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F. 스콧 피츠제럴드 (웅진씽크빅,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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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은지도 산지도 좀 됐는데 이제 포스팅ㅋ 난 이런 인간인듯. 영화도 안봤는데 책부터 덜컥 샀다. 펭귄 클래식에서 나온 걸 산 건 단순히 표지가 예뻐서. 거기다 텀블러 이벤트까지 하고 있길래, 보고 싶었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까지 같이 샀다. 웅진 아래에 있는 펭귄 클래식 시리즈 표지들이 다 명화들을 많이 써서 예뻤고, 아무튼 제본형태나 편집이 깔끔해서 아주 좋았다. 다만 주석이 페이지마나 달린 것이 아니라 맨 마지막 페이지에 몰려 달려있어서, 매번 뒤적뒤적 보느라 짜증나 죽을 뻔. 이 점 때문에 앞으로 펭귄 클래식을 살 때는 좀 망설일 것 같다. 뭐 쨌든 같이 온 텀블러는 아주 잘 쓰고 계심.

  스콧 피츠제럴드는 아무래도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데, 이 책을 사기는 중학교때..인가 고등학교 초인가 샀었으나 아직까지 못읽었다. 매번 1/3 읽고 덮고, 그 다음에 또 1/3 읽고 덮고의 무한 반복. 재미업ㅂ다고 하루키 죽여버린다orz의 감정으로 매번 책장에 꽂힌 책을 바라보고 있다. 혹시 번역의 문제인가 싶었으나, 다른 애들도 다 재미없다고 하는거 보니 뭐 꼭 번역의 문제만도 아닌듯. 언젠간 읽겠지 흥얼흥얼.

  여튼 위대한 개츠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단편이니 어떻게든 읽겠지 하는 마음가짐과 기무니로부터 재미있다는 추천을 들어서 샀다. 결과는 적당히 성공. 처음엔 좀 루즈한가 싶었는데, 단편마다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그런가(스콧 피츠제럴드가 세 챕터로 나눈 이유가 있다) 각기 나름의 재미와 멋이 있었다.

나의 자유분방한 그녀들
-젤리빈, 낙타의 뒷부분, 노동절, 자기와 핑크
판타지
-리츠칼튼 호텔만큼 커다란 다이아몬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칩사이드의 타르퀴니우스, 오 빨간 머리 마녀!
분류되지 않은 걸작
-행복이 남은 자리, 이키 씨, 제미나, 산 아가씨

  순서는 요렇게 나뉘어져 있다. 개인적으론 판타지 파트가 재일 유쾌하고 재미있었고, 그 다음은 나의 자유분방한 그녀들 파트가 재미있었음. 분류되지 않은 걸작 들은 행복이 남은 자리 빼고는 그냥 그랬다. 마지막 부분이라 내가 지쳤던 걸지도.

  판타지 파트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건, 의외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아닌, '리츠칼튼 호텔만큼 커다란 다이아몬드'였다. 말그대로 리츠칼튼 호텔만큼 큰 다이아몬드(...)를 가진 부자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아 진짜 막판엔 엄청 웃었다. 황당한 소재인데 황당한 전개, 거기에 또 황당한 결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막 이상한 게 아니라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판타지 파트의 이야기들이 대부분 뻔뻔스레, 이것은 현실이라는 듯 진행되어서 그런가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물론 재미있었다. 굉장히 짧은 단편인데, 영화와는 달리 태어났을때 이미 꼬장꼬장한 노친네의 모습인 벤자민 버튼을 보는 재미가 좋았음. '오 빨간 머리 마녀!'도 꽤 재미있었다. 진짜 마녀일 줄 알았는데 또 그건 아니어서 조금 실망.

  나의 자유 분방한 그녀들 파트에서 가장 재미있던 이야기는 아무래도 '낙타의 뒷부분'이 아닐까 쉽다. 있을법한 이야기에 재치가 더해졌다. 두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런 이야기는 좀 길게 서사를 바꾸어서 영화로 만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로 탈바꿈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젤리빈'이나 '노동절'도 꽤 좋았는데, 이 이야기들은 허무하거나 절망적인 느낌이 있어서 크게 내 취향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꽤 괜찮은 단편집. 즐거웠다.
변신 시골의사(세계문학전집 4)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프란츠 카프카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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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지가 언젠데 완독한 건 얼마되지 않았다. 교양 수업 때문에 변신 하나만 읽고 꽂아두었던 기억. 변신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도 왜 읽으려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잡고 읽었는데... 아... 번역이 이상한건지 내용이 이상한 건지, 내가 멍청한 건지 읽고 나서도 멍한 것들이 많았다. 허무. '변신'은 무척 재미있었지만, 나머지 작품 중에서 크게 기억에 남는 건 '굴' 정도.

  단편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 부분은 거의 1, 2페이지 정도의 짧은 글들이었는데 몰입감은 좋았지만서도 역시 읽고 나니 크게 기억에 남는 것들이 없었다. 다만 전체적인 윤곽으로 기억에 남는건 메마르고, 허무하고, 무섭다는 느낌. 다 버석버석하고 읽고나서 안정감이 드는 소설이 드물었다.

  다만 마음에 들었던 안정적인 느낌의 구절은 이 부분.

   나의 잠을 깨우는 것이 옛시절의 습관인지 아니면 이 집도 역시 가지고 있는 위험들이 충분히 크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규칙적으로 문득문득 깊은 잠에서 깨어나 밤이나 낮이나 변함없이 이곳에 가득 깔린 정적을 엿듣고 또 엿듣다가는 안심하여 웃고 그러고 나면 전신에 맥이 풀려 더욱 깊은 잠에 빠진다.

「굴」, 『변신·시골의사』, 프란츠 카프카, 민음사, 1998, pp.122~123

  물론 이 뒤로는 불안감과 편집증에 빠져있는 듯한 묘사로 가득하지만, 굴 안에 있는 두더지인지 뭔지 하는 생명체가 느끼던 감정들은 그 묘사가 너무 세세해서 푹 빠져들었다. 이상하게 느리게 읽히던 것은 그 감정선을 따라가느라 그랬었나보다.

  '변신'과 '굴'만으로도 마음에 들었지만, 나머지는 글쎄... 카프카가 마음에 들어한 작품이라는 '시골의사'나 '판결'은 내겐 너무나 이상했다.

  요건 내가 대학교 1학년때인가 2학년 때 과제로 냈던, '변신'과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 대한 짧은 감상문. 지금 읽으니 참 간단하고 허접하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제이 아셰르 (내인생의책,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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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드 블로그에서 당첨되어서 보았다. 소설인 데다가 전부 대화 + 화자의 마음 속 생각으로  이루어진 서술 덕에 몰입도는 꽤 높았다. 난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인데도 하루만에 다 읽었다. 서너시간 걸린 듯? 그만큼 가볍다는 느낌도 좀 들었긴 한데, 다루는 소재가 있다 보니까 그런 부분이 많이 상쇄된 듯 하다.

  진행 방식이 흥비로운 편이었다. 이게 나름의 과거 회상과 현재의 상황이 얽혀 있어서. 주인공이자 이 소설의 화자인 클레이가 자살한 해나 베이커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받는 데에서부터 이 소설은 시작된다. 1인칭인 주인공의 생각과 상황묘사가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테이프에 담긴 해나 베이커의 목소리가 교차되어 나오는 식이다. 

  작가로선 테이프 안의 이야기만 쓰는 편이 좀 더 편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까, 아무래도 좀 전개가 무뎌진 감이 있었다. 주인공인 클레이는 모든 장소를 이동하며 하루만에 테이프를 전부 다 듣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작가가 급하게 이 소설을 끝내려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흡조절이 좀 덜 되는 느낌? 뭐 중요한 것은 해나 베이커의 테이프 내용이니까, 사실 클레이야 어떻게 이동하건 말 건 상관이 없다. 다만 아쉬웠던 건 클레이가 해나 베이커의 리스트에 있는 악인이 아니었다는 거. 처음부터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하는 클레이가, 진짜 잘못한 게 없다는 식으로 흘러가니까 나로서는 좀 재미가 떨어졌다. 해나 베이커가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면... 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서도, 그 정도는 다른 사람들의 에피소드―이를테면 상담선생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원서 제목과는 달리 한국 번역본의 제목은 '루머의 루머의 루머'인데, 해나 베이커가 자살로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의 첫 시작은 저스틴이 만들어 낸 루머 탓이니까 저런 제목을 붙인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나는 저 제목 탓에 루머가 완연하게 퍼지는 과정 따위를 상상했는데 그런 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치 못하고 벌이는 사소한 행동들로 인한 오해가 어떤 식으로 타인에게 작용하는 지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었다는 느낌. 물론 진짜 못된 행동들을 한 아이들도 있었고,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을 벌인 아이들도 있었지만... 결국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사람의 죽음―어떻게 보면 노인까지 합해야겠다만―을 초래했다.

  해나 베이커가 테이프 안에서 말하는 논리들이 다 옳은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건 클레이가 계속 짜증날 정도로 말해대는 '네가 손을 내밀었어야 했어'의 탓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 모든 일들이 본인의 죽음까지 바칠 만한 일이었는지에 대한 고민은 아직 내 속에 남아있다. 차라리 그 힘으로 살아서 모든 엇나간 상황을 바로잡아 보려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느낌도 있고. 죽으려는 사람에게 그런 의욕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그렇다면 애당초 테이프를 만들어 낸 것조차도 말이 안된다. 죽으려는 사람이 테이프까지 만들고 있으신가요. 쓰고 보니 내가 이 소설을 다 읽고 느꼈던 허전함 같은 게 여기에서 유래된 것 같다. 현실성이 조금, 떨어진다. 물론 모든 소설은 허구라지만 이건 설득력의 문제인 듯.

  뭐 이러저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몰입도나 흥미로서는 좋았다. 소재가 가볍지 않아서 내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나 베이커의 죽음이 좀 더 안타까웠다.
 

거미 여인의 키스(세계문학전집 37)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마누엘 푸익 (민음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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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후...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냐. 마지막에 울었다. 짧게 전달되는 사실 한 줄에 숨이 턱 막혔다. 몰리나, 몰리나... 아름다운 몰리나. 그리고 발렌틴. 그들이 감옥 안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는. 영화는, 사상은, 감정은. 뭐라 정리할 수 없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몰리나밖에 떠오르지 않아. 죽겠다. 너무너무 슬퍼. 1부 끝나고 나서 몰리나에게 느꼈던 감정들은 2부가 끝나고 나서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래 몰리나에게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랬지만. 미치겠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영화들이 매력적이다. 몰리나의 시각에서 재창작되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훨씬 더 감성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캣피플과 같은 스릴러조차 몰리나에게 전달받을 때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치의 홍보 영화조차 몰리나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전달된다. 나는 몰리나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몇 몇 이야기는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고, 몇 몇 이야기는 본래 있는 영화라고 한다. 많이 각색 되었지만... 여섯 종류의 이야기를 볼 때 각각의 주인공들에게 발렌틴과 몰리나를 넣어서 볼 수 있다.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빠져버린 것도 볼 수 있다. 나치 선전물속의 레니는 아무리 봐도 몰리나다. 매혹의 오두막에 나오는 못생긴 하녀도 몰리나이다. 마지막 싸구려 멜로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그녀도 몰리나이다. <내가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답니다…… 내 마음을 빼앗아 갈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멀리 있으나…… 가까이 있으나 항상 당신을 그립니다……> 모두가 다른 이야기인데, 모두가 몰리나와 발렌틴의 이야기야. 본 바탕이 확실한 영화는 세 개. 캣피플, 매혹의 오두막, 좀비와 함께. 그렇지만 보지 않아도 상관 없다.

  초반엔 동성애자인 몰리나(내가 보기엔 트랜스젠더 같기도 한데, 흠.)를 무시하던 발렌틴이 점점 변화하는 과정이 경이롭다. 물론 몰리나의 엄청난 희생정신, 부족한 자존감 따위가 발렌틴의 비참한 상황과 맞물려 벌어진 일이지만... 정말 꽉 막혀있던 발렌틴이 변화하는건. 그가 대화를 통해 마음을 열어서이기도 하지만, 몰리나의 정신이 너무나 대단해서. 남자를 최고로 알고, 남자이면서도 자신을 여자로 생각해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몰리나. 그런 몰리나를 이제는 그러지 말라 설득하는 발렌틴. 둘이 섹스하는 장면도 그렇거니와, 마지막에 몰리나의 부탁으로 키스하는 장면은.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한 채로 헤어나오질 못한다. 몰리나는 언젠가부터 가브리엘보다는 발렌틴을 위주로 생각하고 있었지... 그가 말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몰리나와 가브리엘이 아니라, 몰리나와 발렌틴이었어. 마지막 장면, 고문을 당해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발렌틴이 보는 환상들은. 그가 몰리나에게 가지는 죄책감의 크기는. 거미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은. 아아 몰리나...

  발렌틴이라는 게릴라와 몰리나라는 동성애자를 통해 그 시절의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 그런 것도 이해가 안 되는 바 아니지만. 나는 왜 그런 현실보다 발렌틴과 몰리나가 교감하는 감정들에게 시선이 가는 것일까. 좋았다. 굉장히.

「내가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좀 내버려둬 달라는 말이야. 내가 더 이상 현실을 비관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미치기를 원해? 하긴 난 이미 미친년이니까」
「그래, 솔직히 말하면, 네 말도 맞아. 여기서 네가 미칠 수도있어. 하지만 그것은 네가 현실을 비관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네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지금 네가 하는 행동처럼 말이야. 네가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만 생각하는 네 태도는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단 말이야」
「왜 그렇지? 그렇지 않아」
「그렇게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마약처럼 해로운 거야. 내 말 좀 들어봐. 네 현실, 바로 네 현실은 단지 이 감옥만이 아니야. 이 감옥을 뛰어넘어 생각해 봐. 내 말 알겠지? 그래서 난 책을 읽고 하루 종일 공부하는 거야」

「그래. 그리고 나도 살아 있어…… 그런데 내 삶은 언제부터 시작하지? 언제가 되어야 내가 내 것을 만질 수 있고, 내 것을 가질 수 있지?」

「행복하다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면 더욱 고통스럽지 않을까?」
「몰리나, 한 가지 명심해 두어야 할 게 있어. 사람의 일생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지만, 모두 일시적인 것이야. 영원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그래, 맞아. 하지만 조금 더 오래가는 것은 있어」
「우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 좋은 일이 일어나면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하기는 쉬워. 하지만 그걸 진정으로 느낀다는 것은 다른 문제야」
「그러면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자기 자신을 납득시켜야 되는 거야」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옳아매는……」
「아주 멋진 말인데! 그 말, 정말 맘에 들어」
「……」
「내 생각 많이 할거야?」
「너한테 많은 것을 배웠어…… 몰리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난 멍청인데……」
「행복하게 지내길 빌어. 그리고 나를 좋은 놈으로 기억해 주길 바래. 나도 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나한테 뭘 배웠지?」
「설명하기 아주 어려운 것이야. 하지만 나한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주었어.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네 손은 항상 따뜻해, 발렌틴」
「네 손은 항상 차고」
「발렌틴, 너한테 한 가지 약속할게. 널 떠올릴 때마다, 난 행복할 거야. 네가 나한테 가르친 대로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해 줘…… 다른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 않도록 행동하고, 아무도 널 함부로 다루게 하지 말고, 착취당하지도 말아. 그 누구도 사람을 착취할 권리는 없어. 한 얘기 또 해서 미안해. 전에 한번 말했는데, 넌 그 말을 별로 달갑게 여기질 않았어」
「……」
「몰리나, 남한테 무시당하면서 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그래, 약속할게」

마르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이 말만은 당신한테 할 수 없었어, 당신이 그것을 물어볼지 몰라 두려웠고, 그러면 당신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았어, <아니에요, 사랑하는 발렌틴,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이 꿈은 짧지만 행복하니까요.>

마누엘 푸익, 『거미 여인의 키스』 中

지킬 박사와 하이드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책만드는집,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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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강 시간에 도서관 가서 봤다. 오 독서 굉장히 오랜만인데? 나 진짜 소설책 읽은지 백만년 된 기분. 과제 땜에 읽은 거 빼고. 하긴 과제로 읽었다고 해도 걸리버 여행기가 마지막 ㄳ... 삽질한다고 공허하게 컴퓨터만 하고 산 것 같다. 집에선 책을 펼치면 곧바로 잠이 오더라고... 독서대라도 하나 살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어릴 떄 보고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내 기억이랑 다른 것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 아 기억력 하고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짧은 단편이었고 그다지 오랜 시간 읽지 않은 것 같다. 한 40분 정도? 난 책을 빨리 읽는 편은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은 더 짧은 시간 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 안에는 모두 자신이 겉으로 드러내는 면 말고 근원적인 '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라는 틀 안에서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들. 보통은 악에 가까운 부분이 아닐까. 나같은 경우에는 실제 내가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오만방자하니까. 지킬 박사가 하이드가 악에 가까운 부분인 줄 알면서도 이것을 밖으로 꺼내는 행동을 참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된다. 지킬 박사의 말처럼,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세상의 어떤 부분도 신경 안쓰고 본질적인 욕망 그대로를 표현할 수 있다면 나라도 그렇게 할 것 같다. 특히 나처럼,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일면들을 심히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더욱 더 매력적인 일 아닐까. 결말이 조금 비참하긴 했지만 내가 하이드라면 자살하지 않고 도망하지 않았을 까 싶다. 자살과 사형대는 다르지 않잖아. 도망해서 더욱 소름끼치고 재미있는 일들을 조금이라도 더 저지르는 게 낫잖아.

  편지글 형식으로 사건의 배경을 서술한 것들이 좋았다. 3인칭으로 일어난 상황들을 표면적으로 파악하게 한 뒤에, 1인칭인 편지글로 인물 내면의 심리를 더욱 상세하게 알게 되어서 맘에 들었음. 이왕이면 하이드의 편지글도 보고싶었었는데... 뭐 그건 지킬 박사가 대충 묘사해 주긴 했지만.

  재미있었다. 오래간만에 독서 모드. 거미 여인의 키스와 음란과 폭력이라는 책을 빌려왔다. 롤리타를 빌리고 싶었는데 서가에 없더라. 어휴 책 정리좀 잘 해놓으라고!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으로부터 인간의 근본적이고 철저한 이중성을 깨달았다. 내 의식세계에서 두 가지 본성이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나다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사실 그런 다툼이 있었던 이유는 내가 두 가지 본성을 다 극단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떄문이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킬 박사와 하이드』 中

내 마음의 옥탑방(99 이상문학상작품집 23)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상우 (문학사상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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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년도, 23회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할아버지 댁에서 무심코 훔쳐오긴 했으니, 한국 소설을 잘 읽지 못하게 되어버려서-_-(부끄럽다, 참.) 읽는 것을 한참이나 미루고 있었다. 그래도 단편들의 묶음인지라 며칠 전부터 조금씩 읽고 있다. 여전히 한국 소설은 내게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다가온다. 인생을 쉬이쉬이 살아온 나의 모습이 느껴져서 부끄럽다. 대상 수상작은 박상우의 내 마음의 옥탑방.

  다소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로 시작해서, 작은 옥탑방까지 도달하다 보면 정말 우울해진다. 가난이 범람하는 작디 작은 옥탑방. 꿈없는 시지프같은 주인공 민수, 화려한 지상으로의 추락을 꿈꾸는 주희. 모두가 슬프다. 중간 중간 까뮈의 시지프 신화를 도입하면서 우울한 결말로 치닫나 했더니, 웬걸. 결말은 의외로 희망적이다. 

  시지프들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 나만 같아서, 슬펐던 소설. 그러나 민수는 말하네. 지금, 당신의 옥탑방에 불을 밝혀야 할 때. 라고.

  지난 십 년 동안 나는 시지프들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었다. 몽타주로 재현되는 무수한 시지프들의 세계, 산정을 향해 바위를 밀어올리는 불굴의 의지를 상실해버린 시지프들의 세계, 희망 없는 노동을 죄악시하고 도로(徒勞)를 무능의 결과로 치부해버리는 시피프들의 세계, 신을 향한 멸시를 두려워하고 운명을 극복하려는 반항적인 분투를 상실해버린 시지프들의 세계―그곳에 안주하며 하루하루 종말적인 인간의 시간을 살아온 것이었다.
  아주 가끔, 신화 속의 시지프가 기억에서 되살아날 때가 있었다. 늦은 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다가 문득 형네 집에 얹혀살던 시절을 떠올리게 될 때, 새벽에 뜻하잖게 잠에서 깨어나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될 때―그럴 때마다 찡그린 얼굴, 바위에 부벼대는 뺨, 진흙에 덮인 돌덩이를 멈추려고 버틴 다리, 바위에 받아 안는 팔, 흙투성이의 손 같은 게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한 것이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멸시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지프가 깊이 잠든 오관을 후려칠때마다 쩡, 쩡, 어디선가 빙벽을 꺠는 듯한 소리가 날카롭게 귓전으로 밀려들곤 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나는 낯선 지상에 서 있었고, 손가락을 헤아려 보면 나도 모를 나이가 되어 있었다. 옥탑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의 거리, 그리고 옥탑방을 떠나던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세월.
  십 년 세월이 지난 지금,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깊은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지나간 시간보다 남겨진 시간이 두려운 건 변화가 아니라 불변하는 것에 대해 느끼는 끈끈한 채무감 때문이리라. 주어진 형벌의 바위를 부정하고, 지상에 안주하기 위해 인간의 숙명까지 부정하는 시지프들의 지옥―무슨 이유 때문인가, 추억이 망각의 늪으로 잦아들 때가 되었는데도 내 마음의 옥탑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살았던 한 여자의 존재감 때문이 아니라 옥탑방이라는 상징, 그것이 하나의 생명채가 되어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불완전한 지상의 주민, 숙명의 전모를 간파하지 못하는 인생의 장님들에게 그 빛은 무엇을 일깨우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주 우연히 지상에서 다시 마주치게 될지라도, 부디 행복한 시지프의 표정을 당신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편지,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력을 느끼게 하는 주시(注視)의 언어로 나의 기억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언젠가, 우연을 가장하고 찾아올지도 모를 필연의 시간에 나는 어떤 시지프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치게될지라도, 편견과 모순과 아집에 사로잡힌 불행한 시지프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 운명에 당당히 맞설 줄 아는 행복한 시지프의 얼굴을 나는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다. 내가 그녀를 알아보거나 그녀가 나를 알아보는 순간, 혹은 내가 당신을 알아보거나 당신이 나를 알아보는 순간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옥탑방에서 밀려 나오는 불빛의 의미, 준비된 자세로 항상 깨어 있으라는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라는 걸 알 수 있으리라.
  지금, 당신의 옥탑방에 불을 밝혀야 할 때.
레벌루션 NO.3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KANESHIRO KAZUK (북폴리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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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우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책. 내가 골랐다. 일전에 영화 GO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봐서 덩달아 책도 보았었다. 빠른 진행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재일 청소년의 철학, 마음 따위를 담아낸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의 감성이 나를 자극했다. 가네시로 가즈키 자신 또한 재일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주인공의 마음을 잘 표현한 것이었겠지만. 같은 재일 한국인인 유미리와는 몹시 다른 느낌.

  REVOLUTION No.3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첫 소설이라 한다. 3류 고등학교의 '더 좀비스(1. 학교의 평균 학력이 뇌사 상태. 뇌사 상태에서 살아있는 시체. 2.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아서)'의 멤버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몹시 유쾌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서글픈 감정을 자극하는 부분도 있다. 작가가 고등학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등학생들의 살짝 유치한 면을 잘 보여준다.

  캐릭터들은 제법 충실한 편이다. 이 소설은 미나가타 구마쿠즈의 시점으로 진행이 되는데, 미나가타는 약은 수를 내거나 하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진지한 면을 가지고 있으며, 모임의 브레인 부분을 상당부분 담당하고 있다. 대변인? 정도로 하면 옳을까. 이타라시키 히로시는 모임의 리더격인 녀석이다. 오키나와 태생이라 성이 특이하다. 항상 자신 만만하고, 항상 최선을 다 한다. 자신의 신념이 뚜렷한 녀석이라고 본다. 박순신은 이 소설의 연장격인 Fly, Daddu, Fly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재일 한국인인데, 정말 신념이 뚜렷하고, 모임에서 가장 날카롭게, 무게있는 녀석이다. 가야노는 어찌보면 특색이 없기도 한데, 소년가장으로서 알맹이가 단단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가장 커다란 유머를 담당하고 있는, 모든 불행이 그에게 일어나며 또한 얼띤 구석이 있어서 그 불행을 전신으로 받아들이는 '사상 최악의 얼바리 사나이 야마시타'. 더 좀비스의 멤버라기엔 뭐하고, 중립을 지키지만 코스모폴리탄의 꿈을 위해 '머니와 페니스'를 이용하는, 미나가타의 상담처인 독특한 캐릭터 아기(혼혈인데, 본명은 사토 겐이지만 어머니의 옛 성인 아기날드의 아기를 별명으로 삼고 있다). 한명 더 덧붙이자면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튼 선생님이 생각나는 닥터 모로까지.

  이처럼 REVOLUTION No.3는 캐릭터를 통해 단단한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주변 상황보다는 캐릭터들에 눈이 쏠려 이야기 진행의 바탕을 만들고, 또한 판단하게끔 하는 것이다.

  소설의 세 파트는 'REVOLUTION No.3', '런, 보이스, 런', '이교도들의 춤'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 파트인 REVOLUTION No.3는  더 좀비스가 명문 여고의 축제에 침입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더 좀비스의 리더 격인 이다라시키의 삶에 가까워진 죽음을 다루어 소년들의 성장을 말하려 한다. 살아있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히로시, 보고 있냐?
  우리, 해냈어.
  네가 죽는다고? 어림없지.
  너, 보고있지?

   두번째 파트인 런, 보이스, 런은 오키나와에 있는 이다라시키의 무덤에 찾아가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사상 최악의 얼바리 사나이 야마시타가 돈을 날치기 당한 것을 시작으로, 그들은 새롭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과정 안에서는 또 여러가지의 사건이 벌어진다. 거기에 미나가타의 어려운 연애 이야기가 곁들여진다. 나중에 돈을 되찾고 오키나와에 가는 장면까지 생각하면 가슴이 다 시원해진다.

  -너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나 돈이든 여자든 명예든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을 작정이야. 가능하면 세계도 바꾸고 싶고.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한껏 즐길 거야, 하지만 너만은 절대로 잊지 않을게. 네가 원했던 것도 내 나름의 방식으로 해 볼 생각이야.

  마지막 파트인 이교도들의 춤은, 이교도들의 춤이라는 작은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스토커가 쫒아다니는 요시무라 쿄코의 보디가드를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보디가드라는 익숙치 않은 일을 통해 죽을수도 있었던 상황을 겪은 미나가타. 그리고 보디가드를 맡게 된 박순신의 이야기. 이 또한 흥미로우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유쾌하게 말한다. 범인을 체포해도 그들은 경찰에게 눈총을 받는 아웃사이더들이다. '다음부터는 유사한 사건에 연루되는 일이 있으면 신속하게 경찰에 신고하라'는 엄명까지 듣는다. 그런데 여기에 대응하는 미나가타의 생각은 어떤가?

누가 그런 말 듣는다고.
후후후.

  그러게. 누가 그런 말 듣는다고. 후후후.

  총 세 가지 파트로 이루어진 REVOLUTION No.3는 세 가지 이야기 모두 다 재미있다. 유쾌하다. 단숨에 읽어내릴 수 있다. 나는 호흡이 빠른 소설이 좋고,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소설이 필요했고, Fly, Daddy, Fly의 전신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소설이 너무 좋았다. 또한  REVOLUTION No.3는 단순 발랄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유쾌하게 지내지만, 자신들이 사회의 아웃사이더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사회의 차별을 잘 알고 있다. 그 차별의 중심에는 박순신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 모두는 열등생으로서 사회의 차별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좌절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쾌하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자신들의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교도들의 춤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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