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사과 (창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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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소설을 참 오래전부터 읽었다. 어떤 면에서 그 인터넷 소설들은 참 중독성이 있었다. 딱딱했던 소설을 벗어난 빠르고 간결한 문체, 급한 진행, 시제가 지켜지지 않는 문장들 등 모두가 날 흥미롭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 싶었다. 내가 그동안 지켜왔던 소설을 보고 쓰는 방식들이 인터넷 소설을 봄을 통해 망가져가고 있었다. 나는 멈춰야 할 때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멈췄다.

  이번 소설 『미나』를 펼쳤을 때 내가 느낀 당황스러움 여기에서 기인한다. 인터넷 소설의 생 날것같은 느낌이 소설 전반에 흘렀기 때문이다. 작가인 김사과의 나이가 어리고, 인터넷에 소설을 기재해 보았다는 이력 때문에 그런 것일까? 『미나』는 기존의 발행되었던 책들과는 달리 인터넷 소설의 느낌을 매우 강하게 띠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것이 불쾌했다.

  현재형으로 일관된 소설은 읽기에는 매우 수월했다. 마치 내가 수정이나 미나가 된 듯이 바로바로 읽어 내려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인터넷 소설의 감성은 날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사회 시스템을 위협하는 미나와, 그것의 존재를 극사회적인 존재 수정. 그리고 모두의 방관자 민호. 모두가 정신병자처럼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P시는 실제 우리 사회의 교육열과 인간을 사회의 부속품처럼 보는 현실을 극대화한 장소이다. 십대의 일상에 가장 밀접하고 첨예하게 대두되어 있는 사교육 문제는, P시를 통해서 극단적으로 그려내어진다. P시의 사교육 시스템은 공립학교 시스템을 비웃으며 학생들에게 계급에 따라 분리하여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학교 교육을 대안하여 등장하였다기보다, 어릴 때부터 평등주의의 논리를 거절하게끔 만들어버리는 불평등의 장소이다. P시의 모든 것은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파악되고, 그들의 삶에 있어서도 이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학생들의 부모들이 이에 대표적으로 투영되는 인물들인데, 미나나 수정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대신 그것을 돈으로 때우려 든다. 학원비를 주고 용돈을 주면 그들의 역할이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런 비뚤어진 P시의 모습은 그 근저에는 한국의 현실 사회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불쾌한 현실이 제시되었다면 이제 그것이 해소되어야만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은 예상과 달랐다. 이 사회체제에 완벽히 적응하고 있는 미나, 수정, 민호의 관계는 친구로 등장하지만, 미나의 옛 친구인 박지예의 죽음으로 인해 이 관계가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게 했던 사회 안에서의 위치는 깨어지고 만다.

  수정은 P시의 사회에서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는 인물이다. 아니, 어쩌면 완벽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는 시종일관 구토하면서 P시가 제시하는 교육시장의 열기를 따라잡으며 불평등의 사회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인물이다. 이미 10대인 그녀는 P시의 이러한 열기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을 벗어나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수정에게 있어서 미나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시기의 대상이다. 미나는 융이나 들뢰즈 같은 철학자의 이름을 줄줄 꿰는 모습을 보여주어 자신의 지식수준을 비교하게 만드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금전적인 입장에서도 자신의 우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수정은 미나를 친구라 여기며 한없이 매달렸음에도 한 순간에 그녀를 적으로 인식하여 반대의 입장으로 돌려버렸다. 그 일말에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은 수정이 가지고 있었던 상대적인 결핍과, 불평등의 사회에서 미나보다 하위구조에 위치하였다는 자존심의 패배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소설을 읽던 초반에는 미나를 수정과 다르지 않은 존재로 인식했다. 그녀의 행동거지 어느 한 군데 수정보다 특이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지예의 죽음 이후 미나는 P시의 안티테제로 등극한다. 박지예의 죽음에 영향 받지 않고 P시의 사회구조 속에서 계속해서 똑같이 살아가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미나는 박지예의 죽음에 크게 흔들린다. 그리고 그로 인해 P시의 논리와 반대의 입장에 서서 그곳을 벗어나 버린다.

  이 변화는 긍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억압되고 비뚤어진 P시의 논리는 소설 바깥쪽에 위치한 내게는 부숴야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P시는 사회구조를 흔들어놓는 미나의 존재를 용서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틀에 맞추어 키워낸 수정의 존재를 통해 미나를 제거하는 극단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태까지도 미나를 부러워하고 시기의 대상으로 놓았던 수정은, 이 사회를 벗어나려 하는 미나를 보며 두렵다고 느끼며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녀를 닮아가고 싶어 하면서도 닮을 수 없는 자신을 느낀다. 여태까지는 그나마 미나와 자신을 동일 선상에 두고 같은 존재로 느꼈지만, 미나가 사회를 이렇게 벗어난 순간에서부터 수정은 그럴 수가 없어졌다. 미나는 이제 더 이상 친근한 존재가 아니며, 자신과는 다른 존재이다. 구토를 해가면서까지 P시에 간신히 맞춰가고 있던 수정은 자신과 다르게 이 사회를 쉽게 빠져나가는 미나의 존재를 용서할 수 없다. 그 자신이 억지로 그 틀에 밀어 넣어지며 긍정했던 P시의 논리가 부정되어지면, 수정 자신의 존재 또한 부정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수정과 미나로 대두되는 이러한 대립은 인간을 가두려는 사회와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상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소설의 또 다른 인물인 민호는 두 시선을 지켜보고 있는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수정의 미나 살해계획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것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점에서 사실 수정보다 더 P시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미나를 살해한 수정을 보며 미소를 던지던 민호는, 내게 수정 이상으로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이상한 소설이 도착했다’는 김영하의 말처럼, 『미나』는 정말 이상한 소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선함이 모두에게 맞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는 맞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구세대의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어느 정도는 형식과 서사가 괜찮은 소설을 읽고 싶었다.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수정의 미나 살해과정에서 있던 현실들의 모습이 그저 답답하고, 어째서 현실세계의 탈출이 이런 방식으로 좌절되어야만 했는지 불쾌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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