만한 것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순진하고 마음씨 좋은 행동들을 더 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서 그 정도 허세에 젖은 행동을 하지 않거나, 그 정도 불만에 찬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야 말로 더 드물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십대라면. 그 점에서 샐린저는 이 소설을 참 잘썼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의 감성들이 생각할 만한 것들을 일인칭으로 정확하게 서술했다는 느낌이었다.

  홀든이 고등학교에서 또다시 퇴학을 당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며칠 동안 그가 겪는 일들은 단순한 노선을 따르면서도 여러 모로 험난한 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 동생 앨리의 죽음과 몇 번의 퇴학 등 개인적으로 힘든 일들을 겪은 반항아 아닌 반항아 홀든은, 그 사흘 간 더 더럽고 치사하며 나쁜 세상의 모습을 다 겪게 되었다. 어떻게 삐뚤어지게 나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택하는 것들은 나쁜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그저 먼 곳으로 떠나 혼자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었다. 나아가야할 멘토가 되어주어야 할 어른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그나마 마지막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마저 그를 성희롱 하려 했으니, 그에게 어른들이 쥐어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어봤자 부모님이 쥐어준 알량한 돈 몇푼 뿐.

  방황하는 그를 구원하는 것은 어른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어린 여동생 피비이다. 아직 초등학교에 다닐 뿐인 이 소녀의 맑은 영혼은 홀든을 구원하는 밧줄이었다. 고작 아이들이 노는 호밀밭을 지키는 게 꿈일 뿐인 순수한 홀든의 영혼은, 마찬가지로 순수한 아이에게서 구원을 얻는다. 그가 '사회적으로' 나쁜 길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동생 뿐이다. 그가 나아갈 길로 이끌었어야 할 어른들은, 그를 이해시키거나 혹은 그를 이해하기에 너무나 더럽혀져 있었다.

  피비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홀든은 이대로 가다간 사회의 낙오자가 될 지도 몰랐지만, 그렇더라도 영혼만은 순수한 채로 유지되었을 지도... 마지막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에서 조금 멍해졌다. 홀든같이 순수한 이에겐 사회로 적응하기 위한 치료가 필요했나보다.

  음, 잘 모르겠다. 내가 좀 더 어릴 때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무슨 생각을 했을지. 다만 지금 읽어도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게 정리가 잘 안 되어서 아쉽다. 그 짧은 며칠 동안에 진행되는 홀든이 겪는 일들과 그에 대한 심리묘사가 참 좋았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 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 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민음사, 2001, pp.229-230

  「지금 네가 떨어지고 있는 타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정말 무서운 거라고 할 수 있어. 사람이 타락할 때는 본인이 느끼지도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끝도 없이 계속해서 타락하게 되는 거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그냥 생각해 버리는 거야. 그러고는 단념하지. 실제로 찾으려고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냥 단념해 버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민음사, 2001, p.247-248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빌헬름 스테켈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민음사, 2001, p.248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세계문학전집108)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라우라 에스키벨 (민음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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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왜 '쌉싸래'라는 표준어를 두고 쌉싸름을 선택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분량이었지만서도 술술 읽히던 책. 부엌에서 시작된 티타의 삶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인생의 이야기. 티타의 인생을 따라가며 티타가 느끼는 절망과 기쁨, 슬픔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 기복은 한없이 비참하다가도 희망의 실마리를 주기 때문인지, 읽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줄거리만 따지면 조금 이상한 느낌을 준다. 가부장도 아니고, 가모장이라고 해야하나? 막내딸의 인생은 무조건 어머니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집안의 이상한 법도에 따라 티타의 인생은 철저하게 희생된다. 집안일 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결혼도 못하고 평생 마마 엘레나만 수발해야 한다는 거다. 게다가 이 마마 엘레나의 폭압 앞에 티타는 사랑하던 연인 페드로가 큰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하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페드로는 '사랑하는 그녀의 옆에 평생 있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며 로사우라와 결혼했는데 이 부분은 정말 싫었다. 차라리 둘이 도망을 갔으면 가지, 도대체 몇 명에게 상처를 주는 페드로인지.

  부엌과 함께 자란 티타이기에 각 에피소드는 각각의 요리가 등장하며 티타의 감정을 표현해준다. 요리를 만들어내는 감정 뿐 아니라, 요리를 통해 각종 신기한 묘사로 감정을 표현했기에 이런 부분이 참 좋았다. 그 요리들에 영향을 받는 주변인물들에 대한 표현도 좋았고. 특히 둘째언니였던 헤르트루디스가 펄펄 날아서 도망가버리는 이야기에서는 장미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페드로와 로사우라가 떠나고 티타가 혼자 앓던 시간들이 보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기력을 완전히 쇠해버린 티타의 마음을 보듬어줄 사람이 곁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유모 나차가 죽은 후 티타가 더 힘들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시간 만큼은 티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다. 티타가 의사 존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헌신적이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존과 함께 행복하길 바랐다. 티타 인생에 소박한 행복이 찾아온 것 같았으니까. 존을 만난 후 티타는 강해졌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자기 의지를 똑바로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티타의 변화가 좋았다.

  하지만 역시 아쉬운 것은 티타의 마지막 선택. 평생을 마마 엘레나를 돌봤고, 언니 로사우사를 위해 아낌없이 주던 티타가 좀 더 이기적인 결정을 하길 바랐다. 이 선택 자체도 자신이 한 선택이라 티타를 탓할 수 없지만, 아쉬운 건 사실.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급 찌질해지던 페드로는 정말 싫었는데. 그리고 티타의 선택을 받아들인 존은 정말 좋은 사람이로구나. 로사우라와 페드로의 딸인 에스페란사와, 존의 아들인 알렉스가 맺어진 것, 그리고 그 오랜 시간 후에야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페드로와 티타. 남들의 시선이 어땠건간에, 티타는 자기 자신이 선택할 수 있어 행복했을 것 같다.

  이야기를 보니 뭐 혁명이니 뭐니 나오던데... 역사같은걸 알고 봤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뭐 몰라도 재미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페드로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 순간 티타는 팔팔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집어넣었을 때의 느낌이 이런 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얼굴과 배, 심장, 젖가슴, 온몸이 도넛처럼 기포가 몽글몽글 맺힐 듯이 후끈 달아올랐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민음사, 2004, p.24

  "아시다시피 우리 몸 안에도 인을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이 있어요. 그보다 더한 것도 있죠.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알려드릴까요?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잠시 동안 우리는 그 강렬한 느낌에 현혹됩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따듯한 열기가 피어오르지요.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나중에 다시 그 불길을 되살릴 수 있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육체에서 달아나 자신을 살찌워 줄 양식을 찾아 홀로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헤매게 됩니다. 남겨두고 온 차갑고 힘없는 육체만이 그 양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중략)

  "그래서 차가운 입김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장 강렬한 불길이 꺼질 수 있으니까요. 그 결과는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 입김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가 훨씬 더 수월하답니다."

(중략)

  "축축해진 성냥갑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이 있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민음사, 2004, p.124~12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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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책 내용은 알지 못할지언정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책의 제목이다. 나 또한 그랬는데, 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주변인들로부터 들은 책의 감상들(‘몹시 재미있다.’, ‘너무 어려워.’ 라는 식의 상반된 의견들)과 철학적 요소를 담은 소설이라는 것뿐이었다. 철학이라니. 게다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앞서 읽었던 단편들과 달리 긴 장편이었기에 처음 대하는 마음가짐이 편치 못했다. 책 표지에 있는 기괴한 그림이 책을 읽기전의 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고, 첫 페이지에 있는 ‘영원 회귀’니 뭐니 하는 말들은 나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러나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생각 외로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네 사람의 특징적인 주인공들을 통한 서술방식이 다른 소설들과 크게 다른 점을 안겨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라는 네 명의 주인공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한다. 여기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인간이란 존재가 가지고 있는 무거움과 가벼움, 그 경중. 그리고 우연의 필연성. 이것을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 전하고 있는 듯 하다.

  주인공들은 각각의 특징이 도드라지는 인물들이다. 삶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며, 테레사와의 관계를 통해 삶의 무거움을 배우나 그 가벼움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인 토마스. 운명적 사랑을 믿으며 무거움으로 대표되는 테레사,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구속받고 싶지 않아하는 사비나. 사비나의 애인이니 프란츠. 이 불안한 존재인 네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사랑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고, 토마스와 테레사 라는 한 커플과 사비나와 프란츠라는 한 커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난다 할 수 있다.

  토마스와 테레사는 서로 반대되는 캐릭터이다. 이런 상반된 인물의 관계는 서로를 참을 수 없어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는데 토마스로 하여금 그의 애정관계를 계속하게 하고 테레사에게는 그에 반항하려 하는 마음을 품게 한다. 토마스는 테레사의 무거움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의 행동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테레사는 테레사대로 토마스의 가벼움을 이해할 수 없고 그로 인해 반항하려 하지만 캐릭터 본질의 무거움 때문에 그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사비나와 프란츠는 앞선 토마스와 테레사와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인다. 사비나는 가벼움의 이미지로 대표되며 프란츠는 무거움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프란츠와 사비나는 서로 다른 언어 소통과정을 가지며, 프란츠는 사랑에 있어서 충실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사비나는 모든 억압을 거부하는 모습처럼 사랑도 자유이며 구속으로 느낀다.
 
  이런 상반된 캐릭터들에게서 거론될 수 있는 것은 우연의 문제이다. 예를 들면, 토마스와 테레사는 정말이지 닮은 구석이 없는 반대되는 인물이다. 비단 성격만의 문제가 아니라, 직업조차도 그러하다. 의사이며 가벼운 토마스, 소도시의 여급이며 무거운 테레사. 이렇게 다른 둘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둘은 결혼하게 된다. 여기에는 우연의 필연성이 반드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의 문제가 나온다.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니체가 말한 영원 회귀는 영원한 시간은 원형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일체의 사물이 그대로 무한이 되풀이되며, 그와 같은 인식의 발견도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내가 으레 겁을 먹었던 소설의 첫 부분. 여기에서 영원 회귀의 말을 담고 있다. ‘한번은 없는 것과 같다’라는 말에서 그것은 드러난다. 무경험의 행성으로서 우리의 세계를 생각할 때, 재귀의 가능성이 없기에 인간은 계속해서 똑같은 실수를 범하게 된다. 한번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두 번 살면서 이전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며 때문에 결과의 예측이 불가능하다.

  이 반복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괜찮겠지만 부정적인 것이라면 이것은 문제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영원 회귀는 무거움을 가지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이 가지는 영원 회귀는 서로에 대한 이해 불가능함으로 인한 것이고 이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한 영영 계속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소설속의 인물들은 이러한 반복을 계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의 가벼움을 택함으로서 이러한 반복을 그만두고 사회나 존재 스스로로부터의 해방욕구를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여태까지의 긴 네 캐릭터들의 성격과 그로 인한 이야기 전개는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캐릭터들은 인간의 존재를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나누어 보여주며, 영원한 사랑과 순간적인 사랑과 같은 모순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인간 존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과 동시에 이러한 캐릭터들을 통해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한계, 덧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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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너무 힘들어갔다.
파리대왕(세계문학전집 19)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윌리엄 골딩 (민음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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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읽으려고 했는데 다류가 사더니 바로 빌려줘서 읽었다(이런). 확실히 빨리 읽을 수 있었고, 읽는 내내 재미있었지만 동시에 괴롭기도 했다. 으 난 인간의 악마같은 본성을 대놓고 꿰뚫는 책이 제일 소름 돋는 것 같다. 내가 몹시나 감성적인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을 믿고 싶어하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나는 인간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가 그 본성을 끄집어 낸다던가, 혹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이게 더 처참하다) 사실은 인간 본성은 이러이러하다 라는 점을 짚어내는 이야기들이 참 껄끄러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파리대왕은 그런 이야기가 맞다. 어른들 없이 '어느 정도로' 교육받은 문명인인 아이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처음에 그들은 나름의 규칙을 정하고 랠프를 대장으로 추대해(과정이 좀 우습긴 했다만) 무인도에서 인간사회의 규칙을 세워 그것을 지켜나가려 했다. 사실 이 순간에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돼지Piggy가 무시되는 것과, 사사건건 부딪힐 것을 예고하고 있는 잭의 성격이 눈에 보여서 그 파탄이 눈에 보이는 듯 했지만. 그래도 뭔가 이해가 되는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 왕국은 권력에의 욕심과, 식욕이라는 본능, 실체없는 두려움에 선동된 탓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것도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무너져버렸다. 사이먼의 죽음까지는 광기에 휩싸인 결과라 치부할 수 있다 해도, 최후의 지식인이었던 돼지가 죽은 이후에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랠프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였던 쌍둥이들조차 잭의 편으로 돌아서 버리고, 모두가 랠프를 사냥감처럼 사냥하려 드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마치 이성이라고는 한 톨만치도 남지 않은 짐승처럼 변해버린 모습이라서... 사실 짐승도 자신에게 투항할 의지가 없는 다른 짐승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죽이려 하진 않는다. 인간이 짐승보다 한 단계 아래로 퇴보해버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랠프 하나를 잡기 위해 섬에 불을 내는 건 또 어떤지. 마치 야만인의 제의 같다고 생각했다.

  구조대들이 왔을 때, 처음에는 그렇게 자기 이름을 잘 읊더대던 퍼시벌 윔즈 메디슨는 머리 속을 텅 비워버린 양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성이 없는 우리는 결국 점점 더 멍청하게 변해버리고 만다.

  랠프와 다른 아이들이 무사히 구조되었다지만 이것을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너무 낱낱이 드러나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 앞에 기묘한 역겨움이 느껴졌다. 그건 그 추악함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인간, 우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것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나 또한 자신의 치부를 보고 싶지는 않다.

  랠프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 전에 모래사장을 뒤덮고 있던 신비로운 마력의 모습이 잽싸게 눈을 스쳐갔다. 그러나 이제 섬은 죽은 나무처럼 시들어져 버렸다―사이먼은 죽고― 잭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목매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민음사, 2000, pp.302-303


멋진 신세계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올더스 헉슬리 (문예출판사,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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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류의 강력추천으로 산 책. 사실은 스트록스 노래인 'soma'가 떠올라서... 난 디스토피아 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볼까 말까 꽤 망설였었는데, 열고 나니 굉장히 재미있어서 거침없이 읽을 수 있었다. 디스토피아 물이지만 특별히 어두운 느낌을 준다기보다 묘사하는 모습들이 너무 깔끔하고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이라서 읽는 데 편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1984를 읽으며 느꼈던 그 불안감이나 갑갑함이 없었다.

  처음엔 주인공이 버나드인줄 알았다. 멍청한 레니나를 옆에 끼고 뭔가 하는건가 했었어... 헬름홀츠도 뭔가 있어 보였었는데, 막상 정말 요주의 인물은 '야만인' 존이었다. 1/3이 지난 시점에서야 등장하는 인물인지라 뭔가 했었어. 어머니가 있는 자연상태로 태어나, 소위 문명세계란 곳에 성인이 되어 돌아온 야만인 존. 문명세계의 씨를 타고 났기에 '야만인 보호구역'에서는 따돌림을 받았던 존은, 행복할 줄 알았던 문명세계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 야만인의 세계에선 배척당했다지만 그곳의 정신을 가지고 자랐기에, 문명세계에는 그가 추구하는 사랑과 영혼의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만약 린다가 좀 더 책임감 있는 엄마였다면, 야만인 세계의 사람들과 동화되어 잘 자랄 수 있었다면 존이 이렇게 불행해지진 않았을텐데. 그런 생각도 들었고...

  이런 존의 혼란은 총통과의 대화가 나오는 17장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읽으면서 어느 쪽이 맞는가에 대해 몇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 현실의 나는 존의 손을 들겠지만, 만약 그렇게 교육받아진 사람이라면 나도 멍청이 레니나처럼 행동하려 들지 않을까. 혹은 책임감 없이 술만을 찾고 종당에는 소마와 함께 죽어버린 린다처럼.

  철학적인 질문이 오가는 것도 괜찮았다지만, 사람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듯 만들어지고,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져있으며, 세뇌받으며 자라는 신세계의 모습이 나오는 초반 부분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징그럽게 보여야 할 모습인데 이 부분이 꽤 깔끔하게 묘사되며 넘어간다. 게다가 이 세계의 사람들은 반그램, 혹은 일그램의 소마 한 알로 행복해 질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하다. 불행한 세계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어둡고 컴컴한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읽는 내가 현재의 사람이며 그들이 말하는 야만인이라는 점에서 느껴지는 불쾌함은 어쩔 도리가 없다.

  * 소립자에 나왔던 미래상과 이런 미래 상 중에서 고르라면, 나는 차라리 지금의 인류가 몽땅 없어지고 새로운, 종이 다른 인류가 등장하는 소립자 쪽의 미래상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왜일까.

  "여러분들은 노예 신분이 좋습니까?"
  그들이 병원으로 들어갔을 때 야만인이 말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망울은 정열과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여러분은 갓난아기 상태가 좋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갓난아기들입니다. 보채고 앵앵우는 젖먹이들입니다."
  야만인은 그들의 짐승 같은 우둔성에 어찌나 분개했떤지 자신이 구해주러 온 대상인 그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있었다. 모욕적인 언사는 거북등과 같은 완강한 그들의 우둔성 앞에서 무력한 메아리처럼 되튕겨왔다. 그들은 분노에 찬 표정을 눈에 담고 야만인을 멍하고 침울하게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앵앵 울고 있을 뿐입니다!"
   비애와 회오, 연민과 의무―이 모든 것을 이제 망각한 상태였다. 이제 이들 인간 이하의 괴물들에 대한 강렬하고 위압적인 증오심에 빠져들고 있었다.
  "당신들은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인간다움과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릅니까?"
  분노가 원동력이 되어 그의 말이 유창해지고 있었다. 어휘가 술술 터져나왔다.
  "그것도 모릅니까?" 그는 반복해서 물었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한 응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을 계속했다.
  "그러면 내가 가르쳐주겠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들을 자유롭게 해주겠습니다."
  그러고는 병원의 안뜰로 향한 창문을 열더니 약상자를 열고 소마 알약을 한 주먹씩 꺼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문예출판사, 1998, pp.269-270


소립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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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보니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던 소설. 이 책을 읽는 중간에 꼬마 니콜라 5권 세트와, 고우영 삼국지 10권 세트를 읽었다(...) 아무튼 이 소설은 서점에서 우연히 보고 집에와서 바로 샀었는데, 내가 적나라한 성애 묘사 장면 때문에 샀던건지 뭔지(하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알다시피 이 묘사는 전혀 야하지 않다, 그냥 적나라할 뿐.) 그냥 홀리듯 샀던 걸로 기억한다.

  중간 정도까지 읽었었을 때도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지, 이 소설의 주제는 뭔가 한참 생각했는데 결말까지 가서야 겨우겨우 생각할 여지가 생긴 것 같다. 결말이 생각치 못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꽤 놀랐고, 처음 소설이 왜 미셸 제르진스키를 다룬다 했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요컨대 소설 안의 '현재'를 만들어 낸 선구적인 인물이라 이거지. 아무튼 읽는 도중에는 이거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결말에 놀랐던 것 같다. 중간 중간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무지막지하게 나오는데 그 이유는 이거겠지.... 읽을땐 몰라서 이게 뭔가 했어.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 일단 브뤼노와 미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철학적인 질문에 와닿게 된다. 이 완벽하게 다른 형제는 같은 뱃속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완벽하게 다른 사고와 성향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교류하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

  브뤼노는 혐오스러운 종류의 인간이었고, 그 사고 자체는 동의할 만한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가 그런 생각을 머리에 품게 된 동기만큼은 이해가 갔기에 미운 인간은 아니었다. 크리스티안을 만난 이후 둘이 같이 긍정적으로 변하나 했었는데, 결말이 그리 되어 아쉬웠다. 크리스티안은 정말 좋은 여자였는데. 브뤼노도 그걸 알기에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간 것이겠지. 정신병원 이후의 생활이 아무런 문제 없이 '행복하기만 해'서 소름이 돋았다. '멋진 신세계'의 소마를 먹은 사람들 같아서. 으응, 역시 이런 건 싫어. 차라리 혐오스러운 브뤼노 쪽이 낫다.

  미셸은 어릴 때부터 유지했던 그 무덤덤한 성격 탓에 성장 이후의 일들은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아나벨과 사십이 되어 재회한 뒤의 움직임은 꽤 흥미로웠다. 그렇게 감정에 무감각한 사내가 실제로 감정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느낀 것 같아서 말이다. 미셸은 아나벨을 사랑하진 않았지만 아나벨을 통해 사랑을 배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그저 두려움의 표정을 띄우던 그가, 자기도 모르는 새 울어버렸다는 데서 진화를 느꼈었다.

  미셸의 실종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프레데릭 허브체작이라는 과학자는 막상 미셸이 생각하고 고려했던 깊은 성찰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의 과학적 성과들만이 밀어붙여진 듯 해 슬펐다. 그 사람들이 좀 더 생각했다면 인류는 여전히 지금의 인류일 수 있었겠지. 완벽한 인간이라는 것은 이상적인 것일 뿐, 실제로 있다면 그다지 행복하진 못할 것 같다. 아니면 이건 내 소망일까?

  유쾌하진 않았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책.

  아스페의 실험은 정확하고 엄밀했으며 완벽한 자료로 뒷받침되어 있었다. 이 실험은 학계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35년에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와 로젠이 양자 이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이래, 처음으로 그것에 대한 완벽한 제반론이 나왔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실험 결과는 양자 이론의 예안과 완벽하게 일치하였고, 아인슈타인의 가설에서 나온 벨의 부등식은 명백하게 부정되었다. 그럼으로써 이제 두 개의 가설만이 남게 되었다.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의 운동을 결정하는 감추어진 속성들이 국소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립자들은 서로 얼마만큼 떨어져 있든 간에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또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들이 관측 문제와 무과하게 내재적인 속성을 지닌 소립자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우리는 깊디깊은 존재론적 공허 앞에 놓이게 된다. 실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고 관찰 가능한 것을 예측하는 수학적 형식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연구자들의 대부분은 물론 두 번째 가설 쪽으로 결집하였다.

『소립자』,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pp.135-136

  「두 개의 소립자가 결합되면,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가 형성됩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한 몸에 관한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미소를 짓고 있던 목사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미셸은 활기를 띠며 말을 이었다.
  「제 말씀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힐베르트 공간에서 양자에게 고유 상태 벡터를 부여할 수 있지 않겠는냐 하는 것입니다. 제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소립자』,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p.187

  1999년 12월 31일은 금요일이었다. 브뤼노가 여생을 보내게 될 베리에르 르 뷔이송 정신병원에서는 환자들과 의료진이 함께 모여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그들은 샴페인을 마시며 파프리카 향을 가미한 칩을 먹었다. 파티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브뤼노는 어떤 간호사와 춤을 추었다.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 약이 제 효능을 발휘한 덕에 그의 욕망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오후의 간식을 좋아하였고, 저녁 식사 전에 모두와 함께 보는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을 좋아하였다. 그는 무엇 하나 기대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평온하게 살고 있었다. 두 번째 밀레니엄이 끝나는 그 밤도 그에게는 마냥 기분 좋은 밤이었다.
  세계 전역의 묘지에서는 묻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들이 무덤에서 계속 썩어 조금씩 해골로 변해가고 있었다.

『소립자』,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pp.316-317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말이 담긴 시집을 선물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집은 무엇일까? 아마 류시화의 시집일 것이다. 그만큼 류시화의 시는 대중적이다. 마치 안도현의 시 같이 서정적이며 직설적인 류시화의 시들은 이해하기 쉽고 그만큼 마음에도 잘 다가온다. 시어에 숨은 뜻을 집어넣기 위해 매일 애쓰는 시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일반 대중으로서는 류시화의 시를 더 찾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게 류시화 하면 떠오르는 시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이다. 가장 유명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말이 몹시 애달프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이나 하늘 혹은 내 안의 모습. 어디에도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며 그대에 대한 그리움을 피력하는 모습은, 그대에게 나의 사랑을 최대한 말하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류시화의 다른 시들은 대부분 감수성을 자극하는 내용인데, 「소금인형」에서는 당신를 최대한 많이 알기 위해 노력하다 못해 당신과 완벽히 동화되어 사라져 버리는 자신의 모습이 낭만적인 슬픔을 선사한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는 자신을 외눈박이 물고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로써 목숨을 바칠 만한 사랑을 이야기 하는데 자못 엄숙하기까지 하다. 이런 내용들은 조금만 살펴보면 그 내용이 상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 보다 작품의 의도가 더 먼저 다가온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쉬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랑 이야기가 아닌 「벌레의 별」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벌레의 눈에서 별이 사라졌음은 인위적인 힘에 의해 벌레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류시화의 시는 쉽고 그것으로 인해 얻게 되는 힘은, 어떨 때에는 위대한 시인들의 그것보다 강하다.

  류시화의 번역시들은 류시화 시와 같은 특색을 띤다. 데인 셔우드의 「죽기 전에 꼭 해볼 일들」이나 킴벌리 커버거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두 시는 살아가면서 한번 해 봄직한 일들을 직접 보여주며 자신에 대한 돌아봄을 촉구한다.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서정적인 말투-류시화가 번역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가 사용되고 있는 이 두 시는, 번역시임에도 류시화의 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류시화의 시들은 어렵지 않다. 또한 서정적이며 감정적인 마음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시 문학계에 있어서는 불행한 일일 수는 있지만, 문학에 있어서 엄숙하고 진지한 문학만 있으란 법은 없다. 어려운 문학만 있다면 누가 문학을 즐기려 하겠는가. 류시화의 시는 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시를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해 줄만한 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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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읽기는 편하지만 역시 깊게 읽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상의 눈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전상국 (민음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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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선과 악의 모호한 구분과, 우매한 전체 집단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화자이며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대, 선으로 보이나 사실은 위선에 둘러싸인 임형우와 담임선생님. 절대 악이나 집단에 의해 변모하게 되는 최기표.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의 집단으로 구성된다. 소설은 각 인물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크게는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는 인물들의 성격은 결과적으로는 선과 악 중 어느 것도 아닌 모호한 것이 되어버린다.

  소설 안에서 최기표는 악으로 대표되는 존재이다. 그에게 피해를 당하는 아이들은 함부로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나는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 의문점이 있다. ‘머리에 털나고 처음인 그런 무서운 린치’를 당한 이유대조차도 담임이 최기표를 미워하는 데에 반감을 가진다. 최기표가 행하는 악에 피해를 입은 이러한 집단이 최기표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나는 그것을 일단은 최기표가 가진 악행의 순수성에서 찾고 있다. 악행에 순수가 있다는 것은 모순되는 말일지 모르지만, 그의 악행은 정직하다. 누군가를 괴롭히고자 몇날 며칠을 고민하여 괴롭히거나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해 도시락을 훔쳐 먹는 것이 아니다. 그저 메스껍기에, 배가 고프기에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그가 행하는 악은 계획적이지 않다. 보기에 메스껍기 때문에 사람을 때리고, 배가 고프기 때문에 도시락을 훔쳐 먹는다. 이러한 그 악행의 순수성-순전히 단순한 감정 욕구에서 불러일으켜진 악행-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품을지언정 집단적으로 책망치 않는 최기표에 대한 규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한다. 담임선생님과 임형우가 그 규제의 발원지이다. 담임과 임형우는 그 성격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성격의 인물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위선에서 드러난다. 담임은 임형우보다 노골적이다. 그에게 있어서 최기표는 자신의 완벽한 항해에 방해 요소가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방해 요소인 최기표를 규제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지는 않는다. 그 필요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 임형우다. 임형우는 천천히 자신의 계획을 실행해 나가는 야심가다. 최기표를 몹시 위하는 척 하면서도 담임이 그를 옭아매는 데 일조하는 인물이다. 임형우는 단순히 담임의 말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는 아니지만 담임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최기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데 한몫을 한다. 이 둘은 최기표를 ‘구원’한다는 슬로건을 앞에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최기표를 통해 자신들을 치켜세우는 데에 마음이 쏠려 있다. 소설 중반부에 나오는 신과 악마에 대한 짧은 말은 이런 상황의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보이게끔 한다. 그들은 선을 가장한 위선이다.

  소설에는 이러한 선과 악의 대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을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대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화자이니까 빼 놓는다 하더라도 나머지 아이들은 도대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은 그저 우매한 집단이다. 담임과 임형우가 꾸며놓은 일대로 이끌어지는 집단에 불과하다. 그러한 그들을 나는 우매한 집단이라 표현한다. 그렇다고 이런 우매한 집단을 만만하게 여겨도 되는 것일까?

  임형우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먼저 집단을 섭렵한다. 최기표에게 어느 정도 다가섰을 뿐더러 나중에는 자기희생을 통해 재수파 아이들(그들도 결국은 집단의 일부분이다.)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임형우는 왜 집단을 끌어들였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 우매함과 동시에 드러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누가 말했던가. 개인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며 집단에 의해 평가받으며 집단의 평가에 따라 개인의 가치는 성립된다. 이러한 것을 따져 볼 때 소설 안에서 최기표가 가지고 있는 위치는 최기표 자신이 쟁취한 것도 있지만 집단에 의한 힘이 더 강했으리라 본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반의 대장이었던 엄석대가 가지던 집단에 의한 권력과 같이 말이다. 최기표는 재수파 라는 소수의 집단에 의해 악의 근원지로 자리 잡고 반 아이들이라는 집단에 의해 그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임형우가 대중이라는 집단을 이끌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형우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유대와의 대화에서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임형우는 재수파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는 것에서 이미 완벽하게 대중을 사로잡았다. 임형우는 이유대에게 ‘우리가 무서워했던 건 기표가 아니라 기표를 둘러싸고 있는 재수파들’ 이라는 말을 한다. 즉 최기표가 가지고 있는 힘이 최기표 본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집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집단을 손에 넣으면 최기표도 자연스럽게 손에 넣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반의 순탄한 항해에 방해가 되는 최기표를 얌전히 시키기 위해서 임형우는 집단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영악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정확한 판단이다. 이후 최기표가 반에서 원래의 입지를 잃고 단순히 불쌍한 아이로 전락해 버린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집단의 무의식적인 행동은 임형우와 담임이 계획했던 대로 최기표를 규제하게 된 힘이다. 

  집단은 최기표를 무서워함으로써 최기표를 반의 권력자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최기표를 나약한 인물로도 만들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집단은 지도자에 의해 전에 가졌던 개인의 인상을 잊고 새로운 인상을 덧그려 나간 것이다. 최기표가 가출까지 할 정도로 가졌던 두려움은 자신의 현실 변화뿐만 아니라 과거와 너무나 대비되는 집단의 태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소설 안에서는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인물들이 소설 밖에서 볼 때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모호성을 통해 인간의 선악에 대한 물음을 던져준다. 또, 집단의 우매함과 더불어 집단의 무서움을 보여줌으로써 명확한 세태 판단 없이 휩쓸려가는 대중을 비판하는 모습도 들어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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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다시 기억남. 이거 재밌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영하 (문학과지성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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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김영하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단편집인 「오빠가 돌아왔다」였다. 전체적으로 참 유쾌한 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가슴 한구석을 쓰라리게 한다는 느낌도 있었다. 또, 상황을 유쾌하게 풀어내지만 동시에 그를 통해 몹시 비꼬아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범한 일상 혹은 현실을 그려내는 척 하면서 그 안에서 이리저리 현실을 비꼬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데에서 조금의 메스꺼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읽게 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내가 알고 있는 김영하 특유의 글을 복습하게 한 기분이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가 먼저 나온 작품이지만 말이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김영하의 다른 작품들처럼 현실을 비꼬면서 그것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이 안 풀리는 듯한 날이 있다. 모두가 겪어봤을 법한 그런 평범한 사건에서 하나의 극적인 요소(즉,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발견하게 된 것)가 더해지면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팽창되며 나중에는 펑 터져버려 의외로 맥없이 끝난다. 마치 이건 그냥 이런 이야기야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읽고 느끼는 건 순전히 읽는 너의 몫이야. 라고 말하는 듯도 하고. 

   내가 봤을 때 이 소설은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119에 신고하기 위해 하루 종일 노력하는, 그러나 잘 풀리지 않는 남자를 통해 요즘 사람들의 냉혹함을 전달하고 있는 것 같다. 휴대폰 하나 빌려주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엘리베이터에 갇혔음에도 혼자 나간 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여자. 크게는 이런 뼈대부터 세세한 화자의 감정 표현에까지 이런 현실의 냉혹함이 묻어나온다. 화자가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하며 마지막에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은 씁쓸함을 더해주기도 한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이전에 읽었던 김영하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읽고 난 뒤 기분이 조금 메스꺼웠다. 이게 정말 현실에서도 일어날 법 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이에게 휴대폰 하나 빌려주려 하지 않는 태도, 매일 보는 얼굴이라도 요금이 없으면 매몰차게 내리라 하는 버스 운전기사, 같은 위험 안에 있었음에도 자신이 그 위험에서 빠져나가면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 모두 현실 안에서 제법 있을 법한 인물이고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읽고 메스꺼움을 느낀다. 이 현실이 냉혹하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 하듯 유쾌하고 스스럼없는 말투로 전달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욱 배가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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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아마 책 전부를 읽진 않은듯?
나쁜 어린이 표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황선미 (웅진주니어,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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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동화를 읽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어릴 적에 재미있게 읽었던 몇 편의 이야기들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고 두루뭉수리 머리 속에 아른거릴 뿐이었다.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를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이번에 읽게 된 황선미의 「나쁜 어린이표」는 내게 꽤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누구나 어린 시절, 아니 꼭 어린 시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해받거나 억울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쁜 어린이표」는 건우라는 어린이의 이런 상황을 통하여 오해가 싹트는 상황과 건우의 마음속에서 일으켜지는 미움의 상황을 잘 전달하고 있다.

  「나쁜 어린이표」는 단순히 아이의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이들의 사회적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나쁜 어린이표’를 받음으로써 주변 아이들에게 ‘저 애와 놀면 나도 나쁜 어린이표를 받게 될 거야’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상황이 그러한데, 이것은 건우를 또 한번 상처 입히는 일이 된다. 건우의 상황에서 볼 때 오해 받아지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주변 아이들의 시선이 더 괴로운 것이었을 것이다. 「나쁜 어린이표」는 사소한 어른들의 행동이 어린이의 세계에서 어른의 의도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계속 오해를 받음으로써 건우가 노트에 ‘나쁜 선생님표’를 적어 넣는 것은 건우의 선생님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한번 ‘나쁜 어린이표’를 얻음으로써 계속 그러한 아이로 보여지는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 선생님의 모습이 아이에게는 더욱 커다란 상처로 번져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갈등은 동화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다가 결말에 가서는 선생님이 ‘나쁜 선생님표’를 발견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는 구조로 끝나고 있는데, 이런 결말은 그동안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소하며 1인칭 시점을 따라 건우와 감정을 공유하던 독자에게도 이해하기 쉬운 갈등의 해소를 전달한다.

  「나쁜 어린이표」는 철저하게 어린이의 시각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이 동화는 건우의 시선을 통해 선생님의 모습과 주변상황을 보여줌으로서 어른의 세계에서만 판단되던 것들을 어린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어린이의 시선을 이해하며 그것에 공감하게 한다. 읽는 이가 어린이라면 ‘나도 이런 적이 있어!’ 라는 식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이고, 읽는 이가 어른이라면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회상해 보거나, 어린이들의 시선을 이해하는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이 동화를 인기 있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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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예전에 읽을 때도 흥미로왔던 동화. 애들 과외를 다니면서 그 집에 있는 동화책을 읽게 되는데, 동화책도 재밌는건 진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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