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타
감독 애드리안 라인 (1997 / 프랑스, 미국)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도미니크 스웨인, 멜라니 그리피스, 프랭크 란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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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원작 소설인 '롤리타'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집에 있긴 있는데 엄청 좋아서 산 것이라기 보다는,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안 읽고 반납하기를 두 번 한 끝에 오기가 생겨서(혹은 또 빌리러 가기 귀찮아서) 샀었다. 그냥저냥 끈덕지게 중간까진 읽었었고 중반 이후로는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책장에 남겨두고 있지만, 롤리타란 소설이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을 만큼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려고 한 건 역시 제레미 아이언스 때문인데(...) 결과물로만 보면 원작을 잘 반영한 괜찮은 영화가 나온 것 같다. 험버트(제레미 아이언스)가 내 생각보다는 훨씬 잘생기고 멀쑥한 남자로 나온 것 말고는 그 성격은 꽤 비슷했던 데다 롤리타(도미니크 스웨인)나 샬롯 헤이즈(멜라니 그리피스)의 묘사는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꼭 들어 맞았다. 나름 중요한 인물인 퀼티(프랭크 란젤라)도 적당히 가려져있으면서 존재감을 나타내는 캐릭터로 알맞았다고 생각한다.

  신기하게도 내용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원작인 소설보다 '덜' 역겨운데 이건 주인공의 외모 탓도 있겠지만서도, 롤리타를 만나기 전 험버트의 인생이 거의 나오지 않은 탓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그 부분을 읽을 때 아주 짜증이 났었거든. 어릴 적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끝내버림으로써 역겨움은 상쇄되긴 했는데 험버트가 어린 소녀를 좋아하게 된 동기나 그 내면에 깔린 질척질척한 배경들이 잘 나오지 않아서 그 부분은 아쉽다. 그 장면들이 역겹긴 했어도 험버트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엔 가장 도움이 되었었다.

  초반에는 험버트에게 운이 따라주는 듯 하지만, 어쨌거나 험버트에게 남은 건 잔혹한 파멸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안다. 험버트는 그걸 막기위해 애쓰지만 그의 시도들은 실패로 끝날 뿐이다. 실패로 끝나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리 자상한 모양새로 돌로레스 헤이즈, 롤리타를 감싸안으며 사랑한다 외쳐도 결국 그는 페도필리아를 가진 남자일 뿐이니까. 성장하는 아이를 가둬둘 순 없다. 롤리타는 아주 잠시동안 험버트의 손에 있었을 뿐, 어떻게 해도 달아나게 되어 있었다.

  롤리타의 성격은 소설을 보기 전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은, 성인 남성에 위협받는 아이상(象)은 아니다. 자유롭고, 제멋대로이고, 때로는 버릇없고 난데 없어 험버트를 당황하게끔 만드는 존재이다. 그런데... 어떤 세상의 어떤 사춘기 아이가 그렇지 않을까? 사실 롤리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녀들의 성격과 같았다. 험버트의 시선에서 험버트가 당황하는 꼴을 보고 있느라, 그녀가 영악하고 발랑까진 소녀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모두가 명심해야 한다. 롤리타는 명백한 피해자다. 여름캠프에 간 새 엄마를 잃고 의지할 데라고는 자신을 더러운 시선으로 핥아대는 험버트밖에 남지 않은, 고작 열몇살 남짓의 꼬마애라는 걸. 소설이나 영화나 이 점을 아주 자연스레 잊게 한다. 험버트가 롤리타에게 "그 남자가 누구냐, 제발 알려줘" 라고 울면서 섹스하는 장면은 일면 험버트가 불쌍하다고 느끼게 하지만 사실 그건 강간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롤리타가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곤 고작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것 뿐이었으니까.

  영화는 감옥에서의 이야기가 아닌 퀼티 살해 직후의 험버트로 앞, 뒤를 장식하고 있는데, 그건 험버트가 운전을 하는 장면이다. 비뚤비뚤 흐느적하게 도로를 지그재그로 질주하는 험버트의 차는 험버트의 마음이며 험버트 그 자신 같아 보였다.

  책과 비교해서 보기 괜찮았던 영화였다. 전반에 깔려있는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내용은 책을 읽었을때와 마찬가지로 끕끕하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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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지
감독 루이 말 (1992 / 프랑스, 영국)
출연 줄리엣 비노쉬, 제레미 아이언스, 루퍼트 그레이브즈, 미란다 리차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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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때 본 탓에 대충 내용을 다 알고 있었고, 끝나고 나서의 그 불쾌함도 알고 있어서 다시 보기 힘들었다. 내가 제레미 아이언스 아니면 이 영화 다시 볼 생각도 안했겠지. 아무튼 보려고 마음먹고 정보를 찾아보다 보니(어차피 내용을 다 아니까 스포일러 당할 것도 없었고) 이 영화가 가장 우스운 정사 장면이 담긴 영화 2위로 뽑힌 거다. 1위는 쇼걸인데 안봐서 모르겠고, 다 본 다음에 느낀 건... 이게 왜 1위가 아니지.
 
  장난이 아니라 진짜 세상에서 가장 웃긴 정사신이었다. 총 다섯 번의 정사 장면이 나오는 데 안 웃긴 건 마지막 거 한 개 정도...? 나머진 진짜 보다가 내 머리가 꽝꽝 얼어붙을만큼 우스웠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노력하고 진지하게 연기하긴 하는데,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가 너무 통나무같아서 서로 짝이 안맞는다. 장면이 뭔가 작위적이기 짝이 없어서... 정말 일말의 에로티시즘도 느껴지지 않아서 곤란했을 정도. 고 속에 담겨있는 감정이야 어렴풋이 알겠다면 보여지는게 이렇게 우스워서야 잘 전해지지 않는다고...

  내용 자체도 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타입인지라 보는 내내 힘들었다. 한 마디로 사랑에 빠지고 눈이 멀어서 자기 인생 뿐 아니라 남의 인생까지 말아먹는 이야기. 애당초 아들의 연인과 바람을 피우는 남자가 행복해질 수 있을 리 없지만, 이 이야기의 끝이 더 찝찝한 건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너무 찝찝하게도 이 모든 죄의 대가는 스티븐(제레미 아이언스)만이 받고, 안나(줄리엣 비노쉬)는 유유자적하게 그 모든 비극의 틀안에서 빠져나갔다. 스티븐은 그만한 대가를 치뤘지만 안나가 받은 죄가 없어서 아쉽다. 엉뚱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잔뜩 간 것도 그렇고 말이다.

  둘의 사랑에 관해서도, 스티븐 쪽은 진실성이 있어보이지만 안나 쪽은 일말의 죄책감뿐 아니라 사랑까지 없어보인다. 묘하게 정상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캐릭터라는 느낌이 가득했다. 마틴(루퍼트 그레이브즈) 뿐 아니라 스티븐을 사랑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이 캐릭터에겐 열정이랄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비뚤어진 사고방식과 남을 파괴하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같은 표현 밖에는. 마틴이 죽었을 때 알몸으로 계단을 뛰어내려가 마틴을 끌어안고 울던 스티븐과 달리, 안나는 유유자적하게 그 자리를 떠버리는데 이 장면은 소름끼쳤다.

  오빠와 나? 우린 늘 함께였죠. 세계 각국을 다니며 외국어를 배웠어요. 오빠와 난 점점 가까워졌어요. 우리에겐 우리 둘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오빠를 사랑했죠. 오빠는 제가 자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절 놓아주려 하지 않았고 소유하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전 그 어떤 소유욕도 두려워하게 됐어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을요.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났었죠. 오빠가 저 때문에 자살했어요. 전 결정을 해야 했어요. 저의 파멸을 막아야 했거든요. 전 이겨냈어요.
 이걸 잊지 마세요. 상처 받은 사람들은 위험해요. 그들은 생존하는 법을 알죠.

  영화 중반에 안나가 자살한 오빠에 관해 털어놓는 장면이다. 이런 오빠에 관한 이야기는 후에도 몇 번 더 드러나는데, 글쎄... 이런 설명을 듣고 안나가 왜 저렇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너의 생존하는 방법이라는게 그거냐고 묻고 싶었다. 설득력이 없는 캐릭터 배경이라서 현재의 행동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나 보다.

  그냥 볼만한 건 제레미 아이언스와 미란다 리차드슨의 연기 정도. 스티븐이 한참 안나에게 빠져 있을 때의 그 초조함이나 마음 속에서 찐득하니 눌어붙어있는 열망, 욕구의 표현등이 섬세하게 드러나서 그건 좋았다. 예를 들명 벨기에 출장지에서 파리로 무작정 야간열차를 타고 가, 호텔에 있는 안나에게 전화하던 장면. 수화기를 매만지고 수화기가 안나인 양 가만히 얼굴에 대는 조심스러운 모습이라던가, 파리 호텔의 건너편에 있는 마틴과 안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침대에서 온 몸을 뉘인 채 흐느끼는 장면 같은 것. 전반적으로 연기가 다 좋았지만서도 이런 안절부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들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미란다 리차드슨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부근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마틴이 죽고 난 후 잉그리드(미란다 리차드슨)가 스티븐에게 "왜 자살하지 않았느냐"며 오열하는 부분이 그랬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로 자식을 잃은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나체인 체로 "날 사랑한 적이 있냐"고 묻는 장면. 전자쪽은 완전히 폭발하는 장면이라 아 잘한다 싶긴했는데, 후자쪽은 오히려 차분하고 냉정하게 식은 느낌인데도 연기를 잘 한다는게 확 와닿았다.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는 말하고 싶지 않아... 캐릭터 탓이겠거니...

  시간이 지나서 생각하면 괜찮은 영화. 그런데 막상 볼 때는 그런 생각이 별로 안들었던게 신기했다. 영화의 분위기나 연기를 보면 괜찮다.

  HBO에서 2005년에 방영한 TV영화. 1부와 2부 둘로 되어있는데, 1부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헬렌 미렌)와 레스터 백작(제레미 아이언스)의 이야기가 주가 되었다면, 2부에서는 레스터가 죽고 난 뒤 그의 양아들인 에섹스 백작(휴 댄시)과의 관계를 주로 다루었다. 역사를 잘 아는 기무니와 함께 봤더니 중간중간 배경지식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ㅎㅎ

  엘리자베스 1세의 인생을 총조명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그려내려 노력한 이야기. 일단 연애의 이야기가 중심 이야기로 작용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그녀의 정치적 능력보다는 성격이 두드러져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게 1부에서는 조금 더하고, 2부에서는 에섹스를 다루는 그 솜씨 탓에 정치적 능력이 눈에 들어온다. 1부에서는 약하게 느껴지던 모습들이 2부에서는 뚜렷하겨 윤곽이 잡힌다고 할까... 즉위 30년 된 여왕의 힘이 느껴진다.

  1편에서의 엘리자베스의 인생과 관련한 이야기라고 하면 역시 결혼 이야기. 이건 물론 왕위 계승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중요했다. 충신(을 가장한 가장 아끼는 애인)인 레스터와는 결혼하지 못하는 상황이고, 여러모로 결혼 이야기도 밀려들어오고 해서 결국은 프랑스의 앙주 대공(제레미 코빌롤트)과의 혼담이 오가는데, 생각보다 둘이 말도 잘 통하고 어울렸는데 성공하지 못한 혼담이라 아쉽다. 이미 혼담이 오갈 시기에 앙주 대공과의 나이차가 상당했는데도 둘이 괜찮았다고 그러더라. 하지만 프랑스 쪽의 앙주 대공의 형이 이 결혼을 탐탁잖게 생각했고, 영국 쪽 또한 앙주 대공이 가톨릭교도라는 이유로 거슬려 했어서 오히려 외부 세력에 떠밀려 결혼하지 못했다고. 레스터 쪽에서는 한시름 놓을 일이었지만... 고 레스터도 몰래 결혼해서 애까지 생긴걸 들켜버려서 왕궁 출입을 금지당한다. 이 때 앙주 대공의 하인이 실수인 것 마냥 그 사실을 알리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었다. 기무니가 옆에서 "궁중암투로는 저 쪽을 당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러는데 조금 웃었다.

  아무튼 레스터가 왕궁 출입 금지당하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종교 문제로 로마에서 파문당하고, 스페인과는 전쟁을 치룰 위기에 처하고, 암살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앙주 공도 죽고... 하는 여러가지 문제가 겹치고 그래서 마음의 안식을 얻고자 레스터를 7년만에 불러내지만 뭐 달달한 연인으로 변신하진 않더라. 이전에도 이미 몇 번이나 거절당한 레스터가 이 쯤 와서는 아예 확실하게 '영원한 친구' 선언을 듣는 장면이 있었다. 불쌍한 레스터... 라는 생각도 많이 안 들었던게 결국 할 건 다 해먹었던 거 같아서. 아무튼 레스터가 돌아온 후에는 구교를 대표하는 스코틀랜드의 메리(바바라 플린)를 사형시키고, 그 때문에 스페인과의 전쟁이 발발하고 고런 일들이 이어진다. 영화에서는 네덜란드 전쟁에 장군으로 참여했던 레스터가 그걸로 인해 병세가 생긴 것 같은 것처럼 나오더라. 2편에서 에섹스가 전장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엘리자베스가 막으려고 하는 장면들은 이런 일에서 기인한 것이다... 라는 설명은 되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승리했지만 이어져 오던 병세 탓에 레스터는 죽는데, 그 오랜 시간동안 제일 총애받았던 레스터가 죽는 장면은 조금 애처로웠다. 죽으면서 자신의 의붓아들인 에섹스를 부탁하는 장면이 나오더라만... 뭐 그 부탁의 의미와 같은 방법으로 보살핀 건지는 모르겠다(...)

  2부에서는 레스터의 의붓아들인 에섹스와의 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을 덮고 있는데 1편보다는 확실히 더 재미있었던 게, 이 에섹스란 녀석이 너무 철이 없고 아기같다 보니까 엘리자베스가 오냐오냐 해주면서도 또 칼같이 잘라내는 진행이 보기 즐거웠다. 처음에 에섹스가 설치는 걸 어디까지 받아주려나 싶었는데 엘리자베스로서는 최대한 관용을 베푸는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왕 앞에서 칼을 뽑아들려는 장면까지 나왔으니 오죽하랴. 레스터가 자신의 능수능란한 정치방법은 가르쳐주지 못한 것인지, 에섹스에서는 그런 게 없어서 어린 풋내만 가득할 뿐, 막상 베어물면 텁텁하고 신 맛이 나는 덜 익은 사과를 보는 것 같았다. 버릇이 잘못 든 애가 어디까지 기어오르는 지 확실히 볼 수 있다.

  에섹스의 몰락에 대해서는, 추밀원의 다른 신하들이 에섹스를 굳이 계략에 빠뜨리려 했다기 보다는 에섹스 본인이 화를 자초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모함도 있기는 있었겠지만서도 이런 부분이 영화에서 너무 드러나니까, 그렇게 내쳐져도 할 말이 없어 보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니랄까봐 여자 임신시키고... 그것도 빼도박도 못하게 추밀원 의원 중 하나인 월싱햄 경(패트릭 말라하이드)의 딸이었다. 어이구. 그걸로 확실히 신임을 잃은 뒤로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게 없는 듯. 그 과정이 보면서 짜증도 나고 그랬던 게, 본인의 위치를 파악을 못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참 그랬다. 신임을 얼마나 잃었는지, 자기가 어떤 부분까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몰라서 너무 설쳐대니까. 그렇게 총애받던 남자가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서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죽는 것을 보곤 세상사 허무하구나 싶었다.

  고 뒤로 마음을 정리하고 통치에 힘쓰는 모습이 잠깐 나오고, 남은 건 죽음인데 엘리자베스의 죽음은 적절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 같다.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고(그 중 한명은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게 되었고) 가슴속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고목나무 같은 모습으로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선선하면서도 무겁게 다가왔다.

  덧붙이면 추밀원 의원들과 엘리자베스 여왕이 밀고 당겨대는 장면들도 꽤 재미있었다. 항상 나오는 세 명을 보는 재미가 있는데, 월싱햄과 윌리엄 세실(이언 맥디어미드)과 그의 아들 로버트 세실(토비 존스). 로버트야 후반부에나 나오니까 진중한 모습이 많았다 쳐도 앞의 두 사람은 여왕에게 실컷 얻어맞는 장면 같은 게 웃겼다... 그리고 그 진지한 로버트 세실은 여왕과 둘이 있을 때 '피그미'라고 불리워서ㅜ.ㅜ... 뭐 여왕이 나중에 가서는 애칭이라고 해주긴 했다만 본인 속이 좋진 않았을 것 같은데.

  기무니가 이쪽 왕들은 '일하는 기계' 같았던 반면 저 쪽은 휴식은 또 확실하게 취해주는 면이 있다고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파티라던가, 왕이 춤춘다던가 하는 장면들은 우리나라 배경에서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저 쪽 왕들에게 좀 더 자율성이 있었던 것 같다. 동시에 암살 위협도 배는 많은 것 같고... 종교 문제는 영화로만 봐도 골머리가 아프다. 그 쪽의 가치가 내 머릿속에 잘 박혀있지가 않다 보니까 왜 저런 걸로 싸워? 왜 남의 나라 일에 참견이야? 하는 부분이 있기도 했다. 이건 내가 그 쪽 사람이 아니어서 확실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배우들 연기는 말 할 것도 없이 좋은데, 특히 헬렌 미렌의 엘리자베스 1세 연기는 너무 좋았다. 온통 냉철하다가도 한 순간에 감정적이 되기도 하는 모습들. 얼음같다가도 화르륵 타오르는 모습들은 보는 내내 질리지가 않을 만큼 좋은 연기였다. 제레니 아이언스나 휴 댄시는 그 역할 때문인지 곱게 보이진 않았지만 각각 매력이 있었다. 제레미 아이언스는 진중할 땐 진중하면서도 어떨 땐 비열해 보이고, 치졸하기 짝이 없어보이는 변화를 보여줬고 휴 댄시의 경우엔 항상 열혈인 모습이었지만 마지막에 확 진지해진 모습을 보고 살짝 놀랐다. 추밀원 의원들은 다 연기가 좋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토비 존스의 연기가 좋았던 게, 어떻게 보면 무표정인데 거기에서 감정이 다 느껴진는 부분들이 있었다. 확실히 연기들은 흠잡을 데 없는 듯.

  쓰고보니 불평도 있은데 이것 저것 사건이 많아서 확실히 재미는 있는 편이었다. 연애 이야기랑 역사를 잘 편집해서 좋았다. 난 역사물을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다. 역사물에 관심있는 사람이면 훨씬 더 재미있게 볼 거라고 생각한다.

행운의 반전
감독 바벳 슈로더 (1990 / 미국)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글렌 클로즈, 프레데릭 노이먼, 펠리시티 허프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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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레미 아이언스 필모그래피 보니까 이걸로 상 많이 받았길래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네이버에서 간략한 스토리만 보고는 그냥 평범한 중년부부의 질린 일상을 담은 영환 줄 알았었는데 처음부터 그 예상을 바로 깨주시는 전개를 보여주었다. 오히려 스릴러라고 해야하나, 이리저리 머리 쓰게 하는 영화.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주고 답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여러 모로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았다.

  서니 본 뷸러(글렌 클로즈)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시점에서 이미 서니가 식물인간이 된 채이다. 아내를 살해하려 시도했다는 혐의로 1차 공판에서 30년형을 선고받은 서니의 남편, 클라우스 본 뷸러(제레미 아이언스)가 항소를 하기 위해 하버드 법학대학의 교수 알랭(론 실버)를 고용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클라우스와 알랭이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과 함께 일어났던 사건의 이야기를 듣거나 해서 재구성 된 장면들이 나타나는데 여타 수사물을 다룬 미국 드라마에서 많이 보여졌던 방식이기도 해서 그건 익숙한 편이었다. (저스티스가 생각났다. 변호인들의 이야기인데 고객의 입에서 나온 사실로 재현장면을 보여준다. 마지막에는 진짜 진실을 보여주고...) 다만 이러한 사건의 재현 장면들이 한 30 정도는 타인의 입에서 나온 증언장면의 구성이라 한다면, 나머지 70 정도는 클라우스의 입에서 나온 사실을 재현한 장면들이기 때문에 다소 클라우스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영화 끝까지 진짜 상황은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순전히 관객들이 자신의 머리 속에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물론 그것이 진실이라는 법도 없다. 클라우스의 증언을 듣는 알랭 또한 신뢰와 의심을 널뛰기하며 그를 판단해가는데 이것이 보는 관객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알랭이 인맥과 학생들을 동원해서 단시간 내에 항소를 준비하는 과정도 흥미진진 한 편이었다. 아마도 옛 연인이었던 변호사 사라(아나벨라 시오라)까지 끌어들여서 하는 일인지라 처음에는 여유가 있다가도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하고, 이런 저런 사건도 생긴다. 뭐 학생들이 따로 눈에 띄는 일은 별로 없는데 하나 있다면 처음에 변호를 돕는 일을 거부하겠다고 했던 학생 미니(펠리시티 허프만) 정도일까... 이런 미니가 나중에 가면 어떤 태도로 변하게 되는 지 보면 조금 웃긴다.

  클라우스라는 캐릭터가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캐릭터였기에 흥미가 솟았다. 처음에는 세상의 시선처럼 나쁜 사람으로 보여지다가도 그가 설명해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은 동정심도 솟고, 때때로는 한없이 다정해 보이며, 어떨 때에는 비열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다. 서니의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것, 바람을 피우는 관계 등을 스스럼없이 인정하는 모습이나 아내의 상황을 두고 연극같다고 말하는 점 등은 인간성이 결여되어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무표정한 얼굴로, 인슐린에 관한 농담(서니의 혈액에서 과다한 인슐린이 나타났다)을 한다던가, 알랭이 원하는 식의 감정 표현을 할 줄 모른다고 인정하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한없이 인간적이다. (또 미드 생각이 나는데, 일전에 보스턴 리걸에서 부자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여자가 나온 적이 있었다. 바람을 피우는 데다가 냉혈하고 감정 표현도 못하는 여자였고 그것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잔뜩 샀었다. 비슷하네...)

  완연히 클라우스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듯 하며 클라우스가 무죄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들다가 마지막에는 서니의 속옷차림을 두고 두 가지 상황을 예상 할 수 있게 된다. 처음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났을때 서니가 했던 말대로 "나도 좋고, 당신도 좋은" 상황을 클라우스가 만들었던가, 아니면 클라우스의 외도의 증거를 직접 목격하고 실의에 빠진 서니가 자살을 택했던가. 사라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하게, 그리고 증거대로 생각하기에는 클라우스가 죽였다는 쪽이 훨씬 말이 된다. 그러나 정말로 단순하고 억지스럽더라도 서니가 자살을 택했다는 것이, 알랭의 말대로 '단순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른다. 클라우스 본 뷸러만이 사실을 알 뿐이다.

  마지막에 약국에 간 클라우스의 모습에서, 약사에게 인슐린을 달라고 하는 모습에선 살짝 소름이 돋기도 했다. 굳어진 약사의 얼굴을 보며 "농담이에요."라고 말하는 클라우스의 모습은 장난스럽기도 하고, 소름이 돋기도 한다. 이전에 이미 몇 번 했던 농담이었다는 점에서 쉬이 넘어갈 수 있기도 하지만... 묘하게 껄쩍지근한 구석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화를 다 보고 위키피디아를 뒤져봤는데 이게 완전히 실화라서 이름까지 다 진짜더라. 서니 본 뷸러는 식물인간 상태로 살다가 2008년에 죽었다고 한다. 그 오랜 시간동안 식물인간인 채였다니 불쌍하다. 클라우스 본 뷸러는 지금 영국에서 예술작품이랑 영화 리뷰하면서 산다고. 재미있는 건, 클라우스가 서니의 유산을 딸 코시마를 위해 포기했다는 점. 서니의 어머니, 곧 장모가 분노한 나머지 유산 상속인 목록에서 코시마를 제외하자 코시마를 다시 상속인으로 만들기 위해 칠천오백만 달러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돈 때문에 서니를 살해했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 같기도 하고. 아 코시마가 상속받을 돈이 더 많으려나. 뭐 어차피 내 생각일 뿐이다.

  상을 휩쓸었던 제레미 아이언스의 연기는 아주 좋았다. 예민한 서니의 남편으로서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모습과 서니가 죽은 뒤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냉혈한의 모습... 여러가지 모습이 뒤섞였는데 우리로선 심중을 알 수 없는 클라우스라는 인물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준 것 같은 연기였다. 글렌 클로즈의 연기는 히스테리컬하고 예민한, 동시에 나약하기도 한 그런 모습들이 잘 나타나서 좋았음. 론 실버 역할이야 약간은 전형적이었는데, 클라우스를 신뢰하게 되며 보여지는 미묘한 변화들이 좋았다.

  재미있었다. 처음부터 혼을 쏙 빼놓았고, 진행 방식이나 스토리 모두 흥미 진진.


공주와 개구리
감독 론 클레멘츠, 존 머스커 (2009 / 미국)
출연 애니카 노니 로즈, 테렌스 하워드, 존 굿맨, 키스 데이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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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에서 최초로 흑인 공주를 내세운다기에 흥미로워 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다가 기무니랑 같이 봄. 오래간만에 디즈니의 2D 만화를 보니까 기분이 좋더라. 향수도 자극하고... 무작정 기술을 앞세운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살린 옛날 식 2D가 더 취향인 것 같다. 향수 자극... 물론 향수만 자극하면 안되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 기술 발전이 이러니 저러니 해도 왕도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걸 확실히 보여준 영화 아닐까.

  디즈니판 동화의 재해석이 들어갔는데, 공주와 개구리 원 이야기의 단순한 플롯을 화려하게 확장시켰다고 해야하나.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 티아나(애니카 노니 로즈)는 원래 공주가 아닌데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일중독 여자였다. 옆에 부자 친구인 샬롯(제니퍼 코디)이 있긴 하지만 라이벌 구도같은 걸 내세우는 건 아니고, 그녀와 자신의 인생을 비교해 우울해지는 일도 없다. 오히려 사이좋은 친구사이인데 둘이 같이 있으면 서로의 장점이 부각되어서 재미있다는 느낌이었다. 샬롯이 워낙에 애교가 많고 눈치가 없는 성격이기도 한데다, 이 영화의 티아라는 남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불행이나 행복의 크기를 재는 인간이 아니어서 말이지.

  보면서 비교가 되는건 오히려 나빈 왕자(브루노 캠포스)와 더 비교가 됐다. 똑같이 가난의 정점에 서 있지만(빈털털이 망나니 찌질이 왕자 나빈이시여) 그걸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니까. 처음에 그들이 완연히 대립하는 것만 해도 그렇고 투닥투닥 대는 꼴을 보고있으면 아 둘이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구나! 이걸 느낄 수가 있다. 그렇게 안맞는 둘이 만나서 서로에게 자신의 성격을 조금씩 양보해가면서 긍정적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처음엔 티아나가 평강공주처럼 바보온달 나빈을 교화시키는건가 싶었는데 뭐 그정도로 열정적이진 않고, 부지런한 티아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빈도 영향을 받고, 나빈을 통해 티아나는 일 뿐 아니라 사랑도 돌아볼 수 있게되는 윈윈 관계.

  공주와 개구리 원작도 판타지같은 이야기였지만, 거기에 더 판타지가 더해져 알록달록한 색채가 나타나게 된 거 같은 느낌이다. 디즈니식의 악역은 닥터 파실리에(키스 데이빗)이라는 부두교 신자가 맡고 있는데 뭐 악역의 역할이 크게 역할이 부각된 거 같진 않았다. 초점이 개구리로 변한 후 티아나와 나빈이 어떤 식으로 변해가는지에 더 잡혀있어서 그런가...

  티아나와 나빈이 개구리가 된 뒤 만나게 되는 친구들인 레이(짐 커밍스)와 루이스(마이클-레온 울리)들은 적당히 흥을 돋워주는 조연들이었는데, 활기차고 엉뚱한 건 악어 루이스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레이 쪽이 더 시선이 갔다. 힘없는 반딧불이지만 이반젤린을 향한 사랑을 믿고 있고, 친구들간의 우정도 배신하지 않으며 사랑을 지켜주려 애쓰던 캐릭터. 디즈니 답지 않은 결말을 맞았지만(...) 최종적인 결과를 보면, 뭐 그래 어쩌면 괜찮은 것 같기도.

  디즈니 최초의 흑인공주를 내세웠는데 결과가 제법 만족스러웠다. 자신의 상황에 굴하지 않고 꿈을 '스스로' 키우는 공주상을 보여준 건 정말 즐거웠고, 통속적이지 않은 왕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도 재미있었고. 음 좋았다!

베니스의 상인
감독 마이클 래드포드 (2004 / 미국,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영국)
출연 알 파치노, 제레미 아이언스, 조셉 파인즈, 린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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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일록 너무 불쌍해...... 감상 끝.

...이 아니고, 아니 그래도 진짜로 너무 불쌍했다. 마이클 래드포드의 베니스의 상인은, 주인공이 샤일록(알 파치노)이라고 해야 옳았다. 다른 이들은 거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안토니오(제레미 아이언스)와 베사니오(조셉 파인즈)의 눈물겨운 우정이니, 베사니오와 포시아(린 콜린스)의 사랑이야기니, 포시아가 남자로 변장해 판결을 내려주는 기지고 나발이고 샤일록만 불쌍하다.

  원전을 그대로 잘 해석했다는 평이 많지만 원전 자체가 불평등한 모습을 담고 있는 관계로 영화조차 불편하게 느껴졌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차별은 꼴사납다. 애당초 유태인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고서 고리대금업을 한다고 몰아세우는 작자들이 제대로 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거 같진 않지만 말이다. 차별의 근본조차 내겐 와닿지를 않아서. 내가 보기엔 어차피 한 뿌리인 것을(...)

  알 파치노의 샤일록 해석이 너무 좋았던 관계로 샤일록이 나오지 않는 장면에선 오히려 재미가 떨어지는 신기함이. 처음부터 유태인 지구를 나누고 빨간 모자를 씌워 유태인을 차별하더니, 안토니오는 더러운 고리대금업자라며 자신을 개라 부르고, 돈 빌리러 온 주제에 이자는 낼 수 없대서 살덩이 하나 걸고 돈빌려줬다. 끝까지 꼿꼿한 이 크리스천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딸년 제시카(줄레이카 로빈슨)는 그 크리스찬 로렌조(찰리 콕스)와 눈이 맞아 돈을 훔쳐 떠나버렸으니... 나라도 그런 복수심을 품을 것 같았다.

  나머지 캐릭터들의 설득력이 너무 떨어져서 샤일록에게 더 눈이가고 그랬다. 흥청망청 있는 재산을 탕진하고 친구의 돈과 살덩이를 걸고 아내를 맞으러(!) 떠나는 베사니오가 제일 꼴보기 싫었다. 그다지 능력있는거 같지도 않았고... 도대체 포시아는 어느 부분에서 베사니오에게 매력을 느꼈던 걸까? 알 수가 없다. 베사니오와 포시아의 시종인 그라티아노(크리스 마셜)와 네리사(헤더 골든허쉬)도 주인들처럼 한눈에 반했으니 딱 어울리는 주인과 하인의 짝들이다. 안토니오도 그렇지, 아무리 우정이 중요하다 한들 베사니오같은 치에게 돈을 빌려주다니. 안토니오와 베사니오의 관계는 둘만 있을 때에는 너무 노골적인 동성애가 들어있어서... 그래 뭐 사랑으로 감싸안으신건지.

  샤일록의 딸도 너무 마음에 안들었던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둘러싸고있는 상황을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아버지를 떠날 수 있느냐다. 그래 이것도 뭐 사랑으로 감싸안았겠지. 그래도 너무 짜증이 났다. 중간 중간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라던가, 영화 마지막에 가서는 후회나 회한에 찬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한들 용서가 안 되는 캐릭터더라.

  하이라이트인 법정 모습에서는 주변을 둘러싼 패들이 모두 샤일록을 욕하며 자비를 베풀라 말하는게 너무 가소로웠다. 먼저 자비를 베푼 적은 한 번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하대하며 멸시했던 자에게 자비를 바라는 건지 그 심리가 우스웠다. 자신들이 강할때는 자비를 주지 않으면서 약할 때에는 자비를 베풀라 간청한다니? 모든 상황이 변장한 포샤로 인해 뒤집혔을때 바닥에서 온 몸을 끌어안고 끅끅대는 샤일록의 모습은 세상 누구에게라도 동정심을 불러 일으킬 것 같았다. 자비, 그 놈의 자비를 백번은 외치다가 상황을 뒤집어놓고서 그런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들의 모습은 어떻고? 돈을 빼앗고, 목숨을 구걸하게하고, 종교까지 앗아가는 그들의 자비에 역겨움으로 속이 메스꺼웠다. 끝까지 유태인은 들어라, 라는 식으로 '유태인'으로 규정하는 것도 너무 이상했다.

  요새 제레미 아이언스가 너무 좋아서 본 거였는데 도저히 공감이 안 가는 캐릭터라서 보다 지쳤다. 법정에서 살덩이 베어내기 준비할 때, 기절하듯 쓰러지는 장면이 아름다웠다는 거 정도만 내 마음의 위안(...) 알 파치노는 연기 잘한다 잘한다 했지만서도 여기서는 진짜 사무쳤다. 빗속에서 딸 이름을 부르면서 우는 모습, 기독교인들에게 유태인들은 기독교인과 같지 않은가 하며 몰아붙이던 모습, 법정에서의 모습들. 모두가 완벽했다.

  연기도 좋았고 원전도 잘 살렸지만 내용에 있어서 내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많아서 보면서 힘들었다. 카타르시스가 아닌 스트레스가 쌓이는 영화라니.
2008/05/01 - 거미 여인의 키스 / 마누엘 푸익



거미 여인의 키스
감독 헥토르 바벤코 (1985 / 브라질, 미국)
출연 소냐 브라가, 윌리엄 허트, 라울 줄리아, 데니스 더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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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봐야지 하고 생각한 지 반년만에 보는 듯. 굉장히 고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85년작이면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화질이 내가 봤던 다른 고전영화들보다도 별로여서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당연히 원작은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

  나는 책이 더 낫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영화가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다. 책의 길고 함축적인 내용들이 영화 안에 다 밀어넣어지진 못했다는 느낌이어서 그랬던 것 뿐이고... 책을 본 사람도 영화만 본 사람도 괜찮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몰리나(윌리엄 허트)의 영화 이야기에서는, 몰리나와 발렌틴(라울 줄리아)과 관계된 이야기들을 골라 잘 담아낸 것 같고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몰리나의 말에 따라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를 보는 기분으로 볼 수도 있었다. 감옥 안에서 둘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변화해 가는지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거의 없지만 보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발렌틴의 태도 변화가 많이 느껴졌다. 뒤로 갈수록 몰리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진다.

  캐스팅이 잘 된것 같다. 게이인 몰리나 역할의 윌리엄 허트는 커다란 덩치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섬세한 감정 표현을잘 해줘서 좋았다. 소심하고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몰리나 역할을 너무 잘 해줬다. 아, 몰랐는데 윌리엄 허트 예전엔 붉은 머리였더라. 가늘가늘해 보여서 그 머릿결마저도 몰리나 같았다. 발렌틴 역의 라울 줄리아도 정치범이면서도 동성애에서는 관대하지 못한 마초의 느낌을 잘 살렸다. 처음과 끝의 느낌이 너무 달라서 신기했다. 이 분이 아담스 패밀리의 그 분이라니 믿을 수 가 없다(...)

  내용에 관해선 이미 책을 읽고 느꼈던 것들이 많아서 그런지 더 할 말이 없다. 괜찮은 영화였다.

데드 링거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1988 / 캐나다, 미국)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주느비에브 부졸드, 하이디 본 팔레스크, 셜리 더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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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알게 되었고 갑자기 보고싶어져서 봤는데 아 너무 재미있었다. 제레미 아이언스의 1인 2역 연기도 너무너무 좋았고, 이야기 진행도 흥미로웠다. 장르에 관해서는 스릴러다 공포다 드라마다 말이 많던데 뭐 딱히 구분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중요한 건 쌍둥이 맨틀 형제의 유대감과 집착, 자유를 원하는 심리 같은 것들이 아닐까. 난 오히려 드라마 쪽에 한 표를 들어주고 싶긴 하지만...

  나/너의 구분이 없는 엘리엇과 베벌리(제레미 아이언스). 남들은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이 쌍둥이 형제는 각자의 몸과 각자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어릴 때부터 섞어놓은 것마냥 같은 삶을 공유한다. 어릴 적에 가지고 있던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성공적인 산부인과의가 되는 둘은 나이가 제법 먹은 나이가 되었어도 함께이며, 여전히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다. 집, 직장, 기괴하게 여자까지도. 그 둘의 인생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샴 쌍둥이처럼 완전히 얽혀져 있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의 엘리엇과 수동적이며 내성적인 성격의 베벌리는 그렇게 독립성을 배제한 삶을 살아왔다. 못된 성격을 가진 형 엘리엇이 순한 베벌리를 부려먹는 것 같은 부분도 있지만(이런 우위관계는 엘리엇이 베벌리를 baby brother라고 부르는 데에서도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둘은 서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이 중에서 조금 더 '사악한' 엘리엇은 이런 상태에 만족하고 있다.

  문제는 베벌리로부터 시작된다. 이 상호의존적이고 종속적인 관계에서 한명이 만족을 얻지 못하고 벗어나려 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자궁이 기형이기에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배우 클레어(쥬느비에브 뷰졸드)와 만나게 된 이후 베벌리는 처음으로 형과 비밀을 공유하길 거부한다. 영혼의 샴쌍둥이였던 맨틀 형제가 처음으로 분리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들이 정신적으로 샴쌍둥이마냥 이어져있다는 사실은 아예 베벌리의 꿈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꿈에서 베벌리는 엘리엇과 배 부분이 연결되어 두려움에 질린다. 꿈안의 클레어가 그것을 잘라내려 시도할때 베벌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꿈에서 깨어난다. 이 장면은 실제 현실에서 그 둘이 샴쌍둥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정신적인 면에서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처음으로 이 관계에서 벗어나길 시도했던 베벌리가 이러한 악몽을 꾼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셋이 함께 만나는 식당 장면. 평소 엘리엇과 베벌리의 성격이나 관계가 그토록 잘 드러난 장면이 없을 것 같다. 클레어가 자신이 두 명과 데이트 했다는 사실을 알고 화를 낼 때 엘리엇은 불쾌해 하면서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베벌리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클레어에게 "사실 당신과 먼저 관계를 맺은건 나지만, 당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 동생에게 양보했죠(I was the one who fucked you first, but I gave you to my baby brother because you weren't very good.)" 라고 말하는 엘리엇의 말에서 그의 사고구조가 정말로 잘 느껴졌다. 클레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베벌리에게 물을 쏟아부었을때 엘리엇은 정말로 유쾌하게 웃지만, 그러나 막상 베벌리가 진심으로 상처받고 슬퍼하자 엘리엇은 "내가 그녀를 잡아올게. 모두 다 내 잘못이라고 말할게(Listen, I'll go and catch up with her. I'll tell her it was all my fault.)" 라고 한다. 베벌리와 클레어가 함께 하는 것이 탐탁치 않지만, 베벌리가 상처받는 모습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베벌리를 손에 쥐고 흔드는 듯한 엘리엇 또한 결국은 베벌리에 종속된 존재라는 걸 명확히 드러내주기 때문에 이 장면이 너무나 좋았다.

  클레어를 통해 이 관계에서 벗어나려 시도하는 베벌리보다 엘리엇이 더 이 관계에 얽매여 있기에, 우위에 있는 듯한 엘리엇이 사실은 한없이 약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엘리엇은 클레어와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잘 지낼 수 있다는 식으로 클레어를 유혹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때문에 이 셋의 관계는, 특히 맨틀 쌍둥이의 관계는 일그러져 갈수밖에 없다.

  서로에게서 떨어져가던 맨틀 형제가 다시 심각한 상호의존 상태로 돌아서는 것은, 분리의 시작이 그랬듯 베벌리를 통해서이다. 클레어가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한 이후로 베벌리의 삶은 비탄으로 빠져든다. 클레어와 만나면서부터 약간의 약물중독에 시달리던 베벌리는 이후로 완전한 약물중독이 되어버린다. 울면서 자신을 찾아온 베벌리를 보며 엘리엇은 다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지만, 이 약물중독은 끝내 베벌리를 완전히 망가뜨린다. 베벌리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엘리엇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비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부분쯤 가서는 베벌리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장면을 몇 가지 몰 수 있다. 캐리(헤이디 본 팔레스크)가 쓰러진 베벌리에게 인공호흡을 시도할 때, "만지지마, 걘 내 동생이야!(Don't touch him, he's my brother!)"하며 캐리를 밀쳐내고 자신이 인공호흡을 하는 장면이나, 아파서 누워있는 베벌리와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그렇다.

Elliot : Right, I want you to take. three of these now, take three around seven this evening, three before you go to sleep. and three when you wake up in the morning.
엘리엇 : 이 약을 먹어. 세 알은 지금 먹고, 세 알은 저녁 일곱시 쯤에, 그리고 세 알은 자기 전에 먹어. 그리고 다음날 일어나서 세알을 먹고.
 
Beverly : Yes, Doctor!
베벌리 : 네, 선생님!

Elliot : Can I trust you to do that, or have I got to sit here and watch you?
엘리엇 : 내가 널 믿어도 되겠어? 아니면 여기에서 널 지켜봐야겠니?

Beverly : I don't know. Can you trust me?
베벌리 : 글쎄. 날 믿을 수 있어?

Elliot : Oh, God! Don't do this to me, Bev.
엘리엇 : 세상에. 내게 이러지마, 베브.

Beverly : But I'm only doing it to me, Elly. Don't you have a will of your own? Why don't you just go on with your very own life?
베벌리 : 난 내게 이러는거야, 엘리. 형은 자신만의 의지도 없어? 자기 인생이나 살아가지 그래?

Elliot : Do you remember the original Siamese twins?
엘리엇 : 최초의 샴쌍둥이를 기억해?

Beverly : Chang and Eng. They were joined at the chest.
베벌리 : 창과 앵. 가슴이 붙어있었지.

Elliot : Remember how they died?
엘리엇 :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기억하니?

Beverly : Chang died of a stroke in the middle of the night. He was always the sickly one. He was always the one who drank too much. When Eng woke up beside him and found that his brother was dead. he died of fright right there in the bed.
베벌리 : 창은 한밤중에 뇌졸중으로 죽었지. 그는 언제나 약했고,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었어. 앵은 자다 일어나서 그의 형제가 죽어있는 걸 발견했어. 그는 놀라서 죽었지.

Elliot : Does that answer your question?
엘리엇 : 네 질문에 대한 답이 됐니?

Beverly : Poor Elly.
베벌리 : 불쌍한 엘리.

Elliot : Poor Bev.
엘리엇 : 불쌍한 베브.

  이런 종속적인 모습들이 자꾸 보여지며 그들을 단순히 형제라고 보기는 힘들 지경에까지 오는데, 그때 즈음에 그들이 쓰는 호칭에 더욱 시선이 가게 된다. 영화 초반부에 클레어가 베벌리에게 이름이 여자이름이냐며, 형제도 그런 이름을 갖고 있냐 묻는 부분이 있다. 그때 베벌리는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들이 서로를 부를 때 엘리엇과 베벌리라 부르지 않고, 엘리와 베브라는 애칭을 쓴다. 베벌리는 원래 여자 이름이고 엘리엇을 엘리라고 부를 때에도 완연한 여자이름이다. 둘 사이의 섹슈얼리티를 흩어놓는 부분이 서로의 호칭에서부터 느껴진다. 두 사람이 형제이며 동성애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만 떼어놓고 본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연인보다 심각한 것 같이 보여진다.

  엘리엇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벌리의 상태는 나아지질 않고, 동생과 달라지는 것을 허용할 수 없는 엘리엇은 급기야 내 혈관에 흐르는 모든 것이 베벌리의 것과 같아야 한다며 똑같이 약물에 빠져든다. 그를 구해내지 못할 바에야 그와 완전히 같은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로서 두사람은 모두 망가져버린다.

  클레어를 통해 오해를 풀게 된 베벌리는 잠시나마 정신을 차리고, 집을 나와 클레어와 함께하지만 일주일 동안 연락이 없는 엘리엇의 상태에 오히려 엘리엇을 제발로 찾아간다. 집에서는 베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엘리엇은 완전히 약물에 중독되어있었고, 베벌리는 그를 구하려 하지만 그 또한 약물중독 환자일 뿐이다. 완연한 환각상태에서 어린아이같아진 둘의 모습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띠는데, 엘리엇이 오히려 베벌리에게 보살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환각상태에서 엘리엇은 완전히 베벌리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쌍둥이의 관계가 상하우열에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엘리엇은 환각상태에서 자신의 자체제작 수술기구를 통해 엘리엇을 살해하게 되는데, 이 부분은 소름끼치게 편안한 모습이라 오히려 두려운 느낌이다. 베벌리는 자신의 꿈에서 샴쌍둥이가 되어있었던 배 부분을 갈라내는데, 이는 그들의 종속적인 관계를 영원히 끝맺으려는 시도같이 보여진다. 그 일을 하면서 베벌리는 처연하게 울고, 엘리엇은 배가 갈리는 와중에 왜 우냐고 묻는다. 베벌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분리되는 것이 두렵다(Separation can be a terrifying thing.)"고. 그리고 그런 베벌리에게 엘리엇은 "걱정 말라며, 우린 영원히 함께(Don't worry, baby brother. we'll always... we'll always be together)"라 대답한다. 결말 부분을 보고 이 대사를 다시 한번 보니 더욱 흥미로웠는데, 왜냐하면 환각상태에서 시도되는 분리는 엘리엇의 죽음을 통해 완벽하게 이뤄지지만, 우리는 언제나 함께일 거라는 엘리엇의 말처럼 자유를 얻게 된 베벌리 또한 결국은 죽어버려 엘리엇과 같은 길을 가는 것(영원히 함께하는 것)이다.

  결말은 엘리엇에게 벗어날 자유를 처음 갈망했던 베벌리 또한 결국은 엘리엇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엘리엇이 죽은 날 아침 엘리라는 이름을 불러대는 베브의 모습은 슬프기 짝이 없다. 클레어에게 다시 돌아갈까 하던 베벌리는 결국 엘리엇을 껴안고 함께 죽어버린다. 이 형제의 유대관계는 단순히 살아가면서 습득된 것이라기보단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붙어있는 샴쌍둥이처럼, 영혼이 붙어있었던 것 같다. 포스터의 카피가 잘 맞아떨어진다.

  보는 내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해피엔딩으로 갈 수 없는 스토리였지만 해피엔딩을 바랐는데 조금 슬펐다. 아,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제레미의 연기가 일취월장했다고 본인 스스로도 말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쌍둥이라지만 완전히 다른 캐릭터였으며, 각 캐릭터의 깊이가 있었으니까. 또, 이 영화는 진짜 쌍둥이가 연기할 수 없는 영화같다. 진짜 쌍둥이가 연기하기에는 너무 소름끼치는 구석이 많으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감독 팀 버튼 (2010 / 미국)
출연 조니 뎁, 미아 와시코우스카, 헬레나 본햄 카터, 앤 헤더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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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본다 본다 했는데 약속이 자꾸 미뤄져서 이제야 봤다. 별로 평이 좋진 않아서 볼까말까 했는데, 그래도 좋아하는 감독이고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다 보니 봤는데... 생각보다는 훨씬 별로였다. 시각적으로는 어느정도 만족시키는 부분이 있지만 스토리 진행에서는 이게 뭔가, 싶었던 부분이 많았다. 굳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었어도 될 것 같은? 그런 부분들.

  이리저리 합쳐지거나 뭉뚱그려지거나 해서 각자의 특색을 띠게 된 캐릭터들은, 물론 매력이 있다. 배우들도 잘 데려다 썼으니까. 이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배경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말이다. 기본 속성은 따왔지만 심화시켜서 보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매드 해터(조니 뎁)의 경우는 정말은 미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줘서 나름대로 실망했다. 새롭게 판타지 세계를 구축하고 싶었으면 그렇게 할 것이지 여기에 앨리스의 캐릭터들을 따와 접목시키다가 이도 저도 안 된거 같은 느낌이었다. 이건 앨리스도 아니고 팀버튼도 아녀...

  그걸 빼놓고 보면 적당히 중간은 가는 판타지 세계. 사실 판타지세계에서 앨리스(미아 와시코우스카)가 벌이는 모험보다는, 그 모습 자체에 눈이 가게 되었다. 하지만 때문에 판타지 세계 안에서 지켜내고자 하는 의미는 별로 크게 와닿지 않아서, 앨리스가 싸움에 참여하게 되는 그 전반적인 과정과 심리변화 설명은 참 별로. 어쨌든 판타지 세계를 보는 재미는 있었다. 매드 해터는 아무래도 비중이 커서 그런가 눈에 많이 띄었고, 멍청한 느낌의 하얀 여왕(앤 해서웨이)나 중후한 목소리의 압솔렘(알란 릭맨), 작달막하고 깡이 센 쥐(바바라 윈저), 하얀 토끼(마이클 쉰)나 미친 토끼(폴 화이트하우스), 트위들디와 트위들덤(맷 루카스)... 다 특이하고 좋았지만, 역시 백미는 붉은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이었다.일단 그 모습에서부터가 충격이 큰데 역할 또한 강렬해서 좋았다. 그리고 사실 하얀 여왕 쪽보다는 붉은 여왕쪽의 심리상태가 더 이해가 갔다. 사랑받지 못해서 땡깡을 부리는 어린애 같지 않은가... 하트의 잭(크리스핀 글로버)은 비굴비굴한 캐릭터가 좋았지만, 딱 거기까지. 재바워키(크리스토퍼 리)는 비중이 더 컸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다지 설명도 없고, 그냥 쓰러지기 위해 나온 악당 같았다. 아, 그리고 체셔 고양이(스티븐 프라이)... 사실 얘는 왜 나왔는지 더 모르겠는 캐릭터.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고 요술같은 모양새만 부려대서.

  크게 만족시키진 못했어도 그래도 판타지 세계의 내용은 나름대로 오밀조밀 즐겁게 본 편이었는데, 이거에 연결된 진짜 현실세계 또한 불완전한 판타지 같아서 불만족스러웠다. 차라리 완연한 판타지로 갔으면 좋았을텐데... 현실 세계로 나온 순간 재미가 팍 없어지고 말았다. 판타지 세계에서의 사건을 발판으로 삼아 현실 세계의 앨리스가 눈을 뜨고 독립적인 여자가 된다, 라는 내용을 그리고 싶었던건 알겠는데 그 여성이 독립적인 여성이 되는 부분이 그다지 설득력도 없고. 일단 중국이야기가 나오는 데에서 어이를 잃고 말았다. 제국주의의 발판을 깔아주나요...

  그냥 전체적으로는 별로였다. 하지만 헬레나 본햄 카터를 위해서라면 또 봐주고 싶은 마음은 든다.
2010/03/16 - 적벽대전 1부 - 거대한 전쟁의 시작 (赤壁: Red Cliff, 2008)



적벽대전 2 : 최후의 결전
감독 오우삼 (2009 / 중국)
출연 양조위, 금성무, 장첸, 장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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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잊어버릴까봐 빨리 봤다. 적벽대전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조조군의 패로 끝난다. 다 아는 이야기를 어떻게 각색하느냐에 따라서 몰입도와 작품성이 달라질텐데, 그 몰입이란 게 퍽 잘 된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내용을 다 알아서 그런가보다 생각했었는데 흐룃이 말하길, '다 알고 책으로 적벽대전을 볼 때에도 몰입이 그렇게 잘되었었는데, 영상에서 이 정도로 안 된다면 문제'라고 해서 수긍하고 말았다. 확실히 영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몰입도가 좋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각색이 아주 잘 된 것 같지도 않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원작에 비해 많이 각색이 되었는데 음, 원래 역사를 바탕으로 한 픽션이야 재창조에 재창조를 거듭하는 것이라지만... 손상향이 위군으로 숨어들어가 손숙제(동대위)와 우정을 쌓는다든가, 감녕(나카무라 시도)이 전쟁중에 죽어버린다든가 하는 일은 참 별로다 싶었다. 손상향을 어떻게든 비중있게 넣고 싶어서 넣은 건 좋은데, 짧은 시간 내에 손숙제와 그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되어버린다는 게 조금 그랬고 손숙제 캐릭터도 너무 어리숙하기 짝이 없어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누구라도 손상향을 스파이로 의심할 상황인데 그렇게 놔준다는게. 그리고 감녕은 오의 큰 장수인데 물론 멋있게 죽었지만 그렇게 적벽대전에서 죽여버린다는 게 살짝 놀라웠다. 별로 좋은 의민 아니다.

  가장 큰 본 스토리에 없는 부분은 1편에서부터 도드라진 소교의 역할인데, 소교가 홀로 조조군에 가서 동남풍이 불어올 때까지 조조를 말리는 부분은 이 모든 각색 중에서 그나마 나았던 거 같기도 하다. 이미 1편에서 포석을 깔고 들어가서 그런가 그런 역할을 맡은 부분에 있어서는 어색함이 없는 편이었달까. 익숙해진 탓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본 작품과는 어긋나는 부분이 생겨버렸다. 노장 황개의 투혼이나, 조조를 놓아주어야 하는 관우의 모습 같은 것들이 사라진 것도 결국 이 스토리에서 기인한다.

  적벽대전이 어떤 결말이 날 줄 알고 있었다는 걸 치더라도 재미가 그냥저냥 했는데, 막판에 조조를 살려주는 부분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비굴하게 도망해서 목숨을 건졌다면 말이 된다만 전쟁을 저 판국까지 벌인 마당에 조조같은 인물을 살려둘 리가 만무하다. 원작과 다른 방향으로 조조 캐릭터를 세우려다 보니 비굴한 도망모습같은건 그리지 못한걸까?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관우가 뒤쫓는 부분까지 그리려면 벌려놓은 영화 진행과 안맞는 건 알지만, 음... 이래서야 삼국지연의에서 내용을 빌려왔다 할 수 있을지.

  제갈공명이나 주유에 관한 해석은 신선하고 좋았지만서도 그 때문에 나머지 캐릭터들의 의미가 사라지거나 망가진 점, 그리고 크게는 주제까지도 이상하게 나아가버린 점이 아쉽다.

  이건 보다 그냥 웃겼던 부분(...)

버릇_없는_남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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