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세계문학전집 104)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민음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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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이다. 그 영화를 재작년인가, 시창작 시간에 교수님이 보여주셔서 봤었다. 메타포에 대한 감을 살려주는 영화이기도 했지만, 내용도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홀딱 빠져서 봤던 영화. 그 영화의 원작이라니까 안 볼 수가 없었다. 언제 사야지 사야지 벼르다가 사던 책 사이에 끼워넣었던 소설.

  아무래도 영화보다는 세세해서 결말 부분에 가서는 영화의 결말보다 훨씬 우울한 감이 있었다. 앞 파트를 읽는 내내 행복하고 즐겁다가, 뒷 파트에 가서는 정말 슬퍼졌던 소설. 실제 시인이었던 '파블로 네루다'를 픽션 안에 끼워넣다 못해 주인공 중 하나로 내세우는 재치를 발휘하고 있다. 시골 촌부에 불과했던 마리오가 그를 만나게 되면서 쌓는 우정을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처음 마리오의 행동들은 어떻게 보면 민폐이기 짝이 없었지만, 진솔한 그 모습 때문에 악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때문인지 그들은 점점 친분을 쌓게 되고, 네루다는 마리오가 시를 쓰도록 도왔을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베아트리스와의 중매에도 적극 나서준다. 둘의 교류는 사회의 편견을 뛰어넘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마리오에게 항상 힘이 되어주던 네루다가 마을을 떠나고 정치를 하게 되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칠레의 역사와 맞물려 꽤 어두운 방향으로 진행된다. 네루다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사건이 지나버린 뒤엔 모든 것이 빛바랜 듯 쇠락해버리는 느낌이었다. 마리오가 경찰조사를 받으러 가는 길이 그의 마지막 길이었다는 건 누구나가 알 것이다.

  이야기의 진행은 무거운데 재미있기는 무척 재미있어서 책장이 금방금방 넘어가던 소설책.

  "마리오, 내게는 『일상 송가』보다 훨씬 더 괜찮은 책들이 있네. 그리고 온갖 메타포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건 부당한 일이야."
  "뭐라고요?"
  "메타포라고!"
  "그게 뭐죠?"
  시인은 마리오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예를 하나만 들어주세요."
  네루다는 시계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좋아. 하늘이 울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뜻일까?"
  "참 쉽군요. 비가 온다는 거잖아요."
  "옳거니, 그게 메타포야."
  "그렇게 쉬운 건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부르죠?"
  "왜냐하면 이름은 사물의 단순함이나 복잡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거든. 자네 이론대로라면 날아다니는 작은 것은 마리포사(*스페인어로 나비)처럼 긴 이름을 가지면 안 되겠네. 엘레판테(*코끼리)는 마리포사와 글자 수가 같은데 훨씬 더 크고 날지도 못하잖아."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메르타, 민음사, 2004, pp.27-28

  "저 사랑에 빠졌어요."
  "이미 말했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저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내가 이 나이에!"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메르타, 민음사, 2004, p.42
 
  "로사 부인이세요? 또 파블로 네루다입니다."
  마리오는 수화기를 통해 과부의 대답을 엿듣고 싶었다. 하지만 과부의 대답은 시인의 고막만 괴롭혔을 뿐이다.
  "당신이 열두 사도를 거느린 예수라 해도 우체부 마리오는 결코 이 집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겁니다."
  네루다는 귓불을 어루만지면서 공허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아냐, 아무것도. 다만 첫 회에서 케이오 패 한 권투 선수의 심정을 이제 알 것 같아."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메르타, 민음사, 2004, p.86

  시詩라는 장르를 통해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가는 흔치 않다. 요즘 사람들은 시집을 잘 사보지도 않거니와 이전과 같이 깊게 시를 읽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세태 속에서 성공한 작가로는 류시화나 안도현 등을 들 수 있다. 내가 살펴본 시는 안도현의 시이다. 안도현은 대중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인으로서 낮게 평가되지는 않는다. 안도현의 시가 대중성을 획득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안도현의 시는 기본적으로 짙은 서정성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정情에 약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시라도, 마음에 조근 조근 다가오는 말이라면 좋은 반응을 보인다. 안도현의 시는 대부분 독자의 이런 마음을 파고드는 서정적 느낌이 강하다. 그의 대중성은 이런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안도현의 시는 서정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안도현의 시는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자아성찰을 담고 있다. 그러나 자아성찰의 시가 무조건 좋은 시가 되지는 않는다. 어떠한 형태의 은유로 형상화 되는 가에 따라서 자아성찰의 시는 좋은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는데, 안도현의 시는 추상적 진술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세상의 구체적 사물을 선명하게 독자에게 드러낸다. 요컨대, 「너에게 묻는다」의 연탄재의 모습, 「연탄 한 장」의 연탄의 모습. 또 「우리가 눈발이라면」에서의 함박눈의 모습 등을 통해 독자는 구체적으로 그 이미지를 머리 속에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그의 시에 나타난 자아성찰은 자신을 반성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만드는 자기 다짐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찬밥」에서 화자는 자신을 찬밥에 비유하나 나중에는 국밥이 되고 싶다. 곧, 국밥이 되겠다. 라는 말로 자신의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독자는 시인이 내미는 자아성찰과 자기 다짐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시를 보기에 이런 자아성찰과 다짐의 모습은 읽는 이에게 호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안도현의 시는 주변 사물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것은 모든 시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이 기본적인 덕목이다. 그러나 여타 시와는 달리, 안도현의 시는 사람들이 공감하기 쉬운 방식으로 주변 사물이 서정적으로 변환됨으로써 독자의 마음에 한결 쉽게 다가선다. 그는 객관적 대상을 사랑과 이해를 통해 바라보아 사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한다. 앞서 말했든 한국인은 정에 약하다. 안도현의 시에서 나타난 사랑과 같은 감정을 통해 재창조된 사물들은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도현의 시에서 나타난 재창조된 사물들은 서정성을 담고 있다고 했다. 서정적 감정을 가지는 기본적인 주체는 인간이다. 요컨대, 안도현의 시에서 재창조된 사물들은 인간이 가진 감정의 모습을 담고 있다. 「겨울 강가에서」를 보자. 눈발이 강물에 들어가 녹는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은 시인을 통해 강물이 애틋한 사랑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여기서 눈발과 강물의 하나 되는 통합은 마치 사람의 그것과 같다. 그러므로 독자는 사물의 모습을 보더라도 자신들의 모습을 보는 것 마냥 느낄 수 있게 되고, 서정성은 여기서 또 한번 획득되는 것이다. 「바닷가 우체국」같은 경우에서 보아도 바닷가의 쓸쓸한 우체국이라는 그리움과 기다림이 공존하는 공간을 보여주면서 독자의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환기시켜준다. 서정성의 획득은 인간과 같은 감정에만 의지하지는 않는다. 「고래를 기다리며」에서 시인은 고래와 바다라는 개체와 개체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보여주며 생명의 내적 연관성과 만물의 상호 교류성을 나타내고 있다.
 
   안도현 시의 서정성은 감정의 무절제가 아닌 사회문제와 개인 서정의 결합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연민과 동정이라는 인간애를 통해 민중 공동체의 모습과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전봉준 보다는 주변의 민초들의 모습에 집중하여 시를 전개함으로써 민초의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며, 마지막 연의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라는 같은 말로 민중 해방을 위한 길의 제시 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직접적 제시가 있는 이 데뷔작 외에도 「우리가 눈발이라면」에서의 상처 입은 모든 이에 대한 간절한 느낌의 사랑의 호소에서도 이것은 나타나며, 「찬밥」에서와 같은 소망의 표현, 「겨울 강가에서」와 같은 사랑의 장면 제시 등을 통하여서도 이것은 잘 나타나고 있다.

  나는 안도현의 시보다는 소설을 먼저 접했다. 소설 「연어」였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했던가. 그에 걸맞게 「연어」에서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이 재미있는 이야기 통해 교훈을 전달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그의 시를 처음 접했던 건 「너에게 묻는다」였다. 짧은 구절이었지만 마음에 큰 의미로 다가왔다.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반성을 쉽게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안도현의 시는 어렵지 않다. 그것이 참 큰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것은 일단 피하고 보는 요즘 세대에게 이것은 쉽게 교훈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지 않는가. 물론 어려운 것을 피하는 세태는 수정되어야 할 만한 것이지만 말이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쉬이 마음속으로 다가오는 안도현의 시는, 꽤 오래토록 베스트셀러로서 유지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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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발표문이었던 걸로 기억?
픽션들(보르헤스전집 2)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민음사,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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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니, 글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머릿속에 펼쳐진 것은 당연히 미로였다. 여러 방향으로 꼬여 있어서 빠져나오려면 한참을 애써야 하는. 그런 미로에도 길은 있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의 정원은 결코 끝이 나지 않는 시간의 미로이며 삶의 미궁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아주 옛날에 봤던 프로그램 하나를 떠올렸다.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어떤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주고 그 중 한 가지를 선택했을 때의 결과를 각각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대부분 앞부분에서 선택하게 되는 아주 작은 선택 때문에 당착하게 되는 극과 극의 결말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한번 쯤 하는 후회에서 나오는 ‘내가 전에 이런 식의 선택을 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간단한 물음을 이야기로 풀어낸 셈이었다. 이런 심리를 건드리고 있었기에 궁금증을 자극하는 면이 강하고 내용적 측면에서도 꽤 재미가 있었기에 인기가 많았던 기억이 난다.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인생극장’에서 건드렸던 그 물음을 근본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소설은 처음 부분에서 리차드 메든이라는 영국 군인에게 쫒기고 있는 중국계 독일군 스파이인 유춘의 상황을 설명하며 그 때문에 그가 선택하게 되는 방향, 그리고 그로 인한 만남과 뒷마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그의 선조 취팽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적절한 배경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 안에서의 유춘은 자신의 대장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어떤 것이든 그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은 후에 그가 만나게 되는 스티븐 알버트와의 만남에 필연성과 개연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유춘의 조상인 취팽의 기이한 책은 책 자체로서 결말이 나지 않는 소설이다. 책과 미로를 합쳐 놓은 듯한 이 책은 결말이 나지 않으며 그 플롯 또한 복잡해 그냥 읽었을 때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취팽이 남긴 편지에서는 <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모든 미래들이 아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알버트는 <다양한 미래들(모든 미래들이 아닌)>이라는 구절에서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의 무한한 갈라짐을 연상하고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의 정체를 알아챈다. 정원은 공간적인 것이 아닌 시간적인 것으로, 소설의 복잡한 플롯은 이로 인해 기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취팽의 소설은 어떤 일을 했을 경우에 일어나는 후일에 대한 경우의 수를 모두 차용함하고 그 차용된 사건들도 또 다시 분화해 나가면서 가지를 뻗어나가 종당에는 그것들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진 길들이 있는 정원을 만들어 낸다.

  소설 안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다루고 있는 취팽의 이 책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을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을 떠올렸다고 했다. 요컨대, 나는 이 소설이 현재의 시간과 선택의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취팽은 뉴턴과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을 믿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뉴턴과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이란 이러하다. 뉴턴이 보는 시간은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과 절대적 시공 안에 모든 실재가 존재하는 시간이며 쇼펜하우어의 시간은 개인적이고 특별한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공통적으로 이 두 사람은 시간을 절대적인,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취팽이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는 시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시간 안에 있는 사건들과 인물들을 통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취팽의 소설, 나아가 보르헤스의 이 소설은 현실에서 내가 어떠한 일을 선택함으로 인해 발생되는 사건들의 분화 속에서 미래의 시간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예는 소설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살인이라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다. 만약 앞부분에서 빅토르 루네베르크가 죽지 않았더라면 유춘이 알버트를 살해할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알버트와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 죽게 됨으로서 알버트가 죽게 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은 시간과 그 사건에 의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또 유춘은 알버트를 죽이기 전 현실과 다른 시간을 잠시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유춘과 알버트가 존재하는 현재의 시간과 다른 또 다른 시간(곧, 취팽이 생각하는 개념의 시간)을 보여주는 보르헤스의 소설적 장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현실은 수많은 필연성이 결집한 결과물이다.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는 ‘아 내가 그때 이러저러 했다면 지금 이렇지 않았을 텐데.’라는 후회는 과거의 선택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하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개인적으로 취팽의 시간개념에 공감을 하는 편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수많은 우연과 필연으로 결집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이 소설은 소설 안 취팽이라는 인물이 쓴 소설과 유춘이라는 인물의 예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선택, 그에 따른 삶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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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이거 굉장히 짧은 단편인데 지금 봐도 재밌다. 『픽션들』 안에 있는 짧은 단편.
마틴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데일 펙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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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자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책 중 한권. 퀴어문학이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고 하기엔 가슴에 애틋하게 남는 응어리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주제가 헤어짐 혹은 사랑을 할 때 느끼는 부푼 감정, 그것이 빠져나가는 과정 들을 그리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단편집이라고 해야할까... 각각의 에피소드는 독립되어 있지만, 기묘하게도 유기성을 띄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마틴과 존』안에 있는 각각의 소설들에서 주인공들은 항상 마틴과 존이며, 주변 인물은 비, 수전, 헨리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마틴이 부자건, 길에서 만난 십대 소년이건, 지금 욕조에서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이건 간에. 혹은 존이 또 다른 인물이건 간에 그들은 항상 마틴과 존이다.

  단편들은 각각 그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이 행복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속이 쓰렸다. 행복한 이야기도 얼마 없거니와, 행복하다고 방심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항상, 그리고 영원히」같은 단편에서는 행복한 모습을 내내 보여주더니만은 마지막 강도들의 습격 탓에 기분을 잡쳐버리고 말았었으니까. 이 단편은 묘하게 뒤쪽에 위치한 「빌어먹을 녀석, 마틴」이라는 단편과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을 주었다. 「빌어먹을 녀석, 마틴」은 이 단편집 내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는데, 이미 마틴이 죽어버린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 외에도 존이 헨리와 맺고 있는 관계, 수전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절절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변모」와 「바다의 끝」이 아닐까 한다.
「변모」의 경우 처음에는 그 소재 탓에 껄끄러운 감이 있긴 했다. 양아버지와 같은 상대와 미성년자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렇지만 어머니의 하룻밤 상대였으며 아버지의 죽음 뒤 피폐해진 어머니를 돌봤던 애인 마틴과, 아들인 존 사이의 감정이 기묘하게 잘 나타나 있다. 중간에 있는 그 짧은 성애 장면에 대한 묘사는 나까지도 숨죽이게 만들었다. 소설 마지막의 존이 마틴에게서 받은 편지 구절이 아른거렸다.

  나는 오늘 그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편지는 수개월 전에 부친 것이었지만, 네 개의 다른 주소지를 경유하여 내게로 왔다. 마치 편지의 내용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지도 모른다. 비록 글의 맥락이 닿지 않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도, 그런게 있다고 한다면, 주의 깊게 찾아내야 했지만 말이다. 이 편지의 끝부분에는 어떤 절박함 같은 게 있었다. 동시에 모호한 점도 많았지만.
  "사랑하는 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니?"

「변모」, 『마틴과 존』, 데일 펙, 민음사, 2008, pp.101-102

  『마틴과 존』안의 소설이 대부분 내 속을 쓰리게 만들었지만, 「바다의 끝」의 경우엔 달랐다. 겨우 세쪽의 이 짧은 소설은 정말 산뜻하고 둥실거리는 사랑의 기쁨을 그 안에 담아냈다. '사랑이 언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짧은 물음으로 말이다. 사랑은 존이 느끼는 것 처럼 육체를 나누는 밤, 그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틴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아침에 존재한다. 나는 이 논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사랑은 아침에 존재하는 거야."
  마틴이 다시 내 귀에 그 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내 귀에 갖다 대고 젖은 손으로 내 등을 위아래로 쓸어 주며 나로 하여금 더 이상 아무것도 원치 않게 만들었다.
  "긴 밤을 함께 보내고 나서 맞이하는 아침에."
  내 귀 아래에서 그의 심장이 피의 강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생각에 나의 일부는 떨렸고, 나의 일부는 따뜻했다.

「바다의 끝」, 『마틴과 존』, 데일 펙, 민음사, 2008, pp.175-176

  단편집인데도 생각보다 더디게 읽었다. 슬며시 소재 탓으로 돌려본다. 재미있고, 언제 또 꺼내 읽겠지. 아, 그리고 소설 안의 묘사들이 신기한 것들이 많아서 좋았다. 독특하면서 와닿는 표현들을 많이 본 것 같다.
귀로 웃는 집(창비시선 157)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임영조 (창작과비평사,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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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로 웃는 집의 시들은 소박하다. 임영조 시인의 시들은 소박한 삶의 느낌을 담고 있다. 내가 생활하는 삶의 터전, 그 생활 터전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과 소소한 이야기들. 그것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겪고 있는 삶 혹은 내 주변의 삶의 모습이기도 한데, 이런 시들이 무작정 어렵게 느껴질 리 없었다. 작가 후기를 살펴보면 임영조 시인 자신은 ‘철학적 심각성이나 종교적 엄숙함을 표출하려는 것보다 세상과 친하려는 따뜻한 시선을 갖고 싶다’고 했다. 이러한 작가의 마음가짐은, 내게 그의 시들을 한층 편하게 다가오도록 해 준 듯하다. 실제로도 그는 삶의 모습, 곧 세상의 모습을 담은 시들을 썼다.

  귀로 웃는 집의 시들은 삶의 모습을 피가 뚝뚝 흐르는 날것마냥 무작정 던져놓지는 않는다.(그런 것은 시로 취급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귀로 웃는 집의 시들은 자연물과 융합되어 삶을 나타내고 있다. 임영조 시인은 자신의 삶의 모습에 상상을 덧씌운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는 작게는 곤충의 모습, 크게는 커다란 풍경 등에 빗대어지거나 하여 다듬어진다. 피가 흐르는 날것을 상상력으로 데치고, 비유라는 초록색 잎으로 감싸 쌉싸래한 삶의 맛이 나도록 내놓은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해서 임영조 시인의 시들이 무작정 안락하고 편안한 삶의 모습을 설겅설겅 담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체험하는가?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개인의 생각들은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부정적인 것도 있다. 남진우 씨의 해설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곤충채집 시리즈는 변신을 거듭하며 사는 사람들의 문제성을 해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임영조 시인은 단순하게 일상적 감정만을 담아내지 않았다. 그는 여러 가지 문학적 표현을 통해 자신의 사상 또한 시에 담아낸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내면을 독자에게 시를 통하여 드러낸다. 편안하게 한번 읽고, 두 번째 정독을 하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의 낱개로 풀어보는 시 공부로 인해 시에 대한 막연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시는 무작정 어렵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시를 느끼려고 해 본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시는 전체적으로 그 시의 향을 맡으며 느껴야 한다. 분석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어쩌면, 그것이 어떠한 형식을 통해 탄생했는지는 그 시에 담긴 향을 느낀 후에 하는 편이 더 수월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한다.

  임영조 시인의 시들을 통해 나는 시를 좀더 쉽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가 쉽다는 말은 아니다. 시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어렵고, 막연하고, 알 수 없는 말의 나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귀로 웃는 집의 시들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을 통해 부담 없이 작가의 내면의 성찰을 세상에 뱉어낸다. 아주 조금이라도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시를 친근하고 어렵지 않은 느낌으로 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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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제로 냈던 거 앞 뒤 뭉텅 잘라버린 중간 내용. 저 시집 아직도 갖고 있는데 편하다.
장미의 이름(상)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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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변 아이들을 상대로 말을 들어보니 평가가 극과 극을 달렸다. 그러나 이건 소설적인 평가는 아니고, 재미의 측면에서 말을 들어본 것이었다. ‘재미있다’ 혹은 ‘어렵다’라는 대답이 나왔는데, 재미없다가 아닌 ‘어렵다’였기에 책을 읽기 전 바짝 긴장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실재로 책을 구매하고 나니 일반 책보다 더 두꺼우면서도 두 권이나 되는 분량이 아닌가. 맘을 단단히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장을 열고 몇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을 때는 더욱 절망했다. 긴 주석에 잘 알지 못하는 내용. 초반부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주석을 읽다보면 내용을 잊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내용 이해의 틀을 잡고 나자 읽는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 영화를 본 것이 내용의 틀이 되는 이야기를 잡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책의 내용을 잘 담은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장미의 이름은, 주 내용의 뼈대를 빼 놓고 보더라도 그 살집이 비대하다. 쉴 새 없이 늘어대는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의 대화, 또는 윌리엄 수도사와 다른 수도사들과의 논쟁은 장미의 이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살집이다. 그들의 대화는 수많은 종교적 논쟁과 철학적 물음으로 점철되며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고 있기에 쉽사리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차근차근 살펴보면 그 반론의 반론이라는 것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종파라도 그 안에서 끝없이 갈려나가는 의견과 의견의 대립은 장미의 이름이 왜 단순한 소설로 치부되지 않으며, 움베르토 에코가 지식인으로서 높게 평가되는지 알게끔 한다.

  소설의 초반부에 나오는 윌리엄과 우베르티노의 논쟁은 소설에 등장하는 어느 논쟁보다 어렵고 지루하면서도 재미있다. 우베르티노는 꼬장꼬장하면서도 이미 머리가 굳은 노인이다. 그는 당시 가톨릭인의 모습 중 하나를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그는 해박하지만 자신의 굳은 믿음, 어찌보면 신념인 그것을 통해 다소 보수적이며 일반적이지 못한 논리 구성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와 위트가 적절히 섞여있는 논쟁을 펼치는 윌리엄은 철저히 이성적인 틀 안에서 논쟁한다. 이 대화는 분명 서로의 논리가 치열하게 다투는 접점이고, 어느 한쪽의 편도 확실히 들어주지 않지만, 왜인지 나는 윌리엄의 손을 들게 된다. 내게 우베르티노는 믿음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둔해진 사람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결말 부분에서 언 듯 호르헤가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는 듯한 느낌인데, 이것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 그의 논리 전개가 타당성을 획득하기에 부적당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나의 규칙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논리 전개가 쉬이 이루어지지 않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후 나오는 윌리엄과 수도사들과의 논쟁에서도 나는 대부분 윌리엄의 손을 들었는데, 이것은 내가 무신론자인 것과도 조금은 관계있을지 모르겠다.

  윌리엄과 호르헤 수도사의 웃음에 관한 논쟁 논쟁은 단순히 종파가 다르고 가르치는 교리가 다르다는 것에서 설명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호르헤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웃음이 좋지 않다고 믿는다. 이것은 한 종파의 교리가 되기 이전에 호르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미 진리가 된 것 같다. 웃음이란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반응이다. 그런데 호르헤는 이것을 두고 이교도들이 관객을 웃게 만들고자 지은 것이라고 하며 웃음이 온당치 못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웃음을 육체를 뒤흔들고 얼굴의 형상을 일그러뜨리게 해 인간을 잔나비로 추락시키는 존재라고까지 말한다. 호르헤가 내세우는 또 다른 논리도 우습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의 논리는 ‘웃음이 나쁘다’라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고 단지 내게 그의 믿음을 강요할 뿐이다.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윌리엄의 주장 중 웃음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고 이성성의 기호라는 말 만 나에게 약간의 의문을 주었을 뿐(인간만이 웃었던가?), 나머지의 논리는 적절한 예를 들어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나의 반응은 무슨 차이일까. 그것은 앞서 말했듯 호르헤(혹은 그 외의 다른 수도사들)의 주장은 종교적 가르침으로의 믿음에 얽매여 있는 탓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요컨대 그들은 그들의 교리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은 거짓일 수 없고, 이 믿음을 온전히 보전함과 동시에 다른 논리를 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펼치는 수많은 논쟁거리는 온전한 자기주장만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고, 하나에 얽매인 상태로서는 적절한 토론을 펼칠 수 없다.

  그들의 수도원이 진리에 대한 수호라는 아름다운 이념을 가졌음에도 그런 이념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흥미를 억압했다는 것에서 하나의 믿음에 무작정 얽매인 결과를 알 수 있다. 그들이 펼치는 논리가 맞았더라면 다시 말해 그들의 진리가 정말 진리였다면, 그들의 진리는 억압하지 않더라도 그 진리로서 인식되지 않았을까. 중간에 윌리엄이 아드소에게 해 주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라에서도 나올 수 있는것이라고.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그 진리의 본질마저 흐리고 있는 것이다.

  star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도 그 덧없는 이름뿐.) 장미는 장미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장미 자체로서 장미인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을 통해 이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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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이게 대학 2학년 때인가? 이 땐 죽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재미있다. 이거 영화도 재밌었다.
하얀 가면의 제국: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박노자 (한겨레신문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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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비문학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은 그 딱딱한 문체가 싫고, 지식이 부족한 내가 집중하기 어려운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틀만 두고 본다면 박노자의 『하얀 가면의 제국』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박노자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의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으로 귀화해 박노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 출신의 사람. 그의 특이한 이력은 그의 소설을 흥미로운 눈으로 읽게 했다.

  『하얀 가면의 제국』은 한국 사회의 바닥에 은연중에 깔려 있는 오리엔탈리즘과 서구중심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시각에서 바라본 동양으로서,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한 용어이다. 서구중심주의는 동양에서 바라보는 이상적인 서구세계를 나타내는데, 결국 오리엔탈리즘이나 서구중심주의나 둘 다 우리 사회의 발전에 그다지 긍정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오리엔탈리즘과 서구중심주의가 우리 사회의 바닥에 깔려있다는 것을 박노자는 외국인이 가지는(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가지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며 서술하고 있다.

  그 안의 챕터인 「하얀 가면을 벗자」는, 오리엔탈리즘의 배경이 되는 역사의 서술과 우리민족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서구중심주의를 말하며, 현재 서구세계가 바라보는 한국에 대해 서술한다. 이로 인해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 그리고 세계의 시선에서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은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그러한 오리엔탈리즘과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박노자는 서구중심주의에서의 탈피를 외치며 오리엔탈리즘이 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 지적인 해방을 촉구하고, 서양흠모에 가까운 포지티브 옥시덴탈리즘의 배경을 밝혀 지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또한 서양에서의 자유정신을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하며 서양에서의 자유의 틀이라는 것에 대해 말해 준다. 박노자는 ‘이상적인 서양’의 삭제를 말하며 오리엔탈리즘과 서구중심주의에서 해방된 진정한 평등 세계를 말한다.

  역사적 근거를 들어가며 말하는 박노자의 설명은 진실성을 띠게 되며, 책을 읽는 독자인 우리의 문제를 정확히 바라보게 해 준다. 한국인들이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지 못하던 한국 사회의 문제를 어설프지 않은 몸짓으로 끄집어내어 줌으로서 한국인에게 변화를 촉구하는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전해주는 데 부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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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감상. 슬프게도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무(개정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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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나르 베르베르,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던가. 그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던 때의 나조차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우스워서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개미』라는 소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의 글은 초기에는 과학적인 지식에 기반을 두고 글재주, 흥미를 덧붙인 것들이었다. 추리소설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사실적인 것을 더하고,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그의 이야기는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딱 『뇌』까지 그래왔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소재에 지루한 감을 느낄 때 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단편집을 하나 내놓았다. 그것이 『나무』였다.

  『나무』는 앞서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내놓았던 소설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나무』는 그의 유쾌한 상상력과 더할 나위없는 비꼼을 버무려 놓은 소설이었다. 소설은 대부분 인간의 시선을 확장하여 다른 것의 시선을 택했고, 이것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꼬아 놓았다. 이런 비꼬는 방식이 몹시 유쾌해 웃음이 비실비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번역된 말투인지, 본래의 말투인지 탁탁 내뱉는 그의 문체에서 나오는 ‘웃으면서 비웃기’는 단편집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보면,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입장인 인간을 반대로 키워지는 입장으로 만들어 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외계인이 인간을 키우는 매뉴얼을 만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성별을 식별하는 법, 인간의 이종 설명 부분과 같은 부분에서부터 인간의 생식, 임신, 관습… 많은 부분을 짧게 통달한 이 매뉴얼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모습을 비웃고 있다. 외계인의 의도는 그렇지 않겠지만, 읽고 있는 독자는 그런 기분을 느낀다. 아주 단편적인 것에서 심층적인 것까지, 타인의 눈에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를 이 소설은 보여주며 인간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나무』에 실린 단편들은 대부분 이런 식의 느낌을 독자에게 전해준다. 인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고 있는 일상에 변화를 준다거나, 그것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인간의 모습을 다른 시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냄새」와 같은 경우는, 나는 외계인을 인간에 덧댄 것으로 인식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으며, 사치품 혹은 호화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식의 구성은 또 다른 ‘웃으며 인간 비웃기’의 방법인 듯 싶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는 그의 이전 소설들과는 다른 방향의 상상력을 발휘하면서도 하나의 주제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빠른 전개와 위트 있는 상상력이 발휘된 이 단편집은 단편이기에, 재미있기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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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감상. 부담은 없지만 알맹이도 견고하진 않았다.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한비야 (푸른숲,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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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비야의 중국 견문록은 신변잡기를 두루 늘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이전에 한비야의 다른 책을 읽었을 때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몇 편의 중국 견문록 에피소드들은 더욱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 캄보디아의 이야기라던가, 구호활동 이야기 같은 것. 이러한 에피소드들이 굳이 중국 견문록에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런 에피소드가 중국 견문록에 버젓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한비야의 책이 한비야의 일상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일 것이다. 여행기라기보다 일기 같다.

  남의 소소한 일상을 왜 사람들은 들여다보고 있을까. 그건 한비야의 책이 가진 당당한 느낌과 한비야가 전해주는 일상이 재미있고 호기심이 일게 하기 때문이리라. 한비야의 문체는 당당하다. 나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하고, 이러이러하게 느꼈다. 라는 식의 말투가 그녀의 외국 이야기에 신뢰를 더해준다. 또, 소소한 일상이라고 해도 한비야의 일상은 세계적이다. 외국에 나가서 겪게 되는 자그만한 난항이 읽는 이에게는 무척 신비로운 일로 다가온다. 한비야의 생각을 적어놓은 그저 일상인 것뿐이지만, 읽는 이에게는 재미있는 외국의 실상이다. 게다가 한비야는 그저 단순히 외국에서 겪게 되는 일상을 적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에피소드나, 정치적 문제를 담은 에피소드, 호기심이나 궁금증이 일게 하는 에피소드를 적어낸다. 이런 것에서 우리는 세계를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다. 마치 우리 이웃의 이야기처럼 외국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교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서 여행기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한비야의 중국 견문록은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을 준다. 초기에 발간된 한비야의 책을 읽었던 내게 이 중국 견문록은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주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한비야의 중국 견문록이 여행기, 견문록의 틀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비야식의 당당한 문체도 좋고, 소소한 일상이야기도 좋지만 제목인 중국 견문록과 상관없는 에피소드는 내게 복잡하고 재미없는 구성을 만드는 요소로만 보인다. 한비야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뛰어오름과 동시에 그 본연의 색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는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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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도 예전에 적어둔 감상. 이런 식의 옛감상이 몇 개 있어서 앞으로 올려보려고 한다.
콘트라베이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파트리크 쥐스킨트 (열린책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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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태어나서 제일 처음으로 내 돈주고 산 책은 '향수'이다. 그 두꺼운 소설은 하룻밤 새 읽을 수 있을 만큼 긴장감이 가득하고 소재 또한 재미있다. 제일 처음 읽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은 '좀머씨 이야기'이다. 고모 방 안에 있던 삽화가 예쁜 소설책은, 짧지만 기묘하게 마음을 울리는 것이 있었다. 내게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 하면 떠오르는 사람 순위권.

  콘트라베이스는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유명하게 만든 희곡이다. 1인극을 위해 쓰여진 이 희곡은 그의 글들이 항상 그렇듯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든 생각까지도 낱낱이 풀어헤친다. 1인극이다 보니까 희곡적인 느낌이 많이 안나서 좋았다. 게다가 그냥 한 사람의 독백을 계속 듣는데도 지루할 새가 없어 금세 읽었다. 원체 얇기도 하지만, 몰입도가 끝내준다.

  오케스트라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악기인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사람이 주인공. 어느새 30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세라'라는 소프라노를 좋아하지만 그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 틀에 갇힌 채 (거기에서도 신의 직장 공무원이긴 하다만)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주인공에게는 모든 것은 자기를 옥죄는 틀과 같다. 심지어 자신이 연주하는 콘트라베이스조차도 그에게는 '언젠가 부수어리고 싶은' 대상이다. 그는 커다란 사회 구조 안에서도, 오케스트라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며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지막에 가서는 세라의 눈에 들 만한 일을 하겠다 마음을 먹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아마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전략) 그런데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제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어떤 시각으로 살펴보아도 최후의 쓰레기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까닭 때문에 저는 오케스트라의 구성을 인간 사회의 모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계에서나 그 세계에서나 쓰레기와 관련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게 마련이지요. 더구나 오케스트라의 세계는 인간 사회보다 더 나쁩니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에서는―이론적으로만 보자면―언젠가는 나도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가서 꼭대기에서 내 밑의 벌레 같은 것들을 내려다볼 날이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열린책들, 1993, pp.62~63

  1인 희곡은 작게는 오케스트라에 속한 한 인간의 고뇌를 말하지만, 넓게 보면 사회 전체의 문제를 꼬집기도 한다. 그 부분에서 몇 부분 마음에 안드는 구석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묘사와 표현은 마음에 들었다. 혼잣말을 이렇게까지 심도있게 쓴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상연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꼭 한번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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