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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려고 한 건 역시 제레미 아이언스 때문인데(...) 결과물로만 보면 원작을 잘 반영한 괜찮은 영화가 나온 것 같다. 험버트(제레미 아이언스)가 내 생각보다는 훨씬 잘생기고 멀쑥한 남자로 나온 것 말고는 그 성격은 꽤 비슷했던 데다 롤리타(도미니크 스웨인)나 샬롯 헤이즈(멜라니 그리피스)의 묘사는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꼭 들어 맞았다. 나름 중요한 인물인 퀼티(프랭크 란젤라)도 적당히 가려져있으면서 존재감을 나타내는 캐릭터로 알맞았다고 생각한다.
신기하게도 내용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원작인 소설보다 '덜' 역겨운데 이건 주인공의 외모 탓도 있겠지만서도, 롤리타를 만나기 전 험버트의 인생이 거의 나오지 않은 탓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그 부분을 읽을 때 아주 짜증이 났었거든. 어릴 적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끝내버림으로써 역겨움은 상쇄되긴 했는데 험버트가 어린 소녀를 좋아하게 된 동기나 그 내면에 깔린 질척질척한 배경들이 잘 나오지 않아서 그 부분은 아쉽다. 그 장면들이 역겹긴 했어도 험버트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엔 가장 도움이 되었었다.
초반에는 험버트에게 운이 따라주는 듯 하지만, 어쨌거나 험버트에게 남은 건 잔혹한 파멸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안다. 험버트는 그걸 막기위해 애쓰지만 그의 시도들은 실패로 끝날 뿐이다. 실패로 끝나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리 자상한 모양새로 돌로레스 헤이즈, 롤리타를 감싸안으며 사랑한다 외쳐도 결국 그는 페도필리아를 가진 남자일 뿐이니까. 성장하는 아이를 가둬둘 순 없다. 롤리타는 아주 잠시동안 험버트의 손에 있었을 뿐, 어떻게 해도 달아나게 되어 있었다.
롤리타의 성격은 소설을 보기 전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은, 성인 남성에 위협받는 아이상(象)은 아니다. 자유롭고, 제멋대로이고, 때로는 버릇없고 난데 없어 험버트를 당황하게끔 만드는 존재이다. 그런데... 어떤 세상의 어떤 사춘기 아이가 그렇지 않을까? 사실 롤리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녀들의 성격과 같았다. 험버트의 시선에서 험버트가 당황하는 꼴을 보고 있느라, 그녀가 영악하고 발랑까진 소녀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모두가 명심해야 한다. 롤리타는 명백한 피해자다. 여름캠프에 간 새 엄마를 잃고 의지할 데라고는 자신을 더러운 시선으로 핥아대는 험버트밖에 남지 않은, 고작 열몇살 남짓의 꼬마애라는 걸. 소설이나 영화나 이 점을 아주 자연스레 잊게 한다. 험버트가 롤리타에게 "그 남자가 누구냐, 제발 알려줘" 라고 울면서 섹스하는 장면은 일면 험버트가 불쌍하다고 느끼게 하지만 사실 그건 강간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롤리타가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곤 고작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것 뿐이었으니까.
영화는 감옥에서의 이야기가 아닌 퀼티 살해 직후의 험버트로 앞, 뒤를 장식하고 있는데, 그건 험버트가 운전을 하는 장면이다. 비뚤비뚤 흐느적하게 도로를 지그재그로 질주하는 험버트의 차는 험버트의 마음이며 험버트 그 자신 같아 보였다.
책과 비교해서 보기 괜찮았던 영화였다. 전반에 깔려있는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내용은 책을 읽었을때와 마찬가지로 끕끕하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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