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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로 시작해서, 작은 옥탑방까지 도달하다 보면 정말 우울해진다. 가난이 범람하는 작디 작은 옥탑방. 꿈없는 시지프같은 주인공 민수, 화려한 지상으로의 추락을 꿈꾸는 주희. 모두가 슬프다. 중간 중간 까뮈의 시지프 신화를 도입하면서 우울한 결말로 치닫나 했더니, 웬걸. 결말은 의외로 희망적이다.
시지프들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 나만 같아서, 슬펐던 소설. 그러나 민수는 말하네. 지금, 당신의 옥탑방에 불을 밝혀야 할 때. 라고.
지난 십 년 동안 나는 시지프들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었다. 몽타주로 재현되는 무수한 시지프들의 세계, 산정을 향해 바위를 밀어올리는 불굴의 의지를 상실해버린 시지프들의 세계, 희망 없는 노동을 죄악시하고 도로(徒勞)를 무능의 결과로 치부해버리는 시피프들의 세계, 신을 향한 멸시를 두려워하고 운명을 극복하려는 반항적인 분투를 상실해버린 시지프들의 세계―그곳에 안주하며 하루하루 종말적인 인간의 시간을 살아온 것이었다.
아주 가끔, 신화 속의 시지프가 기억에서 되살아날 때가 있었다. 늦은 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다가 문득 형네 집에 얹혀살던 시절을 떠올리게 될 때, 새벽에 뜻하잖게 잠에서 깨어나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될 때―그럴 때마다 찡그린 얼굴, 바위에 부벼대는 뺨, 진흙에 덮인 돌덩이를 멈추려고 버틴 다리, 바위에 받아 안는 팔, 흙투성이의 손 같은 게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한 것이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멸시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지프가 깊이 잠든 오관을 후려칠때마다 쩡, 쩡, 어디선가 빙벽을 꺠는 듯한 소리가 날카롭게 귓전으로 밀려들곤 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나는 낯선 지상에 서 있었고, 손가락을 헤아려 보면 나도 모를 나이가 되어 있었다. 옥탑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의 거리, 그리고 옥탑방을 떠나던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세월.
십 년 세월이 지난 지금,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깊은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지나간 시간보다 남겨진 시간이 두려운 건 변화가 아니라 불변하는 것에 대해 느끼는 끈끈한 채무감 때문이리라. 주어진 형벌의 바위를 부정하고, 지상에 안주하기 위해 인간의 숙명까지 부정하는 시지프들의 지옥―무슨 이유 때문인가, 추억이 망각의 늪으로 잦아들 때가 되었는데도 내 마음의 옥탑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살았던 한 여자의 존재감 때문이 아니라 옥탑방이라는 상징, 그것이 하나의 생명채가 되어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불완전한 지상의 주민, 숙명의 전모를 간파하지 못하는 인생의 장님들에게 그 빛은 무엇을 일깨우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주 우연히 지상에서 다시 마주치게 될지라도, 부디 행복한 시지프의 표정을 당신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편지,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력을 느끼게 하는 주시(注視)의 언어로 나의 기억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언젠가, 우연을 가장하고 찾아올지도 모를 필연의 시간에 나는 어떤 시지프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치게될지라도, 편견과 모순과 아집에 사로잡힌 불행한 시지프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 운명에 당당히 맞설 줄 아는 행복한 시지프의 얼굴을 나는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다. 내가 그녀를 알아보거나 그녀가 나를 알아보는 순간, 혹은 내가 당신을 알아보거나 당신이 나를 알아보는 순간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옥탑방에서 밀려 나오는 불빛의 의미, 준비된 자세로 항상 깨어 있으라는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라는 걸 알 수 있으리라.
지금, 당신의 옥탑방에 불을 밝혀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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