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곡예사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폴 오스터 (열린책들,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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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놓고 한참만에 읽은 듯. 그리고 여전히 나는 읽은지 일주일이 지나서 감상을 쓰고... 집에 놀러왔던 친구가 이거 재밌어 해서 아 맞다 그거 읽어야겠다 하면서 읽었다. 폴 오스터의 소설은 이게 처음인데 꽤 마음에 들었다. 글이 생각보다 진중하고 무게감이 있어서 놀랐다. 왜 되게 가벼울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무겁다고 해서 재미없거나 지루한 건 아니고 오히려 파고들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다루고 있는 소재는 가벼운 듯 가볍지가 않았따. 판타지이면서 또 판타지가 아니었고.

  제목만 보고 처음엔 아, 서커스단에 들어가서 공중곡예를 연습하는 사람의 인생담인가. 뭐 그정도를 상상했었다. 그런데 진짜 하늘을 나는 이야기다! 오. 소설의 상상력이여. 소재부터 나의 상상력의 빈곤함을 일깨워주더라. 고아인 '월터'가 유대인 사부 '예후디'를 만나서 하늘을 나는 방법을 배우고, 또 그 이후의 월터 인생 전반을 통과하는 이야기. 예후디의 집에 간 월터는 당시 월터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이 소설의 시대배경은 1920년대 정도!) 흑인 '이솝'과 인디언 아주머니 '수'와 살게 된다. 또 한명, 같이 살진 않지만 현명하면서 또 약간 괴짜같기도 한 '위더스푼' 부인도 있다. 처음 월터는 이솝과 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혐오하지만 그럼 감정들은 교육으로 인해 점점 나아지며 결국 그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고, 또...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또 만나고. 험난한 월터의 인생 여정이 묘사된다. 1장이 끝날 때엔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눈물도 안났는데, 2장 끝날 때엔 참 많이 울었음. "좋았던 시절들을 기억해라.", "내가 너한테 가르쳤던 것들을 기억해."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 하나에 펑펑 눈물이 나더라. 3장은 읽으면서 가장 심드렁하기도 했는데 월터의 삶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흘러가지 않았고 또 월터의 타락을 바라보는 심정이 편치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4장은 마무리되는 이야기였기에 나쁘지 않았고.

  나는 이 소설에서 월터가 하늘을 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진 않았다. 그걸 시작으로 엮인 인간관계와 이야기 진행들이 중요했지. 1장의 흥미로움과 2장의 진득한 무거움 속에서 묻어나오는 삶의 단면들이 참 좋았던 소설.

  앞으로도 몇 번 더 읽어볼 것 같음.
폭풍의언덕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문학선
지은이 에밀리 브론테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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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정신병자들의 향연인가... 워낙에 유명한 소설인지라 좀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별로였다. 이건 에밀리 브론테의 자매인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네. 자매가 내게 무슨 짓을 한거지... 오히려 극 내용으로만 보면 제인 에어 쪽이 더 탄탄해 보인다. 폭풍의 언덕은 집안의 가정부 넬리의 입에서 전해지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좀 이상했다. 구성 방식이 영... 근데 재미는 이 쪽이 더 있었던 게, 캐릭터들이 워낙에 강렬해서 그랬다. 그래도 내 취향은 별로 아니었다. 나는 나쁜 캐릭터 좋아하는데 여기 나오는 '나쁜' 캐릭터들은 동정할 가치도 없어ㅎㅎ

  1대와 2대에 걸친 이야기인데, 캐릭터들이 다 혈족으로 맺혀있어서(오 친척결혼 가능한 나라시여) 읽으면서 관계 정립하느라고 초반에 좀 헷갈림. 케서린 언쇼와 힌들리 언쇼가 일단 남매고, 언쇼 집안에 히스클리프가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야기가 이어지는 이야기의 서술은 가정부인 넬리가 맡는다. 가정부지만 힌들리와 나이가 같음. 소설 주인공 1세대들과 동년배라서 그 나이에 맞는 시선을 보여줄 때도 있다.

  캐서린은 말괄량이 캐릭터고 힌들리는 약간 허세 있지만 그래도 괜찮은 남자애였던거 같은데, 히스클리프로 인해 여러모로 두 캐릭터 영향을 받게 된다. 아버지에게 히스클리프와 비교당하며 히스클리프에 대한 증오를 쌓은 힌들리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히스클리프를 핍박한다. 이 상황에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그래도 서로를 의지하며 잘 노나 싶더니,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좋아하면서도 그의 가난과 무지함을 견디지 못해 안전한 선택(...)인 린턴가의 에드가와 결혼한다. 이 에드가가 나쁜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점잖고 괜찮은 사람이란 게 오히려 내 속을 태웠다. 여튼 이 과정에서 캐서린의 속마음을 알게 된 히스클리프는 언쇼 집안과 린턴 집안에 복수를 다짐하며 마을을 떠난 후, 한참 후에 다른 사람이 되어 되돌아온다. 여기서부터 복수극의 시작이다.

  마을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힌들리의 집에 정착한다. 일단 도박으로 이미 위더링 하이츠 저택을 손에 넣은 상태인데, 여기서 또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헤어턴의 사랑을 얻는데 그를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닌, 망치는 길로 인도한다. 1대 뿐 아니라 2대를 망치고 있는 셈. 난 여기서부터 히스클리프를 용서할 수 없었다(...) 또 히스클리프는 주기적으로 캐서린과 접촉한다. 옛 친구의 귀환에 마냥 신난 캐서린은 그를 항상 환영한다. 에드거의 불만을 사더라도 신경쓰지 않는 쿨함... 속터져서 내 참. 이 와중에 에드거 린턴의 동생인 이사벨라가 히스클리프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알고 화를 내는 걸 보면 어이가 없어 소설 안으로 뛰어들어가고 싶을 정도. 그리고 이걸 생각없이 히스클리프에게 말하는데, 히스클리프는 린턴 가문 또한 망치기 위해 이사벨라를 이용하여 둘이 도망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겹쳐 캐서린은 결론적으로 보면 자기 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망. 죽기 전에 딸 캐서린, 즉 캐시 린턴을 낳고 죽는다. 이사벨라 쪽은 후에 본색을 드러낸 히스클리프에게 질려 히스클리프의 아이를 잉태한 채 다시 도망. 린턴 히스클리프를 낳는다. 이렇게 캐서린이 죽으면서 1대의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 셈. 난 너무 이해가 안갔던 게 캐서린. 자유분방한 아가씨인건 좋은데 민폐는 끼치지 말라 이거야. 히스클리프는 좋지만 가난한 그는 싫어. 에드거는 안정되고 편안하지만 히스클리프에게 끌려. 이게 뭐야 이 싸이코패스야.... 그러다가 결국 자기 화를 감당 못하고 죽지를 않나. 어이가 터졌다.

  캐서린이 죽어서 정신을 차리면 히스클리프가 아니죠. 끝까지 언쇼 가와 린턴 가를 망가뜨리려는 히스클리프의 계획은 2대로 넘어가 계속되는데, 캐서린이 죽은 뒤 그의 오빠인 힌들리 또한 죽게 되고 남은 아이 헤어턴은 하인의 상태로(자신은 그런 지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상태로) 자라게 된다. 히스클리프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던 힌들리의 복수를, 그 아이에게 고대로 한 셈. 캐시의 경우 에드거 린턴의 지극한 사랑으로 자라나지만 어머니를 닮은 구석도 분명 존재해 이게 재앙의 씨앗이 된다. 린턴 히스클리프는 이사벨라가 죽은 뒤 잠시 에드거의 집에 맡겨지지만 히스클리프가 그 존재를 쫓아 아이를 빼앗아간다. 본디 몸이 약하고 성격도 그다지 강하지 못했던 린턴은 히스클리프의 집에서 더 버릇없고, 더 유약하게 자라난다. 이 세 아이가 만나는 장면들이 좀 웃긴데, 어쨌든 히스클리프의 계략으로 세 아이는 다시 재회한다. 셋 다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만 캐시는 하인같은 모습의 헤어턴이 자신의 사촌이라는 데 질색을 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린턴의 경우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피려 든다. 헤어턴의 상처가 보여버려... 헤어턴은 캐시의 눈에 잘 들려 노력하지만 캐시의 무시와 본인의 무지가 겹쳐 좋지 않은 결과만을 낳는다. 나약한 린턴은 캐시에게 더욱 매달며 애같이 구는데 캐시는 그를 내버려두지 못하고 연락을 하다가 결국 히스클리프의 계략에 말려들어 그와 억지로 결혼하게 된다. 좋지 못한 타이밍으로 에드거까지 사망, 결국 양 집안의 재산을 손에 넣으며 히스클리프는 두 집안을 몰락시키는 자신의 계획을 이룩한 셈. 린턴 이 자식은 보면서도 끝까지 짜증이 났던데 야 이 징징이 새끼야.... 몸 약한건 참겠는데 정신이 이따위인건 참을 수가 없더라. 게다가 결혼하고 나서 홀랑 죽어버려 히스클리프의 계략에 한 몫을 해주어버렸다. 어이구 속터져.

  그래서 위더링 하이츠에는 히스클리프, 헤어턴 언쇼, 캐시와 하인들이 이상한 동거를 하게 된다. 집안 분위기가 좋을 리 없지만 이 상태가 계속되는데, 헤어턴의 배려를 마침내 캐시가 깨닫고, 또 그런 캐시로 인해 헤어턴이 변해나가면서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복수가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며 결국은 죽는다. 해서 이 두 사촌끼리 결혼할 모양새를 풍기며 훈훈하게 끝나는 이야기... 인데 훈훈하지가 않단말이다 나는!

  일단 캐릭터들이 너무너무너무 민폐쟁이들이다. 심지어 서술자 넬리마저도 그렇다. 끼어들어서 왜 괜찮을 수 있는 일을 괜찮지 않게 만든다던가 정작 끼어들어야 할땐 끼어들지 않느냔 말이다. 하인의 입장도 있겠지만 이 부분이 무척 열이 받았음. 그리고 1대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천하의 개... 여기까지. 둘이 사랑해서 결혼했으면 이런 일도 없을 텐데. 아 이건 캐서린 탓이구나! 그래 이 사람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왜 두 남자 이것저것 재느라고 사람들 속을 헤집어놓느냐. 게다가 에드거랑 결혼했으면 제대로 행동했어야지 히스클리프를 놓지 못하는 행동들은 또 어쩌고. 와 내가 보다가 책 찢어버릴뻔. 히스클리프도 자기 연애는 자기 연애고 애들은 애들이지 왜 2대까지 건드려. 복수의 정당성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치지 않느냔 말이다. 에드거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말도 안해... 그리고 히스클리프 어린시절 보면 얘도 썩 심성이 바르고 올곧지도 않아요. 또 1대의 힌들리. 야임마... 애아빠가 엄마 죽었다고 애를 그렇게 방치하다니 용서할 수가 없다... 그리고 히스클리프 괴롭힌 것도 애 때야 이해가 간다만 다 커서도 그러지 말라고... 1대에서 봐줄수 있는 건 에드거, 오직 신사 에드거 뿐이에요. 2대는 애들이 다 이런 상황에서 자라서 이해가 간다만 여기서도 캐시가 좀 짜증이 났음. 어쩜 그리 엄마의 단점만을 닮았는지 하지말란 건 다해요. 발을 빼려면 좀 빨리 빼던가... 와오. 그러나 2대의 상진상은 역시 린턴 히스클리프. 이 징징이자식을 그냥...! 어쩜 이렇게 오만불손하고 짜증나게 자랐는지 자식교육의 중요성을 통감하게 해주는 캐릭터였다. 캐시랑 그 난리 쳐서 결혼했으면 잘해줘야지 어쩜 아빠한테 그런 거만 배워서ㅡㅡ 흐아 끝까지 싫었다. 헤어턴의 경우엔 별 말 하면 안될 거 같음. 얘는 상황이 그랬지 애 심성이 괜찮았다. 삐뚤어진 모습을 좀 보여주긴 했어도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고, 또 자기 변화하려는 모습이 기특했음.

  내가 이거 왜 봤지. 전혀 낭만적이지 않는데다가 캐릭터들에게 정을 줄 수 없는 소설이었음. 교훈은 뭐 사람에게 잘 대하자 정도인가. 어쩌라고...? 그래서 총평. 막드도 이런 막드가 없다...... 제인 오스틴이 정말 연애소설 잘쓰는 거였구나. 새삼 깨달았다.
아가미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구병모 (자음과모음,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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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누가 빌려줘서 읽기 시작. 제목이 끌려서 읽고 싶었었는데 오, 읽고 나니 더 좋았다. 목덜미에 아가미(와 몸에는 빛나는 비늘을)를 가지고 있는 남자 곤에 관한 이야기. 곤을 찾아온 여자 해류가 들려주는 회상과 현실이 얽혀있는데 이 과거를 되짚어나가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곤의 과거는 어찌 보면 슬플 수도 있지만 막상 본인은 담담하게 자라난 느낌. 아버지가 곤(그때는 곤이 아니었지만)과 함께 이내촌의 호수에 투신자살을 하고, 아버지는 죽었지만 곤은 이내촌에 사는 노인에게 거두어진다. 노인은 손자인 강하와 함께 살고 있고, 딸은 젊을 때 집을 나가 강하만을 맡기고 또 연락이 끊긴지 오래인 상황.

  처음에는 곤을 보내버리라던 강하는 곤의 목덜미에 있는 아가미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이제는 오히려 노인에게 신고하지 말라며 곤을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하는데, 그렇다고 강하를 다정다감한 형제로 보긴 어렵고 곤을 대하는 행동이 좀 난폭하기도 하다. 근데도 이게 밉지가 않은게, 애가 삐뚤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감정표현에 서툴고 어려서 그런 느낌이라서 강하도 이해가 갔다. 곤의 비밀을 세상에 들키지 않도록 노력하는 강하의 모습은 신기하다. 이렇게 저렇게 곤을 구박하면서도 결국 곤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곤이 호수에 빠진 아이를 구해냈을 때 강하는 그를 칭찬하기보다는 오히려 (심하게) 혼을 내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한다. 아이의 목숨보다도 곤이 중요하다는 듯이. 밖에서 보면 강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만 곤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곤에게 강하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비밀을 지키라고 말하는 감시자 같다. 곤이 그걸 상처로 여긴다기 보다는 좀 덤덤하게 아 그렇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는 거 같긴 하지만.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 강하의 엄마 이녕의 귀환은 무덤덤히 살아갈 수 있었던 상황의 반전을 만들어낸다. 연기자가 꿈이었지만 그 꿈을 잃고 나이 든 퇴물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녕에겐 더 이상의 꿈이 없다. 그녀는 하루하루 환상을 만들어주는 약을 먹으며 남은 인생을 소진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는 것은 곤 뿐이다. 본디 무덤덤하고 또한 세상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한 곤은 그런 이녕을 바라만 보는데, 어느 날 약에 취한 이녕은 몸을 씻던 곤을 우연히 보게 되고, 그런 곤에게 "예쁘다"고 말한다. 여태까지 자신의 몸을 감추고 숨겨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곤은 그 말 한마디에 감화되어 이녕을 진짜로 신경쓰게 된다. 이런 깨달음의 과정이 좀 신기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 이후 곤은 이녕을 진짜로 신경쓰게 되어 그녀가 먹는 약들을 한번에 다 버리게 되는데, 약물중독자들이 그러하듯 이녕은 금단증상과 환각에 시달려 곤을 살해하려 들고, 역으로 방어하던 곤에 의해 죽는다. 당황한 곤은 그대로 강하를 부르는데 신기한 게 강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곤을 여태까지처럼 폭력적으로 다루지 않고, 오히려 당황하나 곤에게 후드티를 입히고 있는 돈을 챙겨주어 멀리 떠나 보낸다. 이곳은 자신이 처리하겠다며. 이 때 곤은 강하에게 "날 죽이고 싶지 않느냐"고 묻고 강하의 대답은 이렇다. "물론 죽이고 싶지"만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여태까지 자신이 들었던 말 중에 "예쁘다"가 가장 최고의 찬사인 줄 알았던 곤은 강하의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존재 자체에 대한 소중함을 획득한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 강하의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듣고. 그래서 일년에 한 번씩 자신이 머무는 곳의 풍경을 사진으로 보내며.

  소설은 아가미가 있는 곤에게서 시작하지만 이야기 전체는 곤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곤과 강하의 관계에 더 물들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겉으로는 삐뚤어졌지만 속으로는 이상할 정도로 끈끈히 맺힌 관계. 곤의 몸상태보다는 곤의 내면이 더 궁금하고, 강하와 곤 사이에 남아있는 것들이 더 보고 싶은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 관계 면에서는 은교가 생각나기도 했다. 지누도 그 생각을 한 거 보면 나만 한 생각이 아닌듯ㅎㅎ

  어쨌든 난 즐겁게 봤다. 재미있었음. 곤이 강하를 어서 찾아내기를.

  곤, 당신 이름 있잖아요. 그거 할아버지도 아니고 강하가 지어준 거래요. 그렇게 부르기도 기억하기도 쉬운 단 한 글자뿐인 이름을, 막상 자기가 붙여놓고 부르지도 못했대요.
  그 무렵 강하는 『장자』를 어린이용 다이제스트 판으로 엮은 학급문고 도서를 읽고 있었대요. 장자의 첫 장에는 이런 얘기가 있거든요. 북쪽 바다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 그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강하는 당신의 아가미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으로서 이거야말로 이 아이한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대요. 하지만 그래 놓고는 당신의 이름을 부른 적이 거의 없었죠. 그건 그 다음 장에 있던 한 줄이 일종의 예언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래요. 이 물고기는 남쪽 바다로 가기 위해 변신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고 한다. 그의 등은 태산과도 같이 넓고 날개는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과 같으며 한번 박차고 날아오르면 구만 리를 날아간다고요.
  언제 어떤 일로 떠날지 모르는 아이였잖아요. 오랜 기간 이내촌에 머물긴 했지만 실제로 당신은 불의의 사고로 떠나왔고요. 강하는 그 이름을 일상적으로 부르는 것조차 두려웠던 거예요. 한 번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한 글자가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아가미』, 구병모, 자음과 모음, 2011, pp. 180-181
연인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마르그리트 뒤라스 (민음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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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류가 빌려줘서 읽기 시작. 빌려 읽긴 했는데 다 읽고나서 그러고보니 우리 집에 이런 이름의 책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하고 고개를 돌리니 책장에 이 책이 보였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야 이건ㅋㅋㅋㅋㅋㅋㅋㅋ 산호출판사에서 나온 92년도 판 책이긴 한데 더 두껍고(단편 두 개가 더 들어있다) 워낙 옛날 책이라서 기억도 못하고 있었네. 분명 할아버지 댁에서 가져온 것이겠지...

  따라서 연인 본편은 민음사 판을 읽었고, 나머지 단편 두 편(작은 공원, 부영사)은 산호출판사 버전으로 읽었다...만 사실 연인 말고 나머지 두 편은 안읽은 것이나 마찬가지. 눈은 읽고 있는데 머릿속에 남은 게 하나도 없다. 와, 내가 왜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에 연인 하나만 있는 지 알 거 같았음. 연인이 그나마 읽을 만 하니까요... 사실 연인 자체도 시점이나 시제가 왔다갔다 하는지라 읽으면서 좀 내 글은 아니다 싶었는데(오 난 이렇게 현재 과거, 혹은 주체가 왔다갔다 하는 데 약한 듯) 나머지 두 개는 더 못읽겠더라. 부영사는 초반에만 집중하다가 결국 나가떨어짐. 안 읽어.

  연인 자체도 읽기 쉬운 글은 아니고, 시종일관 불행에 젖은 삶에 무감각해진 열일곱의 '나'를 보고 있다면 읽는 나까지도 무심한 표정을 짓게 되었지만... 그래도 내용은 괜찮았다. 아버지가 죽고, 히스테릭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방관 아래 엉망으로 자라난 폭군 첫째 오빠, 큰오빠에게 눌려 다소 약해진 둘째오빠와 살고 있는 열일곱 소녀 '나'가 주인공. 특이하게도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프랑스가 아니고 베트남이다. 동양의 바탕에 있는 서양인의 모습은 지금 상상해도 꽤 부자연스러운데, 시대상을 생각하면 어땠을 지 보지 못했어도 감각으로 느껴진다.

  소설은 이런 '나'가 부유한 연상의 중국인을 만나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뭐 그런 일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사실 '나'쪽에서는 그다지 열렬한 반응도 아니었고("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어요. 날 사랑한다 해도, 당신이 습관적으로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대해 주세요.") 세상을 무심하게 보는 그런 시선과 서술법 탓에 달콤하다기보다는 힘든 사랑이라는 느낌이 더해졌다. 실제로도 그랬고. 중국인 남자는 나의 시선 안에서도 심약하고 나약하다.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나는 중국인이야." 하는 대사에서 느껴지듯 가족, 특히 아버지와 관련된 일과 그녀의 젊음 앞에 힘들어한다. 이 둘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났다는 것이 전제로 되어있어 더 애틋하게 읽힌다. 감정이 결핍된 프랑스인 소녀와 나약한 중국인 남자의 사랑 시간이 지날수록 더 메마르고 또 더 진한 인상을 남긴다. 전반부에는 이게 사랑인가 싶었던 부분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억눌린 채로 스멀스멀 번져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코 폭발하지는 못한다. 그와 그녀의 이별 장면은 별다른 구구절절한 하소연과 애원 없이도 가슴이 시리다.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뒤 걸려온 한 통의 전화까지 참 스산하게, 스치듯이 그러나 깊게 마음이 아프다.

  소설에서 중요한 건 남자와의 사랑 뿐 아니라 가족간의 관계였는데, 어머니-큰오빠로 이어지는 강한 압제의 주체들은 읽기만 해도 진저리처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 '나'의 서술처럼 어머니는 진짜 미친 것일수도 있고, 큰오빠는 그런 어머니 아래에서 왕으로 키워진 또 하나의 미친 사람 같았다. 작은 오빠는 그냥 안쓰러웠고. 이런 가족을 바탕으로 담고 있는 '나'의 심리 또한 이해할 만한 사춘기의 것이어서 그건 좋았다. 그 허무함 때문인가 약간 롤리타 읽는 기분도 들었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긴 소설이라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가늠이 잘 안된다. 다만 배경이 너무 특이해서 아 여기 가봤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었다. 중국인과의 사랑은 모르겠고. 다만 첫째 아이를 잃은 것, 가족사항 뭐 이런거 다 비슷하니까 연인과의 일도 사실일 거 같다. 여튼 괜찮게 읽었다. 확 취향이냐면 그건 아니고.

첫사랑
카테고리 소설 > 소설문고/시리즈 > 소설문고일반
지은이 투르게네프 (웅진씽크빅,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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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첫사랑의 미묘한 감정을 잘 담아낸 이야기라고 해서 보고 싶어서 샀다. 책이 얇아서 보기 편할 거라 생각한 것도 있었고... 그리고 진짜 괜찮았다. 러시아 소설은 그 이름 때문에 읽기 전에도 지레 겁먹는 편인데 이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이 단순한데다가(지나이다의 구혼자들이 많긴 하다만 뭐 굳이 이름을 외우려 하진 않았고 성격에서 판명나니까) 부칭을 담는 러시아의 이름 짓는 양식을 이용한 구석이 약간 있기도 해서 마음에 들었다.

  (만) 열여섯이 되어 대학교 입학 시험 준비를 하는 소년과 청년 사이의 남자,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그 주인공. 그의 집에 새로 세를 얻게 살게 된 궁핍하고 몰락한 자세키나 공작부인이 있다. 공작은 이미 세상을 떴고, 공작부인과 함께 하는 것은 그녀의 딸 지나이다. 스무살의 지나이다는 아름다운 외모와 그에 어울리는 영악한 모습으로 여러 구혼자들을 데리고 논다. 블라디미르는 그녀에게 말 그대로 첫눈에 반하게 되는데, 이런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평소엔 좋아하지 않지만 도리어 이 소설에서는 첫사랑의 풋풋함과 무절제함의 느낌을 주어서 더 현실감 있었다.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은 연상의 여자. 게다가 자신을 어린 대상으로만 보는 지나이다의 시선을 블라디미르 또한 느낄 수 있다. 거기서 오는 막막함과 가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틋함, 간절함이 뒤섞여서, 신기하게도 편하게 읽는 내내 가슴 한 켠에 물이 스미듯 서서히 내 마음을 적시는 감정들의 묘사가 마음에 들다. 어린 청년은 주변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빠삭하게 파악할 만큼 영특하진 않지만 그런 기류는 느낄 수 있었기에 그런 답답함 속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잡을 수 없는 심정이 절절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소설에선 블라디미르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가 꽤 흥미롭게 그려진다. 블라디미르를 아끼긴 하지만 자식에 대한 예의 그 이상의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 아버지의 캐릭터는 화를 돋구면서도 흥미롭다. 이런 캐릭터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나 했더니 이건 투르게네프 작가 본인의 삶에서 기인한 것이라서 더 신기했다. 이 소설은 비현실적이네, 말도 안된다 하는 생각을 들게 하면서도 그것을 믿게 하는 진실성이 있었다. 그런 진실성은 작가의 현실에서 기반한 것이겠지. 사랑이 없는 결혼을 한 아버지, 어머니를 똑 닮은 아들을 사랑할 수 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는 어머니.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투르게네프에게는 현실이었으니 이런 소설이 나올 법도 하다. 하여간에 내게는 소설 안에서 나오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가 지나이다에 대한 묘사보다 더 흥미로웠다. 뻔히 악한데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좋아해서 그런가.

  지나이다에게 진실로 사랑하는 대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살인까지도 불사하려던 청년은 그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모든 것을 접게 된다. 그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야기는 통속극으로 흘렀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이 사랑을 갈구해 마지않는 아버지임을 깨달았을 때 이야기는 바뀐다. 그는 심지어 그런 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없다. 감정이 마구마구 부풀어오르는데도 폭발이랄 것이 일어나지 않는 기이함이 여기 있다. 그런데도 그의 감정은 구구절절이 이해할 만 해서 씁쓸하기도 했다.

  음... 편하고 좋았다. 엄청 몰입할 정도는 아니고.

  아버지는 나에게 기이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도 기이했다. 아버지는 내 교육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한 번도 나를 무시한 적은 없었다. 그는 나의 자유를 존중해 주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아버지는 내게 예의 바르게 대했다……. 단지 아버지는 나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뿐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매료시켰으며 나의 이상적인 남성상이었다. 그의 손이 나를 밀쳐내고 있다는 것을 내가 끊임없이 느끼지 않았다면, 아버지에 대한 나의 애착이 얼마나 커졌을 지 알 수 없다. 대신에 원하기만 하면 거의 순식간에, 한마디로 말하면, 몸짓 하나로 아버지는 내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내 영혼은 활짝 열려서, 마치 현명한 친구나 관대한 교사에게 하듯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못 본 체하곤 했다. 아버지의 손이 다시 나를 밀어냈다. 상냥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밀어냈다.
  때로는 그도 유쾌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의 아버지는 장난치며 소란을 피우기도하고, 소년처럼 나와 같이 놀기도 했다. (아버지는 몸으로 하는 힘든 운동은 모두 좋아했다.) 한 번, 딱 한 번! 아버지가 너무 상냥하게 나를 귀여워해서 나는 거의 울 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쾌함과 부드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은 마치 꿈처럼 내게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도 품게 하지 못했다. 나는 이지적이고 밝게 빛나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얼굴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내 심장이 떨려왔고 내 몸 전체가 그에게 빨려들 듯했다……. 아버지는 마치 내 마음속을 읽기라도 하듯, 내 옆을 지나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집을 나서다가, 일을 하다가, 혹은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갑자기 몸 전체가 굳어지곤 할 때면 바로 내 몸도 움츠러들고 차갑게 식었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호의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분명 아버지도 알 수 있는 내 애원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갑자기 일어나는 드문 발작과 같았다. 나중에 아버지의 성격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는 나나 가족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으며 그것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선택해라. 타인의 도움을 바라지 마라. 너는 너의 것이란다. 그것이 바로 삶이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젊은 민주주의자로서 내가 자유에 대해 논할 기회가 있었다. (내 식으로 부르자면 그날의 아버지는 '선량'했다. 그럴 때는 아버지와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었다.)
  "자유." 아버지가 되뇌었다. "무엇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지 알고 있니?"
  "네?"
  "그것은 의지, 자신의 의지란다. 그것은 자유보다 더 좋은 권력을 준단다. 무언가를 원하는 능력을 가져라. 그렇게 되면 자유를 얻고 다른 사람들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pp. 69~71
군주론
카테고리 소설 > 소설문고/시리즈 > 소설문고일반
지은이 니콜로 마키아벨리 (웅진씽크빅,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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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웅진출판사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펭귄클래식 10권 세트를 받았다. 어떻게 온건지 모르겠는데 아마 바이킹 사면서 응모된 거인듯. 고 열권 중에선 내가 전혀 사지 않을 법한 책이 두어 권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군주론이었다. 소설편향적인 독서가에다가 이런 인문 고전을 썩 많이 읽지도 않아서 절대 안읽을 것 같았거든. 근데 뭐 얇기도 하고 가지게 된 건 가지게 된 거니까 읽기 시작했는데... 오. 이거 엄청 재밌어.

  군주로서의 자세와 덕목을 서술하는 책인데 물론 내가 군주가 될 건 아니지만 꽤 쓸만하다. 인간관계 처세론이 많이 팔리던데 나름 그쪽 분야에도 발을 걸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음. 시대가 시대인지라 몇몇 거슬리거나 피식웃고 지나갈만한 부분(여성 비하, 교회계열 군주국에 대한 언급 회피)이 있긴 했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솔찬히 재밌게 읽었다. 나는 읽으면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거나 그 밑거름이 되게 해주는 책들을 좋아하는데, 이건 인문서적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그런 밑바탕을 잘 깔아주는 책이었다. 역사적 배경지식을 알면 더 재미있을 책. 난 잘 몰라서 주석을 계속 읽어가며 봤는데 역사공부도 하고 싶어지더라.

  고전은 고전이로구나. 이렇게나 재밌을 줄이야. 유토피아도 읽어봐야겠다.
오렌지만이과일은아니다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지넷 윈터슨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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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모던 클래식 판본 너무 좋다. 종이가 가벼워서 쓱쓱 잡히고 크기도 적당하고...

  이 책을 왜 샀더라. 암튼 모던클래식에서 나온 책들 보다가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랑 이 책중에 고민하면서 샀던 것 건 기억난다. 세라 워터스의 소설들을 읽은 직후라 레즈비언 문학이 읽고 싶었던 것 같기도... 물론 살 때에도 세라 워터스랑 완전 다를 건 각오했다. 그건 역사소설이자 연애물이었고, 이건 개인의 성장기에 가깝다.

  레즈비언으로서 정체성을 자각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일반 성장 소설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두드러지는 가정사 때문이었다. 입양아인 지넷의 엄마는 기독교 원리주의자. 이 쯤되면 답이 나오는 상황 아닌가. 원리주의자들과 함께 하며 자라난 지넷이 그 틀에 온전히 복종하고 있다가 그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뭐 그런 이야기인데... 내 생각보다는 충격이 좀 없었다. 묘사가 자기 성향에 대해 그렇게 큰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어린 시절 이후의 이야기를 큰 시간라인에 따라 진행시켜서 감정이 썩 잘 드러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성장통보다는 그 성장에 초점을 둔 이야기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고난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설명되는 것들의 중점이 거기 있는거 같지 않았다.

  지넷보다 엄마 캐릭터에 더 집중하게 된다. 아무래도 캐릭터가 엄청나게 강렬하다보니까 어쩔 수 없었다. 보기만해도 소름끼치는 인물상이지만 소설 안에서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지넷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약간 안타깝기도 했다.

  중간 중간 끼워진 우화 형식의 이야기들은 본래의 이야기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말할 순 없지만 적당히 연관되어 있다. 따로 읽어봐도 무방하지만 본래 이야기를 생각하며 읽으면 더 재미있음.

  작가의 자전소설에 가깝다. 물론 어느 정도 허구가 섞여 있기야 하겠지만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지넷이고, 똑같이 입양아에다가 기독교 원리주의자 어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소설 후반부에 지넷이 고생했던 이야기는 별로 없이 집에 돌아와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이야기만 있어서 똑같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작가 본인의 환경이 없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 소설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책장은 잘 넘어가고, 집안 환경에 관한 부분 때문에 즐겁게 읽긴 했음. 마음에 아주 쏙 들 정도는 아니었고. 이것보다 더 기대를 했었나보다.
빵굽는타자기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폴 오스터 (열린책들펴냄,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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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오스터의 소설은 하나도 안읽어봤는데 어째 이것부터 읽게 되는구나. 카테고리가 소설이긴 한데 이거 에세이 아닌가? 본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까. 뭐 소설처럼 쉽게쉽게 읽기는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미있었음.

  작가가 되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소설이 아닌,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나와있어서 흥미로웠던 책. 이런 면에서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었을 때 같은 느낌이 났다. 그 책은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스티븐 킹이 작가가 되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가 더 재미있는 책인데 이 책은 아예 그런 테두리 없이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 고난 뭐 이런걸 다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기 인생사도 좀 다루는데, 중산층에서 가난을 모르고 자란 청년이 청구서를 걱정하는 지경이 되고, 돈이 너무나 급한 나머지 야구 카드 게임을 만들어 팔려는 생각을 하기까지의 그런 과정들이 남의 일이라 그런지 즐거웠다. 희희낙락했다는 게 아니라 과정이 흥미를 끌 만하고 아 이런 상황까지 몰아붙여졌구나 싶은 생각을 한 발짝 더 하게 되는.

  단순히 글만 쓴 게 아니라 경험을 많이 했다는 점이 내 시선을 끌었다. 남들이 다 겪는 그런 경험 외에도 파리에 가서 살아본다던가, 회사에도 다녀보고, 다른 작가의 영어본 책을 내는 걸 도와 본다던가, 희곡을 상연했던 경험 같은 것들이 한 데 모여 폴 오스터라는 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경험에서 얻게 되는 생각의 향연은 날 충분히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여튼 이런 복잡한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글쓰기를 포기하거나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게 주목할만한 일이겠지. 그런 부분이 있었는데, 생활고에 지쳐 번역 일만 하느라 글쓰기를 일주일 정도 놓게 되자 손에서 작가로서의 감이 떨어졌다고. 꾸준한 글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꼈다.

  부끄럽지만 나도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있는 편이라서 더 즐겁게 읽었다.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는 대부분 즐겁다.
로드(THEROAD)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코맥 매카시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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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재미없기로 무섭게 소문이 나있고, 코맥 매카시라는 작가에게 큰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읽을 생각 없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재밌게 보긴 했지만 그건 영화였고. 아포칼립스 배경을 되게 안 좋아하는데 어쩌다 보니 읽고싶어져서 샀다. 글이 되게 강단있고 툭툭 친다는 느낌이었다. 한계가 보이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고난들이, 삶에의 끈질긴 집착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읽을 때 마냥 행복했다던가 그런 이야긴 아니지만.

  책은 밑바탕이 되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진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짚어주진 않지만 현실의 상황이 어떤 지는 소름끼치도록 잘 느껴진다. 자연에서 나오는 음식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버린 세계, 강도들이 날뛰고, 약한 자는 빼앗기고 강간당하며 심지어 먹히기까지 하는 그런 세계 묘사는 이상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는 단순한 자연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것이 놀랍도록 설득력 있었다.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 타입은 아니어서 더 그랬다.

  '남자'와 '소년'은 이런 불확실한 세계 속을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걸어나간다. 끊임없는 그들의 길 속에는 고난이 대부분일 뿐 행복은 그림자만 언듯언듯 보여질 뿐이다. 며칠을 굶기도 하고,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이제 마지막이다, 이제 마지막이다 싶을 때에도 언제나 희망은 있다. 이런 이어짐은 소설의 결말에까지 이어진다. 지치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생명력이 거기에 있다.

  살기 위한 남자와, 아직은 꿈을 꾸고 있는 소년의 부딪침,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만남.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길은 모두 하나로 통하는 것만 같았다. 희망이 있다는 믿음. 길가에서 만났던 노인은 그런 면에선 희망이 없는데도 살아남은 사람 같았고, 약탈자들은 그 희망보다는 눈 앞에 있는 것들을 쫓고 있는 것 같았고. 기분이 번잡했다.

  소설 초반 쯤에 남자가 소년에게 죽지말라고,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싶어진다고. 그랬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소년이 거기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저와 함께 있고싶어서요? 응. 그래.
백설공주에게죽음을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넬레 노이하우스 (북로드,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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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 생각 전혀 없었는데 차장님이 자기가 보고 빌려주셔서 봄. 사실 이런 식의 소설을 즐겨 보진 않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읽었다. 추리 소설 같은 느낌. 스릴러기도 한데 막상 그렇게 긴박하진 않아서 손에 땀을 쥐고 보거나 그렇진 않았다.

  고교시절 두 명의 여자친구를 살해하 죄로 감옥에 10년동안 복역한 토비아스 자토리우스가 주요인물. 이 소설에서 주인공을 꼽고 싶지가 않은 게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주체가 딱 하나가 있는 게 아니라 여럿이 얼키설키 엉켜서 사건해결이 이뤄지는 거라서 그랬다. 토비아스는 자신이 살해를 저질렀단 기억이 전혀 없이 증거만으로 형을 살게 된다. 토비아스가 죽였다고 추정되는 여자 둘은 토비아스의 전 여친이었던 로라와, 당시 

  알텐하인이라는 작은 도시가 배경. 항상 이런 소도시가 나오면 소름이 끼치는 게, 사람들끼리의 결속력이 대단하고 그 안에 음모가 있는 느낌이라서 그렇다. 마치 이끼처럼. 이 소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 좋은 얼굴로 마을을 쥐고 흔드는 부자 클라우디우스 테를린덴이 있고, 10년 전 교사이기도 했던 남편 그레고어 라우터바흐를 훌륭한 정치인으로 만들어 낸 정신과 의사 다니엘라 라우터바흐, 마을의 심술궂은 소식통 마고트 리히터 등 마을의 인물들은 수상쩍기 짝이 없다.

  토비아스는 알텐하인으로 돌아와서 잔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아버지 하르트무트 자토리우스가 운영하던 식당은 망한 지 오래이고, 테를린덴의 놀음으로 재산을 빼앗기게 된 터라 어머니는 리타 크리머는 아버지를 오래 전 떠났다. 그나마도 토비아스가 돌아오면서 리아 크리머는 누군가에게 차도로 밀쳐져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다.

  토비아스의 곁에 남은 알텐하인 주민은 어릴적부터 친구였던 나디야 폰 브레도프 뿐. 어릴 적 촌스러운 모습이었던 나디야는 이제 유명한 스타가 되어있고, 토비아스를 끊임없이 돕는다. 마을에서 토비아스를 배척하지 않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건 마을에 새로 들어온 십대 아멜리 프륄리히와 테를린덴의 첫째 아들인 티스 테를린덴. 아멜리는 고스스타일을 즐기는 십대 여자아이로 겁이 없는데, 10년 전 토비아스가 죽였다고 하는 여자 중 하나인 스테파니를 꼭 닮았다. 티스는 심성이 곱지만 뭔가에 억눌려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자폐증을 앓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티스의 동생인 라르스는 일전에 토비아스의 친구였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을을 떠나 가족과의 연락을 거의 두절한 상태.

  이런 설정 속에서 형사인 보덴스타인과 피아가 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가 주가 된다. 물론 형사 쪽 인물들이 더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 둘이라고 보면 될듯. 둘의 개인사정도 나오긴 하는데 추리에 좀 지칠때 쯤 간간히 재미를 더해주는 정도였다.

  하여튼간에 결론은 결국 토비아스의 잘못이 아니었고, 마을 사람들이 긴밀히 얽힌 과거 사건이라는 게 드러남. 이거야 처음 읽을 때부터 짐작이 가능하다. 누가 어떻게 했느냐의 문제... 이것도 뭐 그냥 그랬고 난 음습한 과거 일이라는 데 더 집중해서 재미를 느꼈다. 추리 그런 거 안함.

  로라는 토비아스의 친구들인 외르크, 펠릭스, 미하엘이 강간하고 살아있는 채로 파묻은 건데... 지레 밟힐까봐 겁이 나 자수를 어설피 하는게 인간적이라고 할까. 소름끼쳤던 건 부모의 태도. 외르크의 아버지인 루츠 리히터는 들켰다는 것을 알자마자 자살을 택하지만, 어머니인 마고트 리히터는 자신 아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거 한국이나 외국이나 삐뚤어진 모성애는 똑같구나 싶어서 소름끼쳤다.

  스테파니는 학교 선생님이었던 그레고어 라우터바흐에게 살해당했다. 심약한 라우터바후의 뒤를 받쳐주던 아내 다니엘라가 시체를 수습한 것인데, 이 과정엔 테를린덴 가문 또한 얽혀있다. 티스가 살해장면을 목격했다는 걸 알게 된 다니엘라는 티스에게 치료가 아닌 마약성분의 약을 계속해서 처방하고, 테를린덴은 스테파니의 죽음에 아들 라르스가 얽혀들어갈까봐 스테파니의 시체를 숨기는 걸 돕는것.

  나디야의 일도 여기서 드러나는데, 이 모든 일의 내막을 알고있음에도 토비아스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이 일들을 감춘 것이었다. 여러모로 마을 사람들이 남 인생을 쉽게 망가뜨린 것이었다.

  토비아스 본인의 인생 뿐 아니라, 토비아스 아버지의 인생도 망가졌고, 로라의 아버지 만프레드 바그너는 망가져서 리타를 해쳤고, 뭐 그런 식으로 여러 사람의 인생이 망가졌다. 참 사람이 뭔가 생각하게 만들었던 소설. 추리 자체는 뭐 그렇게 흥미롭진 않았다만... 재미만 있었다 싶은 느낌도 있고. 약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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