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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오브 헤븐 |
감독 |
리들리 스콧 (2005 / 독일, 스페인, 영국, 미국) |
출연 |
올랜도 블룸, 에바 그린, 리암 니슨, 에드워드 노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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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어서 보느라 힘들었지만 오 다 보고나니 꽤 만족했다. 극장판에 비해 감독판이 49분 더 길대서 극장판으로 봐야했는데, 이거 극장판으로 본 사람들이 욕한 이유를 알겠더라. 이건 완벽히 감독판으로 봐야 하는 영화였다. 그래야 모든 서사구조가 눈에 들어 오겠더라. 아무튼 엄청나게 긴 탓에 내가 영화를 처음 보려던 목적이었던 제레미는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 나와...ㅎㅎ
애초에 사극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편인데, 요새 나오는 역사물들은 거의 팩션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사건 일면만 툭툭 따오는 거라고 생각해 버려서 그런지 완전히 바뀌는 것만 아니라면, 실제 역사와 어긋나도 크게 거슬려하지 않는다. 애초에 역사에 그렇게 관심 있는 타입도 아니기도 하고. 킹덤 오브 헤븐도 역사물이라고 하기엔 꽤 많은 것들이 실제 역사와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발리앙(올랜도 블룸)이 이십대의(!) 평민 대장장이 출신으로 되어있다던가, 시빌라(에바 그린)가 발리앙을 좋아한다던가... 또 뭐가 있지. 아무튼 요런 설정들은 현실과 다르긴 한데, 그걸 빼고 나면 이 전쟁에 대한 시선이 생각보단 객관적으로 그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과장된 영웅주의는 접어두고 기독교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 발리앙이라는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오히려 그 기독교적인 신념이란 것, 전쟁에 앞선 사람들의 마음 속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여튼 재미있고 말이 되게 이야기를 만들어 놨다는 소리다. 리들리 스콧은 '글래디에이터' 볼 때도 느꼈는데 이런식으로 역사 서사시를 헐리웃 판으로 잘 만드는 것 같다. 이번에는 대놓고 영화 사이사이에 중간, 막간 이런 부분을 넣은 점이 흥미로웠다. 완급조절은 잘 된편일까... 상대적으로 화려한 전쟁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득달같은 로맨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보는 내내 아 이거 재밌군,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십자군 3차 전쟁 직전의 이야기인데 사실 요 때 예수살렘이 살라딘의 손 안에 넘어갔을때, 주인공은 이벨린의 발리앙보다는 승리한 자인 살라딘(가산 마소드) 쪽이 헐리웃 스타일에 더 맞았다고 생각한다. 근데 이 영화에서는 남아서 예루살렘을 지키고 지키다 평화롭게 협상을 맺어(역사에선 어쨌건간에) 사람들을 구제했던 이벨린의 발리앙을 내세운단 말이다. 이 주인공 설정에서부터가 이 영화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게 아닐까.
기사 고프리(리암 니슨)의 사생아로서 원래는 평민이었던 발리앙은 이벨린의 영주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게 되는데, 처음에는 죽은 아내(나탈리 콕스)의 천국행을 기원하고 동생(마이클 쉰)을 죽인 자신의 죄를 씻으려 한 것이지만... 막상 예루살렘에 가 보고 나니 별게 없단 말이다? 자기가 바라던 신은 모습은 커녕 목소리도 안 보이고 옆에서 아버지와 함께하던 자선단체 회원(데이빗 듈리스)이 아무리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해 좋게 설파해도 마음은 냉랭하기만 할 뿐인데 그런 거 치곤 자기 할 일을 잘 해나간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볼드윈 4세(에드워드 노튼)의 충실한 신하인 티베리아스(제레미 아이언스)와 만나고 나병에 걸린 볼드윈 4세를 받들며 자신의 영지인 이벨린을 개척해나가는 일들 말이다. 여기엔 다른 십자군과 같은 종교적 여지가 전혀 없어보인다. 요런 덤덤한 영웅이라는 설정이 오히려 신선했다.
볼드윈 4세는 살라딘과 적절한 수준의 평화를 유지해나가는 왕인데 이거에 반발하는 부하들이 당연히 있고... 그게 기 드 뤼시냥(마튼 초카스)과 샤티용의 레이날드(브렌든 글리슨) 같은 애들. 아, 영화답게도 이 반대편인 기 드 뤼시냥의 아내이며 지금 왕이 죽으면 자기 아들을 통해 섭정을 할 여자가 시빌라란 말이다. 그런데 이 아들도 삼촌과 같이 나병에 걸려있다는걸 발견하고, 시빌라는 그런 아들을 차마 두고보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죽인다. 그리고 나서 왕위는 자연스레 자신에게서 기 드 뤼시냥에게로. (실제로 시빌라는 발리앙에게 반하지도 않았고 당연한 수순으로 기 드 리시냥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 왕위 넘어가는 과정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게 실제 역사와 다른건 차치하고, 시빌라의 마음 속이 그렇게 이해되는 편은 아니었어서 그랬다. 발리앙을 그렇게 사랑한다면서도 상황 판단 제대로 못하고 배신감 느꼈다고만 생각하는게... 그래서 나라 쫄딱 말아먹기 직전까지 가게 만드는 게 영. 뭐 그거 때문에 영화 진행되는거긴 하다만 아들 죽이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그 외의 스토리 진행이나 캐릭터 묘사는 참 좋았음.
종교세계를 해탈한 듯한 발리앙의 묘사도 그랬지만, 인심 후했던 승리자 살라딘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맡은 배우 가산 마소드는 이슬람교 연구하는 사람이기도 하다던데, 여로모로 카리스마가 넘쳤다. 예루살렘이 무엇이냐고 묻는 발리앙의 말에,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라고 말하고 연이어 하지만 곧 전부이지(everything) 라고 하는 모습은 이 성지가 가지고 있는 상징을 보여주는 듯 해 좋았다. 살라딘 주변 인물로 초반부에 등장하기도 했던 이마드(알렉산더 시디그)는 능글맞은 면이 있으면서도 진중한 면모가 돋보이던 캐릭터. 병마에 시달리며 얼굴이라고는 눈밖에 나오지 않았던 볼드윈 4세는 종교의 광기와 현실 사이에서 중도를 찾으려고 하는 거 같아서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었다.
음... 기대를 하나도 안하고 봐서 그런가 재미 있었는데, 남들이 봐도 재미있을 거 같다. 전쟁씬을 보려는 게 아니라 서사를 보기 위해 보는 영화였고, 그 역할을 잘 해낸 것 같다. 배우들의 연기도 참 좋았다. 다들 안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