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지가 언젠데 완독한 건 얼마되지 않았다. 교양 수업 때문에 변신 하나만 읽고 꽂아두었던 기억. 변신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도 왜 읽으려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잡고 읽었는데... 아... 번역이 이상한건지 내용이 이상한 건지, 내가 멍청한 건지 읽고 나서도 멍한 것들이 많았다. 허무. '변신'은 무척 재미있었지만, 나머지 작품 중에서 크게 기억에 남는 건 '굴' 정도.
단편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 부분은 거의 1, 2페이지 정도의 짧은 글들이었는데 몰입감은 좋았지만서도 역시 읽고 나니 크게 기억에 남는 것들이 없었다. 다만 전체적인 윤곽으로 기억에 남는건 메마르고, 허무하고, 무섭다는 느낌. 다 버석버석하고 읽고나서 안정감이 드는 소설이 드물었다.
다만 마음에 들었던 안정적인 느낌의 구절은 이 부분.
나의 잠을 깨우는 것이 옛시절의 습관인지 아니면 이 집도 역시 가지고 있는 위험들이 충분히 크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규칙적으로 문득문득 깊은 잠에서 깨어나 밤이나 낮이나 변함없이 이곳에 가득 깔린 정적을 엿듣고 또 엿듣다가는 안심하여 웃고 그러고 나면 전신에 맥이 풀려 더욱 깊은 잠에 빠진다.
「굴」, 『변신·시골의사』, 프란츠 카프카, 민음사, 1998, pp.122~123
물론 이 뒤로는 불안감과 편집증에 빠져있는 듯한 묘사로 가득하지만, 굴 안에 있는 두더지인지 뭔지 하는 생명체가 느끼던 감정들은 그 묘사가 너무 세세해서 푹 빠져들었다. 이상하게 느리게 읽히던 것은 그 감정선을 따라가느라 그랬었나보다.
'변신'과 '굴'만으로도 마음에 들었지만, 나머지는 글쎄... 카프카가 마음에 들어한 작품이라는 '시골의사'나 '판결'은 내겐 너무나 이상했다.
요건 내가 대학교 1학년때인가 2학년 때 과제로 냈던, '변신'과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 대한 짧은 감상문. 지금 읽으니 참 간단하고 허접하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과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여러 모로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인간이 괴물로 변한다던가, 원숭이가 인간화 되는 서술)에서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두 작품은 비슷한 면이 많고 따라서 두 작품에 대해 사고를 할 때 두 작품을 연계해서 사고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신」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을 통해 현실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해버리는 사건은 비현실의 시작이나 그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무척 현실적이어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그레고리의 가족에 대한 헌신은 그것이 반복되어 일상화됨에 따라 당연한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렇기에 가족 중 아무도 그레고리의 헌신에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에서부터 그레고르가 당연히 해오던 헌신을 할 수 없게 된 것만으로도 그레고르가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될 여지가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레고르의 가치는 일단 거기까지인 것이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레고르는 보기에도 흉물스러운 괴물로 변해버리고 만다. 이렇게 되면 그레고르는 당연히 집안의 부끄럽고 귀찮고 보기 괴로운 존재로 나락한다. 그레고르가 흉측한 괴물로 변했음에도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내치지 않는 것은 순전히 그레고르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약간의 인간성과 가족애 덕분이었다. 괴물로 변한 ‘저것’이 내 아들이고 오빠라는 생각에 가족들은 많은 불편함과 심정적 괴로움을 감수한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그레고르의 희생이 일상화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레고르의 변신도 일상화 되고 만다. 여기서의 일상화는 그레고르의 가족이 그레고르의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던가 하는 종류의 일상화가 아니다. 그레고르의 변신에 의해, 변신한 모습의 그레고르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애정과 가족애가 소멸해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레고르가 가지는 괴로움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애초에 그레고르가 가족에게 가지고 있던 입지는 그가 가족에게 가져다주는 금전적 여유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변신한 뒤에 남은 것은 가족애이다. 그런데 이것마저 사라졌다 하면 그레고르의 입지는 거의 없어지고 그레고르 자체만으로 남게 된다. 그런데 현재 그레고르의 모습은 하찮다 못해 흉물스러운 벌레의 모습이다. 여기에서부터 그레고르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을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레고르의 이 불행한 변화의 모습에서 인간이 가지는 존재가치에 대한 물음은 던져진다.
인간의 존재 가치는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 소설 안의 그레고르에 따르면, 그레고르는 그의 희생을 통해 그의 가치를 증명 받고 있었다. 혹은 가족 안에서 아들이라는 입지를 통해 그의 가치가 증명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사라짐에 따라 그레고르는 처참하게 버림받는다. 여기에서 그레고르는 그레고르가 아니었는가?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레고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레고르였다. 그의 외견이 변함에 따라 그가 잃어버린 직장과 가족은 곧 그의 존재 가치마저 위협하고 만 것이다. 인간의 존재 가치란 결국 인간이 가진 인간으로서의 외견과 인간이 가진 능력에 의해서밖에 증명되지 못하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힘은 고작 저런 이유밖에 없는 것일까? 인간이 가지는 특성은 무엇이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변신」은 인간 존재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소설이다. 명확한 답을 낼 수 없다는 점에서 생각할 점이 더욱 많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는 「변신」과 반대되는 상황을 통해 비슷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인간에게 잡혀 출구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 의지를 상실하고 인간화되어버린 원숭이 피터. 이 원숭이를 통해 읽는 이는 인간의 비인간성의 모습 혹은 인간 현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본래 가지고 있던 자유를 빼앗긴 시점에서부터 원숭이 피터는 모진 일들을 많이 겪고 그것을 통해 인간화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비인간성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인간 현실의 모습은 어디에서 드러나는 것인가? 소설에서는 원숭이 피터를 통해 인간 현실의 모습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원숭이 피터 내면으로부터의 인간화 과정에서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원숭이 피터는 우리에 갇히고 그것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새로운 출구를 찾는다. 이 출구라는 것에 대해 원숭이 피터는 자신이 찾는 것은 자유라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값싸게 이용되는 단어가 아니라 아주 단순하고 상징적인 출구라는 단어였다고 말한다. 원숭이 피터의 출구는 인간과 동일해 지는 인간화였다. 원숭이 피터가 스스로 인간화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가 아닌, 현실에 순응한 모습이었다는 소리다. 곧, 원숭이 피터가 인간화를 통해 얻게 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닌 현실 순응의 모습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원숭이 피터가 원숭이임에도 불구하고 저러한 종류의 깨달음과 간단한 모방을 통해 인간화 되었다는 것을 통해 인간이 가진 입지와 그 정체성의 혼란 또한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이다.
벌레로 변해버림에 따라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레고르와 인간화가 되어버린 원숭이 피터. 이 두 소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