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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내내 지루해 했다. 유명세를 다 타고 난 후에야 접한 이 애니메이션은 정말 몹시 지루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사이보그화 등의 배경 상황은 그나마 다른 곳에서도 많이 접한 상황이라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스트 등의 알 수 없는 어휘는 뜻을 파악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고(슬프게도, 내가 뜻을 파악하지 못했어도 스토리는 흘러간다.) 스토리 진행은 더디게 느껴졌다. 거기에 나를 더욱 지루하게 만든 것은 온갖 현학적인 대사들이었다. 수월하게 이해할 수 없는 대사들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더욱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애니메이션이 나왔을 당시에는 일단 그 화려함에라도 감탄했겠지만, 나온 지 10년이 지난 이 애니메이션은 그다지 놀랄만한 효과를 보여주지도 못했다.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봤음에도, 애니메이션을 다 보고 나선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지루하게 본 영화는 보고 난 후 곧바로 잊어버리는 나이지만 왠지 계속 깔끔하지 못한 뒷맛은 영 나를 괴롭혔다. 목을 길게 빼는 것이 귀찮아 놓쳤던 자막 몇 개가 걸렸다. 질척한 느낌으로 진행되는 스토리와 애니메이션에 꼭 어울리는 소름끼치는 음악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결국은 영화를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애니메이션 안의 상황 판단이 된 상태에서 본 공각기동대는 처음 보았을 때 보다 훨씬 나았다. 자막이 보이지 않아서 놓쳤던 몇몇 대사들도 빠짐없이 보았다. 물론 대사 몇 개를 더 보았다고 해서 영화가 갑자기 쉽게 느껴진 건 아니었다. 영화는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고 생각했던 첫 번째 감상보다는 나아진 기분이었다.
사이보그화 된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가? 아니 비단 사이보그화 된 인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가는가? 이것이 이 어렵기만 한 영화 속에서 내던지는 질문이다.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현학적 대사들은 전부 저것을 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인공인 쿠사나기는 사이보그 신체라서 가라앉아 버릴 수 있음에도 잠수를 계속한다. 온 몸이 몽땅 기계인 그녀는 그 신체로 잠수할 이유가 없다. 잠수에 대한 바트의 질문에 쿠사나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두려움, 불안, 고독, 어두움,... 그리고 어쩌면 희망? 해면으로 떠 올라갈 때, 지금과는 다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그런 느낌....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
나는 이 대사가 이 애니메이션의 주제가 시작되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은 혼란한 미래사회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 혼란을 더욱 부각시킨다. 멋대로 기억이 조작되어 괴로워하는 청소부는 직접적인 설명이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나가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기억의 축적을 통해서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것이 교란될 수 있다는 상황을 가정해 ‘네 존재는 증명 될 수 있는가’ 하고 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과 나를 둘러 싼 기억이 모두 수정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기억이 수정된다면 기억이 수정된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어. 그렇게 이 애니메이션은 대답하는 것이다.
영화 어딘가에서 나온 대사 중 이런 것이 있다. 자세한 위치는 적어두지 않아서 어떤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대사의 내용으로 보아하니 아마도 쿠사나기나 인형사의 대사일 것이다.
삶의 시작은 화학반응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정보는 기억 정보의 그림자일 뿐이지.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정신은 신경계세포의 스파크에 불과해. 육체나 두뇌가 기계로 바뀔 수 있다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인격’과 ‘기억’이라는 정보 뿐. 그런 정보들이 사라지면.. 그것을 죽음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아.
나는 이 애니메이션의 생각에 완벽하게 동의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나의 기억으로서 더욱 명확한 내가 될 수 있다. 주변이 가지고 있는 나의 기억 또한 나의 존재를 명확하게 하는 부분일 것이다. 앞에 있던 질문을 다시 끌어다 써 보자. 만약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과 나를 둘러 싼 기억이 모두 수정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기억이 수정된다면 기억이 수정된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을 수 있을까? 완벽하게 같지는 않아도, 아주 다를 수는 없다는 게 나의 대답이다. 나는 나이고, 모든 기억은 어쨌든 나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인데 그것이 없다고 나의 존재가 부정 될 필요는 없다. 기억이 없다 하더라도 여기 내가 살아있고, 내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존재는 나의 기억을 뛰어넘을 수 있다. 오만한 생각일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말들만 늘어놓는다. 이 애니메이션이 어깨의 힘을 조금만 더 풀었다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내가 감상문에 풀어 넣은 것들이 영화가 담고 있는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래서 그 많은 내용들을 우겨넣느라 영화가 어려워 진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어깨의 힘을 조금 더 뺐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공각기동대의 후속 작으로 ‘이노센스’가 있다고 들었다. 안타깝게도 공각기동대보다 더 어렵다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언제 한번 보아야겠다. 공각기동대의 후속 작이 어떤 형태를 취하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두 번째 본 공각기동대는, 처음보다 매력적인 영화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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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릇파릇하던 대학교 1학년 때 쓴 감상. 과제 파일에서 찾았다. 신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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