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이야기(이청준문학전집:중단편소설 10)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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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요새 나오는 소설들이 발랄함을 좋아하고 그렇기에 그러한 소설들을 치중해서 읽어왔다. 결국은 이전에 나온 진지한 소설들에 눈을 잘 돌리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런 나의 편협적인 독서 때문에 나는 진지한 글들을 읽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이청준의 단편들을 읽을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요 근래에 읽었던 이청준의 소설들은 대부분, 최근 시대 기류에 편승하고 있는 가볍고 발랄한 소설들과는 반대되는 것들이었다. 그의 소설들은 작가의 생각을 깊이 있게 전달하고 있었고(반대로, 작가의 생각이 깊이가 깊은 것일지도) 그렇기에 나는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중「비화밀교」는 내가 가장 어렵게 읽은 소설이었다.

  난해하다. 「비화밀교」를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서술하는 ‘나’ 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것을 읽는 나는 오죽하랴. 「비화밀교」는 그 안에 숨어있는 정치적 색채와 종교적 색채가 버무려져 도대체 내게 쉽게 이해할 기회를 주지 않는 소설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친구들에게 그것에 대한 질문을 내던져야 할 지경이었다.

  서술자가 작가라는 점에서 몇몇 이청준의 소설이 생각났다. 「매잡이」나 「줄광대」같은 소설 말이다. 서술자가 작가여여서 그런지 액자형 소설인가 싶었는데, 액자형의 소설은 아니었다. 다만 소설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화자는 액자형의 소설 구조를 떠올리게 했다. 쉽게 보면 주인공 ‘나’가 ‘조 선생’과 함께 고향에 돌아가 산에서 하는 비밀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이야기이지만 소설의 중심은 그 행사의 내용이다. 나는 주인공인 ‘나’가 행사에 직접적인 참여를 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고, 그렇기에 그를 중심 안에 있지 아니한 서술자로 보았다. 그가 ‘조 선생’의 말대로 자신의 소설에 행사에 대해 서술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직접적인 참여라고 보기에는 그렇게 보기에 매끄럽지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고향에서 매년 이루어지는 행사는 비밀 행사이다. 단순히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한해를 맞이하는 종류의 신년 행사가 아니기에 이 행사는 그 의미가 있다. 지방민속을 뛰어넘는 역사나 종교행사로도 볼 수 있는 이 행사는 일종의 밀교이다. 행사의 내용은 그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자신이 가진 불을 한 곳에 묻고 떠나는 것뿐이다. 그런 단순한 것임에도 누구도 그 행사에 대해서 떠벌리지 않으며 그저 조용히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은 이 밀교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밀교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이 밀교의 의미는 산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세속의 질서가 사라지고 그저 서로가 서로를 한 가지 소망으로 묶어나가는 행사라는 데 있다. 세속의 질서가 사라진다는 것은 모든 세속적인 감정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의 소망만을 바라는 존재로 거듭난다는 것인데, 모두가 이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밀교의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할 수 있다. 산 아래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을 잊고 서로의 죄를 용서하며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조 선생’의 아버지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친일파인 ‘조 선생’의 아버지는 산 아래에는 손가락질 받는 친일파이지만 산 위에서는 모든 사람들과 평등한 존재가 된다. 사람들에게 암묵적인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때, 그가 밀교에서 종화주가 되고 싶어 아들을 내세웠던 것에서 그의 죄책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밀교에서 암묵적인 용서를 받은 ‘조 선생’의 아버지는 밀교에 있을 때 그 마음의 평온함을 느끼고, 그 때문에 그 밀교의 다음을 잇는 종화주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요컨대 내가 본 밀교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현실 세계에서 모두가 그것을 잊고 평등해 지는 사회이다.

  밀교의 소망으로의 의지는 폭발을 일으키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행사의 절정 때 모두가 입속에서 맴도는 아아 소리를 낸다. 이것은 모두가 바라는 소망에로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 않은가. 모두가 바라는 소망은 그저 가슴 안에서 존재할 뿐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단 것이다. 마치 일제시대 교장에게 반항했던 무리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온전히 이 소망의 모습이 유지 되었다면 이 소설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본연의 것은 퇴색하며,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려 하는 움직임이 이는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입장의 사람들은 장화대(藏火臺) 앞에서 춤을 추며 불씨 묻기를 방해하던 청년들이다. 그들은 무언의 춤판으로 사람들에게 위협을 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나타내려 한다. 그들은 여태까지 조용하게 유지되며 소망을 가슴 속으로만 품도록 하는 밀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폭발을 대신해 기다림만을 계속하던 밀교는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기다림보다는 폭발을 택하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소망을 입속으로만 웅얼거리지 않고 밖으로 직접 내보이며, 사람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온건하게 지켜져 왔던 사회에의 개혁파의 등장. 이것은 내게 마치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보였다.

  ‘조 선생’은 ‘나’에게 이 밀교 안에서의 일은 비밀이라고 당부하면서도, 밀교 안에서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를 부탁한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가시적인 질서에서 나타나지 않는 힘,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인 밀교는 ‘조 선생’에게 아름다운 질서의 조화로 비춰지고 있다. 그렇기에 ‘조 선생’은 지금 이대로의 온건한 저항을 하는 밀교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조 선생’은 이 밀교가 온전히 유지되기를 바라는 온건파의 입장이다. 하지만 ‘조 선생’은 밀교가 언제까지나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이 밀교가 가진 음의 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이 음력의 세계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나’에게 그런 모순적인 부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소설 작가이다. ‘조 선생’의 부탁으로 쓰게 될 소설에 대해, 밀교에 대해 모르는 이라면 단순히 흥미로운 소설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밀교를 아는 이, 특히 앞선 청년들과 같은 자라면 그 밀교의 폭발을 잠시라도 막을 수 있게 된다. ‘나’로 인해 밀교가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면, 적어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힘의 조화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개혁파의 청년들은 ‘조 선생’보다 한걸음 빨랐다. 청년 중 한 명의 분신자살을 뜻하는 듯한 문장이 뒤에 나온다. 그들의 폭발은 이미 이뤄져버린 것이다. 때문에 ‘조 선생’의 바람은 너무 늦은 것이 되어서, 밀교의 정치적인 싸움은 결국 온건파의 패배로 끝을 맺는다. ‘조 선생’이 ‘나’에게 그의 생각을 털어놓는 것은 싸움의 패배로 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패배로 ‘조 선생’에게 있어 ‘나’가 쓰게 될 소설의 가치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나’는 이 내용을 소설로 서술한다.
 
  앞서 말했듯, 「비화밀교」는 난해하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과 몇 가지 주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서야 그 숨은 뜻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밀교가 가진 의미에서 종교적 색채를 보았고, 조 선생의 말들을 통해 정치적 입장의 한 단면을 보았다. 「비화밀교」는 사람들이 가진 내면의 저항과 그러한 심리를 잘 드러내 준 작품으로서 내 머릿속에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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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꼬꼬마 시절에 쓴 과젠데... 이걸 쓸 때만 해도 내가 논문 주제로 비화밀교를 선택할 줄 몰랐다. 사실은 김승옥을 쓸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차라리 벌레 이야기를 쓸 걸 그랬나 싶기도 한데... 뭐 나름대로 애착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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