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y
Pray by frozenmind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1. 최근 일본 사태 때문에 트위터에 들어가기 싫어진다. 난 기본적으로 나와 반대되는 의견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거나, 넌지시 말하는 편인데 트위터는 꼭 싸움의 장 같다. 난 내가 옳아, 내가 옳아. 내 말을 들어. 이 말을 되게 리버럴하고 이성적인 말마냥 꾸면서 하고 있다. 돌리고 돌려서. 근데 본질적으로 말하고자 하는건 결국 내가 옳아 그거잖아. 밴드 뺴고 다 언팔하던가 팬질용 아이디를 새로 만들던가 해야지 짜증나서 못봐주겠다. 보고있자면 욱하고 치밀어 오른다.

2. 나도 우리나라가 병신짓하는거 안다. 없는 돈 털어가며 일본 퍼주는 게 웃기다고도 생각한다. 근데 그거에 마구 분노하는 글을 '지금' 보고싶지는 않다. 계속 보면서 불편하고 짜증이 나면서도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 글을 보고 감정의 출처를 깨달았다.

4. 남의 나라에 난리났는데 그 나라를 동정하거나 도와줄 생각은 않고 우리나라 까는 생각만 하는 거 보면 정말 짜증난다. 사람의 마음 그릇에 사랑이나 정의가 미리채워져 있는 게 아니고 증오나 경멸이 미리채워져 있으면 그거 어따쓰냐. 못된 심똘이나 되는 거지.

그런거지. 난 이런 시기엔 뉴스도 못보는데, 폭력과 증오로 점철된 말들은 단 한개도 보고 싶지 않다.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싸우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관심을 꺼버린다. 이성 이전에 최소한의 감성이 내게는 먼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감정적으로만 온전히 판단한다는 뜻은 아니다. 난 너무나 감정적이라 이런 것들을 표현할때는 더 조심하려 노력한다.

3. 모든 게 너무 과열되어 있다. 슬픔도 비판도 모두가. 그 안에 공포가 포장된 채 앉아있다. 이 과열된 상황 속에 끼고 싶지 않다. 실지로 느끼는 게 더 많지만 난 조용히 입을 다문다. 그렇게 닥치고 있다. 모두가 실지 본인이 느끼는 것보다 말이 많거나, 말만 한다.

4. 관련해서 회사 언니랑 싸울 뻔 했는데, 지진 났던 날 "벌받은 거지"라고 했다. 뇌가 없는 줄 알았다. 순간 폭발해서 너야말로 그러다 죄받는다고 할 뻔 했다. 평소엔 참 좋은 사람인데 정치적이나 사회적인 부분만 나오면 정말 참을 수 없이 내 속을 뒤집어놓는다.

5. 나이가 들 수록 완성된 내 생각의 틀을 깰 수가 없다.

6. 종교는 없지만 때로는 기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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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락되는가? 세계 어느 나라던 간에 예술 작품의 음란성 시비는 끊이지 않는다. 예술 작품의 음란성 시비는 당국과 언론간의 시비 거리이며, 문화와 풍습에 따라 제도를 달리하고 있다. 이처럼 성이 문학뿐 아니라 여러 예술에 소재로써 사용되게 되면 여러 가지 시비를 달고 다니게 된다. 포르노그래피 예술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포르노란 무엇인가? 포르노를 인간의 육체 혹은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 서술한 것으로서 성적인 자극과 만족을 위해 이용되는 성표현물이라고 본다면 어디까지를 성표현물로 보아야 할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포르노를 내용에 따라 구분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는데 그 구분의 기준은 노골성과 내용의 반사회성이다. 한 예로서 폭력적인 성표현물, 비폭력적이지만 인간의 지위를 하락시키고, 품위를 손상하며,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을 묘사한 성표현물, 아동포르노, 성에 관한 일반인의 가치관에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성표현물을 하드코어 포르노로, 성행위 또는 성행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성기노출이 포함된 비폭력적․비품위손상적 성표현물, 성기의 노출이 없는 비폭력․비품위손상적인 성표현물, 나체 등을 소프트코어 포르노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성적 표현만으로 덧칠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포르노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드의 ‘소돔 120일’은 성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지만 ‘소돔 120일’을 포르노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예는 많은 다른 예술작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포르노와 에로티시즘의 경계는 확실히 구분 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포르노라고 낙인찍힌 작품은 언제까지나 포르노로 남아있는 것인가? 사드의 ‘소돔 120일’은 그를 둘러싼 온갖 악명에 가득 찬 신화 때문에 거의 2세기 간을 천박한 금서로 묻혀 지내야 했다. 사드가 사상사나 문학사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문학적 급진성을 발견해내면서부터였다.

  또, 공자에 의해 편찬된 《시경(詩經)》에는 후대 지식인들에 의해 음란물로 판정받은 많은 문학작품들이 실려 있다. 이 음란물들은 "시경 삼백편의 시를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라고 단언한 공자의 권위에 밀려 내내 《시경》에 실렸고 유학을 배우는 청소년들은 수십 세기 동안 이 음란물을 암송했다. 일견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이 같은 상황은 문학작품이 갖는 감화력은 특수한 것이라는 원칙이 승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전래되던 시 3000여 편 가운데 305편을 뽑아 《시경》을 편찬하며 공자는 "본받기에 충분할 만큼 착하지 못한 것이나 경계를 삼기에 충분할 만큼 악하지 못한 것을 가려내어서 버리셨다."고 주자는 주석했다. 즉 《시경》에는 극단적으로 선하고 윤리적인 작품과, 극단적으로 악하고 음탕한 작품이 각각의 도덕적 자극을 위한 표본으로서 함께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음란성이 짙은 문학작품에 대한 검열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리얼한 문학적 표현에 도달한 것은 그것의 음란성을 막론하고 "문학에 의한 인간의 형성과 교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공자는 '사회적 통념'이란 명분을 앞세운 얄팍하고 모호한 잣대에 의해 잘리고 붙여진 문학에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것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지금 포르노라 불리는 문학들이, 현재에는 포르노라 규정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현재의 가치기준만으로 어떻게 예술 작품에 포르노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가?

  포르노는 법적으로 19세 미만인 자는 관람할 수 없다. 그렇다면 포르노에 대한 사전검열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19세 미만인 자가 관람할 수 없다면, 19세 이상인 자의 포르노 관람은 허용한 셈이다. 허용한 이유는 19세 이상이 포르노에 대한 판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19세 이상인 성인조차, 일정 수위 이상의 포르노에서는 판별력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 포르노에 대한 검열은 그것을 접하는 관람자들에 대한 우롱이다. 이미 제도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 또 하나의 제도를 덧씌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이러한 검열에서 예술 작품은 해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금기와 위반의 성 인식으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 성은 예로부터의 금기시 되어왔으며 그 금기를 충동으로 인해 위반할 때는 그만큼 죄의식과 고뇌를 경험하게 된다. 성행위가 원래 생식 차원에서 출발했지만 동물과 달리 인간은 성행위를 에로티즘으로 승화시켰다. 예술 작품은 원초적이고 거친 성을 에로티즘으로 승화시키는 하나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예술 작품은 그 동안의 인간의 성 문화를 원초적인 본능인 동물성의 차원으로 보는 것을 벗어나, 제도와 문화에 의해서 주어진 금기와의 투쟁 속에서 인간의 본질 성으로 승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대법원 판결 중, 한 미술교사의 개인 사이트 내 나체 사진 게시를 음란물로 판결한 것이 있다. 이에 반발하여 대법원 앞에서 퍼포먼스를 한 작가 김윤환은 “현대 미술이란 시대정신의 표현이며, 시대의 징후를 민감하게 포착하여 일상에 충격을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사회를 성찰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 대법원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 예술창작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을 법으로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예술이 음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예술 작품은 성적 표현을 함유할 수 있다. 이 경우 예술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따져보고 예술을 보호할 수 있는 보호 장치를 가져야 한다. 검열이라는 이름 하에 예술 작품의 표현의 자유, 더불어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작가의 상상력이 검열이라는 이름 하에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사람들을 외설과 음란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의무와 함께 예술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전자의 의무는 19세 이상 된 자의 판별력에 의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보고, 후자의 의무 또한 반드시 보호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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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무살 때 쓴 거. 이거 쓰다 새벽에 울었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써야하나 하고ㅋㅋㅋ 화나가지구 너무 쓰기 싫어서 막 울었음... 그런데 어떻게 다 썼네 쓰긴ㅋㅋㅋ 기사에서 짜집기 한 부분은 눈에 확보이네 아주... 어이구 한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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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민족주의, 거기에서 나온 표현들
(짱X, 대륙의... 아무튼간에 비하 표현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내가 전체주의에 좀 거부감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눈먼 법의 수호자
(머리는 가볍게 가슴은 뜨겁게!)

전라도/경상도 놈들은~
(어떻게 저런 사고가 나올 수 있는지 뇌 해부 필요)

기자, 교사, 교수, 여류작가
(성별 확정 안해주면 몰라볼 정도냐)

걘 너무 싸구려야, 우리 XX는 그런 성격 아니거든, 걔가 좀 마음이 약하잖아
(애정에서 나온 발언이라는 건 이해하는데, 가끔 이게 진짜 지나친 사람들이 있다.
마치 그게 진실인 것 마냥. 연예인이랑 개인적으로 아시기라도 하시는건지)

어줍잖은 선민의식
(정말이지 너나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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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떠오르는 건 이 정도인가
내가 너무 까칠한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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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rs
Lovers by Nad Renrel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동거란 사전적으로는 단순히 같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의미에서 동거는 어떠한가? 여기서는 곧 사실혼에 입각한 관계의 동거의 의미가 강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동거에 관한 이야기를 부쩍 많이 다뤄왔다. 동거라는 말만 나와도 쉬쉬하던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다. 그만큼 동거라는 행위는 사회적인 현실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중년층의 동거에 대한 인식이 나쁜 편에 속한다. 당장 우리 부모님께 동거에 관해 물어만 보아도 크게 화를 내신다. 중년층에게 있어서 동거는 결혼을 회피하고 성관계만을 위해 동거한다는 의미가 큰 것 같다. 또한 우리나라처럼 순결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있는 사회에서, 그 사실혼 관계가 겉으로 드러나는 동거는 좋은 시선을 받을 수 없다. 특히 딸을 가진 부모라면 이러한 현실에 동의하여, 동거에 관해서 굉장히 안좋은 시선을 보낸다. 

  막상 동거를 하는 나이 대는 중년층보다는 청년층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거에 관해서는 청년층의 의견이 아닌 중년층의 의견이 왜 나오는가? 바로 중년층은 청년층의 부모이니까 그렇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자식들은 부모의 품 안에서 자라난다. 따라서 다른 나라에 비해서 부모와 자식의 유대 관계가 깊은 편이며, 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식으로 정의되고 있다. 부모는 자식이 커가는 와중은 물론이고, 다 커서까지도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이런 가족 유대적인 환경은 자식이 자식의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기도 한다. 동거도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중년층이 이렇게 동거를 반대하고 나섬에도 불구하고, 동거는 현실이다. 나는 동거에 찬성한다. 한국에서는 지금 30만 쌍이 결혼을 하면 그 절반인 14만 쌍이 이혼을 하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보통 부부간의 성격차이와 가족과 시부모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잘 살펴보면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은 현실, 그리고 가족이 둘의 결합이 아닌 가족과 가족 간의 결합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이혼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타협의 부족이다.

  아무리 오랜 기간 연애를 했다고 하더라도, 같이 살아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배우자가 양말을 벗어 제대로 세탁기에 집어넣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그 일은 몹시 사소하지만, 10년이고 20년이고 그것이 반복된다면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도 그런 식이다. 요새 주부들이 들어가는 사이트에 가 보면 이런 글들이 눈에 꽤 띈다. 시부모가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하고,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남편에게 말하면 남편은 그런 일 가지고 무슨 불평이냐고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삶에 너무 간섭하기도 하며, 배우자에 대해 배려가 없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가 반복되면 당연히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여자들은 이러한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혼은 상상치도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율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여자들은 다르다. 현대의 여자들은 남자와 똑같은 권리를 주장한다. 자신의 권리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스트레스는 당연히 오래 견디기 힘들고 종당에는 이혼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발달하여 의식은 높아져 간다. 그러나 남자들은 자신들의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가부장적인 체제에 익숙해진 상태이다. 여기에 여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알았다. 가부장적인 남편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요구하지만, 여자들은 순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혼을 한다. 어쩌면 여성 인권의 신장 또한 이혼율의 원인이라면 원인일 수도 있겠다.

  동거는 높은 이혼율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동거를 통해 배우자의 세세한 습관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이 양가의 합의를 얻어낸 동거라면 가족들의 간섭이 어떠한지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함께 살아봄으로서 결혼의 예행연습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이라면 굳이 호적에 이혼을 표시해가며 사람과 헤어질 이유가 없다. 상대방을 겪고 판단해서 하는 결혼이라면 실패할 확률은 그렇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줄어든다.
 
  그러나 굳이 결혼의 예행연습이니 뭐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동거는 유익한 편이다. 둘이 함께 산다면 생활비와 집세 등이 많이 절감된다. 굳이 모르는 타인을 룸메이트 삼는 것보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편이 좋다. 결혼에 비해 서로에게 얽매일 이유도 적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주는 무거움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서로 사랑해서 한시도 떨어지기 싫다는데 동거를 해서 안 될 이유는 또 무엇인가? 20대 이상이라면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서 있는 나이이이다. 또한 그것을 실제로 실행할 수 도 있는 나이이다. 자신의 판단 아래 동거하는 것이 죄가 될 이유는 없다. 부모는 자식에게 조언할 수는 있으니, 자식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동거 현실은 너무나 열악하다. 법적인 것도 그러하고, 사회적인 시선도 그렇다. 사실혼 관계가 법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효력은 너무나도 적다. 같이 살고 있는 자신의 동거자가 당장 죽을 위기라 해도, 다른 동거자는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없다. 결혼서류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배우자가 죽으면 상속권도 받을 수 없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사회적인 시선도 만만치 않다. 앞서 서술했지만 중년층이 가지는 동거에 관한 시선은 몹시 좋지 않다. 굳이 중년층이 아니라도 그렇다. ‘나는 동거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라고 말하는 젊은 층의 사람도 실제로 동거하는 커플을 보면 신기하게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전에 동거기록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에 대한 진실성부터 의심한다. 남자의 경우에는 헤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결혼한 뒤 배우자 가정에 알려지면 평지풍파가 일 지경이다. 실제 드라마에서도 이러한 경우를 다룬 적이 있었다. 여자 주인공의 동거사실이 시댁에 알려지면서 여자 주인공은 많은 고초를 겪는다. 문제는 이것은 현실이라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동거하고 있다.’라는 식의 말을 꺼내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십상이며, 좋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에서의 동거는 폭탄을 껴안고 산다고 해도 좋을 만큼 아무런 보호도 없다. 이 와중에 동거문화 열풍이니 뭐니 해서 ‘사랑해서 하는 동거’가 아닌, ‘동거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동거’를 위한 사이트마저 생기고 있으니 한심할 노릇이다.

  프랑스는 동거가 일상화된 나라이다. 프랑스의 동거 혹은 독신 인구는 전체 인구의 1/3에 달한다. 프랑스에서는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여성들의 여권이 신장되었다. 이에 따라 가정주부를 거부하고 남자들의 일을 하게 된 여자들이 생겨났다. 이에 1968년 5월 68혁명이 일어나면서 독립적 사고를 증진하고, 자신뿐인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자 하는 사상이 널리 퍼졌다. 이를 통해 동거의 일상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프랑스에서는 동거를 많이 선호하고 있고, 전체 출생아의 45%가 동거부부에게서 난 아이들이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렇게 동거가 횡횡하는 이유는 일단 제도적으로도 확실히 동거가 뒷받침되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PACS 법을 통해 동거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있다. 이 법을 통해 동거하는 이들은 결혼한 이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PACS 법은 동성애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 프랑스의 다양성을 볼 수 있게끔 한다.

  또 프랑스인들이 가지는 개인주의가 동거에 한 몫을 한다. 그들의 부모는 자식이 동거를 하는데 관여하지 않는다. 갓 성인이 된 아이가 동거를 한다고 해도 조언할 뿐 말리지는 않는다. 그들의 부모는 우리나라의 부모들처럼 헌신적이지 않으며, 자식을 품에 안고 키우지도 않는다. 개인주의가 발달했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지는 무게감과 책임감에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으레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을 받아왔다. 그래서 그 무게감이 덜하지만, 프랑스처럼 개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더욱 더 그 무게감이 더해지는 것 같다.

  프랑스처럼 우리나라에서 동거가 횡횡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사회적 시선이 몹시 안 좋지 않은가? 그러나 점차 동거 인구가 늘어난다는 통계는 동거가 점차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온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가족은 전통적으로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화해 왔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단번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이 부분에서는 많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은 핵가족이 일반화 되었고 이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나라 특유의 가족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부모 가족과 자식 가족이 각각 따로 살지만 가까운 거리에 집을 두고 서로 자주 왕래하는 식의 수정 확대가족이나, ‘영구별거’가 아닌 ‘일시별거’의 의미를 가지는 수정 직계가족 등의 형태가 그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낸다. 동거가 점차 밑에서 올라와 그것이 현실문제로 대두된다면, 사람들은 새롭게 그것을 적응해 나갈 것이다.

  앞서 말했듯 동거는 현실이다. 언제까지 순결이니 뭐니 내세우면서 현실을 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동거에 대해 찬성이니 반대이니, 우리 사회는 이미 동거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동거가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장점들은 확실히 있다. 금전적으로, 정서적으로도 그렇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 안에서 동거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케케묵은 사상을 빗대어 자신을 옭아매고, 혹은 자식을 옭아매거나, 그에 얽매여 자립심을 잃거나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내가 나의 의지로 동거하고 있다는데 남이 욕한다고 그 욕을 들을 필요는 없다. 동거를 한다고 하여 문란한 관계로 보는 것은 먼지 쌓인 과거에 사는 사람의 일이다. 실제로 동거를 하지 않는 모든 연인 관계가, 성관계 없이 이루어진다면 또 모르겠다. 과도한 유대관계에서 나타나는 단점을 깨달아야 한다. 문란함과 도덕성을 따지기 이전에 실리를 따져야 한다. 그것을 깨닫고 나면 동거가 나쁘다고 만은 볼 수 없다.

  물론 동거가 가지는 나쁜 점들도 존재할 것이다. 제도적인 것, 사회적인 것을 빼고 서로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책임감의 상실, 너무나 가벼운 만남과 이별, 결혼에 대한 가치 상실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인 면들만 따져 동거를 무조건 반대하기에는 시대가 너무 변하지 않았나?

  현대의 가족관계에서 나타나듯, 사람들은 언제나 중도의 또한 적절한 방식의 해결 방안을 찾아냈다. 곧 스스로 자정작용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인간미가 결여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될지, 혹은 이혼율을 줄이며 서로에 대한 이해의 가치를 높이는 사회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혹 인간미가 결여된 사회가 된 들 어떠한가?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들을 선택했을 것이고, 스스로 그것에 적응해 나갈 텐데. 우리에겐 우리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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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썼던 프랑스 관련 교양 과제에 냈던 거. 어린 생각이다만 나는 동거의 효율성 만큼은 긍정하는 편... 동시에 그에 대한 편견도 물론 가지고 있는 기묘한 상황. 아무튼 내가 한다고 하면 그전에 우리 엄마가 날 죽이겠지..


신이 있다면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텐데
왜 본인들은 그걸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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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들도 가관이고. 그 참. 짜증난다. 원래 수학여행이라는 거, 견문보다는 아이들과의 추억 위주로 가는 거 아니었나. 한 반에 있는 애들이 따로따로 수학여행을 가는 건 뭐야. 안 친한 애들이야 그렇다쳐도, 내가 갈 사정이 안되는데 나랑 노는 애들은 다 외국 간다고 하면 나 혼자 뻘쭘하게 국내여행에 껴야 한다는 거잖아.

  정말로 저 사람들 말처럼 위화감이나 박탈감이 없을까? 애들이 그래 뭐 앞에서는 "아 나 돈없어서 외국 안가~ 너네 재밌게 놀다와라."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체 말할 수 있겠지. 근데 과연 속으로도 그럴까? 아닐걸. 피눈물날걸. 다 같이 가는 수학여행인데 돈 없어서 나 혼자 따로 떨어지게 되었다고 하면 정말 눈물날거다.

  고등학교 때 수학 여행은 아니고, 방학때 신청 하는 애들 모아서 가는 일본 여행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심각한 아저씨 빠순이였기때문에; 정말 가고 싶었다. 나랑 놀던 애들도 다 간다고 신청한 상태였고. 그 때 신청하기 전부터 이미 난 안된다는 거 알고 있었어. 우리집 그 때 크게 여유있는 편이 아니었으니까(지금도 아니지만-_;). 그래도 혹시나 해서 엄마한테 물어나 봤는데 역시 안되더라. 엄마랑 아빠한텐 정말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 그날 방에 틀어박혀서 계속 울었다.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좀 짜증나. 이것 저것 감정이 뒤섞이기도 하고 그까짓걸로 운 나도 화나고, 엄마아빠한테 너무 미안하고. 우리엄마 아직까지 그때 나 울었던거 기억하는데 진짜 기억에서 지워주고 싶다.

  단체로 가는 수학여행이 아닌, 신청해서 가는 여행(그것도 많은 인원이 가는 것도 아니었음)에서도 내 친구들은 가는데 나 혼자 못간다고 생각하니까 되게 서러웠다. 나중에 애들이 여행 이야기하면 더 부럽고 속쓰렸다. 진짜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 감정이 막 그렇더라. 이거 가지고 넌 철이 덜들었어서 그래 이딴 소리 내뱉으면 싸닥션. 그때 생각하니까 감정이 좀 격해졌어.

  그냥 수학여행은 저런 식으로 안갔으면 좋겠어. 수학여행 그 사나흘 갔다와서 견문이 뭐 얼마나 는다고 중고등학교때부터 위화감을 느껴야하나. 나한테는 그 때 그 여행보다는 애들과 함께 있는 며칠이 참 즐거운 것이었는데... 요새 애들은 안그런건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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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컴퓨터 중독은 제법 심각한 수준인데, 그냥저냥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어. 우와. 나는 내가 생각했던 심각한 수준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던 거 같다. 요 며칠 컴퓨터 못하는 상태에 이르다 보니까 사람이 반 미쳐갔다. 그런데 또 자세히 생각해보니까, 컴퓨터를 못해서 생기는 불안증세일 뿐만 아니라, 컴퓨터가 이상해서 불안증세도 한 몫 하고 있는거다. 

  내겐 좀 컴퓨터 강박증 같은게 있다. 예를 들면 바탕화면에는 아이콘 하나 두지도 않고, 파일명은 딱딱 정리해놔야하고, 조각모음이나 컴퓨터 정리를 때때로 안해주면 열받는 뭐 그런거다. 조각모음 되는 컴퓨터 화면만 보면서 가만히 있는 경우도 있으니(뭐랄까 조각모음 되고 있는 실황을 보면 뿌듯하달까- 아 역시 좀 이상하지) 말 다했다. 그러니까 컴퓨터를 안하더라도 컴퓨터가 이상하다는 거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거야. 내가 그렇게 관리를 열심히 했는데! 라는 기분도 들고. 그 동안 포맷만 진짜 열번은 했다. 지금은 그냥 좀 체념상태랄까 뭐 그런 거... 긴 한데 역시 참지 못할 만큼 화가 부글부글 나기도 하고. 뭐 그렇다.

  컴퓨터가 CPU점유율이 알 수 없이 치솟고 이렇게 되면 XP종료가 안된다. 네이버 지식즐에 나온 방법을 다 동원해도 소용이 없다. 아 진짜 분해 죽겠다. 오 어떨때는 잠깐 괜찮기도 한 거 같고 그래서 함부로 사람 못부르겠는데. 역시 안되겠다. 계속 이런 증상이 계속되면 컴퓨터보다 내가 먼저 미쳐버릴것 같다. 내일도 이러면 사람 불러야지.

  그냥 잠깐 강박증 이야기.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안할지도 모르고-_-)

* Image from flickr, by Juliana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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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난 어릴 때부터 낯가림이 굉장히 심한 편이다. 그냥 처음 사람만 만나면 온 몸이 경직되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내가 항상 mp3를 휴대하고 다니는 이유는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단 하나의 벽을 만들어 놓으면 타인이 내게 말 걸 일이 없으니까.

  어제 내 첫인상 이야기가 나왔다.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첫 인상과 친해지고 나서 모습의 갭이 제일 큰 게 나라고-_-; 아니 뭐 예상된 바지만... 흑. 그래도 일주일 동안 얼굴도 못 봤다는 이야기는 좀ㅠㅠ 내가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나.

  모두에게 나오는 내 첫인상은 무심 단답형 대답...; "이름이 뭐야?" "XXX" "뭐 좋아해?" "이거." 뭐 이런식이란다... 헐. 완전 싸가지 없어ㄷㄷㄷ
  그러고보니 지금은 온갖 개그를 떨고 노는 은자와의 첫 대면도 (나는 기억이 안나지만) 이랬단다.

  은자 - (이어폰 꽂고 있는 내게 다가와) "뭐 들어?"
  나 - "일본 음악." (다시 책상에 고개를 파묻는다.)

  ...이게 뭐야... 은자가 너무 충격받아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그랬다... 우와 난 진짜 기억도 안나; ㅠㅠ웃긴다;;

  뭐 일단 친해지고 나면 온갖 진상과 개그를 다 떠는 나이지만, 첫 낯가림이 정말 심하다. 언제부터인가 사람 사귀는 방법을 좀 까먹은 듯한 느낌도 들고...; 어제는 빅뱅 팬 사이트 정팅-_-방에 들어갔는데 하나도 못끼어들겠더라;; 이상해. 나 고등학교 때는 정팅방에서 살았는데. 심지어 정모도 나갔었고...; 음. 사람 성격은 변한다지만 이건 더 악화된거 같아서 좀;;

  내 동생과는 천지차이-_-; 진짜 그 넉살 좋음은 어떻게 감당이 안되던데 나도 좀 배워야.

* Image from flickr by paulbence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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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제법 우유부단한 편이고, 항상 선택의 앞에 서서 고민한다. 그것이 커다란 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랬다.

  아직은 어린 나이. 그러나 나는 제법 많은 갈림길을 지나왔다. 그런 순간순간마다 항상 고민했다. 어느 쪽이 나을까, 어느 쪽이 바람직할까. 괴로울만큼 고민하고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정작 선택 자체는 아무 쪽이나 될대로 되라지, 하면서 대충 하고 말았다. 고민은 하되, 선택하는 일 자체는 의외로 설렁설렁 해치웠던 것이다.

  결과가 좋았던 것도 있고, 나빴던 것도 있다. 결국 갈림길에서의 고민이란 그런 것이다. 두 가지가 비등비등하니까 그래서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일들. 어느 쪽 길을 가던지 일으켜지는 반향은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그 길을 걷느냐는 것.

  자, 웃으며 걸을래, 아니면 울으며 걸을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겠니, 터벅터벅 발걸음을 끌겠니.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울고 발걸음을 끌며 걸었다.

* Image from flickr, by tonys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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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이전에 썼던 이글루에서도 비슷한 글을 썼었는데 뭐 그건 없어졌으니 다시 써볼까. 

  내게 있어서 종교는 선택의 문제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고. 굳센 믿음에 이끌려- 라는 건 내게 해당되지 않는 문제. 절에도 가봤고, 성당도 한 번인가 가봤고, 교회도 꽤 길게 다녀봤지만 어느 곳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했다. 이렇게 다양한 종교에 가 본것은, 순전히 타인에게 이끌려서였으니까. 크고 나니 흥미가 없어지더라. 오, 의외로 나 이런 쪽에선 세뇌가 덜 되는 타입인가.

  우리 집은 종교가 없다. 적어도 아빠, 엄마, 나, 내 동생에 한해서 종교 없음이다. 할머니는 열심히 불교를 믿으시는 편이고, 고모는 열심히 개신교를 믿는 편. 또 큰이모는 천주교를 다니신다고 알고 있다. 이 분들이 우리 가족에게 종교를 강권했다면 종교가 싫어! 라고 생각했겠지만 어느 분 하나 강권하신 적 없고; 그냥 은근히 믿길 바라시는 정도? 요 정도야 무시 가능한거지.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우리 가족은 종교에 대해 관심 자체가 없는 편. 대체적인 분위기로는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밍숭맹숭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지금와서 내가 "엄마 나 어디어디 다닐래."라고 하면, 우리 엄마는 다니든지 말든지. 라고 말 할 것이다. 결국 서로에게 종교를 권하지만 않으면 상관 없다는 식이다.

  나는 종교가 가진 순기능에 대해서는 꽤 긍정적인 편이다. 결국은 착하고 도덕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거잖아. 뭐 교리를 이상하게 해석한다거나, 보기 짜증나는 날라리 신자 같은건 버려두자. 그건 순기능이 아니겠지. 아무튼 이런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교를 믿지 않고 있다. 별로 종교적 삶을 원하지 않는 비모럴적인 인간; 뭐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면, 모든 종교에서는 복수를 금하고 용서를 하라고 말하는 편인데... 별로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뭐 이런 사소한 문제. 근데 이건 내가 안 믿으면 되는거니까 상관 없는데...

  사실은 이런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게 종교를 강권할 때가 문제겠지. 불교나 천주교 같은 경우는 그나마 이런 강권이 덜한데 개신교 쪽은 아무래도 교리가 교리이다 보니까 민폐 수준에 가깝게 나를 괴롭히는 경우가 있다. 난 친한 사람이 내게 종교를 권하는 것도 별로 반기진 않는데다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종교를 권할 때는 그 거부감이 배로 증가-_-; 결국 완전 싸가지없게 응대해 주는 경우가 잦다(...)

  원래 난 하라면 안하는 타입이라, 믿으라고 말하면 믿기 싫어짐. 그냥 권하는 자체가 별로다. 오히려 이렇게 직접적으로 권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열심히 종교를 믿고 모범적인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것이 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 관심을 갖고 종교시설에 나가기까지의 과정에 강권보다는 이 쪽이 더 잘 먹힌다는 거다. 적어도 내게는.

  난 왜 종교때문에 가족끼리 싸우고, 친구끼리 감정을 상하게 만들고, 연인끼리 헤어지는 지 모르겠다. 그냥... 서로에게 터치 안했으면 좋겠다. 교리가 그렇지 않은 쪽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싫다. 내게 전도를 하려는 사람들이, 넌 종교를 믿지 않는 불쌍한 존재야. 라는 시선을 보내는 것도 싫다. 내가 종교를 안 빋어서 불쌍하게 보는 건 상대방이지, 나는 멀쩡한데. 내게 있어선 상대에 대한 배려의 문제다.

  아무튼 당장은 믿고 싶은 종교 없음. 뭐 믿음이라기 보단 관심 있는 건 있는데, 영 귀찮아서. 전에 엄마가 잠시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던데, 귀찮다고 단 한번도 나가지 않더라...;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난 엄마를 닮았는지도.

* Image from flickr, by tinou b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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