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이청준문학전집:중단편소설 6)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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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광대」라는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딱히 이청준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청준의 소설 중에서도 유명한 소설인지라 읽어볼 기회가 제법 많았었기 때문에 읽게 된 것이었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무슨 소리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애를 먹었었다. 그렇기에 나중에 학교에서 그 주제가 ‘장인 정신의 발로’라고 배웠을 때 그러려니 했었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작품을 깊게 볼 만한 지식은 없었고, 배우려는 열정도 많이 부족했다. 거기에 허 노인의 모습에서는 확실히 장인정신과 같은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쉽게 받아들였던 것도 같다.

  몹시 오래간만에 다시 읽게 된 「줄광대」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일전에 그저 주입식으로 배웠던 ‘장인 정신의 발로’라는 주제가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은 왜일는지. 그것은 「줄광대」를 처음 읽었던 때의 나보다 조금 더 생각의 깊이가 깊어졌기 때문일까. 이전에는 쉽게 넘어갔던 것들이 자세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저 글자를 읽어 내리기에 바빴던 독서 습관이 슬그머니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나의 무지를 핑계로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 테니까.

  액자형 구조로 되어있는 이 소설은 남 기자를 서술자로 내세움으로써 시작을 하는데, 그러면서도 액자 안의 제 3자인 트럼펫 부는 사나이를 통해 틀 안의 이야기를 전달받는 것이 조금 특이하게 느껴졌다. 내게 액자 안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액자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그 안의 인물이(그것이 비록 제 3자일지라도)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직접적인 등장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안 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었다. 액자의 틀을 구성하는 또 다른 인물인 여자에 대해서 나는 처음에는 이 여자가 그저 부수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여자를 접할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통해 소설에 깔려있는 복선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속 알맹이인 액자 내의 이야기는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이 액자 속에는 액자 틀에도 존재하는 트럼펫 사나이가 등장하고,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허 노인과 그의 자식 운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액사 속은 크게 이렇게 나뉜다.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서술에 따라 이야기는 허 노인과 그의 자식 교육, 그리고 허 노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하나의 액자 속이 완성된다. 그리고 뒤이어 또 다른 이야기로서 운의 사랑과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다른 액자 속이 완성 된다. 똑같은 과거의 이야기인데 이렇게 둘로 나눈 의도는 무엇일까? 나는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두 부자의 죽음을 비교하게끔 만들려 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허 노인의 죽음과 운의 죽음은 그 모습이 몹시 일치하는 듯 하면서도 미묘한 구석에서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허 노인은 오직 줄 위에서만 살아온 줄광대이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줄타기 신념이 있고, 그것을 평생 지켜 나간다. 서커스단의 단장에게 혼이 나더라도 자신의 줄타기 법을 바꾸지 않는 것도 그렇고, 아내가 죽은 그 날 이외에 줄을 타지 않은 날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신념은 굉장히 독선적인 모습이 될 수도 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장인정신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아들 운에게 줄타기를 가르치는 모습에서 그의 신념의 모습이 잘 나타나는데, 이를 지켜보면 허 노인은 단순히 줄 위에서 노는 광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평생을 줄타기만을 위해 바쳐온 그는 이미 광대가 아닌 한 명의 장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단순히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모습이 있는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에서는 그저 줄 위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은 것이지만, 허 노인의 죽음이 단순히 그런 실수에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의 죽음의 명확한 이유에 대해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허 노인이 말했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줄광대는 줄 이외의 곳에 발 디딜 데가 없다고 한 것 말이다. 운에게 모든 것을 전수한 그는 줄 위에 두 명의 광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발을 일부러 헛디딘 것이 아닐까. 과도한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내가 허 노인에게 느끼는 그의 장인 정신은 이러한 부분에서 나온 것이니까.

  반면 운의 죽음에서는 나는 허 노인과 같은 장인 정신을 보지는 못했다. 줄 위에 있는 그는 그저 광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만 같다. 허 노인이 죽은 뒤 그도 허 노인과 같이 줄을 탔지만, 결국은 한 여자에게 빠짐으로서 그 줄에서 떨어지고 말았지 않은가. 처음에는 허 노인의 뒤를 이으려는 듯 보였지만 결국 그는 허 노인과 같은 장렬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 듯 하다. 절름발이 여자가 그가 무섭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은 이제 줄을 탈 수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고 줄을 탈 수 있었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말이다. 이것이 허 노인과 운의 차이를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허 노인은 줄광대로서 온전히 그 장인 정신을 평생을 통해 발휘했고, 죽음에서 마저도 그의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그러나 운은 사랑에 빠짐으로 인해 바른 줄타기를 버리고 한낱 광대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앞서 나는 허 노인의 죽음과 운의 죽음은 그 모습이 몹시 일치하는 듯 하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한 어긋남은 그 둘이 가졌던 장인 정신의 차이였다. 그렇다면 일치한다 생각하는 부분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나는 그것을 운의 마지막 줄타기에서 찾는다. 자신의 줄 타는 모습만을 좋아했던 절름발이 여자를 위해 마지막으로 줄타기를 하고 죽는다. 그의 죽음은 쉽게 보면 여자에게 빠져 이루어진 하찮은 종류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한 운의 줄타기에서 비장한 그 무엇인가가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운의 비장함은 내게 허 노인과 운을 동일시해서 보게 했던 유일한 것이었다.

  트럼펫 부는 사나이가 전하는 줄광대의 이야기는 남 기자를 복잡한 심경으로 이끈다. 나는 이 이유를 트럼펫 부는 사나이가 가진 죄책감에서 찾는다. 내게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말은 꼭 고해성사처럼 들린다. 그가 하는 말은 자신의 죄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운의 죽음의 원인인 절름발이 여자가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아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복선에서 그의 죄책감을 느낀다. 그가 남 기자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덜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아내가 절름발이 여자였다는 복선은 속으로 많이 감추어져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트럼펫 부는 사나이가 마을에 정착한 이유 등을 통해 그의 아내가 누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액자 틀에서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을 찾는다. 바로 트럼펫 부는 사나이와 절름발이 여자 사이에서 난 딸이다. 그녀는 트럼펫 부는 사나이의 죽음을 예견하고 돈을 모은다. 나는 그녀가 믿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이 소설의 총체적인 결말을 아스라이 혼돈으로 묻어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줄광대」는 아비의 삶과 그 자식의 삶을 통해 줄 위에서 사는 이의 내면을 그리고 두 세대의 대비로 장인 정신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줄광대」를 온전히 장인 정신에 관한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깊은 듯 하다. 남 기자와 트럼펫 부는 사나이, 몸을 파는 여자에서 나는 혼돈을 둘러싸고 있는 현재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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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과제. 음 내 말투가 보이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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