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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과 머저리」는 전형적인 액자형 소설이다. 다른 액자형 소설에 비해 조금 더 특이한 점은, 내부의 이야기가 현실의 모습을 비추는 듯한 가상의 소설이라는 데 있다. 그 소설은 액자 틀에서 존재하는 인물인 형에 의해 그려지고 그의 동생을 통해 전달된다. 액자 안을 구성하는 형의 소설은 현실이 아니지만, 읽는 이들은 이것이 현실에 바탕을 둔 소설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주인공인 ‘나’는 무기력 증에 걸린 듯한 청년이다.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계획은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의 여자친구인 ‘혜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느낄 정도로 무감각하다. 그는 마치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자유가 억압된 시대, 그 때의 전형적인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또 다른 인물인 ‘형’은 6.25를 겪은 인물로서 현실을 잘 살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나, 자신의 환자가 죽어버린 이후 모든 일을 관두고 소설을 쓰고 있는 사내이다. 그는 시대의 혼란을 직접 겪은 이로서 소설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혼란을 해결하려는 것 같다. 이 둘의 모습은 형과 동생 세대에서 대비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정신적 환부를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의 차이를 보여준다.
형에게는 뚜렷한 정신적 환부가 있다. 그가 소설을 쓰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환부를 찾아 서술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그의 정신적 환부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 6.25를 겪으면서 남게 된 죄책감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이 6.25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있다.
동생에게는 뚜렷한 정신적 환부가 없다. 그런데 통증은 있다. 환부가 없되 통증은 있다는 말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기 고뇌의 원인과 그 책임을 찾을 수 없는 그 시대 젊은이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혜인’의 말에서 통증 없는 환부를 가진 동생의 모습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전쟁을 겪음으로서 자신의 명확한 정신적 환부를 알며 그것에로의 책임 전가를 통해 환부를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는 형의 세대와는 달리, ‘동생’의 세대는 그렇지 못하다. 형과 ‘동생’이 갈등을 겪는 것은 이런 세대간의 차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동생이 형의 소설을 읽으면서 욕을 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안의 나’는 과거의 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설을 읽는 동생의 모습으로도 보인다. 오관모와 김 일병 사이에서 ‘소설 안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방관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김 일병의 몸이 썩어가는 상황에서 그는 오관모를 죽이지도, 김 일병을 죽이지도 못한다. 이것은 과거에 형이 겪었던 딜레마의 모습이며, 현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나’와 ‘형’과 ‘소설 안의 나’는 동일성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의 소설은 미완인 채로 오랜 시간 유지된다. 그것은 소설을 읽는 나를 답답하게 만들어 결국 소설의 끝을 쓰게끔 만든다. 현실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동생이 소설에 그만큼 집중했다는 뜻일 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가 소설의 결말을 스스로 썼던 것은 ‘소설 안의 나’와 ‘나’를 동일시해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형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정신적 상흔을 해결하려 했던 것과 비슷하게 나 또한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정신적 환부를 찾아내고 그것을 자기 식대로 해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가 맺은 결말은 ‘소설 안의 나’가 김 일병을 죽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상황을 직접 겪지 못한 나가 취하는 해결책이며, 형에게는 탐탁치 못한 것이 된다. 형에게 나는 뚜렷함이 없이 무기력하기만 한 수동적인 인간으로 보이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형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과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곧, 나가 맺은 결말은 이전에 자신이 했던 행동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곧 형은 과거 김 일병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오관모가 김 일병을 죽이는 것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가엾은 김 일병을 왜 죽이느냐고 나에게 소리치는 장면에서 그가 가진 죄책감을 보는 듯 하다.
형은 과거의 죄책감으로 인한 환부 때문에 소설 쓰기를 시작했으나 쉽사리 그 끝을 맺지는 못했다. 과거의 상처를 쉽게 극복하기에는 그 환부가 크기 때문이며, 그의 죄책감을 해소할만한 용기와 독한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형이 구걸하는 소녀의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바로 형이 독한 마음을 먹고자 저지르는 행동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라도 오관모를 응징하고 싶어 하는 형은 그 일을 마음먹기 위해, 그리고 소설로 쓰기 위해 이러한 일을 벌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형에게 오관모를 응징하는 것은 형이 과거에 가졌던 죄책감을 덜 수 있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형에게 정신적 환부를 남긴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형은 어떤 결말을 택하는가? 형이 쓴 소설의 결말은 오관모가 김 일병을 죽이며, 뒤따라 ‘소설 안의 나’가 오관모를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은 형의 상흔의 치료이다. 과거에 형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을 ‘소설 안의 나’로 하여금 대신하게 함으로서 본인의 상처를 치료하려 했던 것이다. 형이 과거에 오관모를 죽이지 못했던 것은 ‘혜인’의 남편이 오관모라는 암시를 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소설에서는 ‘소설 안의 나’가 죽인 것으로 나오는 오관모가 멀쩡히 살아서 ‘혜인’과 결혼식을 한다. 이를 통해 과거에 김 일병을 오관모가 죽인 것까지를 사실로 볼 수 있으며 그 이후의 일은 형의 바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형의 정신적 상흔의 완벽한 해소가 형이 소설을 불태우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소설을 쓰고 그것으로 어느 정도의 정신적 상흔의 해소를 이루었지만, 결국 오관모는 살아 있으며 소설은 그저 형의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상처를 명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겨내려 했다. 그의 관념의 성은 무너졌지만, 정신적 상흔을 해소하려 들었던 용기는 그에게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형’과 ‘나’의 갈등은 어쩌면 총체적인 ‘나’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이 나의 모습과 행동에 분노한 것은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찌 되었건 간에 형은 자신의 정신적 상흔을 해결하였다. 그는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 확연한 자신의 정신적 상흔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정신적 상흔의 해결이 비교적 쉬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환부만을 안고 있다. 소설 끝에서 나는 그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허비될 것을 말한다. 나의 아픔 가운데에는 형에게서처럼 명료한 얼굴이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는 그의 정신적 환부를 이겨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을 안다. 작가는 뚜렷함이 없는 나를 통해 그 시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나 또한 명확한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이 막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듯 하여 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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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과제. 읽으면 끕끕해져서 많이 좋아하진 않는다. 내 인생 같은 이야기들은 읽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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