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문(이청준문학전집:중단편소설 6)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청준 (열림원,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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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잡이」를 보다 보면 이청준의 또 다른 소설인 「줄광대」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구성의 모습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두고 보면 「매잡이」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방식이 존재한다. 액자형 소설인 「매잡이」는 그 틀에서 ‘나’와 ‘민태준발견할 수 있으며, 액자 안에서 ‘곽 서방’과 ‘버버리 소년’을 발견할 수 있다. 액자 틀과 액자 안을 넘나드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 듯 해 꼭 인물들의 위치를 규정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또, 이 소설은 액자형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이야기보다 액자 틀에서의 이야기와의 연관성이 더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다.

  「매잡이」에서는 세 가지 작품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이미 발표한 ‘나’의 작품이고, 두 번째는 ‘민태준’의 유작이며, 세 번째는 지금 소설의 액자 틀이 되는 이야기이다. 시간 순서대로 본다면, 지금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가 앞선 두 작품을 통틀어 서술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 작품의 연관 관계를 통해서도 많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겠다. 특히 민태준이 남긴 소설과 지금 ‘나’가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의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매잡이」는 시대의 기류에 편승하지 못하고 전통을 고수하다 스러져 가는 이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매잡이는 한때 몹시 흥하던 직업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매잡이라는 직업은 그 의미를 잃게 되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해결책은 새로운 직업을 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곽 서방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곽 서방이야 말로 자신의 직업에 소명의식을 굳게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은 시대에 편승치 못하는 그의 모습 때문이다. 이전엔 매잡이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서 노인마저 그를 나무라는 것에서 매잡이의 현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매잡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곽 서방에게 매잡이는 모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매잡이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매잡이라는 직업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든 매잡이는 존재 가치가 없어져버린 직업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꾸준히 이어나가려는 사람이 있다. 이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매잡이는 어쩌면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소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 매잡이를 계속 이어나가려는 사람을 통해 보여지는 소명의식일 것이다. 스러져가는 가운데서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며, 매잡이만을 자신의 천직으로 생각하는 곽 서방의 소명의식. 그것이 매잡이라는 직업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곽 서방이 식음을 전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반항의 표현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곽 서방의 반항의 대상이 약간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다른 집도 아니고 하필이면 서 노인의 집 헛간에서 죽음을 맞이하려 드는 행동은 왜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전에 매잡이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지금은 매잡이인 자신을 구박하는(곽 서방을 챙기려는 행동이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구박하는 듯한 행동이다.) 서 노인에게의 불만을 나타내려 한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거처에 관해서는 그저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차라리 곽 서방의 반항의 행동에서 그 의미를 찾고 싶다. 그의 식음을 전폐하는 것은 일종의 한 반항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반항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 반항의 대상은 어쩌면 매잡이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것 일수도 있고, 매잡이를 더 이상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으며, 세상의 기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명확한 한 가지 이유를 집어내긴 힘이 드나, 어찌 되었건 곽 서방의 단식은 반항의 일종인 듯 하다.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단순하게 소명의식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여기서 민태준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매잡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민태준, 즉 민형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평생 소설에 대한 연구만을 했을 뿐 소설을 발표한 적은 없는 민형. 그런 그가 자살하기 전 ‘나’에게 취재 여행을 강권한다. 그런 민형의 권유로 인해 ‘나’는 매잡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민태준은 왜 죽기 전 나에게 그러한 권유를 했을까. 그 이유는 그가 남긴 유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곽 서방의 죽음을 예견한 민태준의 유작은 단순히 미래를 예측한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필연성과 개연성을 잘 잡아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민태준이 점쟁이가 아닌 이상 어떻게 미래의 모습을 그렇게 잘 그려낼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민태준의 현실을 바라보는 능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그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나’를 취재 여행에 보낸 것 같다. 자신이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까지 설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다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민태준이 그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자살을 실행했다는 점에서 민태준은 자신의 작품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자신의 눈으로 그 결과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닐까. 이러한 모습은 곽 서방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의 유작은 곽 서방과 민태준 자신을 동일성을 통해 탄생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소설을 위해 취재는 하되 소설은 결국 쓰지 못했던 민태준이 더 이상 매를 잡아 살아갈 수 없는 매잡이와 동일시되어 비춰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음에 답답함을 느낀다. 민태준과 곽 서방의 대화 부분이 특히 그러했다. 매를 아끼느냐는 민태준의 질문에 곽 서방은 스스럼없이 매를 아끼고 있다고 대답한다. 민태준이 학대와 굶주림과 사역만이 가득한 매를 부리는 방법만이 매를 부리는 방법의 전부냐고 묻는 장면에서, 곽 서방은 매의 몸짓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에 대해 되물으며 민태준을 죽이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솔직히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곽 서방은 민태준을 죽이고 싶다 말하는 것일까. 이 부분이 중요한 시사를 나타내고 있다 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기 힘드니 답답할 따름이다.

  「매잡이」는 간단하게 읽기 어려운 소설이었다. 나는 「매잡이」를 읽으면서도 그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이 들었다. 나 자신의 억측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면 많았다고 하겠다. 액자 속의 내용과 액자 겉의 내용이 서로 얽혀 있는 부분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설 내의 세 가지 종류의 매잡이 소설이 등장하는 것도 그 뜻을 알아내기 힘들었고 말이다. 내가 해석한 것이 맞는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매잡이」는 어떤 의미에서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한 이청준의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언젠가 이 소설에 대해 더 연구하고 이해할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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