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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연인 본편은 민음사 판을 읽었고, 나머지 단편 두 편(작은 공원, 부영사)은 산호출판사 버전으로 읽었다...만 사실 연인 말고 나머지 두 편은 안읽은 것이나 마찬가지. 눈은 읽고 있는데 머릿속에 남은 게 하나도 없다. 와, 내가 왜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에 연인 하나만 있는 지 알 거 같았음. 연인이 그나마 읽을 만 하니까요... 사실 연인 자체도 시점이나 시제가 왔다갔다 하는지라 읽으면서 좀 내 글은 아니다 싶었는데(오 난 이렇게 현재 과거, 혹은 주체가 왔다갔다 하는 데 약한 듯) 나머지 두 개는 더 못읽겠더라. 부영사는 초반에만 집중하다가 결국 나가떨어짐. 안 읽어.
연인 자체도 읽기 쉬운 글은 아니고, 시종일관 불행에 젖은 삶에 무감각해진 열일곱의 '나'를 보고 있다면 읽는 나까지도 무심한 표정을 짓게 되었지만... 그래도 내용은 괜찮았다. 아버지가 죽고, 히스테릭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방관 아래 엉망으로 자라난 폭군 첫째 오빠, 큰오빠에게 눌려 다소 약해진 둘째오빠와 살고 있는 열일곱 소녀 '나'가 주인공. 특이하게도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프랑스가 아니고 베트남이다. 동양의 바탕에 있는 서양인의 모습은 지금 상상해도 꽤 부자연스러운데, 시대상을 생각하면 어땠을 지 보지 못했어도 감각으로 느껴진다.
소설은 이런 '나'가 부유한 연상의 중국인을 만나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뭐 그런 일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사실 '나'쪽에서는 그다지 열렬한 반응도 아니었고("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어요. 날 사랑한다 해도, 당신이 습관적으로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대해 주세요.") 세상을 무심하게 보는 그런 시선과 서술법 탓에 달콤하다기보다는 힘든 사랑이라는 느낌이 더해졌다. 실제로도 그랬고. 중국인 남자는 나의 시선 안에서도 심약하고 나약하다.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나는 중국인이야." 하는 대사에서 느껴지듯 가족, 특히 아버지와 관련된 일과 그녀의 젊음 앞에 힘들어한다. 이 둘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났다는 것이 전제로 되어있어 더 애틋하게 읽힌다. 감정이 결핍된 프랑스인 소녀와 나약한 중국인 남자의 사랑 시간이 지날수록 더 메마르고 또 더 진한 인상을 남긴다. 전반부에는 이게 사랑인가 싶었던 부분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억눌린 채로 스멀스멀 번져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코 폭발하지는 못한다. 그와 그녀의 이별 장면은 별다른 구구절절한 하소연과 애원 없이도 가슴이 시리다.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뒤 걸려온 한 통의 전화까지 참 스산하게, 스치듯이 그러나 깊게 마음이 아프다.
소설에서 중요한 건 남자와의 사랑 뿐 아니라 가족간의 관계였는데, 어머니-큰오빠로 이어지는 강한 압제의 주체들은 읽기만 해도 진저리처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 '나'의 서술처럼 어머니는 진짜 미친 것일수도 있고, 큰오빠는 그런 어머니 아래에서 왕으로 키워진 또 하나의 미친 사람 같았다. 작은 오빠는 그냥 안쓰러웠고. 이런 가족을 바탕으로 담고 있는 '나'의 심리 또한 이해할 만한 사춘기의 것이어서 그건 좋았다. 그 허무함 때문인가 약간 롤리타 읽는 기분도 들었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긴 소설이라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가늠이 잘 안된다. 다만 배경이 너무 특이해서 아 여기 가봤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었다. 중국인과의 사랑은 모르겠고. 다만 첫째 아이를 잃은 것, 가족사항 뭐 이런거 다 비슷하니까 연인과의 일도 사실일 거 같다. 여튼 괜찮게 읽었다. 확 취향이냐면 그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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