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나나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박형서 (문학과지성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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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누네 집에 있길래 빌려온 책. 이전에 추천받았었는데 그 때 당장 사진 않았고 나중에 읽어야지 생각했었다. 지누 책에서 발견하고 첫장을 넘겼는데, 느낌이 아주 좋아서 바로 빌려옴. 그래도 그 때 몇 장을 넘길 때만 해도 이 소설의 배경이 태국인 지 몰랐다. 그냥 신기한 외국 이름이 나오기에, 어, 외국인들이 주인공인 이야기인가? 싶었다. 사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또한 겪어내는 인물인 '레오'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인이긴 한데, 그보다는 태국의 홍등가 '소이 식스틴'에 얽힌 삶의 이야기들이라고 하는게 옳겠다. 태국 홍등가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자세해서 처음에는 아니 대체 이걸 어떻게 자료조사했지 싶었을 정도. 그 곳에 가서 살기도 했다는데 그래도 참 세세하다.

  '새벽의 나나'에서의 이야기의 진행은 꼭 현재에 국한되어 있지 안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더 치중해 있다. 보면 꼭 삶의 연대기 같은 느낌이 드는데, 작가가 소이 식스틴을 대표하는 인물인 '지아-플로이-라노' 로 이어지는 연대기를 상상했다가 플로이의 시대를 쓴 것이라고. 지아와 라오의 이야기도 나오긴 하는데 비중이 엄청나게 크지는 않다.

  이야기엔 적절히 환상이 가미되어 있다. 그게 너무 자연스레 녹아있어서 실제와 환상의 경계가 간혹 흐트러진다. 환상조차 실제같다. 죽어버린 솜의 영혼이 자꾸 출몰하여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 그의 남편인 샨이 식물인간이 되어 금요일에만 깨어나는 것, 우웨의 몸집, 아잇의 죽음 묘사... 모든 것들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것 마냥 그려졌다. '소이 식스틴'에서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말하고 있는 삶의 진실성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오히려 강조되는 느낌을 주어서 신기했다.

  아프리카로 떠나던 중이었던 한국인 청년 '레오'가 태국에 잠시 들렀다가, 소이 식스틴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플로이'를 만나게 되고, 이를 통해 독자는 소이 식스틴 내부의 삶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레오는 소이 식스틴에서의 이방인이었기에 그들 중 일부가 될 수 없고, 그런 레오의 시선을 겪게 되는 독자 또한 그들을 이해한다기 보다 관찰하게 되는 것 같았다. 물론 레오 1인칭은 아니었지만 진행이 대체적으로 그랬다.

  소이 식스틴과 엮인 삶은 결코 아름답고 행복하지 못하다. 잠시 거쳐가는 여행자들만이 행복을 잡았다 갈 뿐이다. 레오는 '반' 여행자 였기 때문에 적절한 불행을 가졌고, 또 그만큼 그걸 쉽게 떨쳐낼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 당당한 플로이조차도 불행했다. 그녀가 가진 건 약간의 자존심과 알량한 숭배의 시선 뿐 실제로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본다. 늙은이 욘도 그랬고, 임신한 채 죽어간 까이도 불행했다. 그나마 자유로워 보였던 리싸는 너그러운 남편 마코와 함께 소이 식스틴을 떠나갔지만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딸의 죽음을 자초해 무거운 몸으로 소이 식스틴에 눌러앉게 된 독일인 우웨, 진실된 사랑을 원했지만 스스로 그것을 잘못 판단하여 떠나보내고 섹스돌이 되어버린 콴, 콴을 사랑했지만 그녀에게 어울리는 방식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에릭,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위해 살다가 식물인간이 된 샨, 죽어서도 마을을 떠나지 못하던 솜. 플로이를 너무나 사랑했던 스웨덴인 유하 교수. 이태리 남자의 말을 믿고 성전환 수술을 했지만 버려진 수진, 소이 식스틴의 사람에게 가끔은 경멸받는 까터이 나왈렛. 모두가 불행한 줄 모르고 불행했다. 소이 식스틴의 삶이란. 그 처절함이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일상으로 다가와 읽힌다는 게 슬퍼지더라.

  레오가 그렇게 미친듯이 사랑했지만 얻지 못했던 게 플로이. 아직도 플로이의 속을 잘은 모르겠는데, 자존심이 가장 크게 얽힌 문제가 아닌가 뭐 그렇게 짐작해 본다. 그리고 레오의 방식은 정말로 멍청했다. 플로이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레오가 실질적으로 플로이에게 해줄 수 있었던 건 알량한 돈 몇푼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믿음도 주지 못하는 남자가 비위를 거슬리게 했으니까. 행복한 전생 이야기는 비참한 현실을 더 드러내줄 뿐이다. 게다가 레오는 여행자였다. 언젠가는 떠나갈. 소이 식스틴의 창녀들은, 특히나 플로이는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니까. 그래서일까... 일상에서 벌어지는 그냥 사고 같았던 플로이의 죽음은 너무나 플로이 답더라.

  지아의 시대가 지나고, 이제 플로이의 시대도 갔고, 새롭게 라노의 시대가 오겠지만. 이미 많이 변해린 소이 식스틴의 안에서 라노가 어떻게 그녀의 시대를 알아갈지 궁금해졌다. 읽을 수 있으며 좋겠지만, 글쎄.

  레오는 우웨가 했던 말을 되씹어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말한 건 아무래도 실수였다. 그 자신은 우웨와 너무나도 달랐다. 저에게 여행인 것이 우웨한테는 유배였다. 저에게 가볍게 흘러가는 풍경인 것이 우웨한테는 생존의 엄숙한 배경이었다. 자신은 날렵하며 자유롭고, 우웨는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인간으로 그 거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토록 다른데 무슨 수로 이해한단 말인가? 인간은 그 자체로서 각각 하나의 우주다. 같은 태양계라 해서 화성이 지구를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가 아니었다. 레오가 소이 식스틴에서 그간 줄기차게 해온 작업은 이해가 아니라 해석이었다. 만약에 멋대로 남을 해석하는 대신 고스란히 상대에게 이입된다면, 저말로 이해한다면, 거기에는 사랑도 증오도 끼어들 틈이 없다. 상대의 즐거움과 아픔을 동시에 느끼며 상대와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건 사람한테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웨가 한 말은 그런 의미였다.

박형서, 『새벽의 나나』, 문학과지성사, 2001, p. 392
톰고든을사랑한소녀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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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류가 빌려줘서 읽기 시작. 스티븐 킹 소설은 이게 처음인듯? 영화화 된 건 영화로 좀 봤는데, 책은 그 전에 읽은 기억이 없다. 아 작법서라고 해야할까, 에세이에 가까웠던 '유혹하는 글쓰기'는 읽어보았음. 그건 재미있어 보여서 샀는데 에세이로서 재미있었다. 그래서 아무튼지간에 소설은 이게 처음.

  잘읽힌다. 속도감이 잘 붙는 글이었다. 문득문득 너무 가벼운 느낌에 빈 구석이 있단 생각이 들긴 했는데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문제될 거 없었다. 다만 내가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또 읽고 나서 생각했던 건 '내가 왜 이걸 읽어야 하지?' 였다. 9살박이 트리샤의 고난이 내게 썩 와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왜 이 애가 괴로워하는걸 봐야하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생각할 거리를 그렇게 많이 주지도, 그렇다고 이야기로서의 재미에 푹 빠져들게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후자는 취향 문제에 가깝다.) 생각할 거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고 그냥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읽었다. 교훈은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있읍시다 일까... 애를 놔두고 한눈을 팔지 맙시다? 굳은 의지를 가집시다...? 의미를 으려면 찾기는 쉽다. 작가의 의도가 텍스트를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남에도 확 가슴에 와닿지는 않는 그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음 역시 이건 취향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시종일관 트리샤를 지켜보던 '그것'의 정체는 은근히 김이 샜다. 물론 그게 곰은 아니지만, 곰의 형상을 한 무언가이지만... 내겐 부족해. 내게 더 설명을 해줘.

  내가 좋아할 만한 소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읽어볼만한 가치는 있다. 혼자 떨어진 극한상황에서의 사고방식, 행동 뭐 이런 건 재미있었다. 특히나 그게 내가 더이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된 어린이일 때에는.
호빗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판타지소설
지은이 J. R. R. 톨킨 (씨앗을뿌리는사람,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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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빗 영화화가 되기 전에 반지 시리즈를 다 읽어야지 하고 읽기 시작함. 생일선물로 기무니에게 반지의 제왕 전권을 받았고, 호빗은 반지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샀다. 호빗부터 읽기 시작. 지루할까 걱정했는데 생각외로 술술 읽혔다. 반지보다는 스토리가 좀 작고 오밀조밀한 맛이 있는 듯.

  하루 아홉끼의 식사를 먹고, 따뜻한 햇볕을 받는 것을 낙으로 삼는 안락한 삶을 살던 호빗 골목쟁이네 빌보가 겪는 모험 이야기. 마법사 간달프를 만나 난쟁이들의 보물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뭐 그런 이야기인데, 전체적인 여정이 험난한데도 불구하고 읽으면 마냥 귀엽다. 주인공이 빌보라는 작은 호빗인것도 그렇고, 난쟁이들과의 투닥거리는 관계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서술이 거칠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 있는 전투의 비극마저도 약간은 상쇄될 지경이었음. 근데 뭐 처음엔 동화처럼 썼다니까... 그리고 이 이야기의 무게에는 이 정도가 딱 적당한 듯 했다.

  빌보 너무 착함... 이 호빗은 너무 선량해서 속이 탈 지경이었다. 하는 짓도 귀엽고, 착하고 뭐 그래서 별로 책잡을 구석이 없었다. 계속해서 현명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보기 좋았음. 난쟁이들은... 뭐 이런 불평많은 종족이 있나! 하나씩 잡고 때려주고 싶을 때도 많았음. 고집불통 소린..ㅡㅜ 죽을때 되어서야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마라ㅋㅋㅋ 그래도 뭐 본성자체가 악한 애들은 아니고 그냥 불평많아보이는 애들이었다. 나름 협동하고 이러는 거 귀여웠음. 괜히 난쟁이들 때문에 용한테 공격받은 호수마을 사람들은 눈물뿐이야... 그래도 좋은 지도자 새로 만나서 잘 살아나가겠지. 요정들은 좀 꽉막혀 보였고(막판쇄신이 있었지만)... 베오른은 고지식하면서도 귀엽고 멋이 났습니다. 여러 다양한 상상의 캐릭터들 보는 재미도 한 몫 단단히 했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동화같은 판타지. 그렇다고 주제의식이 가벼운 것은 아니고, 오랫동안 읽히는 이유도 알법한 소설이었다. 재미있게 읽음. 반지 시리즈를 읽기 위한 발판정도로 생각했는데, 요 이야기 하나만 봐도 즐거웠다. 영화 버전도 어서 보고싶음.
바람이분다가라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한강 (문학과지성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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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까 했었는데 지누가 빌려줘서 보게 되었다. 읽으면서 계속 안 사길 잘했음...이었는데 막판가서 손을 오들오들 떨었다.

  읽는 동안 한강은 읽을 수록 나와는 맞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 두 개는 정말 너무 취향이어서 발버둥쳤는데, 문체 자체가 나와는 썩 맞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너무 감성적이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듯한 글은 크게 재미를 못느낀다. 집중해서 읽지 않았다는 소리는 아니고 재미도 있었지만,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든다. 뭐 그런 느낌?

  이 모든 걸 뒤집어놓은게 마지막의 마지막이었다. 아 진짜 한강 소설을 보면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욕망, 혹은 삶에 대한 끈질기고 억센 집착. 가장 마지막에 이정희가 결국은 버티고, 또 버텨 내는 근원은 그녀에게 집착이 있기 때문에. 이미 죽어버린 친구 인주의 모든 것을 지켜내야겠다는 믿음이 있어서.

  주인공 이정희가 서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굳게 믿고 모든 것을 파헤쳐가는 과정은 시선을 끈다. 추리소설을 보는 듯한 이 소설의 진행은 진행되는 이야기의 흥미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있는 기억을 헤집어 모를 감정들을 이끌어낸다. 캐릭터들은 모두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로든 매력적이었다. 이정희 본인의 엄마 이야기, 혈우병이 있는 인주의 삼촌, 알콜중독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던 인주의 엄마, 인주의 딸 민서, 상담의인 류인섭 소장. 그리고 강석원. 단순히 지금의 일들이 현재의 인물들의 일로 머물지 않고 과거와 얼키설키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예민한 성격인 이정희는 썩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아니었는데, 읽다 보니까 괜찮아지더라. 처음에는 너무 이정희의 행동들이 너무 심하다 싶었고, 또 아무런 증거 없이 막무가내로 믿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내가 이정희와 서인주 사이의 유대를 너무 얕보았던 것 같다. 그런의미에서 처음엔 명석해보이던 강석원이 보이는 모습은 정말 추하기 짝이 없어서 실망. 고작 그 정도 사람이었다니,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의 환상대로 서인주를 포장하려 했을까.

  추리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읽는데 읽는 동안엔 그런 느낌이 별로 안 든다. 오히려 지리멸렬한 인간관계가 점액처럼 묻어 나오는 기분에 아 이게뭐야, 했었는데 막판가서는 꽤 카타르시스가 컸다. 재밌었다. 내가 죽으면 내 죽음의 원인을 쉽게 넘어가지 않아 줄 친구는 누가 있을까. 뭐 고런 생각을 잠깐 했음.
단테의신곡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 이탈리아소설
지은이 단테 알리기에리 (느낌이있는책,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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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누가 샀대서 빌려읽기로 했다. 보통은 지옥, 연옥, 천국 편 3권으로 발행되어있는게 정석이지만 이 책은 이야기 식으로 이루어진 한 권짜리 책. 아마도 요약이나 생략된 부분이 많을 것 같다. 이야기식이라 읽기는 수월하긴 했다. (성경 볼 때 하는 생각인데 이야기 식으로 풀어진 거 없나?) 물론 시 형식으로 봤을때의 감동은 없었겠지. 난 그저 내용만 알게 된 것이다.

  여튼 그래도 호기롭게 펼쳤다만은, 아... 재미 없어... 지옥편이 가장 재미있고 갈수록 재미 없어진다. 역시 사람은 잔인한 데 눈이 더 돌아가긴 하는건지 뭔지. 천국편이 재미가 제일 없었던 게, 여기 있는 사람들이 썩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책 전반적으로 깔린 사상도 영 마음에 안들고.

  아무래도 기독교 교리나 그런 사상을 깔고 있는 책이다 보니까, (무신론에 가까운) 나랑은 되게 안 맞았다. 또 시대배경이나, 문화를 알고 읽으면 모를까 그런 지식이 거의 전무한 나로서는 내용을 보고 이게 뭐야, 싶은 부분이 있을 수밖에. 지옥 편에서 루시퍼의 입안에 물린 것이 유다, 브루투스, 카시우스인걸 보고 좀 피식했으니 말 다했지.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전개가 나와는 영 맞지 않았음. 신의 존재도 모르던 사람들이 지옥에 있다니(그 베길리우스가) 이게 무슨 개소리야... 물론 천국편에 보면 신의 존재를 모르던 사람들도 천국에 있기는 한데, 이 기준이란 것도 영 마음에 안들고. 연옥편에서 제일 기가 찼던건 현실의 사람들의 기도가 연옥을 빨리 빠져나오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거였다. 자기 죄를 씻는데 왜 남이 기도해야 돼...? 이런 걸 따지고 들면 내가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실제로 이렇게 느껴버렸으니 별 도리가 없다.

  읽으면서도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을까 고민했음. 그냥 참.
벨벳애무하기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세라 워터스 (열린책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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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무니에게 빌려서 읽기 시작. 처음에는 약간 시큰둥한 느낌으로 책장을 넘겼는데 (역사소설이 재미있을까?) 와... 1장 읽으면서 가슴 터지는 줄 알았다. 난 내용 하나도 모르고 보기 시작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이건 낸시 애슬리의 레즈비언으로서의 성장기. 그렇지만 인간으로서의 성장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낸시 자체가 소설 끝날즈음엔 꽤 철이 들어있다. 일단 얼굴만 밝히지 않아요... 아무튼 끝까지도 꽤, 아니 사실 엄청 재미있었다.

  1장, 2장, 3장으로 나뉘어서 낸시의 인생이 얼마나 널뛰며 변화하는지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1장이 제일 재밌긴 했다. 로맨스 소설 읽는 기분이었다. 레즈비언판 로맨스 소설... 심지어 잘 쓴. 남장 가수였던 키티 버틀러에게 한 눈에 반해 그녀를 쫓고,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기까지의 장면은 진짜 여느 로맨스 소설 뺨치는 긴장의 연속. 이게 낸시의 시점이다 보니까 감정이 절절하게 전해들어와서 또 좋더라. 촌뜨기 소녀였던 낸시가 사랑때문에 런던에 가며 인생이 확 바뀌어나간다.

  다이애나를 만나기 전 까지 낸시의 삶은 그다지 풍요롭지 않았고 어찌 보면 비참하기 까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낸시에게 완벽한 풍요와 향락을 가져다 준 다이애나를 만난 뒤의 일이 썩 즐겁게 보이지만도 않았다. 돈 많은 과부의 애인이 된 낸시의 모습은 완벽한 애완동물이었다. 예쁨받지만 자신의 의견을 낼 수도, 존중받을 수도 없었다. 화를 낸다 치더라도 한낯 어린애의 화처럼 치부됐을 뿐이지. 제나와 그렇게 사고를 친 게 잘했다는 말하려는 건 아니다. 애초에 낸시 자체가 썩 도덕적이지 않은데다 캐릭터가 철 없을 나이의, 철 없는 애인지라 좀 열받게 하는 구석이 간간히 있긴 했다. 그래도 그렇게 된 데에는 다이애나의 탓이 절반은 넘는다고 생각. 뭐 낸시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없긴한데, 이 부분은 그랬다.

  플로렌스를 만난 뒤 낸시는 레즈비언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완성된다. 그렇게나 철없던 그녀가 처음에는 살려고 발버둥치고, 플로렌스의 집에 들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탕아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더라. 처음엔 플로렌스의 캐릭터 역시 썩 마음에 들진 않았는데(아 죽은 사람 붙잡고 살다니 이게 무슨 말이요), 갈수록 좋아졌다. 상처를 가지고 있는 만큼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질투하는 모습도 나름 귀여웠고... 둘 사이 연애가 크게 꼬이지 않아서 다행. 서로 솔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난 굉장히 재미있게 봤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추천하기 난감할 것 같다. 앞서 말했듯 생각보다 자세하게 묘사되어서. 퀴어문화에 조금 열려있지 않으면 난관일 듯. 그걸 감당할 사람에게라면 추천. 너무너무너무 재밌다. 핑거스미스도 완전 기대중.
멋진징조들(그리폰북스)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판타지소설
지은이 테리 프래쳇 (시공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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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한 삼주전에 읽은 거 같은데 아직도 왜 감상 안썼지. 까먹었네...

  재밌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산건데, 재밌긴 재밌었다. 요한계시록의 종말 이야기를 살짝 비튼 건데... 암울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바꾼 상상력이 마음에 들었다. 악마 아지라파엘과 크롤리의 몇천년 쌓인 우정의 모습도 좋았고, 적그리스도인 열한살 아담과 '놈들'의 모습도 귀여웠고. 그 외 어설픈 마녀사냥꾼들인 새드웰, 뉴튼과 예언자의 후예 아나테마의 이야기도 간간히 즐거웠다.

  전반적으로 영국식 유머? 서양의 유머감각이 묻어난다. 동시에 말하면 이 나라에 사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거나 금방금방 캐치가 안되는 유머가 많았다. 생각만치 즐기지 못해서 아쉽다. 기독교 교리를 삶의 바탕으로 삶고 있는 사람들이(믿건 안믿건) 이 책을 읽으면 더 재미있게 느낄 것 같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이야를 다루며 약간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한 이야기가 쭉 이어지는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게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유머도 제대로 캐치 못하는데 이야기에도 집중이 안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소하게 읽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냥저냥 즐겁게 봤음. 근데 산 건 돈 쪼끔 아깝다...
최순덕성령충만기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이기호 (문학과지성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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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이거 읽기 전에 기대를 많이 했다. 그리고 첫 소설인 '버니'를 읽고 나서는, 어 이게 아닌데. 이런 느낌이 들었고. 같은 작가의 소설인가 의심하게 하더라. 분명 말을 풀어내는 방식은 비슷한데 더 무겁고 습윤한 느낌이었다.

버니
햄릿 포에버
옆에서 본 저 고백은 - 고백시대
머리칼 전언
백미러 사나이 -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간첩이 다녀가셨다
최순덕 성령충만기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독특한 형식으로 쓰여진 글들이 있는데 '버니'나 '최순덕 성령충만기'가 특히 그랬다. 버니는 랩 가사처럼 진행되는 서술이 인상적이었고, 최순덕 성령충만기야 아예 성경 문체. 버니 같은 경우는 내용이 너무 어두워서 그런가 그런 읊조리는 듯한 서술이 굉장히 불편하게 다가왔지만,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꽤 즐겁게 읽었다. 결국 내용의 차이인가.

  '갈팡질팡~'에서 보았던 시봉이 이 소설의 단편들에서도 보인다. '햄릿 포에버', '옆에서 본 저 고백은 - 고백시대', '백미러 사나이 -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이렇게 세 편에 나오니 꽤 많이 나오는 편. 그렇다고 모든 단편의 시봉이 같은 시봉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시봉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입맛의 한 구석은 모두 같이 씁쓸하다.

  '머리칼 전언'이랑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은 이 소설집 안에서도 느낌이 되게 특이했다. 전설이랑 현대 이야기가 합쳐진 느낌이었는데, 괴기스러운 느낌을 주는 결말까지 꽤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뭐 썩 좋진 않았다. 신기한데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도 둘 중 택하라면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간첩이 다녀가셨다'는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싶은 이야기. 그냥 현실적이었다. 좀 있을 법하고 소름돋는.

  난 좀 더 가벼운 느낌이 나는 '갈팡질팡~'쪽을 더 좋아한다. 그래도 다른 작가들 소설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내여자의열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한강 (창작과비평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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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 취향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실망했다. '어느날 그는'과 '아기 부처'는 좋았는데 나머지는 썩 취향에 맞진 않았던 듯. 나중에 되팔 목록에 올릴 지 말 지 고민중이다. (으 그러기엔 '어느날 그는'이 걸려서.) 여튼 그래서 초반 두 소설을 읽고 나머지는 건성건성 넘기고 닫고 이러다 나중에서야 완료.

  한강 소설 읽으면 침울하고, 음울한 감정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만 같다. 이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왠지 자연스레 힘없고 하얗게 마른 여자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그런 여자. 여튼 한강의 소설은 그런 게 있다. 굉장히 삶에 집착하면서도 또 쉬이 그걸 놓아버리려고 하는 느낌 같은 게. 아니 삶보다는 어떤 대상인가? 그 대상에 대한 욕구 때문에 삶을 이어가지만 그 대상이 없어진 순간 삶에 대한 의지도 한풀 사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혹은 그 욕망의 대상을 위해서라면 삶 같은 건 되게 하찮아지고 마는. 끈질기게 뭔가를 갈망하는 모습이 소설집 전반에서 묻어나왔다.

어느 날 그는
아기 부처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붉은 꽃 속에서
내 여자의 열매
아홉 개의 이야기 
흰 꽃
철길을 흐르는 강

  '어느날 그는'은 다류에게서 텍스트를 얻어 먼저 따로 읽어봤었는데 그 때 느낌이 되게 좋았다. 뭔가 비참하고 절절한 집착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민화'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삐뚤어진 방식을 택하지만 그게 꼭 악에서 나왔다기보단, 방법을 몰라서 택하게 되었다는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 고시원 골방으로 돌아왔지만... 결말을 보면 그건 비극적인 일만도 아니다. 그는 민화와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결국 그 스스로의 인생을 찾게 되었으니까. 시작점이라도.

  '아기 부처'는 소재 때문에 마음에 들었다. 커다란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걸 감추려 애쓰는 남자, 그 상처 탓에 남자를 보게 되었지만 정작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여자. 다른 여자에게 더 심한 상처를 받는 남자, 그리고 다시 남자와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여자. 뭐 요런 구성 자체가 난 꽤 마음에 들었다. 상처입고 상처입다가도 결국 둘 밖에 남지 않는 느낌이 좋았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는 되게 비참하고 절절하다. 화자가 어린 소녀라서 더 그랬다. 그 소녀에게 독을 먹이고 같이 죽으려던 아버지의 심정이란 것도 볼수록 비참했고. 어머니가 외치던 '지겨워'소리가 내 귀에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부녀가 찾아 헤매던 욕망의 대상인 어머니는 끝까지 나타나지도 않았다.

  '붉은 꽃 속에서'는... 나쁘진 않았는데 뭔가 체념하고 관조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해탈이라고 하나. 그래서 스님이 된 여자는 행복했을까. 이 소설 보면서 더 느낀 건데, 한강 소설 속의 남자들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참 드물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여자의 열매'는 채식주의자의 모티프가 된 작품이라길래 좀 기대했는데... 아 내가 뭘 기대한거지; 왜 밝은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채식주의자 만큼이나 무언가에 집착하고, 또 그 모습은 처절하게 아픈 모습이었다.

  '아홉개의 이야기'는 작은 토막글 아홉 개인데... 뭐 썩 마음에 안들지도,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간소한 이야기들이라 그런가 크게 다가오진 않았는데.. 그래도 '첫사랑'만큼은 좀 마음에 들었다.

  '흰 꽃'도 뭔가 근근히 붙잡고는 있는데 그게 엄청 희망적이진 않았고... '철길을 흐르는 강'도 마찬가지 느낌이 들었다. 둘 중 뭐가 더 낫냐고 하면 그나마 '흰 꽃'쪽을 택하긴 하겠다.

  음 모르겠다. 소재가 마음에 들었던 소설들은 좋았는데 나머지는 꾸역꾸역 집어넣은 기분이다. 난 밝고 희망적인 게 좋다. 아니면 내쳐지고 버려져도 끊임없는 욕망으로 삶을 붙잡으려 드는 모습이 좋고...

시계태엽오렌지(세계문학전집112)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문학선
지은이 앤서니 버지스 (민음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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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이거 너무재밌잖아.... 내가 왜 이전에 이걸 안 읽었지?! 말투 땜에 거슬린다고 덮었던 것 같은데 완전 재미있었다. 화폐단위도 전혀 다른 걸 쓰고 있는걸 보면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삼고 있진 않은 것 같았는데, 설명이니 뭐니 읽어보면 1940~60년대의 시대상을 철저히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 저것 더 검색해보니까 앤서니 버지스 개인의 삶과 굉장히 연관되어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고. (아내에게 일어났던 사고 같은 거...)

  알렉스는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십대이다. 열다섯살일 때 이미 소년원에 갔다 온 전적이 있고, 나와서는 조지, 피트, 딤과 함께 패거리를 이루어 또 나쁜 짓들을 저지르고 다닌다. 이 때 그들이 벌이는 범죄에 대한 묘사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데, 화자인 알렉스 자신이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아서 그런가 읽는 데 큰 불쾌감은 없었다. 오히려 좀 흥겹다는 느낌이 들어서 신기할 지경이었음. 알렉스는 좀 싸이코패스 같은 거라서... 그런 악행들을 보고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느끼는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걸 재밌어 하면 재밌어 했지. 순수악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주제에 교향곡을 듣는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어서 좀 웃기긴 했다만... 그건 제쳐두고.

  1부의 악행들로 말미암아 알렉스는 결국 열다섯 나이에 교도소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도 결국 알맹이는 변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싹싹하게 굴지만 여전히 악하다. 철없기도 하고. 어떨 땐 좀 순진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알렉스가 또다시 살인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국가에 의한 치료에 들어가는 게 2부 이야기. 이 과정을 보는 데서 1부에서 느끼지 못했던 불쾌감이 느껴졌다. 국가라는 거대 기관이 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바꾸려고 하는 것까지는 좋다. 이 시도가 전혀 인도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걸 뺀다면 말이다. 치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어린 애를 속여먹는 것만 같았고, 치료 방법 또한 고통을 일으켜 그 일을 방지하는 것이라... 효과적이긴 한데 인간적이진 못했다. 그렇게 본성을 거세당한 알렉스가 사회로 돌아와서 겪는 일들은 어떻게 보면 뻔한 일들이었다.

  3부가 사회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인데, 글쎄. 알렉스는 이미 부모님에게도 반 쯤 버려진 상태인데다(이때 묘사는 좀 웃기긴 했다... 애가 땡깡 부리는것 같아서ㅋㅋㅋ) 자신이 좋아하는 교향곡은 고통 탓에 듣지도 못하지, 갈 데도 없어 헤매다 이전에 자신이 괴롭힌 사람을 만나 된통 얻어맞기만 한다. 이제 알렉스는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거든. 그걸로밖에 문제 해결을 못하는 앤데, (물론 폭력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폭력이 없으니 대항할 수단이 전혀 없어진거다. 다른 방식을 전혀 모르니까... 사회에 의해 자기 본성까지 잃었으니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애가 되어버렸다. 경찰이 된 딤과 빌리보이에게 수모를 당하고, 그 뒤 어떻게 또 자신이 괴롭혔던 (하지만 그게 자신이 한 일인지는 모르는) 사람의 품에 들어가 어떻게 도움을 얻는데... 그 쪽에서 취하는 행동이란 것들도 결국 정부가 하는 일과 크게 달라보이진 않았다. 여튼 그러다 그쪽에서 마련해준 아파트에 갇혀 클래식을 듣다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 부분까지 모두가 급박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나중에 병원에서 깨어나 내무부 장관의 손에서 또 그 권력에 약간 이용당하긴 하지만, 동시에 알렉스는 본성을 찾게 되는데... 

  이 이후에 원래의 악행으로 돌아오나 했더니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는, 이전에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았던 피트가 결혼한 것을 보고 자신도 정착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드디어 어른이 되어가는 거 같은 모습인지라 신기했다. 아기 사진이나 오려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걸 보면 어떤 교도같은 것이 없었는데도 결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게 될 것 같은 지라. 질풍노도의 십대를 보내고 사회에 의해 억지로 교도당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알렉스 본인을 바꾼 건 알렉스 자신이었다. 아무리 본성을 틀어막아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걸 바꿀 수 있는건 오로지 자신 뿐인 거. 난 그렇게 알아들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는, 소설 마지막 부분의 묘사도 빠졌고, 강간이나 폭력같은 부분을 그 자신의 미학으로 그려냈단 데서ㅋㅋㅋ 왜 앤서니 버지스가 치를 떨고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소설이랑 전달하는 것도 다르고 보여주는 방식도 좀 다른 듯.

  약간 호밀밭의 파수꾼 읽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홀든 콜필드는 알렉스에 비하면 아주 착하고 바른 청년이지만. 비슷한 혼란을 이 소설에서도 본 것 같았다. 그 십대 특유의 감성이랄까. 아무튼 재미있게 읽었다. 푹 빠져서 금방금방 읽어버림.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 하나와 같은 거야.

『시계태엽 오렌지』, 앤서니 버지스, 민음사, 2005, p.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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