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감독 로만 폴란스키 (2002 / 폴란드,영국,독일,프랑스)
출연 애드리안 브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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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시작부터 뭐라고 써야 할 지 모르겠는 느낌이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본 느낌이었다. 인간이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나, 전쟁 중에 인간들이라는 게 얼마나 하찮게 보여질 수 있나... 그런 생각도 들고... 편한 영화는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었다.

  피아니스트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피아니스트라는 섬세한 직업을 가진 폴란드 청년이 전쟁을 통해서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그러나 그 추락 속에서도 지켜질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약간은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스필만 본인이 가질 수 있는 고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주변 상황이나 주변사람들의 태도가 변하는 것들도 흥미로웠다.

  독일에 의해 점령된 바르샤바에서 유대인인 스필만 가족이 겪는 고난의 굴레는 점점 심해져만 간다. 다소 낙천적이던 아버지(프랑크 핀레이)나 신경질적이면서도 섬세했던 어머니(모린 립먼)이 힘을 바싹 잃은 노인으로 변해가는 모습이나, 그렇게 기가 세던 동생 헨릭(에드 스톱파드)이 약해져가는 모습을 보면 속이 쓰리다. 여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 격리 지구에서의 험악한 삶의 묘사는 보는 사람을 힘들게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휠체어에 탄 노인을 베란다에서 집어던지는 게슈타포의 모습은 짧으면서 강한 충격을 주었고, 구와덱이 꿈을 잃어가는 모습들은 슬펐으며, 수용소에 가기 전 캬라멜 하나를 가족 다섯이서 나눠먹는 모습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짠했다.

  간신히 혼자서 수용소 행을 면한 구와덱의 삶은 혼자라서 더 힘들고 지친다. 힘들더라도 같이 힘들 수 있는 가족이 옆에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하루하루를 힘들게 연명하는 그의 삶은 절박하고 동시에 끈질긴 면이 있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삶에 대한 의지가 신기할 정도로. 이런 거친 삶의 묘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이 제한되는 부분인데, 먹지 못해 바싹 말라가는 구와덱의 모습은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콩 몇 알을 넣어 물을 끓이던 모습이라던가,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깡통캔 하나를, 죽음이 눈앞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들고 다니는 모습. 독일군 장교(토머스 크레취만)이 준 음식에서, 잼을 황홀한 표정으로 먹던 모습같은 건 정말 인상깊었다.

  구와덱의 삶은 그렇다 쳐도 주변 상황묘사를 담담하면서도 비정하게 잘 그려낸 듯 하다. 이게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을 걸 생각하니, 그게 정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사람 목숨이 바퀴벌레보다 못한 모습으로 죽어나가니까... 그게 마치 일상인 것처럼 말이다. 또 유태인 말살정책이 있었기에 변해가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도 가슴이 서늘하더라. 숨어있던 구와덱을 발견했을 때 마구 몰아세우던 독일인 여자는 정말 소름이 끼쳤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도왔던 도로타(에밀리아 폭스)와 그의 남편이 얼마나 대단한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이 제한되었을 때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 명확한 모습으로 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제한 안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는지도... 음 굳이 생명력 운운하지 않아도 끈기같은 걸 본 것 같다. 마지막 즈음에 러시아군이 독일군 코트를 입은 구와덱에게 그딴 옷을 왜 입고 있느냐고 물었을때 구와덱의 대답이 가슴에 와 박혔다. 추워서요(because I'm cold). 얼마나 단순하고, 기본적이며 동시에 와닿는 대답이었던지. 이런 대사는 헨릭이 경찰서에 잡혀있다가 나왔을 때, 배고프다고 말했을 때도 느껴지긴 했는데, 아무튼 이 장면의 와닿음은 구구절절 표현하지 않았어도 정말 큰 인상으로 남았다.

  독일군 장교 빌름 호젠필트이 구와덱에게 피아노 연주를 시켰을 때의 모습이 또 기억에 남는데... 구와덱의 직업이라는 건 예술 직종이다. 이런 직업은 세상이 풍족한 때일수록 잘 되는데, 전쟁 상황에서의 취급이야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찮아진다. (아이러니한게 이런 때 또 기막힌 작품들이 쏟아져나오지만.) 전쟁이 난 뒤 구와덱은 피아노를 치지 못하며, 죽을 듯한 동물으로서의 삶의 투쟁만을 보여주는데... 이 때의 피아노 연주는 구와덱의 안에서 예술가의 혼이 죽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다큐멘터리 같으면서도 굉장히 재미 있었다. 하나의 긴 투쟁을 본 느낌. 빌름의 일도 잘 풀렸으면 좋았을텐데. 역사가 그렇지 못했다는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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