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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rs by Nad Renrel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동거란 사전적으로는 단순히 같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의미에서 동거는 어떠한가? 여기서는 곧 사실혼에 입각한 관계의 동거의 의미가 강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동거에 관한 이야기를 부쩍 많이 다뤄왔다. 동거라는 말만 나와도 쉬쉬하던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다. 그만큼 동거라는 행위는 사회적인 현실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중년층의 동거에 대한 인식이 나쁜 편에 속한다. 당장 우리 부모님께 동거에 관해 물어만 보아도 크게 화를 내신다. 중년층에게 있어서 동거는 결혼을 회피하고 성관계만을 위해 동거한다는 의미가 큰 것 같다. 또한 우리나라처럼 순결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있는 사회에서, 그 사실혼 관계가 겉으로 드러나는 동거는 좋은 시선을 받을 수 없다. 특히 딸을 가진 부모라면 이러한 현실에 동의하여, 동거에 관해서 굉장히 안좋은 시선을 보낸다. 

  막상 동거를 하는 나이 대는 중년층보다는 청년층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거에 관해서는 청년층의 의견이 아닌 중년층의 의견이 왜 나오는가? 바로 중년층은 청년층의 부모이니까 그렇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자식들은 부모의 품 안에서 자라난다. 따라서 다른 나라에 비해서 부모와 자식의 유대 관계가 깊은 편이며, 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식으로 정의되고 있다. 부모는 자식이 커가는 와중은 물론이고, 다 커서까지도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이런 가족 유대적인 환경은 자식이 자식의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기도 한다. 동거도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중년층이 이렇게 동거를 반대하고 나섬에도 불구하고, 동거는 현실이다. 나는 동거에 찬성한다. 한국에서는 지금 30만 쌍이 결혼을 하면 그 절반인 14만 쌍이 이혼을 하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보통 부부간의 성격차이와 가족과 시부모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잘 살펴보면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은 현실, 그리고 가족이 둘의 결합이 아닌 가족과 가족 간의 결합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이혼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타협의 부족이다.

  아무리 오랜 기간 연애를 했다고 하더라도, 같이 살아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배우자가 양말을 벗어 제대로 세탁기에 집어넣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그 일은 몹시 사소하지만, 10년이고 20년이고 그것이 반복된다면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도 그런 식이다. 요새 주부들이 들어가는 사이트에 가 보면 이런 글들이 눈에 꽤 띈다. 시부모가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하고,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남편에게 말하면 남편은 그런 일 가지고 무슨 불평이냐고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삶에 너무 간섭하기도 하며, 배우자에 대해 배려가 없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가 반복되면 당연히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여자들은 이러한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혼은 상상치도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율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여자들은 다르다. 현대의 여자들은 남자와 똑같은 권리를 주장한다. 자신의 권리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스트레스는 당연히 오래 견디기 힘들고 종당에는 이혼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발달하여 의식은 높아져 간다. 그러나 남자들은 자신들의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가부장적인 체제에 익숙해진 상태이다. 여기에 여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알았다. 가부장적인 남편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요구하지만, 여자들은 순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혼을 한다. 어쩌면 여성 인권의 신장 또한 이혼율의 원인이라면 원인일 수도 있겠다.

  동거는 높은 이혼율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동거를 통해 배우자의 세세한 습관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이 양가의 합의를 얻어낸 동거라면 가족들의 간섭이 어떠한지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함께 살아봄으로서 결혼의 예행연습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이라면 굳이 호적에 이혼을 표시해가며 사람과 헤어질 이유가 없다. 상대방을 겪고 판단해서 하는 결혼이라면 실패할 확률은 그렇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줄어든다.
 
  그러나 굳이 결혼의 예행연습이니 뭐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동거는 유익한 편이다. 둘이 함께 산다면 생활비와 집세 등이 많이 절감된다. 굳이 모르는 타인을 룸메이트 삼는 것보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편이 좋다. 결혼에 비해 서로에게 얽매일 이유도 적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주는 무거움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서로 사랑해서 한시도 떨어지기 싫다는데 동거를 해서 안 될 이유는 또 무엇인가? 20대 이상이라면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서 있는 나이이이다. 또한 그것을 실제로 실행할 수 도 있는 나이이다. 자신의 판단 아래 동거하는 것이 죄가 될 이유는 없다. 부모는 자식에게 조언할 수는 있으니, 자식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동거 현실은 너무나 열악하다. 법적인 것도 그러하고, 사회적인 시선도 그렇다. 사실혼 관계가 법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효력은 너무나도 적다. 같이 살고 있는 자신의 동거자가 당장 죽을 위기라 해도, 다른 동거자는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없다. 결혼서류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배우자가 죽으면 상속권도 받을 수 없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사회적인 시선도 만만치 않다. 앞서 서술했지만 중년층이 가지는 동거에 관한 시선은 몹시 좋지 않다. 굳이 중년층이 아니라도 그렇다. ‘나는 동거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라고 말하는 젊은 층의 사람도 실제로 동거하는 커플을 보면 신기하게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전에 동거기록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에 대한 진실성부터 의심한다. 남자의 경우에는 헤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결혼한 뒤 배우자 가정에 알려지면 평지풍파가 일 지경이다. 실제 드라마에서도 이러한 경우를 다룬 적이 있었다. 여자 주인공의 동거사실이 시댁에 알려지면서 여자 주인공은 많은 고초를 겪는다. 문제는 이것은 현실이라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동거하고 있다.’라는 식의 말을 꺼내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십상이며, 좋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에서의 동거는 폭탄을 껴안고 산다고 해도 좋을 만큼 아무런 보호도 없다. 이 와중에 동거문화 열풍이니 뭐니 해서 ‘사랑해서 하는 동거’가 아닌, ‘동거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동거’를 위한 사이트마저 생기고 있으니 한심할 노릇이다.

  프랑스는 동거가 일상화된 나라이다. 프랑스의 동거 혹은 독신 인구는 전체 인구의 1/3에 달한다. 프랑스에서는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여성들의 여권이 신장되었다. 이에 따라 가정주부를 거부하고 남자들의 일을 하게 된 여자들이 생겨났다. 이에 1968년 5월 68혁명이 일어나면서 독립적 사고를 증진하고, 자신뿐인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자 하는 사상이 널리 퍼졌다. 이를 통해 동거의 일상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프랑스에서는 동거를 많이 선호하고 있고, 전체 출생아의 45%가 동거부부에게서 난 아이들이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렇게 동거가 횡횡하는 이유는 일단 제도적으로도 확실히 동거가 뒷받침되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PACS 법을 통해 동거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있다. 이 법을 통해 동거하는 이들은 결혼한 이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PACS 법은 동성애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 프랑스의 다양성을 볼 수 있게끔 한다.

  또 프랑스인들이 가지는 개인주의가 동거에 한 몫을 한다. 그들의 부모는 자식이 동거를 하는데 관여하지 않는다. 갓 성인이 된 아이가 동거를 한다고 해도 조언할 뿐 말리지는 않는다. 그들의 부모는 우리나라의 부모들처럼 헌신적이지 않으며, 자식을 품에 안고 키우지도 않는다. 개인주의가 발달했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지는 무게감과 책임감에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으레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을 받아왔다. 그래서 그 무게감이 덜하지만, 프랑스처럼 개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더욱 더 그 무게감이 더해지는 것 같다.

  프랑스처럼 우리나라에서 동거가 횡횡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사회적 시선이 몹시 안 좋지 않은가? 그러나 점차 동거 인구가 늘어난다는 통계는 동거가 점차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온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가족은 전통적으로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화해 왔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단번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이 부분에서는 많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은 핵가족이 일반화 되었고 이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나라 특유의 가족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부모 가족과 자식 가족이 각각 따로 살지만 가까운 거리에 집을 두고 서로 자주 왕래하는 식의 수정 확대가족이나, ‘영구별거’가 아닌 ‘일시별거’의 의미를 가지는 수정 직계가족 등의 형태가 그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낸다. 동거가 점차 밑에서 올라와 그것이 현실문제로 대두된다면, 사람들은 새롭게 그것을 적응해 나갈 것이다.

  앞서 말했듯 동거는 현실이다. 언제까지 순결이니 뭐니 내세우면서 현실을 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동거에 대해 찬성이니 반대이니, 우리 사회는 이미 동거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동거가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장점들은 확실히 있다. 금전적으로, 정서적으로도 그렇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 안에서 동거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케케묵은 사상을 빗대어 자신을 옭아매고, 혹은 자식을 옭아매거나, 그에 얽매여 자립심을 잃거나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내가 나의 의지로 동거하고 있다는데 남이 욕한다고 그 욕을 들을 필요는 없다. 동거를 한다고 하여 문란한 관계로 보는 것은 먼지 쌓인 과거에 사는 사람의 일이다. 실제로 동거를 하지 않는 모든 연인 관계가, 성관계 없이 이루어진다면 또 모르겠다. 과도한 유대관계에서 나타나는 단점을 깨달아야 한다. 문란함과 도덕성을 따지기 이전에 실리를 따져야 한다. 그것을 깨닫고 나면 동거가 나쁘다고 만은 볼 수 없다.

  물론 동거가 가지는 나쁜 점들도 존재할 것이다. 제도적인 것, 사회적인 것을 빼고 서로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책임감의 상실, 너무나 가벼운 만남과 이별, 결혼에 대한 가치 상실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인 면들만 따져 동거를 무조건 반대하기에는 시대가 너무 변하지 않았나?

  현대의 가족관계에서 나타나듯, 사람들은 언제나 중도의 또한 적절한 방식의 해결 방안을 찾아냈다. 곧 스스로 자정작용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인간미가 결여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될지, 혹은 이혼율을 줄이며 서로에 대한 이해의 가치를 높이는 사회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혹 인간미가 결여된 사회가 된 들 어떠한가?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들을 선택했을 것이고, 스스로 그것에 적응해 나갈 텐데. 우리에겐 우리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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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썼던 프랑스 관련 교양 과제에 냈던 거. 어린 생각이다만 나는 동거의 효율성 만큼은 긍정하는 편... 동시에 그에 대한 편견도 물론 가지고 있는 기묘한 상황. 아무튼 내가 한다고 하면 그전에 우리 엄마가 날 죽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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