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라는 장르를 통해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가는 흔치 않다. 요즘 사람들은 시집을 잘 사보지도 않거니와 이전과 같이 깊게 시를 읽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세태 속에서 성공한 작가로는 류시화나 안도현 등을 들 수 있다. 내가 살펴본 시는 안도현의 시이다. 안도현은 대중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인으로서 낮게 평가되지는 않는다. 안도현의 시가 대중성을 획득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안도현의 시는 기본적으로 짙은 서정성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정情에 약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시라도, 마음에 조근 조근 다가오는 말이라면 좋은 반응을 보인다. 안도현의 시는 대부분 독자의 이런 마음을 파고드는 서정적 느낌이 강하다. 그의 대중성은 이런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안도현의 시는 서정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안도현의 시는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자아성찰을 담고 있다. 그러나 자아성찰의 시가 무조건 좋은 시가 되지는 않는다. 어떠한 형태의 은유로 형상화 되는 가에 따라서 자아성찰의 시는 좋은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는데, 안도현의 시는 추상적 진술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세상의 구체적 사물을 선명하게 독자에게 드러낸다. 요컨대, 「너에게 묻는다」의 연탄재의 모습, 「연탄 한 장」의 연탄의 모습. 또 「우리가 눈발이라면」에서의 함박눈의 모습 등을 통해 독자는 구체적으로 그 이미지를 머리 속에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그의 시에 나타난 자아성찰은 자신을 반성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만드는 자기 다짐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찬밥」에서 화자는 자신을 찬밥에 비유하나 나중에는 국밥이 되고 싶다. 곧, 국밥이 되겠다. 라는 말로 자신의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독자는 시인이 내미는 자아성찰과 자기 다짐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시를 보기에 이런 자아성찰과 다짐의 모습은 읽는 이에게 호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안도현의 시는 주변 사물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것은 모든 시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이 기본적인 덕목이다. 그러나 여타 시와는 달리, 안도현의 시는 사람들이 공감하기 쉬운 방식으로 주변 사물이 서정적으로 변환됨으로써 독자의 마음에 한결 쉽게 다가선다. 그는 객관적 대상을 사랑과 이해를 통해 바라보아 사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한다. 앞서 말했든 한국인은 정에 약하다. 안도현의 시에서 나타난 사랑과 같은 감정을 통해 재창조된 사물들은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도현의 시에서 나타난 재창조된 사물들은 서정성을 담고 있다고 했다. 서정적 감정을 가지는 기본적인 주체는 인간이다. 요컨대, 안도현의 시에서 재창조된 사물들은 인간이 가진 감정의 모습을 담고 있다. 「겨울 강가에서」를 보자. 눈발이 강물에 들어가 녹는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은 시인을 통해 강물이 애틋한 사랑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여기서 눈발과 강물의 하나 되는 통합은 마치 사람의 그것과 같다. 그러므로 독자는 사물의 모습을 보더라도 자신들의 모습을 보는 것 마냥 느낄 수 있게 되고, 서정성은 여기서 또 한번 획득되는 것이다. 「바닷가 우체국」같은 경우에서 보아도 바닷가의 쓸쓸한 우체국이라는 그리움과 기다림이 공존하는 공간을 보여주면서 독자의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환기시켜준다. 서정성의 획득은 인간과 같은 감정에만 의지하지는 않는다. 「고래를 기다리며」에서 시인은 고래와 바다라는 개체와 개체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보여주며 생명의 내적 연관성과 만물의 상호 교류성을 나타내고 있다.
 
   안도현 시의 서정성은 감정의 무절제가 아닌 사회문제와 개인 서정의 결합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연민과 동정이라는 인간애를 통해 민중 공동체의 모습과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전봉준 보다는 주변의 민초들의 모습에 집중하여 시를 전개함으로써 민초의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며, 마지막 연의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라는 같은 말로 민중 해방을 위한 길의 제시 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직접적 제시가 있는 이 데뷔작 외에도 「우리가 눈발이라면」에서의 상처 입은 모든 이에 대한 간절한 느낌의 사랑의 호소에서도 이것은 나타나며, 「찬밥」에서와 같은 소망의 표현, 「겨울 강가에서」와 같은 사랑의 장면 제시 등을 통하여서도 이것은 잘 나타나고 있다.

  나는 안도현의 시보다는 소설을 먼저 접했다. 소설 「연어」였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했던가. 그에 걸맞게 「연어」에서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이 재미있는 이야기 통해 교훈을 전달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그의 시를 처음 접했던 건 「너에게 묻는다」였다. 짧은 구절이었지만 마음에 큰 의미로 다가왔다.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반성을 쉽게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안도현의 시는 어렵지 않다. 그것이 참 큰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것은 일단 피하고 보는 요즘 세대에게 이것은 쉽게 교훈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지 않는가. 물론 어려운 것을 피하는 세태는 수정되어야 할 만한 것이지만 말이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쉬이 마음속으로 다가오는 안도현의 시는, 꽤 오래토록 베스트셀러로서 유지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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